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혁명을 이룩하자
본문: 골3:12- 15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저는 나태한 마음이 들 때마다나는 고3이다라고 스스로를 타이릅니다. 고3은 절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여행을 가고 싶어도, 이성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대학 들어가서 하자 하고 참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래야 합니다. 쉬고 싶고, 놀고 싶어도 천국 가서 하자며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가져야 하는 종말론적 긴장입니다. 고3 학생이 다른 모든 즐거움들을 잠시 뒤로 미루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하듯, 우리도 이 세상사는 동안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에 우선 몰두해야 합니다. 해야 한다니까 할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여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은 어디서나 틀림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3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신경이 다른 일들로 분산되는 것을 막아야 보다 중요한 일을 성심껏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우리가 본 받을 만한 사람들의 정신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다윗의 정신입니다. 다윗의 삶을 통해 몇 가지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그는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부를 때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을 알고 이새의 8명 아들 중 7명의 아들이 다 이새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형들에게 다 가라고 하고 자신은 들에서 양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코 다윗을 불러 축복하시고 지도자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불러 쓰십니다. 위대하거나 영특하거나 부자가 되지는 못해도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나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역시 충성된 사람입니다. 재주 있고, 학력 있고, 기술 있고, 머리 있지만 충성되지 않은 사람과 아무 것도 없어도 충성된 사람이 있다면 누굴 쓰겠습니까? 다 있으면 좋겠지만, 역시 충성이 가장 쓰임 받는 요건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의 충성스러운 정신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2.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했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삶의 가장 위대한 특징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왕이 되어서도 그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처럼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믿음은 승리의 길이고 회복의 길입니다. 물론 다윗의 생애에도 큰 오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입니다. 그런 간음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사무엘하 11장 1절에 그 간접 원인이 있습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다윗은 언제나 싸움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기는 예루살렘에 한가롭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태만한 모습입니다. 대개 이러한 모습 속에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없이 한가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자꾸 딴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방심하고 게으르면 그것은 사단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나태함으로 인해 다윗은 밧세바와 죄를 짓고, 연쇄적으로 충복 우리야를 간접 살인하는 죄악까지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지적하자 그는 뭐라 반응합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철저히 회개합니다. 사실상 다윗의 위대함은 골리앗을 쳐 죽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데 있었습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때로 잘못하고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진실로 돌아서면 반드시 회복의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그는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를 그토록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그를 몇 번 살려줍니다. 나중에는 사울이 죽은 것을 알고 정말 그를 위해 애통해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를 보면 그가 권력이 강해지면서도 사울의 집안과 직접적인 마찰을 되도록 피하려는 모습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모습이 언뜻 보기에는 정말 어리석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 사울은 그를 그토록 죽이려 하는데 그는 그토록 피해만 다닐까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사울과 사울의 집안 문제를 하나님이 처리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민심을 얻고 심지어는 사울이 속한 지파로부터도 민심을 얻습니다. 만약 다윗이 직접 사울과 대적하려고 했다면 사울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부작용과 상처가 많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 면을 볼 때 결국 악을 선으로 갚는 길이 부작용 없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참으면 승리합니다, 용서하면 얻습니다. 인내하면 이깁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후부터 8년 후에 사울이 죽었고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울로부터 쫓겨 다녔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 전체 왕이 되기까지 7년 반이 걸렸습니다. 15년의 고난의 세월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인내와 용서에도 한계가 있을 법 한데 그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결국 인내로서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인도를 반드시 기억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시편 37편에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행악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이와 같이 악을 선으로 갚는 자세가 있었기에 그는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가끔 우리를 실망시키고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분들을 마음껏 축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진실로 축복 받게 되는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으면 저주가 임하고, 악을 선으로 갚으면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실망시킨 사람이 보이는 것은 축복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때 그분을 축복하심으로 그 절호의 축복 기회를 잡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충성, 믿음, 용서와 사랑의 정신이 넘쳐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호지민의 정신입니다. 내가 호치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평생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정독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입니다. 그는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여느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에 정적을 숙청한 적도 없었고, 자신을 우상화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호(胡) 아저씨로 불리면서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입은 옷 한 벌만 남겼습니다. 메뚜기 같은 베트남 사람들이 코끼리 같은 미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도 지도자 호치민의 인격과 지도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심지어 남북 베트남이 적으로 싸우는 중에도 호치민의 생일이 되면 남쪽 국민들도 가게문을 닫고 북쪽 지도자 호치민의 생일을 기릴 만큼 그는 전 국민의 존경을 받았었습니다. 백성은 굶기면서 자신의 궁전을 짓는 다른 지도자들에 비하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3꿍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겨레를 위해 평생 동안 헌신하며 이 정신을 지켜왔고, 그의 후계자들도 이 정신을 지도력의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함께 산다(꿍아). 둘째는 함께 먹는다(꿍안). 셋째는 함께 일한다(꿍땀)는 세 가지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도자가 백성들과 함께 먹고 함께 일하는 공동체 정신을 몸으로 실천할 때 온 국민의 역량은 통합되는 것이요, 난국을 헤쳐 나갈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호치민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특권을 누리지 않았고, 국민들과 동고동락함으로써 스스로 국가 통일을 이루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셋째.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정신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찍이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품고 미국에서 흥사단(興士團)이라는 인격수련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독립군을 만들어 일본군과 힘으로 맞서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독립국가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게 도산의 생각이었습니다. 또 그 일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라 올바른 뜻을 품고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세운 인격수양 단체가 바로 흥사단입니다. 흥사단의 기본정신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정의돈수(情誼敦修)요, 다른 하나는 무실역행(務實力行)입니다. 무실역행은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해 힘써 행한다는 뜻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도산의 사상입니다. 한편 정의돈수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도산이 무실역행에 앞서 내세운 참으로 귀한 정신입니다. 도산의 말을 빌면 정의돈수란 곧 '사랑 배우기'입니다. 사랑 배우기와 힘써 행하기, 곧 행함이 있는 사랑, 사랑으로 행하는 삶, 젊은이를 향한 도산의 모범적인 삶과 사상이 뼈저리게 사무치는 오늘입니다.
넷째. 간디의 정신입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급히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놀라 묻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발 한 켤레를 제대로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간디의 생애와 정신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으로는 1.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운동의 전개로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2. 금욕,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참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였습니다. 3. 천민 집단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면서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다섯째, 섬김과 독립을 일구어 낸 정신입니다. 영국의 윌리엄 부스의 구세군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세계 도처의 남녀들이 구세군에 입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주교가 되려고 꿈꾸었던 한 남자가 구세군에 입대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무엘 브렝글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스 사령관은 처음에 그의 입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부스는 그에게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보스로 군림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브렝글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른 훈련병들의 군화를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이에 실망한 브렝글은 내가 기껏 군화나 닦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렀습니다. 그때 환상 중에 거칠고 무식한 어부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려고 엎드리고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예수님! 그들의 발을 씻기셨군요. 그렇다면 이제 나는 저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그후 브렝글은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더러운 군화를 닦았으며 청지기의 사명을 깨닫게 됐고 충성스럽게 섬김의 도를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후에 미국 구세군 최초의 감독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두 가지 모범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만찬이요.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에 있는 여러 지체 중에서 무엇보다도 발을 씻기신 것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발의 말없는 그 섬김과 섬김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발을 씻어 줌으로써 복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의 일생이었고 그 마지막 십자가상의 죽음은 섬김의 절정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기독교 역사상 모든 안수는 주로 머리에 이뤄졌습니다. 이는 구약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안수하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발을 씻기심으로 발에 안수하셨습니다. 이는 목회자의 권위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있음을,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음을 깨우쳐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섬김의 정신입니다. 체면과 권위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에 물들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정신인 이 섬김의 정신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참된 권위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발바닥 인생을 사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이 발바닥 같이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을 요청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13:14)
1940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오산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스승은 민족운동가 조만식 장로였습니다. 주기철이 후에 목사가 되어 목회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주일날 주 목사가 예배를 인도할 때 스승인 조만식 장로가 늦게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자 주 목사는 "장로님, 오늘은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그대로 했을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그 날 참석한 많은 성도들은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칭찬했습니다. 민족독립은 이런 분들의 정신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여섯째. 불굴의 도전정신입니다. 마르코니는 전선을 사용하지 않고 소리의 진동을 전달하는 에테르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성공하여 세상에 최초의 무선통신을 선사할 수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4륜 운송기구를 저렴한 비용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포드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자동차를 만들어내어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라듐이라는 금속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전까지 아무도 라듐을 본 적이 없었고 어디에서 라듐을 찾아야 할지 몰랐지만 꼭 찾아내겠다는 집념을 가진 퀴리는 마침내 라듐의 근원을 밝혀내고야 말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확신이야말로 분명한 결과를 이끌어냅니다. 그리스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을 잘하는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상아로 여성상을 조각했는데, 너무나 멋지게 조각된 나머지, '이 여성상을 현실의 여성으로 변하게 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아프로디테 신은 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기대를 하고 있으면, 그것에 부응하는 현상', 이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라 부릅니다. 우리가 꿈과 희망을 가지고 불굴의 정신으로 계속 전진하면 대개 그 소원을 성취하게 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는 우리들 속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정신 혁명” “심령의 변화” “의식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마다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군인은 군인 정신을 가지고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농부는 농부의 정신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학생은 끝없이 탐구하는 학생의 자세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 혁명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정신에서 새 사람의 정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정신에서 반석 같은 신앙정신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새롭게 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의 체제나 구조를 뜯어고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체제나 구조를 운영하는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다면 두 번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 차례 혁명도 치렀습니다. 어이없는 군사독재 시대도 지냈고 문민정부, 열린 정부 시대가 되었다고 그렇게 기뻐하며 소망 중에 기다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크게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어긋나는 데서 오는 실망감, 배신감 같은 것마저 느끼는 현실입니다. 부조리는 여전하고 부정과 부패는 그 단수를 달리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정신의 혁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구조와 정신자세, 사고방식과 성격구조를 바꿔놓는 정신 혁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신의 혁명이 따르지 않는 체제개혁이나 구조변혁은 아무리 해봐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옷을 바꿔 입는다고 그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돼지를 잘 씻기고 목에 리본을 달아서 방에다 들여놓아 보십시오.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진흙 구덩이에 들어가고 맙니다. 그것이 그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환경을 변화시켜도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마침내 다시 죄악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즉 새 마음을 가지지 않는 한 얼마가지 아니해서 낡은 폐습과 낡은 풍토로 다시 후퇴하고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외부의 혁명이 아니라 내부의 혁명입니다. 인간 자신이 달라지고 정신이 바뀌기 전에는 외적인 변화나 혁명으로는 큰 결실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정신을 혁명할 수 있습니까? 인간 존재의 중심핵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거듭나는 운동이라고 합니다. 낡은 사람을 그대로 두고 아무리 겉의 체제나 구조를 바꾸어 보아도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사람, 인간의 깊은 뿌리를 새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정신의 혁명입니다. 종교는 여기에 목표를 둡니다. 우리는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 이기심과 탐욕과 거짓과 게으름과 교만과 증오의 감정이 깊게 뿌리를 박고 있는 한 아무리 겉의 체제나 조직을 바꾸어도 무엇이 좀 되는 것 같다가도 결국은 유야무야한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회칠한 무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얗게 회칠한 무덤은 겉에서 볼 때는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썩은 송장의 더러운 냄새와 무서운 부패균이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우리 국민의 정신이나 생활이 회칠한 무덤과 같지는 않습니까? 우리 마음의 밭에 새로운 생명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진실과 오래 참음, 근면과 절제, 화목과 긍휼, 사랑과 희락, 온유와 겸손, 양선과 충성의 새싹을 심어 새로운 마음의 밭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 하나 하나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물질의 건설에만 급급하지 말고 정신의 건설에 힘을 씁시다. 그래야 우리가 바로 살고 잘 살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크리스천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시발점은 정신을 바꾸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 이상 큰 변화와 큰 혁명과 큰 개혁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의 심령 변화와 정신 혁명처럼 소중한 것이 달리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하는 것이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내가 사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우리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 따라 떠내려갑니다. 죽은 정신은 세상 물결에 멀리 떠내려갑니다. 그러기에 히브리기자는 너희 중에 세상 물결에 흘러 떠내려가는 자가 있을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히2:1) 그리스도인들은 산 물고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산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리심이라”(빌2:5-11) 그리스도의 정신이 나를 구원했고, 우리 모두를 구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 크리스천들이여,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자복하여 회개하고, 우리의 마음 밭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고, 아울러 세상 모든 민족의 마음속에도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정신혁명의 기수(역군)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와 같은 정신을 알고 있지만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을 맞아서 주님의 이 정신을, 이 성품을 우리도 좀 닮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에 병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모든 죄인들을 주님 앞으로 구원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도 이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쌀과 헌금을 모으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계절에 작은 믿음 있는 사람들이 이들을 북돋워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서 상한 갈대, 감옥에 갇히고 억울하게 밟힌 불쌍한 이들을 함께 붙들어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 국민의 정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을 나도 이루게 하소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는 정신혁명을 이룩하게 하소서.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갈릴리 공동체 전화: 010- 2289- 1638 (빛의 자녀) 010- 9975- 9996 (빛의 사자) http://cafe.naver.com/newgalilee 이메일: allcome@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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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
본문: 눅5: 17- 26
중풍병은 몸이 마비되어 활동을 못하는 병입니다. 나을 수 있는 희망이 별로 없는 병입니다. 그리고 집안 식구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을 유지할 수 있는 병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 정신적으로도 마비되는 병입니다. 지금 많은 현대인들이 돈에 중독되고, 도박, 게임, 일에 중독되고 마비된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치는 길은 예수님을 만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 만남의 자리는 죄의 용서와 생명의 역사와 함께 삶의 변화와 부흥이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만나는데서 삶의 문제와 과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경험한 축복의 삶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가버나움의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중풍병의 원인인 죄 사함을 받고 중풍병에서 고침 받은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된 인생으로 변화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하는 만남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갈 때에 직면했던 어려움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협소성입니다.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들고 예수님이 계신 집을 찾았지만 예수님께서 계신 집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문 앞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협소한 공간은 예수님을 만나는 어려운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어떤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예수님을 만나 친구의 중풍병을 고치게 했을까요?
1. 함께하는 믿음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함께 했습니다. 친구들의 사랑을 받아 드릴 줄 아는 중풍병자와, 친구를 위하여 사랑을 줄줄 아는 함께 하는 친구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함께 했기에 주님의 축복을 받는 승리하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바울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바울 곁에는 ‘누가’와 ‘디모데’가 있었고, ‘에바브로디도’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밖에도 수많은 기도지원자들과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하는 믿음 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주님 만남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믿음입니다. 혼자만이 살아갈 수 없듯이 혼자만의 신앙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함께 하는 믿음 속에 주님의 능력과 역사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믿음으로 주님 만남을 이루십시오.
2. 행동하는 믿음 네 친구는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행동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동반되는 것이 되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는 예수님의 능력을 분명히 믿었기에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가는 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받는 삶임을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이 전도하여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짐을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이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구원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사지 못한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영생과 천국을 믿는다면서 천국을 영생을 사모하며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동하는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장 14- 26절)
3. 포기하지 않는 믿음 중풍병자의 네 친구는 사람들이 많아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갈 수 없자, 지붕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방해와 장애에 직면하여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은 장소가 좁아 들어갈 수 없는 협소한 조건을 뛰어넘게 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은 지붕을 뚫는 모험과 용기 있는 결단을 만들어 냈습니다. 수로보니게 이방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들림으로 예수님께 찾아와 울며 부르짖어 고쳐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 간구에 냉담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간절히 절하며 간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축복하시며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여인의 큰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쉽게 포기하기 때문에 쉽게 잃어버리는 귀중하고 값진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믿음은 포기하지 않게 하는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축복의 인생을 차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4. 적극적인 믿음(모험하는 믿음) 적극적인 믿음은 주님과 함께 하는 주님 만남의 역사 속에 살게 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침상을 메고 주님을 찾는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내렸습니다. 이 적극적인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적극적인 믿음은 행동화하고 모험하기를 즐겨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극적이기를 원하십니다.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적극적 믿음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상상의 아들인 13세의 ‘바비 힐’ 군은 어느 날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에 관한 책을 잃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어린이는 유럽지역 미공군 ‘린제이’ 장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저금통에 모은 돈으로 산, 아스피린 한 병을 보냅니다. 이 약을 아프리카에 계신 슈바이쳐 박사님의 병원에 낙하산으로 떨어뜨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린제이 장군은 이 소년의 편지를 방송국에 보냈고, 방송국에서는 이 갸륵한 사연을 그대로 방송했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감동 받은 우럽사람들이 모금과 함께 약품을 보내왔습니다. 결국 40만 달러치의 약품이 모아지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제공한 비행기에 싣고, ‘바비 힐’군 까지 동승시켜 아프리카의 슈바이쳐 박사에게 보내졌습니다. 적극적인 믿음, 모험의 역사를 만들고, 이 역사는 예수님 만남의 축복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5. 사랑의 믿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구가 어려움을 당하고, 병들면 떠나갑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여기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한 사람들은 친구를 사랑하였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사랑은 희생과 헌신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은 함께 행동하게 하고 적극적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모험하게 합니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는 친구를 사랑하기에 친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고자 했습니다. 친구들의 사랑은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침상을 들고 갔습니다. 사랑은 지붕위로 올라가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사랑은 지붕을 뚫는 모험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사랑은 중풍병자로 하여금, 주님 만남을 만들고, 죄 사함의 역사와 함께, 중풍병자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돌아가는 축복자가 되게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전문가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언에 대해서 시비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의 율법관과 교권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심판하고 정죄 하며 비난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믿음은 사람을 살리기를 즐거워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은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는 주님 만남의 믿음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 만남의 축복을 이루는, 중풍병자를 일으킨 믿음의 축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세상에 중독, 마비된 사람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께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영원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주님,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중풍 병자의 친구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연약한 자들의 필요에 민감하며, 그들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드림으로 섬김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갈릴리 공동체 전화: 010- 2289- 1638 (빛의 자녀) 010- 9975- 9996 (빛의 사자) http://cafe.naver.com/newgalilee 이메일: allcome@naver.com |
행복은 마음에 달려있다.
본문: 시51: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대구 지방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한 청년이 회사를 퇴근하면서 평소 좋아하던 미스 김을 불러내어 '오늘 저녁 데이트를 해야지'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청년과 미스 김은 만나서... 어디에서 멋진 데이트를 할까 생각하다가 팔공산으로 드라이브를 가자 생각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 생각대로 팔공산에 가서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청년이 너무 과속으로 차를 몰아 그만 큰 사고를 내어서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그 날 두 사람을 죽게 했을까요? 데이트를 하자는 생각. 팔공산에 가자는 생각. 신나게 달려 보자는 생각. 그 생각이 그 날..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성공과 실패.. 일상생활, 나아가 운명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생각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나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인간은 연약한 갈대와 같습니다. 때로는 꺼져 가는 등불과 같습니다. 연약한 양처럼 무력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위대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보배로운 선물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은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입니다. 생각의 씨앗을 심을 때 미래가 새롭게 창조됩니다. 현재는 과거의 생각의 열매입니다. 미래는 현재 우리가 심는 생각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선택할 때 미래를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각이 천지를 창조한 것입니다. 생각이 열쇠입니다. 생각이 언어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가득찬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 행동을 결정합니다. 행동은 생각의 결과입니다. 생각이 인격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드러납니다. 생각이 우리의 감정을 결정합니다. 기분 좋은 감정의 뿌리에는 기분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기분 나쁜 감정의 뿌리에는 기분 나쁜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이 우리의 행복을 결정합니다. 참된 행복은 환경이나 성공이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마음의 생각에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있어도 불행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불행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스스로 행복을 선택한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결국 행복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행복의 원천인 마음을 다스리려면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생각을 다스리면 마음이 다스려집니다. 마음을 다스리면 자신을 다스리게 됩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현명한 자입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자입니다. 생각은 호흡처럼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생각을 이해하십시오. 생각을 사랑하고 친구로 삼으십시오. 생각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깊이 생각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깊이 생각할 때 깨달음이 태어납니다. 생각에 영양분을 주는 말씀과 함께 생각하십시오. 말씀묵상은 지혜와 명철을 줍니다. 하나님의 안목을 갖게 도와줍니다. 어두운 생각에 빛을 주고 방황하는 생각에 길을 보여줍니다. 단순한 사색을 넘어 묵상하십시오. 생각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십시오. 그 속에 감추어진 엄청난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자족할 줄 압니다. 참된 부자는 물질이 넉넉한 사람이 아니라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존재가 넉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하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외모 셋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반 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넷째, 남과 겨루어 한사람은 이겨도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했을 때 듣는 사람의 반 정도만 박수를 치는 말솜씨 이 다섯 가지가 플라톤이 말한 행복의 조건입니다. 행복을 위해 조금 부족하게 사는 것은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지혜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 줍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추구하는 최고가 되는 행복의 조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더 많이, 더 아름답게, 더 강하게 최고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절대적 행복의 가치기준입니다. 그러나 행복과 자유는 축적과 성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만족하는데서 얻어집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내 모습에 만족하고 계신지요? 행복은 항상 이미 내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
차 두 대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달리는 앰블런스였고, 또 한 대는 최신식 모델의 세단이었으나, 차선을 마구 달리면서 다른 차를 추월하고 중앙선을 침범하여 위험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남의 귀중한 생명을 빼앗을 사고를 저지르고 말 형세였습니다. 이들 두 대의 차량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에서 왔을까요? 엔진? 차체의 모양? 값의 차이? 아닙니다. 유일한 차이는 누가 운전석에 앉아 있느냐 였습니다. 하나는 사랑과 봉사의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술취한 운전사였습니다. 부정적이고 더럽고 악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과 긍정적이고 성령충만하여 좋은 열매가 가득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과의 삶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삶의 운전석에 앉아서 운전을 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1초 후의 일도 알 수 없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내 마음의 운전수는 창조주이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아니면 유한하고 지치고 무거운 짐진 연약하고 괴로운 나 자신입니까? 허물과 질병, 미움과 질투의 교차로를 달리면서 생의 목적지도 모른 체 황급하게 내달리기만 하려하는 나 자신입니까? 아니면 아버지께로 가는 영생의 지도인 성경을 펴놓고 인도하시는 사랑의 목자 예수님이신가요? 삶의 운전석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마음의 조정실의 열쇠를 전능하신 사랑의 왕 예수님께 드리고 그 보좌에 앉으시게 하십시오. 그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왕좌인 심령에 거처를 가지실 뿐 아니라 그 보좌에 앉아 결정자가 되게 하십시오. 마음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서 운전하게 하십시다.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의 길,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37:4-6) 그리고 성경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곧 그 사람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일만 생각합니다. 즉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높은 지위를 차지 할까? 어떻게 하면 육신을 즐겁게 할까? 어떻게 하면 예뻐질까? 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어떻게 하면 기도와 전도를 많이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오늘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시끄럽고 살기 어렵습니까? 흔히 환경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환경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악하고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악한 생각을 주어서 악한 일을 하게 하고 음란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음란한 생각을 주어 음란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거짓된 사람에게는 거짓된 생각을, 불의한 사람에게는 불의한 생각을 자꾸 넣어줍니다. 모든 문제는 부패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따라 가지게 되는 생각’입니다. 즉 현재의 상황만 보고 판단하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홍해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가나안을 정탐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그랬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보았을 때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현재의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삶과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하시면 살리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불안을 가져오고 쓸데없는 근심 걱정에 빠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고 말씀하셨고 성경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늘 좋으신 분이시며 평안과 소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만 찾으면 살 길이 열립니다. 진심으로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우리를 널리 용서하고 축복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속에서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이시며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욥이 그랬고 요셉과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랬습니다. 결국 모든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는 “마음과 생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잘못된 생각은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며, 기운을 뺍니다. 용기를 없애며, 담력을 잃게 합니다. 또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환란과 절망의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벽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말씀이 적혀져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귀한 것으로 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풍성한 삶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생각을 항상 심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마음에 행복과 기쁨이 넘치며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기쁨이 되신 주님, 저희가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가질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선한 생각을 갖기 원합니다. 오늘도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인 생각, 소극적인 생각, 악한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기뻐하는 생각을 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 갈릴리 공동체 (http://blog.naver.com/allcome)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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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헌금, 십일조)
▣ 피 섞인 헌신
원주에서 차로 두어 시간 벗어난 시골에서 첫 목회를 할 때였다. 볼일이 있어 택시를 타고 원주 시장에 갔다. 시장을 둘러보던 중 한구석에서 물건값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이 있어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우리 교회에 다니는 원귀숙 집사님이 가게 주인과 나물값을 두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산에 가서 뜯은 나물을 상인에게 넘기려고 하는데 서로 가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200원을 더 달라고 조르는 집사님과 못 주겠다고 우기는 상인이 서로 밀릴 태세가 아니었다. 집사님이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주인과 실랑이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 내 돈을 주면서 끝내려고 하는데 마음속에서 강한 음성이 들렸다. “이 나물은 주일 내내 산을 돌아다니며 고생해서 뜯은 것이다. 또 버스값을 아끼려고 시내까지 걸어와 주인과 어렵게 흥정을 하며 팔아 돈을 마련했다. 이처럼 피 같은 돈을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렸는데 이 헌금으로 쉽게 택시를 타고 다니는 목회자가 그까짓 200원 가지고 싸우지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다시는 성도들의 손으로 드린 피 섞인 헌신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김상현 목사(인천 부광교회)
▣ 푼돈에 뭉치 마음
생활보호 대상자로 폐지를 주워 팔아 생활하는 할머니 집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 한 켠의, 움막을 겨우 면한 집에서 살고 계셨습니다. 웅크린 자세로 들어가 무릎을 맞대고 함께 심방 예배를 드렸습니다. 할머니는 깨끗하게 펴진 낡은 만 원권 지폐 두 장을 수줍어 하며 내미셨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목사님인데, 책 사 보세요"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몇 번을 사양하면서, 주일에 감사 헌금으로 드리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받아 와서 그 할머니 이름으로 감사 헌금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헌금입니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와 같은 그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집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교회에 다니며 대접을 받으려면 매월 10~15만 원 정도는 헌금으로 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가 참 안타까웠습니다. 언제부터 헌금의 정신은 사라지고 헌금의 액수만을 따지게 된 것일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돈 이전에 마음입니다. 뭉칫돈일지라도 쥐꼬리 같은 마음으로 드릴 수 있고, 푼돈일지라도 뭉치 마음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뭉칫돈에 쥐꼬리 마음이 아니라 푼돈에 뭉치 마음입니다. 마음을 드릴 수만 있다면 처지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큰 헌금, 큰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딱! 붙어살자」/ 홍정근
* 금언: 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 - 마르틴 루터 -
* 갈릴리 공동체 (http://blog.naver.com/allcome)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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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치유, 치료)
▣ 나의 치유는 너다
나의 치유는 너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가듯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는 내게 그 모든 것이다. 모든 치유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아무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 모두였고 내가 꿈꾸지 못한 너는 나의 하나뿐인 치유다. - 김재진의《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에 실린 시 <치유>(전문)에서 -
* 누구나 어딘가 아픈 곳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통증이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송곳처럼 쓴뿌리처럼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 드러내면 사랑과 정성으로 어루만져주는 사람, 당신이야말로 나의 하나뿐인 치유입니다. 나의 치유는 당신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영혼의 치유
영혼의 치유란 사랑을 바르게 정렬하는 일이다. 진정한 나 자신 그리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가 지닌 그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움과 무게감을 경험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과 더욱 깊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층 더 강해진 그 사랑 덕분에, 다른 것들을 향한 사랑은 그 영향력이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릭 리차드슨의 [치유 기도] 중에서-
기독교는 회복을 노래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작게는 이 땅 가운데서 회복을 경험하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영혼의 치유는 사랑을 깊이 깨달아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영혼의 회복은 자유함을 주고 그 은혜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 의사가 아닌 절대 주권자
이 이야기는 아내가 예수전도단에서 훈련받을 때 경험한 간증이다. 훈련 마지막에 전도 여행을 가는데, 팀원 모두가 하나가 될 때까지 기도해서 사역지를 정한다고 했다. 누군가 "원주다!"라고 외친 순간, 갑자기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원주는 남편이 베체트병으로 투병 생활하며 머물렀던 기도원이 있는 곳이다. 남편은 그곳에서 두 눈을 완전히 실명했다. 나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묻기 시작했다. "24년 전 원주에서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죠?" 나는 그 상처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다음 사역지는 평창으로 정해졌다. 그때 나는 주님이 피 묻은 손을 내 깊은 상처 위에 가만히 올려놓으시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남은 한 곳! 영월로 사역지가 정해졌다. 이곳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남편과 함께 자살하려고 했던 불신앙의 장소였다. 남편의 실명 후 24년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이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다시 그곳에 가게 되었다. "그때 왜 고쳐 주지 않으셨어요? 왜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너보다 더 아팠다. 그때도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울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예전에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눈을 고쳐야 할 의사였던 것이다. 후일 우리 부부가 중도 실명자들을 위한 산소망선교회 일을 하게 될 줄이야…. 그날 나는 의사인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이 세상의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만났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김재홍
* 금언: 진정한 회심의 가장 확실한 표적은 겸손이다.(J, C, 라일)
▣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찬송가 91장, <통> 91장)
1.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2. 거룩하신 주의 이름 너의 방패 삼아라 환난 시험 당할때에 주께 기도 드려라 3. 존귀하신 주의 이름 우리 기쁨 되도다 주의 품에 안길때에 기뻐 찬송 부르리 4. 우리 갈길 다간 후에 보좌 앞에 나아가 왕의 왕께 경배하며 면류관을 드리리
[후렴] 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출처] 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작성자 갈릴리공동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