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길입니다.
본문: 요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어린이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 갈림길에서 체셔 캣을 만납니다. ‘어떤 길로 가야하나?’ 체셔 캣은 앨리스에게 되묻는다. ‘어디에 가는데?’ 앨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체셔 캣은 웃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온 길이 있고 갈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길입니다. 그 길은 철새의 항로보다 더 정확합니다. 그 길을 알아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은 우리를 단련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욥은 고난의 길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그 분은 우리의 고통과 시련 속에 길을 내십니다. 나쁜 일이 일어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일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절망스러운 상황에 갇혀 삶의 희망과 꿈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할지 막막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길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막에 길을 만드시고 당신을 인도해 가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갑작스런 풍파 속에서도 잠잠히 주님이 이루실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그 분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이종혜라는 분의 글입니다. ‘낯선 길에 들어설 때면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 느껴지지요. 처음 가는 고속도로에서 길이 꽉 막혀 곁길로 들어섰어요. 내비게이션에서 알려 주는 길 외에 같은 방향의 또 다른 길이 있으리라 믿고 말이지요. 좀 돌기는 했어도 여전히 꽉 막힌 고속도로를 바라보며 원하는 곳에 도착할 때면 안도감과 뿌듯함의 미소가 지어지지요. 게다가 삭막한 고속도로와는 달리 곁길에는 나무와 강과 집이 어우러진 아기자기한 풍경이 있어 오히려 이 길로 들어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막막한 상황을 만났을 때, 그 길이 전부가 아님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른 길이 하나 혹은 여럿일 수 있고, 어쩌면 가려던 그 곳이 살길이 아님을 뒤늦게 알아 감사가 되기도 하지요. 남들이 모두 안 된다고 했던 그 곳에서 다만 그의 인도하심을 믿고 발을 내딛었는데 내가 모르던 길을 그가 만드셨다면..., 언제는 앞이 캄캄해서 더 이상 길이 안 보일 때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이르게도 하셨다면요. 하나님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림이 있다는 걸 알았지요. 길이 막히거나 낯선 길에 들어설 때 두려움이 있으나 그보단 설렘이 더 큰 이유는,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내가 감당 못할 시험은 허락도 하지 않으시고, 시험 당할 즈음엔 피할 길을 내신다는 미쁘신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막힌 길에선 그의 은혜를 기대하는 습관이 생겼지요. 날 도우시는 하나님을 몰랐다면 난 아마 세상으로부터 점점 숨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그가 감당할 힘을 주시면 단단한 돌 속에 들어있는 천국의 보물을 캐내기도 하고, 그가 피하게 하시어 다른 길로 들어설 땐 내가 모르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지요. 세상에서 길을 잃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무 방법이 없어 보여 절망 속에서 길이 아닌 곳을 선택하는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이 바로 길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예수 믿으세요. 살 길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6:16)
이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인생들은 저마다의 길을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길을 선택해야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잠16:25)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사랑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자동차는 휘발유가 있어 움직이듯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길을 걸으려면 사랑이 지닌 속성들을 하나하나 우리 속에 이루어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4:7)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님의 사랑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가장 귀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일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당신이 이루어야 할 귀중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 사십니까? 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성공하여 권력을 얻는 것입니까?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얻었다 하여도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모두 다 버려 두고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헛되고 또 헛된 것입니다. 언제 떠나십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언젠가는 부모, 형제, 처, 자식과 그 아끼던 모든 것을 다 버려 두고 떠나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을 때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고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 지옥의 길과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 두 갈래 길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복된 삶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 13, 14) 많은 이들이 가고 있는 길, 죄인들의 길로 가지 말고 의인의 회중을 찾으세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 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 1- 6)
갈릴리 공동체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는 좁은 길인 갈릴리 공동체를 찾으세요.
갈릴리 공동체 전화: 010- 2289- 1638 (빛의 자녀) 010- 9975- 9996 (빛의 사자) http://cafe.naver.com/newgalilee 이메일: allco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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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삽시다
본문: 히3: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하와는 왜 하나님이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대한 경고를 아담에게 주신 때는 하와를 만드시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아담을 통해서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 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선악과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달랐습니다. 아담처럼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맘속에 새기지 않음으로 결국 믿지 못하여 불순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성도들도 불신앙과 불순종에 이르러 천국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불신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인 믿는 성도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구원에로의 초청이 아니라 구원 안에 있는 자들에게 대한 강력한 촉구입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할 수 있는 것처럼 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도 천국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왜 안식에 이르지 못했습니까?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표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신약시대 성도들의 목표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곰곰히 생각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의 일치된 고백입니다. 성도들이여! 세상에 한눈팔지 말고 영원한 안식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께 주목하고 그를 깊이 생각하고 그를 따릅시다.
이종혜라는 분의 글입니다. ‘빗줄기 시원한 오후, 우리 반 예쁜이가 집엘 안 가고 운동장에서 첨벙거리며 물이 고인 곳을 일부러 찾아다니네요. 신고 온 장화가 맨 땅을 걷기엔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표정이 얼마나 신나고 맑아 보이는지요. 빗줄기 따라 먼지 쌓인 기억들도 말끔하게 씻겨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녀석 표정만큼 행복해질 때까지 말이지요. 요즘엔 상처 입은 가슴을 안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일들로, 어린아이는 나름대로 고 작은 가슴으론 감당하기 버거운 슬픔으로 말이지요. 비가 많이 내리네요. 무시당한 일, 오해 받은 일, 욕먹은 일, 야단맞은 일,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주어진 환경으로 힘들었던 기억들, 때론 지금에야 이해하는데 그 땐 마음이 좁아 상처받았던 것까지 말입니다. 세상에서 혼자 힘든 것 같다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을 만나면 왜 그렇게 반가운지요. 나만 당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의 위로는 참 큰 것 같아요. 하지만, 모든 일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기가 어렵고, 늘 공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는 걸 봅니다.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 더듬어보면 나도 다를 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상처였던 것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마음에서 지워지는 걸 느꼈어요. 예수를 생각하면서부터 말이지요. 그가 날 위해 죽으셨다는, 더욱이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이 내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으신 그 가슴 벅찬 사랑이 내게 커 보이던 상처를 작아지게 만들었고 어느 새 사라지게 했어요, 예수님을 생각하고서 말입니다. 장화신고 놀던 고 예쁜이가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교실 문을 빼꼼히 열고 인사하네요. 새콤한 쥬스 두 개에 얼굴 가득 행복이 넘칩니다. 예수, 예수, 예수,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 하나, 미소 둘, 그렇게 행복을 맛보며 살아요. 예수 믿으세요, 날마다 천국을 경험합니다.’
또 우찌무라간죠의 ‘예수를 생각하고’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나의 가난함도 슬프지 않고 남의 부유함도 부럽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감사한 마음이 넘칠 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몸의 환란도 괴롭지않고 그 행복도 사모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평강과 만족만 있을 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일의 실패에 실망하지 않고 그 성공에 뛰며 기뻐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영원한 승리자이기 때문이라’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구주를 생각만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2.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중 비할데 없도다 3. 참 회개 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4.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5.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아 - 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2- 3)
나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야 할 예수님은 나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믿음의 주님이시며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 사랑의 주님이시며 지금은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 내가 거할 처소를 마련해 놓고 기도하며 기다리시는 소망의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그 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화는 생각하게 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생각을 버리게 하고 생각을 무시하게 하고 생각하는 것을 힘든 일로 치부하게 하고 즉흥적으로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결정하고 즉각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인스턴트의 문화입니다. 주님은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라고 명령합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정지해야 합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STOP해야 합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현대의 인스턴트 문화 그리고 지나치게 캐주얼한 문화와 에토스를 걸고 넘어지라는 겁니다. 거슬러 올라가라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깊이,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깊이, 깊이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장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야할 대상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임을 강조해 줍니다. 우리 삶에 대해서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희망에 대해서 소명과 사명과 비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것은 한 분 우리 주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지들 중 하나는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의식의 표피만을 자극하고 마는 가 입니다. 부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과 아픔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예수님의 거룩한 삶을 예수님의 부활과 다시 오심을 깊이 생각하므로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함께 좁은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 성경을 읽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으로 읽고, 도덕 교훈으로서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하루라는 시간동안 예수를 생각하는 시간은 한 시간도 안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하루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보다는 불신자들처럼 살아가는 시간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그리스인으로서의 예수의 향기가 베어들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 말씀을 읽는 가운데 예수를 발견하고 그 모습을 닮는 가운데 향기를 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경읽기, 기도하기, 찬양하기 등의 훈련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내 삶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그렇게 수긍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서 따돌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혼란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혼란과 불안은 자기 스스로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삶은 일을 더 꼬이고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서 옵니다.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다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세상에서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할까 봐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교회에서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사용할 뿐입니다. 찬송가의 충성과 헌신은 그저 가사에 불과하여 부를 뿐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아무런 실천적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아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예수님을 바라보며, 매일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삶은 기도와 말씀과 찬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삶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 일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인간(목회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공동체가 이 일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예수님만이 주인이시고 목자이십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길입니다. 갈릴리 공동체로 오셔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갑시다.
*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은 저의 평생에 힘써 따라가야 할 삶의 푯대이십니다. 저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본이 되시고 제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범사에 주 예수를 본받아 더욱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깊이 생각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갈릴리 공동체 전화: 010- 2289- 1638 (빛의 자녀) 010- 9975- 9996 (빛의 사자) http://cafe.naver.com/newgalilee 이메일: allco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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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진 선교사 성경공부(조롱, 멸시)
▣ 그리스도인이란 조롱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처음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이 섞인 호칭이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신문을 받는 중 그 기회를 이용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아그립바 왕은 깜짝 놀라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바울을 책망하고 있다. 왕은 자신에게 그리스도인이란 라벨이 붙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침을 뱉듯이 외면해버렸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가르키는 별명이다. 원래 이 이름은 그리 명예스러운 내용으로 불리운 이름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안디옥 신자들은 그들에게 붙여진 부끄러운 별명을 받아 오히려 놀라운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빛나고 존귀한 이름이 되도록 우리에게 좋은 영적 유산을 전해줬다. 그 결과 마침내 주후 313년에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게 됐다. 오늘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여겨야 한다.
▣ 개는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
지역발전을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 붓던 한 젊은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지지해준 유권자들에게 보답하기위해 자신의 지역구의 모든 편의를 돌보았습니다. 건너기 힘든 강에 다리를 놓아주었고, 무너진 건물들을 다시 세워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깬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모든 노력으로 돌보던 지역구의 신문사들이 자신의 작은 실수를 앞 다투어 비난하며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허탈감과 배신감으로 둘러싸인 그는 모든 일들을 중단하고 자신의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얘기를 들어주던 친구가 갑자기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지나 그들이 서있던 곳 근처에 급행열차가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열차가 그들 가까이로 다가오기 무섭게 동네근처의 모든 개들이 몰려와 기차를 향하여 짖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정치가에게 친구가 말했습니다. “개들이 아무리 짖어대도 급행열차는 달리는 법이네.” 그리스도인은 주변의 가십과 조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듣고 힘차게 전진해야합니다. 물러서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 기도: 주님, 천국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 묵상: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핑계대며 망설이지는 않습니까?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 호객꾼이 전도꾼으로
윌터 맥도널드는 회심 전에 시카고 유흥업소 코미디언이자 댄서였다. 그는 스테이트가의 어느 술집에서 호객 일을 하는 ‘닥’과 절친한 사이였다. 닥은 그 술집 인근에 위치한 ‘퍼시픽 가든 선교회’를 몹시 싫어했다. 그런데 알코올 중독자였던 맥이 선교회 집회에 몰래 참석했다가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후로 그는 술을 끊고 영혼들을 사랑하는 주님의 종으로 변했다. 그 변화를 알아챈 닥은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어느 날, 맥이 선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동안 닥과 다른 호객꾼들은 밖에 서서 손뼉을 치며 그의 흉내를 내면서 조롱했다. 맥은 조롱하는 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메시지를 전했다. 며칠 후, 맥은 여덟 명의 옛 친구들과 길거리에서 맞닥뜨렸다. 그들은 양쪽에 네 명씩 줄을 지어 섰다. 맥이 그들 사이로 걸어가자, 그들은 담배에 절은 침을 맥의 옷과 구두에다 뱉었다. 싸우기 좋아하던 예전 모습과는 달리, 맥은 닥에게 차분히 말했다. “자네도 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싸우려 하지 않을 걸세. 누가 자네에게 침을 뱉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로부터 3주가 지난 어느 날 밤, 닥은 선교회 앞자리에 모습을 나타냈다. 결단하는 시간에 닥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맥, 정말 나 때문에 화나지 않았어?” 맥은 대답했다. “주님이 내가 화나지 않게 해주신다네.” 그날 밤에 닥도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그는 스테이트가에서 친구 맥처럼 때로는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호객 행위를 계속했다. 그것은 사람들을 퍼시픽 가든 선교회로 불러들이는 전도 사역이었다. - 「예수 닮기」/ 레슬리 플린
▣ 검찰 전도 사명
검찰에서 근무하는 한 성도의 얘기입니다. 나름대로 한때 수사검사로 날리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한직에 한직을 맴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드러내놓고 전도하는 그의 행보로 인해 왕따와 조롱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죠. 주위에서 “아예 개업을 하지 그러냐”고 권하면 대답이 걸작입니다. “나 아직 검찰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검찰 복음화의 소명을 받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폭탄주가 만연하고 고사 지내는 것이 상례인 검찰문화에서 전도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것 자체가 이란격석(以卵擊石), 달걀로 바위치기격 아닌가요. 신기한 것은 그의 얼굴이 한없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전도한 교인 수가 무려 1600여명. 때로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아니 계속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 하더라도 올곧게 신앙을 지키는 그가 참 부럽습니다. /윤재석 국민일보 기자
▣ 하나님을 멸시하지 말라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자. 그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요. 그분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이다. 기도에 게으른 사람은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결국 기도 자체를 잃어버린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이 퇴보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느끼며 그분의 채워주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돕기를 원하셔도 도울 수가 없다. 기도의 골방에서 쟁기질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추수하지 못한다. -E.M.바운즈 <기도의 불병거> 중에서
▣ 조소와 멸시가 넘칠 때 - 시123편
인생을 살다가 보면 이웃들의 조소와 멸시로 견디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시온의 땅에로의 귀환 초기의 경험을 반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이들이 의욕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 재건에 착수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소와 멸시였습니다. 그 땅의 기득권자들 중 평안한 자들은 조소하고 교만한 자들은 멸시했습니다. 이와같은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본능은 우리에게 복수를 권하고 감정은 우리에게 한바탕 맞장 뜰 것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느혜미야가 선택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시편기자에 의하면 그는 하늘에 계신 분이시며 하늘의 보좌에서 땅을 통치하는 분이십니다. 그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눈과 귀를 훈련할 때 효과적일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우리를 둘러싼 답답한 현실에 고정시키기 보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전능자의 보좌에 고정시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귀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조소와 멸시의 소리를 듣고 기진맥진하기보다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전능자를 향하여 우리의 영의 귀를 열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하는 자들에게 어김없이 부어 주시는 그분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하늘의 보좌를 움직여온 가장 강력한 짧은 기도는 이런 기도였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왜 주께서는 우리가 긍휼을 구할 때 그렇게도 민감하고 신속하게 반응하실까요? 그 까닭은 하늘의 주요 역사의 주이신 그가 긍휼에 풍성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기도: 역사의 통치자이신 주님, 우리의 심령에 조소와 멸시가 넘칠 때 다만 조용히 주께 나아와 주의 긍휼을 구할줄 알게 하옵소서. 아-멘 /이동원 목사
▣ 노란 별을 달아주는 까닭
세계 2차대전 때 독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슴에 노란별을 달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고 멸시하고 차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노란별을 달고 다니는 일은 불리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노란별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노란별을 달아 주면서 자녀를 교육한 말이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우리를 멸시하기 위하여 이 별을 달게 하지만 엄마가 너희에게 이것을 달아주는 까닭은 네가 자랑스러운 유태인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자랑스러운 일일 수도 있고, 수치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입니다. 어떤 일에서든 좋은 의미를 발견하십시오. * 기도: 주님, 믿음의 유산을 남기게 하소서. * 묵상: 후세에, 혹은 자녀에게 남겨줄 것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태도
* 성경: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17:5)
인생의 여정은 고통의 여정입니다. 고통에서 예외인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생을 살아가며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해석함에는 관대하지만 이웃들의 고통을 해석함에는 너그럽지 못합니다. 나는 억울하게 이런 고통을 당하지만 내 이웃들은 그런 고통을 당함이 당연하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함은 그를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떤 예술가의 작품을 멸시함은 그 작가 자신을 멸시함인 것입니다. 성경은 창조자는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의 걸작품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도 동일하게 주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도상에서 전혀 준비되지 못 한 채로 재앙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재앙의 결과도 실로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되기도 하도, 또 어떤 사람은 관계의 상실로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재앙의 결과로 나머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든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작품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재앙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을 대하는 성도의 마땅한 태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종종 우리 중에는 이런 이웃들을 진지한 긍휼로 대하기 보다 더 오히려 이들의 재앙을 기뻐하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잠언은 이런 사람들이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합당한 태도는 긍휼뿐입니다. * 기도: 긍휼에 풍성하신 주님, 가난과 재앙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을 한 평생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게 하소서. 아-멘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 장애인 천사들
1100여명이 모인 전국장애인수련회에 강사로 갔다가 도리어 받은 은혜가 컸다. 손발을 쓰지 못한 채 누워서 사는 분들은 돕는 사람이 항상 곁에 있고 말이 분명치 않아 알아듣기 어려운 분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에서 어둡고 찡그린 모습을 한 분은 거의 없고 모두가 밝은 표정, 웃는 얼굴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영혼까지 부자유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속에는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믿는 자들을 자유케 하는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 송명희씨의 시가 생각났다. “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인간의 참 가치와 의미와 목적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고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의 은혜는 약한 자에게 더욱 넘치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종교가입니다. 그의 글을 읽고 감동받은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 자라기는 했으나 첩의 아들이라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생이었겠습니까? 왜 나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역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 북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들 가까이로 다가서서 물었습니다. “기생 아들도 사랑하나요?” “아무렴요,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글 가운데에는 ‘나는 기생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확실한 의식, 그 감격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창녀와 걸인 등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런 삶이었습니다. 비방하고 멸시하고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찍으려 달려오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의 향을 묻혀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 톨스토이의 인생론
톨스토이의 ‘인생론’은 삶을 운명에 맡기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그는 제정 러시아의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중년에 접어들면서 번민과 죄의 절망에 깊이 빠졌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얻기 위해 몸부림 쳤으나 해답을 얻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을 찾아 의논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귀족들이 멸시하는 투박스럽고 빈궁한 농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가진 것 없지만 소탈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도 기쁨에 찬 삶을 누리고 있음을 본 것이다. 톨스토이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냈다. 어려운 운명을 뚫고 나가는 그들의 힘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에서 왔던 것이다. 우리 주위에도 운명에 붙들려 꼼짝 못하고 주저앉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연초엔 더욱 그러하고 어수선할 때일수록 그렇다. 어떤 위기에서도 바른 인생관으로 운명을 개척해가는 위대한 힘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때때로 인간의 선택 기준과 다르다. 세상적인 조건이 전혀 구비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목격하고 놀라게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을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28∼29)
▣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시킨다
청교도 성경 학자인 메튜 헨리는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다. 그는 매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기도하며, 묵상하다가 발견한 놀라운 진리들을 그의 주석에 기록했다. 마침내 임종이 다가왔을 때, 그는 그의 친구 일라그쎄에게 유언을 남겼다. “하나님을 섬기며 그와 교제했던 삶이야말로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에게 가장 편안하고, 기쁜 삶이었다네.” 메튜 헨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삶으로써 놀라운 성취감과 만족감을 누렸다. 반면 볼테르는 18세기의 프랑스의 합리주의 학자였다. 그는 생전에 교회를 비평하는 많은 소책자를 썼다 . 다른 종교들처럼 기독교는 100년이 지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종교가 될 것이고, 성경 역시 단순한 동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볼테르의 임종이 다가오자 그의 상태는 매우 악화되어서 그의 비 그리스도인 친구들조차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꺼려했다. 마침내 볼테르는 그의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부짖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채 죽는 것이 틀림없다.” 그의 임종을 지켜보던 간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의 모든 부를 다 준다고 해도, 결코 임종시의 무신론자의 침대 곁에는 가고 싶지 않다. 너무나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메튜 헨리와 볼테르의 경험은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가? 한 사람은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찼고, 다른 한 사람은 괴로움과 절망으로 가득 찼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왔는가?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 - 말씀 앞에 머무는 삶 / 론 스미스
▣ 모욕을 당해도 웃을 수 있는 까닭
한때는 미친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던 이가 큰 스승으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까닭은 화를 낼 만큼 모욕을 당해도 화낼 줄을 모르고 웃기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그 비밀이 알고 싶어 깊은 밤 찾아가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전혀 분노하지 않고 웃으십니까?" "그야 별 것이 있나, 죄인이 죄를 짓는데 당연하지 않고....당연하지! 하하하하하하하" 깊은 밤 별까지 다달을 듯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번졌습니다. <이주연>
* 금언: 깊은 강물은 돌을 던져도 흐리지 않는다. 모욕을 받고 이내 화를 내는 사람은 강도 아닌 조그마한 웅덩이에 불과하다. <톨스토이>
▣ 임페리얼 호텔
일본 도쿄에 임페리얼 호텔이 있다. 이 호텔의 신축공사를 맡은 사람은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ioyd Wright)였다. 지진과 진동이 잦은 이 지역에 호텔을 짓는다고 선언했을 때 사람들은 야유와 조소를 보냈다. 강진에 버틸 건물은 없다. 불가능한 일에 너무 많은 열정을 쏟지 마라. 라이트는 주위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주도면밀한 건축계획을 세웠다. 그는 지하 8피트에 분포한 넓은 점토층이 지진의 충격을 흡수하도록 특수한 공법을 사용해 호텔을 지었다. 이 공사는 무려 4년이나 소요됐다. 건물이 완공된 후에도 라이트의 특수공법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52년 도쿄에 사상 최악의 지진이 발생했다. 모든 건물이 나무토막처럼 맥없이 무너졌다. 그 비참한 폐허에서 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는 건물 하나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임페리얼 호텔이었다. 진품은 위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도 당시 사람들은 노아가 미친 짓을 한다고 비웃었다. /임한창
▣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어거스틴이 한창 저술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루는 꿈을 꾸는데 바닷가에서 한 아이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다가 모래에 붓고 있었다. 어거스틴이 지나가다 궁금하여 물으니까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내어 바다를 마르게 하려고요.” 어거스틴이 어이없어 하면서 어리석음을 꾸짖자 아이는 도리어 조소하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이 조그만 지식을 믿고 하나님의 무궁한 신비를 캐내려 하니 그 어리석음이 나의 행위보다 더합니다.” - 「교회사에서 골라낸 1882가지 신앙이야기」
▣ 바로 지금이 중요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전 미국에 물건을 팔기위해서 출장을 다니며 지난 25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집회인도를 위하여 비행기를 탔는데 한 남자 승객이 술에 취하여 욕설을 하면서 지나가는 스튜디어스를 희롱 하는가하면, 자기가 조종사에게 지시해야 한다고 하며 조종석으로 가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승무원들이 그를 가까스로 붙들어 좌석에 앉혔는데,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바로 앞자리였습니다. 그 사람이 계속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앞좌석의 한 신사가 그에게 “여보시오. 선생, 당신 뒤에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앉아 계신 것도 모르오? 좀 조용히 하시오”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술 취한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향해 서서 “아, 당신이 그 유명한 설교자 빌리그래함 목사시오? 악수나 한 번 합시다. 나도 교회에 나가는데 당신의 설교에 은혜를 아주 많이 받고 있소.”라고 하더랍니다. 사람도 가지가지이고 은혜도 가지가지인가 봅니다. 우리는 은혜를 제대로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은혜가 풍성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느라고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습니다.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참된 은혜를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시제는 “여기 그리고 지금”입니다. 영어로 "here and now"입니다. 나중에 미루지 마십시오. 바로 지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멸시하지 맙시다. ⓒ 조동천 목사 미국생활 설교 예화집<우리동네 가나안 이야기> 중에서
▣ 죄짐 맡은 우리 구주 - 찬송가 369장 -
1.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 시험 걱정 모든 괴름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 조롱, 멸시, 모욕, 희롱, 비웃음에 관한 성경 말씀
0 (욥기 5: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0 (욥기 22:19)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0 (시편 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0 (시편 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0 (시편 40:15)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0 (시편 44: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0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0 (시편 52: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0 (시편 69:33)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0 (시편 79: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0 (시편 102:1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0 (시편 119:51)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0 (시편 123: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0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0 (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0 (잠언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0 (이사야 37:22)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0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0 (예레미야애가 1: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0 (말라기 2:9)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0 (마태복음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0 (마태복음 27: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0 (마태복음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0 (마태복음 27: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0 (마가복음 15: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0 (누가복음 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0 (누가복음 8: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0 (누가복음 22: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0 (누가복음 23: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0 (사도행전 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0 (고린도전서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0 (고린도전서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0 (에베소서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0 (히브리서 11: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0 (베드로후서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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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바라봄)
▣ 언덕을 올려다보며
이스라엘은 언덕이 많은 나라로, 어디에나 산과 동산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표현이 많은데, 이는 예루살렘이 언덕에 위치한 도시임을 의미합니다. 성경 전체에 이러한 언덕과 산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언덕을 향하면서 천국을 바라보라는 용기를 줍니다. 제자들은 하늘 아버지께로 승천하시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를 떠나셨던 때와 똑같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이 땅에 있는 모든 환경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의 관점은 변합니다. 비행기를 타 보면 땅에 대한 관점이 우리가 땅에 있을 때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달과 우주에서 보는 지구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던 모습과 아주 다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자신과 환경 대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 때에야 우리의 관점이 변화됩니다. 삶의 환경에 좌초되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안내를 받기 위해 언덕을 바라봅시다. 동쪽 하늘을 향해 우리 눈을 듭시다.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 「빌리 그래함의 365 영혼의 양식」/ 빌리 그래함
▣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라
흉한 몰골의 엄마와 함께 다니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십대소녀가 있었다. 하루는 엄마가 소녀를 데리고 슈퍼마켓에 갔다. 물건을 들고 계산대 앞에서 돈을 내밀자 흉한 팔을 본 점원이 기겁을 했다. 나중에 소녀는 엄마 때문에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며 엉엉 울었다. 그 말에 상처를 받은 엄마는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여태껏 꺼내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네가 아기였을 때 한 밤중에 우리 집에 불이 났단다. 특히 네 방은 완전히 지옥이었어. 나는 현관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혼자 사느니 차라리 너와 함께 죽기로 마음을 먹었지. 그래서 불길을 뚫고 들어가 너를 품에 안았어. 밖으로 나올 때는 두 팔이 고통이 극에 달했어. 하지만 상처하나 없이 멀쩡한 너를 본 순간, 모든 고통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어" 놀란 소녀는 새로운 눈으로 엄마를 보았다. 소녀는 부끄러움과 감사가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엄마의 손과 팔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도 악과 고통의 문제를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수많은 인간의 탄식을 성경에 기록하신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부르짖어도 좋다는 뜻이다. 단, 언제라도 그 분의 응답에 귀를 기울일 자세는 되어 있어야 한다. /랜디 알콘(악의 문제 바로알기)
▣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라!
북한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저는 어렸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땅에서 잠시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심한 매를 맞고 고통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 어린 나이에 "하나님, 저도 순교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넌 아직 아니야"라고 말씀하셨지요. 비록 어렸지만 제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매 맞아 죽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 땅에서 사는 70~80년은 영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땅에서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을 거역하며 사는 것보다 잠깐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잠시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과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것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어른들이 순교한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담임 목사님이던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셨습니다. 주 목사님은 한국 교회가 다 존경하고 본받고자 했던 분으로, 믿음의 표상이 되셨습니다. 주 목사님은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아셨으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실천하셨던 분입니다. [고난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 /김상복]
* 금언: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일이다. - 토마스 머튼
▣ 하나님을 바라보라!
본문: 빌립보서 4:4~ 7, 찬송 361장 (통 480장)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 중에서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감정이나 태도에 관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4절).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나요? 더구나 기쁘고 슬픈 게 내 마음대로 되는 문제도 아닌데 말입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라”고 말씀합니다(5절). 여기서 관용이란 다른 사람들의 정당성, 순수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 따라 가능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6절). 도대체 어떻게 세상을 살면서 염려없이 살라는 말씀인지 인간인 우리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도, 실천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불평과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의 본을 보였습니다(행 16: 19∼25). 보통사람 같으면 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감옥에 갇혀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고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로,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빌립보 교인들은 박해의 위협에 대해 걱정했지만, 이에 대해 바울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항상 기뻐하라, 모두에게 관용을 베풀어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은 단순히 감정조절을 잘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염려거리가 닥쳐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상황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내어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이해를 초월하여 훨씬 더 값지고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십니다. * 기도: 주님, 기쁨과 감사보다 짜증과 불평의 삶을 살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가정예배365
▣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찬송가 383장, <통> 433장)
1.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를 지은 주 여호와 나를 도와주시네 너의 발이 실족잖게 주가 깨어지키시며 택한 백성 항상 지켜 길이 보호하시네 2. 도우시는 하나님이 네게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방의 달이 너를 상치 않겠네 네게 화를 주지 않고 혼을 보호하시며 너의 출입 지금부터 영영 인도하시리
* 갈릴리 공동체 (http://blog.naver.com/allcome)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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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후회)
▣ 후회없는 삶을 살라
성경 말씀처럼 인생은 안개와 같이 짧다. 일을 미뤄 놓고 늑장을 부릴 만큼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 한 사람이 70년을 산다고 했을 경우 잠자는 데 20년, 일하는 데 24년, 먹는 데 6년, 놀고 치장하는 데 5년, 다른 사람이나 차를 기다리는 데 3년반, 신발 끈을 매는 데 반년 등이다. 후회 없이 시간을 쓰려면 꼭 생각해야 할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일하는 기쁨을 음미해야 한다. 일하는 것이 고통인 사람은 일단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행복할 수도 없다. 교회를 위한 봉사 역시 즐거운지 스스로에게 늘 물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심령을 기뻐하신다. 둘째, 단순함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살아간다. 지니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사람이 너무 많으면 그 속에서 갈등이 생긴다. 그 갈등은 나를 복잡하고 추하게 만든다. 너무 복잡한 사람은 상대방을 몹시 피곤하게 만든다. 주님 안에서 일하는 기쁨을 즐기며 단순함의 가치를 깨닫고 살아간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다. 인생이 안개와 같이 짧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 /최승일 목사(서울 상도교회)
▣ 노인의 탄식
한 소녀가 전도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소녀는 온통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할아버지와 함께 나누기 위하여 곧장 할아버지 방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집회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고 “할아버지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세요”라고 간곡한 권유도 잊지 않았습니다. 손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슬픔의 눈물이 흐리고 있었습니다. “제니야 나도 너처럼 전도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단다. 내가 12살 되던 해였지. 그때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단다. 그러나 난 너무나도 반항적이었고 젊었었기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지. ”나를 떠나 주시면 주님을 괴롭히지 않겠으니 제발 나를 부르지 마십시오‘라고, 제니야, 그 후로 나는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던 거란다.“ 기회는 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있는 기회를 너무도 소홀히 여겨 놓쳐 버리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 후회스러운 양심
회사 출장관계로 필리핀에 가게 되어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숙소 주변을 산책하고 있는데 손수레와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폐지 수거하는 사람인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손수레에는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타고 있었고, 앞에는 아이의 엄마가 먹을 만한 것이 있나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방금 먹고 버린 음식에서 먹을거리를 찾다니.. 손수레에 타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이의 눈에는 부끄러움이 한가득. 저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저의 존재가 그 아이를 비참하게 하는 것만 같아서요. 그런데 숙소에 들어와서 그 꼬마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안 되겠다!' 아직 있겠지 싶어서 다시 밖으로 나갔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두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동정이라도 좋으니, 따뜻한 한 끼 식사라도 대접할 것을.. 너무도 후회스러웠습니다. - 김광일 (새벽편지 스텝) -
뒤돌아보면 그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생각 난 그때가 행동할 때입니다.
[출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삽시다|작성자 갈릴리공동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