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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SaPiens)>> - 유발하라리(Yuval Noah Harari) - 제 4부 과학 혁명 -14,무지의 발견(3)-아는 것이 힘이다

작성자레아|작성시간18.08.08|조회수492 목록 댓글 2

14,무지의 발견(3)



아는 것이

힘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대 과학을 소화하기 힘들어한다. 사용하는 수학 언어가 우리의 머리로는 파악하기 어렵고, 그 연구 결과가 상식과 배치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 70억 명 중에서 양자역학이나 세포생물학,미시경제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과학은 막대한 특권을 누린다.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장군들은 핵물리학은 이해하지 못할지 몰라도 원자폭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잘 안다.

   1620년 프랜시스 베이컨은<<신기관The New Instrument>>이라는 과학 선언문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주장했다. '지식'의 진정한 시금석은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느냐의 여부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1백 퍼센트 정확한 이론은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 결과, 진리인가의 여부는 지식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검사법으로서는 부족한 것이 되었다. 진정한 시금석은 유용성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이론이 지식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과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구를 많이 제공했다. 일부는 사망률과 경제성장률을 예측하는 데 쓰인 것 같은 정신적 도구였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술적 도구다. 과학과 기술 사이에 구축된 연결관계는 매우 강력해서 오늘날 사람들은 양자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과학 연구 없이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일 신기술을 낳지 않는다면 연구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과학과 기술이 관련을 맺은 것은 매우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1500년 이전에 과학과 기술은 완전히 별개의 분야였다. 17세기 초반 베이컨이 양자를 연결시킨 것은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17~18시기 동안 둘의 연결은  강화되었지만, 매듭이 지어진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였다. 1800년에도 강한 군대를 원하는 지배자나 성공적인 사업을 원하는 사업계 거물의 대부분은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에 자금을 대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이 규칙에 예외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역사학자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선례를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훌륭한 역사학자는 그런 선례가 큰 그림을 파악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진기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일반적으로 근대 이전 대부분의 지배자와 사업가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우주의 속성에 대한 연구에 자금을 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기술적 장치로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지배자들은 교육기관에 자금을 댔지만, 그런 기관의 의무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하에 전통적 지식을 확산시키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지만, 그 기술들은 보통 교육을 받지 못한 장인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었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추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마차 제조업자는 늘 같은 재료를 가지고 늘 같은 마차를 만들었다. 새로운 마차를 연구 개발하기 위해서 연간 순익의 1퍼센트를 따로 떼어놓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마차의 설계는 가끔 개선되었지만, 이는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일도 없으며 글을 읽을 줄조차 모르는 어느 지방 목수가 천재성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민간 부문뿐 아니라 공공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대 국가들은 에너지에서 공중보건, 쓰레기 처리에 이르는 국가 정책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과학자들을 부른다. 이와 달리 고대 왕국은 이런 일을 한 예가 거의 없었다. 당시와 지금의 대비는 무기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드와이드 아이젠하워는 1961년에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군산 복합체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고했지만, 방정식의 한 부분을 빼먹었다. 그는 군사-산업-과학 복합체에 대해 경고했어야 했다. 오늘날의 전쟁은 과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군대는 인류의 과학연구와 기술개발의 대부분을 선도하고, 자금을 대고 방향을 조종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없는 참호전이라는 진창에 빠졌을 때, 양측 모두 교착상태를 깨뜨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을 불렀다. 부름에 응한 과학자들의 연구실에서는 놀라운 무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져 나왔다. 전투기,독가스,탱크, 잠수함을 비롯해서 성능이 개선된 기관총과 대포, 소총과 폭탄이 속속 개발되었다.

   과학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욱 큰 역할을 했다. 1944년 후반 독일은 전쟁에 지고 있었고 패색이 역력했다. 한 해 전 독일의 동맹인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연합국에 항복했지만, 독일은 계속 싸웠다. 영국과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공격을 위해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독일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완전히 가망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자국 과학자들에 대한 기대였다. 이들이 V2로 로켓이나 제트기 같은 소위 기적의 무기를 만들어 대세를 바꿀 시점이 임박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독일인들이 로켓과 제트기에 공을 들이고 있는 동안,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는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이 폭탄이 준비된 1945년 8월 초 독일은 이미 항복했지만, 일본은 싸우고 있었다. 미군은 일본 본토를 침공할 준비를 했다. 일본인들은 결사항전을 맹세했으며, 그것이 말뿐인 협박이 아니라고 믿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미국장군들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일본을 침공하면 미군 1백만 명이 희생되고 전쟁은 1946년까지 줄곧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은 새 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2주가 지나고 원자폭탄 두개가 터진 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외쳤고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과학은 공격 무기만이 아니라 방어에도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오늘날 많은 미국인은 테러리즘의해결책이 정치가 아니라 기술에 있다고 믿는다. 나노기술 산업에 수백만 달러를 더 투자하기만 하면 미국이 생체공학적인 스파니 파리들을 아프간의 모든 동굴과 예멘의 보루와 북아프리카의 야영지에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일단 그게 가능하다면, 오사마 빈 라덴의 후계자들이 커피 한 잔을 끓여도 CIA의 스파이 파리가 그 중대 정보를 랭글리의 본부에 전송할 것이다. 뇌 연구에 수백만 달러를 더 할애한다면, 모든 공항에 최고로 세련된 fMRI 스캐너가 설치되어 사람들의 뇌에서 분노와 증오에 찬 생각을 즉각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아무도 모른다. 생체공학적 파리와 생각을 읽는 스캐너를 개발하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동안 미 국방부는 위의 예를 비롯해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들을 연구하기 위해서 나노기술 연구소와 뇌 연구소에 수백만 달러씩을 송금하고 있다.

   탱크에서 원자폭탄,스파이 파리까지 군사기술에 대한 집착은 놀라울 정도로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군사 분야의 혁명은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조직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물론 서로 모르던 문명들이 처음 접할 때 기술적 격차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격차를 일부러 만들고 확대할 생각을 한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제국이 부상한 것은 기술 분야의 마법적 재능 덕분이 아니었으며, 그 지배자들도 기술 개선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랍인들이 사산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우월한 활이나 칼 덕분이 아니었고, 셀주크 사람들이 비잔틴 사람들에게 기술적 우위를 지니진 않았으며, 몽골이 중국을 정복한 것도 뭔가 독창적인 신무기의 도움을 받은 덕분은 아니었다. 사실 이 모든 경우에서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이 우월한 것은 오히려 패배자 쪽이었다.

   로마군이 특히 좋은 예다. 로마군은 당시 최강의군대였지만 기술적으로는 카르타고나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제국보다 나을 게 없었다. 로마군의 강점은 효율적인 조직, 강철 같은 규율, 막대한 예비 인력에 있었다. 로마군은 연구개발 부서를 만든 일이 없었으며, 이들의 무기는 몇 세기 동안 거의 똑같았다. 만일 기원전 2세기에 카르타고를 초토화시키고 누만시아인들을 패퇴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장군의군대가 5백 년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에 갑자기 출현했다면 스키피오는 대제를 상대로도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으로부터 몇 세기 전의 장군, 가령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현대의무장한 여단과 맞선다고 상상해보자. 나폴레옹은 탁월한 전략가였고 그의 부하들은 정예의 전문가들이었지만, 현대의 무기 앞에서 그들의 기술은 쓸모없었을 것이다.

   고대 중국도 로마와 마찬가지였다. 장군과 철학자 대부분은 신무기 개발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발명은 화약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화약은 생명의 영약을 찾는 도교 연금술사에 의해 우연히 발명된 것이었다.

   화약의 이후 경력은 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도교 연금술사 덕분에 중국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중국인들은 새로 만들어진 화합물을 주로 폭죽에 썼다. 송 제국이 몽골의 침입에 무너질 때도, 중세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조직함으로써 엄청난 무기를 발명해 제국을 구하겠다고 생각한 황제는 아무도 없었다. 아프로아시아의 전쟁터에서 대포가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화약이 발병된 지 약 6백 년이 지난 1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 물질이 치명적인 잠재력이 군사 목적에 이용될 때까지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왕이나 학자, 상인 들이 새 군사기술이 자신들을 구하거나 부유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15~16세기에 이르러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통치자가 신무기의 연구개발에 자금을 대는 데 흥미를 보인 것은 그로부터 2백 년이 더 흐른 뒤였다. 그때까지는 기술보다 병참이나 전략이 전쟁의 승패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체코의 아우스터리츠에서 유럽 연합군을 무찌른(1805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갖춘 무기는 루이 16세가 사용하던 것과 거의 동일했다. 나폴레온은 포병이었음에도 신무기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이 비행기계, 잠수함,로켓을 개발할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그를 설득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과학과 산업과 군사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서로 얽히기 시작했고, 일단 그 관계가 정립되자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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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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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포 | 작성시간 18.08.10 네....
  • 작성자햇살 | 작성시간 18.08.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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