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모음! (694)
▶진보와 보수, 천국과 지옥, 이생과 내생, 남과 여, 젊은이와 노인도 서로 공존합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대치하기도 하고 서로 견제하고 갈등하며 때로는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든 이 두 세계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나는 중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중간은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어느 쪽인 가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더 기울어진 사람이 있고 덜 기울어진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종교에도 해당됩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종교들도 크게 두 세계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유신론적 종교이고 또 하나는 무신론적 종교입니다. 유신론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은 모두 이 두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중간 위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이 두 세계가 존재하며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대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무신론적 세계관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세계관입니다. 시14:1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신론적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히브리말로 '나발'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외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내적으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이 '나발'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펴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하신 즉 ...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의 홍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당시 세상의 부패상을 상기하여 지은 말씀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무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무신론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과 자신의 생각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자연과 오늘의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 영적 세계, 내세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 세계만을 강조합니다.
▶유신론은 무신론과 반대의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 무신론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고 불의가 있으면 진리가 있듯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골똘히 찾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14:5절을 보면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계에 계심이라'고 하였고 6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유신론적 세계관입니다.
이 유신론적 세계관은 현재의 자연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넘어 천상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현실의 세계를 넘어 영적인 세계를 보고 오늘의 역사를 넘어 다음의 세계를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열린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닫힌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세계와 역사를 향하여 간섭하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닫힌 역사관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닫힌 역사관에서는 인생의 엄숙함이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역사관의 인생관이 무섭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 닫힌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권세를 가지게 되면 무서운 독재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김일성, 일본 군국주의가 바로 이러한 인생관의 사람들입니다.
▶캄보디아에는 폴포트 정권 때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해골이 오늘날 전쟁기념관에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두려운 대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집안에 무서운 존재가 없으면 아이들이 버릇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신론적 열린 역사관을 가지게 되면 오늘의 세계와 역사뿐 아니고 오늘과 내세와 초월세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그 세계가운데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하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열린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삶에 엄숙함이 있고 하늘을 두려워하고 언제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을 해도 정도를 넘지 않고 크게 타락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지어도 정도를 넘지 않고 흉악한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또한 넘어져도 아주 넘어지지 않고 금방 일어서게 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이 두 세계관이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 두 세계관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사람의 일생에는 3때가 있습니다. 한때는 '태어나는 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태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 태어나는 시간은 인생을 출발하는 시작의 시간입니다. 모든 일에 출발이 좋아야 하듯 사람의 출생도 모든 가족들이 기다리고 축복하는 가운데 시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출발이 좋아야 결과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육상대회에 나왔던 우사인 볼트라는 선수를 보십시오. 출발이 좋지 않으니까 결과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결혼도, 부부 됨도, 첫아이를 낳음도 엄숙함 속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특히 어린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시간은 더 엄숙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하고 아이가 물으면 '어떻게 하다 보니 실수해서 네가 태어났단다.'하고 대답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대답이 아닙니다. '너는 온가족이 기도하고 기다리는 중에 태어났단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출발이 좋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인생의 시작의 때 즉 태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두 번째 때는 '죽음의 때'입니다. 히9:27절에는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든 가족들의 기다림과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태어나야 하고 또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 그 시간도 엄숙하게 맞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자체가 엄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마지막 순간을 참 멋있게 장식하고 아주 부드럽게 운명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노년의 인생을 멋있게 살고 또 멋있게 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인생의 세 번째 때는 '하나님 앞에 서는 때'입니다. 히9:28절을 보면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시간이요 그 다음은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대목이 우리의 삶을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장차 두 가지 엄숙한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는 죽음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장소에서는 말도 줄이고 웃음도 줄입니다. 그만큼 죽음은 엄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한 시간은 우리들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간 대로 심판을 받는 시간입니다. 장차 우리는 모두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간 때문에 이 세상을 함부로 살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두 시간을 학수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죽음의 시간은 쉼의 시간이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시간은 면류관을 받고 공로를 인정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평생을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전도하고 예수를 전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는 마지막 그 시간을 마음놓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엊그제 그동안 논란을 일으켰던 임신한 아내를 살해한 어느 의사가 20년 형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아내는 한 달 후면 아이를 해산할 임산부였습니다. 그런데 산모와 아이가 함께 죽었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남편이 죽였다며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여기서 남편이 죽였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것의 진위여부는 오직 남편인 의사 자신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까지 그 마음의 비밀을 영원히 감출 수 있겠습니까? 장인이 연락 받고 딸의 집에 가서 제일 먼저 사위를 만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하며 사위를 안으려 했더니 사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에 상처가 나 있었는데 장인은 사위가 범인이라고 직감했다고 합니다.
아내 뱃속에는 한 달 후면 태어날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와 아이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위의 태도가 그렇게 냉정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장인이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용서하고 다 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능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남아공은 만델라 이전에 흑인지배 사회입니다. 그 때 일어났던 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대법원장인 올리버경이 자기 집에 흑인 하인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성찬식을 하는 주일날, 그 흑인들이 섬기는 시온성 교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마침 세족식을 거행하는데 이 지체 높은 백인 대법원장 올리버경이 자진해서 그 흑인 여자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는 떳떳하게 대답했습니다. '저 여자는 우리 집의 하인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발을 평생동안 씻겨준 여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배드리는 이 시간 내가 저 여자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마음에 느꼈기 때문에 내가 나가서 씻어 주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대법원장에서 파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백인지배 사회에서 흑인의 발을 씻기는 대법원장의 행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1968년도에 제가 첫 전도사로 한산도의 섬 지방에 부임을 했습니다. 60가구 정도 되는 조그마한 섬 동네입니다. 한산도 본도가 있고, 거기서 또 떨어져 있는 조그만 섬들이 수 십개가 있는데, 거기의 한 교회에 제가 부임을 했습니다.
네 가구가 예수를 믿고 어른이 전부 10명이고, 아이들이 30명 정도 되는 섬 교회였습니다. 가보니 그 교회 사연이 아주 극적이었습니다. 섬에 있는 조그만 교회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사실 앞에 교회가 존경스러웠고 그 교회를 예사로 보지 않는 눈이 열렸습니다.
초라한 초가집을 헐어서 예배당처럼 보이지 않는 그 교회를 세운 집사님은 뱃사공이었습니다. 한산도 본도와 지섬을 연결하는 나루를 건네주는 뱃사공이었습니다.
하루는 낯선 사람이 탔는데 이 사람은 떠돌이 전도사입니다. 옛날에는 떠돌이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이 전도사가 그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면서 뱃사공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바다의 주인이요,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고, 참 신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용왕은 절대 참 신이 아닙니다. 이 섬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은 다 거짓입니다. 참 신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는 그것이 마음에 새겨져서 저 본도의 먼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던 집을 헐어서 기도처소를 만들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동조해서 제가 거기 부임했을 때는 4가구가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 교회도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겪었습니다. 예수 믿고 제일 어려운 것은 정월 대보름날 용왕제를 지내는데 거기에 경비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는 우상 숭배하는데 돈을 낼 수 없다' '계명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에 돈을 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동네사람들이 분노해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주일 날 예배드리는데 돌멩이질을 하고, 문이 부서지고, 심지어 동네를 떠나라고 협박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동네에 한 사건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사라호 태풍'이 그 동네의 아름드리 나무가 되는 당산나무가 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 길을 막은 것입니다. 큰일났습니다. 동네를 지켜주는 수호신이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동네사람들은 그 나무를 치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 나무에 손을 대면 벌을 받는다고 아무도 나무를 치우지 못합니다. 감히 그 나무에 톱질을 못합니다. 그 때 교인들이 우리가 치우겠다고 나섰습니다. 우리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들처럼 그런 두려움이 없으니 우리에게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며칠을 걸려서 톱질을 해서 장작을 만들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동네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저 예수군은 건드리면 안 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용왕제 경비를 내지 않는 핍박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이름 없는 뱃사공 한 사람이 그 동네의 교회에 복음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땀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수고한 것은 반드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그네 종점'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나그네가 사막을 홀로 걸어 가다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헤매다가 보니 양식도 물도 다 떨어져서 굶고 있었습니다. 기진맥진하여 사막 한 가운데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다리가 부러진 낙타가 쓰러져있습니다. 이것이 나그네 종점입니다. 미래가 암담합니다.
그러나 반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로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같이 웃고 있었습니다. 네로는 웃으면 죽은 시체를 보며 오히려 공포심을 가졌습니다.
잘 죽으려고 잘 사는 것입니다. 살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땀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스위스 어느 교회에서 생긴 사건입니다.
늘 교회 종을 치는 '폐인'이라는 사찰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한결같이 쉬지 않고 땀을 흘리며 정확하게 종을 치곤 하였습니다. 그가 늙어서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바로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그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종칠 시간이네' 그리고 교회로 나갔습니다. 종을 치다가 죽었습니다. 종치던 자리, 자기가 40년 동안 땀흘리며 수고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죽었습니다. 같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인지 몰랐습니다. 마침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어느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인가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앞을 보기 전에 당신들이 걸어온 뒷길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자기 뒤를 보니 평탄한 길이었습니다. 좋고 즐거운 길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앞을 보았습니다. 쓰레기와 가시로 가득한 길이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이었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가야 할 길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이 뒤를 보았습니다. 지나온 과거는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땀을 흘리며 수고한 흔적이 역력하였습니다. 앞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흘린 땀이 거름이 되어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흘린 눈물 위에 예쁜 꽃들이 만발하였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이 길이 당신이 가야할 길입니다. 천국 가는 길입니다.'
▶세계적인 기업 코카콜라는 아사 캔들러라는 분이 창업을 했습니다. 원래 이분은 알코올 중독자였답니다. 의지가 약해서 번번이 금주에 실패했습니다.
아내가 이 분을 위해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고 있을 때 강열한 마음의 소리를 들었답니다.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이기는 사람이 성공한다' 집에 와보니 그 시간 아내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캔들러는 아내의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금주에 성공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업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작은 수입에도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면서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고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을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성공의 비밀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고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