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8) 제1 부: 제2 장 뷔소네의 우리 집 - 엄마의 죽음 외 2편

작성자햇살|작성시간20.01.13|조회수170 목록 댓글 2

엄마의 죽음

 

 

 

엄마의 병에 관한 것은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눈에 선하지만, 특히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몇 주 동안의 일이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셀린 언니와 저는 가엾게도 마치 귀양살이하는 사람처럼 아침마다 우리를 데리러 온 르리슈 부인을 따라가서 온종일 부인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하루는, 집을 떠나기 전에 아침 기도를 바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셀린 언니가 가는 도중에 “기도를 아직 드리지 않았다고 말씀드려야 하나?”라고 묻기에 “그럼!”하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언니는 더듬더듬 르리슈 부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그래, 그럼 기도해야지.”하고는, 커다란 방에 우리를 남겨 놓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때 셀린 언니가 저를 쳐다보며, “아! 다른 분들이 모두 우리 엄마 같지는 않구나..... 엄마는 늘 기도를 시켜 주셨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들과 놀면서도 줄곧 사랑하는 엄마 생각이 간절히 났습니다. 어느 날 셀린 언니가 살구 한 개를 받아 와서는 “우리가 먹지 말고 엄마에게 갖다드리자.”라고 소곤댔습니다. 아! 그러나 사랑하는 엄마는 이미 병이 너무 깊어져서 더 이상 이 세상의 과일을 먹지 못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엄마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리와 나눌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신비로운 포도주를,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마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병자성사의 감격적인 순간은 마음속 깊이 박혀 있습니다. 제가 셀린 언니 곁에 앉아 있던 것, 우리 다섯 명의 자매가 나이 순서대로 앉아 있던 것, 옆에 계시던 아빠가 흐느껴 우시던 것 등 여러 가지가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날, 아빠는 저를 팔에 안으시고 “가서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입 맞춰 드리렴.”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말 없이 사랑하는 엄마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대었습니다..... 저는 많이 울지도 않았고 가슴 벅찬 감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보거나 듣고만 있었습니다. 아무도 저를 돌볼 시간이 없었고 사람들이 제게 숨기려던 것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닫힌 관 앞에 혼자 오랫동안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관이라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키가 작았는데도 저는 그보다 훨씬 작아서 엄마를 보려면 항상 고개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관은 엄마보다 훨씬 크고 굉장히 슬프게 보였습니다.....

 

 

 

그 후 15년이 지나 저는 또 다른 관 앞에 서게 되었는데, 그것은 즈느비에브 수녀님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엄마의 관이랑 비슷한 크기여서, 새삼 어릴 적 일이 생각났고, 온갖 추억들이 연달아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관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그날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때보다 자랐기 때문에 관이 작아 보였습니다. 이제 저는 관을 보려고 고개를 높이 들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고개를 높이 든 것은 즐거워 보이는 하늘을 쳐다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모든 시련은 다 끝났고, 이 영혼의 겨울은 영원히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폴린 언니가 내 엄마가 되다

 

 

 

교회가 돌아가신 엄마를 축복하던 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또 한 분의 엄마를 저에게 주고자 하셨고, 제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다섯 자매는 다 함께 모여 서로 슬프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루이즈도 함께 있었는데, 셀린 언니와 저를 보고 “가엾어라. 이제는 엄마가 없구나!”하니까 셀린 언니가 마리 언니의 품에 안기며 “그럼, 언니가 이제부터 내 엄마야!”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늘 셀린 언니가 하는 대로 따라했지만, 이때는 달랐습니다. 원장 수녀님, 저는 당신에게로 돌아서서 “그럼, 나는 폴린 언니가 내 엄마야!”하고 소리치며 당신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때부터 제 생애의 두 번째 시기로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는 제 평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고, 두 번째 엄마로 정한 폴린 언니가 ‘가르멜 여자 수도원’에 들어간 뒤부터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 기간은 네 살 반부터 열네 살까지였으며, 이 무렵에 저는 인생의 무게를 알게 되며, 이 나이에 걸맞은 저만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장 수녀님, 엄마가 돌아가시자 제 성격은 매우 달라졌습니다. 그렇게도 활발하고 마음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던 제가 수줍어지고 얌전해졌으며, 감정이 극도로 예민해졌습니다. 누가 조금 쳐다보기만 해도 금세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도 저를 신경 쓰지 않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했고, 낯선 사람들과 같이 있을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가족들끼리만 있을 때에야 비로소 다시 명랑해졌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저를 한결같이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애정이 가득했던 아빠의 마음은 이미 가지고 있던 사랑에 진정한 모성애까지 더해졌습니다. 또 원장 수녀님과 마리 언니도 저에게 가장 인자하고 헌신적인 엄마가 되어 주셨습니다. 아! 만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어린 꽃에게 따뜻한 햇볕을 아낌없이 주지 않으셨다면, 이 꽃은 도저히 이 세상의 풍토를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꽃은 비바람을 이겨 내기에는 너무나 가냘파서, 온기며 단 이슬이며 봄바람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가 저에게 부족했던 시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의 눈 속에서도 그 은혜를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리지외의 나의 학교

 

 

 

알랑송을 떠나 이사를 갈 때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란 변화를 좋아하니까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리지외에 왔습니다. 여행 도중에 외삼촌 댁을 방문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잔 언니와 마리 언니가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착한 사촌들과 노는 게 참으로 좋았고, 외숙모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다만 외삼촌은 조금 엄하셔서 외삼촌 댁에 있으면 아무래도 뷔소네에 있는 것만큼 마냥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원장 수녀님께서는 날이 밝으면 제 곁으로 오셔서 하느님께 제 마음을 바쳤는지 물어보시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며 옷을 입혀 주셨지요. 그러면 저는 당신 곁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과 함께 읽기 공부를 했는데, 제가 혼자서 처음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천국이라는 글자였습니다. 마리 언니는 쓰기 공부를 책임지고, 당신은 그 밖의 모든 것을 맡아 가르쳐 주셨지요. 쉽게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기억력은 꽤 좋았지요. 교리 문답과 특히 교회사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이 과목들은 재밌었지만, 문법은 여러 번 저를 울렸습니다. 남성형이니 여성형이니 문법을 어려워하던 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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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햇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1.13 제가 고개를 높이 든 것은 즐거워 보이는 하늘을 쳐다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모든 시련은 다 끝났고, 이 영혼의 겨울은 영원히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 죽음을 바라보는 눈이 성녀님답네요. 요 며칠 사이 제 주변 분들의 사망 소식을 몇 건 접했습니다. 죽음이란 영혼의 겨울을 지나 즐거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
  • 작성자모나리자 | 작성시간 20.01.13 그 어린 나이에 삶의 무게를 알게 된 것은 큰 시련을 잘 견뎌내셨기 때문이겠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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