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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진 선교사 성경공부(대접, 접대)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13.06.22|조회수175 목록 댓글 0

한승진 선교사 성경공부(대접, 접대)

 

▣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

 

유대인들에게 이런 잠언이 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에 경외심을 표하는 것보다도 위대한 일이다.” 유대인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에 극도로 깊은 경외심을 표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접대가 얼마나 중대한 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기도와 예배로 부르는 교회의 종소리는 우리 귀에 아주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문의 초인종 소리도 실은 우리를 기도와 예배로 부르는 소리이다. 현관의 초인종이나 노크 소리는 우리를 기도로 부르는 소리이며 손님 대접의 성례로 초청하는 소리이다. 손님 대접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베품의 흐름이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로 계속되도록 이어주는 방법이다. 우리 마음에 감사가 사라지는 순간 이 거룩한 흐름은 거기서 중단되고 만다. 우리가 친철하고 공손한 몸가짐으로 사람들을 반겨주고 다정하게 대해줄 때 우리에게 흘러온 인생의 선물들은 다시 세상으로 흘러나가게 되며 그리하여 마침내 최초의 근원지로 되돌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흘러나와 일상 속의 베품이라는 흐름을 타고 세상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그 선물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사랑은 시원인 하나님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새로운 흐름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네가 선 곳은 어디든지 거룩한 곳이니라 / 에드워즈 헤이즈

 

▣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점원

 

어린이 대공원과 아차산 사이의 능동로 가구거리에 가구대리점을 하시는 최 집사가 20대 때 시골에서 상경하여 그 가구점 점원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지는데 바로 자기 점포 앞 대로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할머니 한 분이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최 집사는 할머니를 점포 안으로 모셔들여 따뜻한 차 한잔을 권했습니다. 그런 뒤 자신이 택시를 잡아서 할머니를 귀가시켰습니다. 며칠 후 전화를 받고서야 그 할머니가 재벌 회장의 장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회장은 이런 성실한 청년이 일하는 회사의 가구는 믿어도 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모든 사무용품을 이 회사 제품으로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게 됩니다.

/이철재 목사(서울성서교회)

 

▣ 뉴질랜드에서의 남자 대접

 

호주와 뉴질랜드는 남자들이 별로 대접받고 살지 못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이민을 떠나는 것을 보면, 몰라서 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뉴질랜드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에 구출하는 순서를 이렇게 잡는다. 제일 먼저 여자를 구출하고, 그 다음에 아이들, 그 다음에 개들, 그리고 마지막에 남자를 구출한다. 일전에 화재 현장에서 여자를 남겨두고, 남자가 먼저 뛰쳐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며칠 동안 텔리비전은 그 남자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세상에서 다시 보기 힘든 파렴치범으로 몰았다고 한다. 여자를 두고, 남자가 먼저 살겠다고 뛰쳐나오면, 살았으나 죽은 자같이 만들어 놓는 것이 뉴질랜드 사회이다. 여자나 아이는 이해하겠는데, 개는 또 뭔가? 한국이 더 인간미가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 대접하는 특권

 

성경은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과 함께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피를 나눈 형제도 사랑해야 하지만,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부자는 끼니를 잇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 때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천사 대접하듯이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삶의 양식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구역 예배를 통해 자기 집을 공개하는 것도 이런 훈련 중 하나가 됩니다. 동창회 같은 것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초대한 일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목회자를 초대하면 정성껏 식사를 대접할 것입니다. 거지도 그런 마음으로 대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대접할 가치가 없는, 대접할 대상이 아닌 분들을 예수님 모시듯이 잘 대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대인 관계의 독특성은 고난 받고 있고, 학대받고 있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 받는 형제들에 대한 깊은 긍휼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눈물 어린 긍휼을 기억하며, 지체를 대해 보십시오. 그 긍휼의 풍성함으로 사람을 대해 보십시오. 그 사람뿐 아니라 당신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 「예수님만 바라보면 행복해집니다」/ 하용조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찬송가 538장, <통> 327장)

 

1.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새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2. 정결케 되기를 원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생명수 마시기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3. 진실한 친구를 원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네 맘에 평안을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4. 즐거운 찬송을 하려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평안한 복지에 가려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후렴>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맘 문 다 열어 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 대접, 접대, 영접, 환영, 선대에 관한 성경 말씀

 

0 (여호수아 2: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0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0 (누가복음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0 (누가복음 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0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0 (디모데전서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0 (히브리서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주의: 본 자료를 무단 수집, 제작 배포 출판하면 저작권법에 저촉(위배)됩니다.

* 갈릴리 공동체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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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지식, 앎) 학문, 지식, 책

2012/10/1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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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지식, 앎)

 

하나님을 아는 지식

 

미국 시애틀에 세계적인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세상의 지식도 배웠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 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하는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가 세계 최대의 항공 회사인 보잉사를 설립한 윌리엄 에드워드 보잉입니다. 비행기는 엔진이 뒤에 달린 것과 엔진이 날개에 달린 것 두 종류가 있는데, 세계적으로 많이 쓰는 '보잉 747'은 엔진이 모두 날개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은 지혜로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개발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유대인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드리는 자녀로 길러야 합니다. 땅의 지식은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수단이 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영원한 삶의 목적과 의미, 인간의 가치까지도 새롭게 합니다. 땅의 지식은 눈을 아래로 뜨게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눈을 위로 뜨게 합니다. 삶의 새로운 힘과 능력, 하늘의 지혜를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말씀보다 귀한 것은 없네」/ 김삼환

 

아는 자

 

1.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우매자이다. 그러면 그를 피하라

2. 알지 못하면서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자는 어린아이다 그런 사람은 가르치라

3. 알면서도 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잠자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깨우라

4. 알면서 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그러면 그의 뒤를 따라 가라

/빛의 사자

 

용도를 모를 뿐

 

본문 : 히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중세시대 사냥을 즐기는 한 귀족이 친구로부터 사냥개를 선물 받았습니다. 친구는 세상에 둘도 없는 명견이니 부디 잘 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귀족은 당당히 사냥개들을 데리고 토끼 사냥엘 나갔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말과는 달리 개들은 토끼를 몰아오지도 않고, 귀족이 총을 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졸졸 쫓아만 다녔습니다. 개들이 아직 적응이 안 되서 그런 줄 알고 며칠 뒤 귀족은 이번엔 새를 사냥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새를 사냥할 때도 개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총에 맞은 새를 물어오지도 않고, 새를 쫓지도 않았으며 그저 주인만 따라다닐 뿐이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가 귀족을 찾아와 개가 잘 있냐며 묻자 귀족은 화를 내며 대답했습니다.

“그 게을러빠진 사냥개들 말인가? 너무나 훌륭해서 토끼도 잡지 못하고, 새도 몰지 못하더군. 화가 나서 사냥터에서 다시 데리고 들어오지도 않았네, 살아있는지도 잘 모르겠군.”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매우 놀랐습니다.

“이보게, 그 개들은 맹수와 사냥을 위해 훈련된 개들이라네. 그런데 버려버렸단 말인가?”

귀족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고, 쓸모없는 물건은 없습니다. 아직 제대로 사용될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나의 가능성을 인정하듯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도 인정하십시오,

* 기도: 주님! 제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도 겸손한 자세를 갖게 하소서!

* 묵상: 다른 사람의 꿈과 포부를 폄하하지 마십시오.

/김장환 목사, 제공 : 나침반출판사

 

예수 더 알기 원함은 (찬송가 453장, <통> 506장)

 

1.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2.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3.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우니

그 말씀 한절 한절이 내맘에 교훈 되도다

4. 예수가 계신 보좌는 영광에 둘려 있도다

평화의 왕이 오시니 그 나라 왕성하도다

<후렴>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 지식, 앎에 관한 성경 말씀

 

0 (시편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0 (요한복음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 갈릴리 공동체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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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담대하라 평안, 두려움, 불안

2012/10/10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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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담대하라

 

본문: 수 1:9- 18, 찬송가 347장, <통> 382장

 

아프리카에는 ‘뱀잡이수리’ 라는 아주 특이한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평소에 아주 잘 날아다니다가도 어느 순간 고통을 감지하거나 위험한 것을 느끼게 되면 갑자기 날 수 있는 능력을 망각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 수 있는 능력을 망각해버린 ‘뱀잡이수리’는 땅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끝내는 목숨을 잃어버리거나 다치게 되는 특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 ‘뱀잡이수리’와 같은 특징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처음에는 상당한 훈련에 의해서 의지적으로라도 조금씩 기도를 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지만, 막상 기도가 필요한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는 기도를 잊어버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거나 방황하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평소 기도의 습관을 살려 위기 때에 백 퍼센트 발휘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십시다. 비록 심령은 연약하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강하고 담대한 성도가 되십시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27:14)

 

대도시를 조금 벗어난 지역에 가면 양봉을 하는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벌통을 갖다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그 벌통 주위에서 있다가 벌이 옷 속에 들어가거나 몸에 붙으면 깜짝 놀라 날뛰며 벌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 때는 거의 언제나 벌에 쏘여 퉁퉁 붓곤 합니다. 그런데 양봉을 하는 아저씨가 벌통을 손질하거나 꿀을 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간혹 얼굴에 망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손이나 팔에 벌이 달라붙어도 그저 그대로 둔 채로 일을 다 마칩니다. 그러면서도 거의 벌에 쏘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조금 잘 되거나 자기에게 조금 손해가 된다 싶으면 앞장서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그런 일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듯 의연하게 대처하며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예외 없이 두 경우의 결말은 참고 기다린 사람 쪽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에는 그 일을 하실 분이 하나님뿐이시라는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

우리는 배우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기도 응답이 오기를 기다리고, 반항적인 자녀가 철들기를 기다리고, 일자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건강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갈등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경제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곧 인내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인내를 배웁니다.

믿음의 영웅들의 명단을 보면, 잘 기다린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 왕은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서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기에 앞서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으며, 다시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보냈습니다. 욥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노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난 후에야 특별한 아이인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석방되기를 기다리면서 편지들을 썼는데, 그것이 오늘날 신약 성경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역시, 세상 죄를 대속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18)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6-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경쟁적인 세상입니다.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이나 독서실에서 씨름을 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취직을 하려고 하면 너무나 경쟁이 치열해 좀처럼 좋은 직장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옛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가졌던 심정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아무런 힘과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높은 장벽을 쌓고 추호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극히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그의 길이 평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전임자 모세는 기적의 지팡이가 있었고 홍해 바다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한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는 그런 능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더 이상 모세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여호수아를 더 능력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직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만 붙들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모든 적을 이기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 읽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해야 하고 직장인들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 앞에서 모든 문제를 미리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우리는 훨씬 빨리, 그리고 쉽게 성공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생각대로 믿는 것이 좌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그 대신 너무 영적으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은 우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 기가 죽게 되어 있고 자신감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네 발로 밟는 땅은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 겁을 먹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시도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움직이고 땅을 밟는 자만이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이루실 때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며,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누구나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쓰실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에 쓰임을 받게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는 이 귀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상고해나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로 준비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들어가 큰 민족으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모르는 왕조가 들어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범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침내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광야 40년을 그렇게 방황하는 동안 애굽에서 나오던 당시에 20세 이상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출애굽 2세대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고 광야 40년 동안 인도했던 모세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엄청난 과업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권위 있는 지도자와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의 철저한 헌신,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바로 지도자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절)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분명하게 제시하며 그들을 권위 있게 이끌어갈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모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헌신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어서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고, 가나안 정복이라는 막중한 과업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부담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때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여호수아에게 와서 그의 권위에 절대복종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여호수아를 격려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명령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수1:17-18) 여호수아 생전에 그에게 도전하거나 거역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정복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이들의 전적인 순종과 헌신이 가나안 정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세 번째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지도자가 뛰어나고 백성들이 잘 따른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신 말씀이 바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네 평생에 너를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 5)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과 함께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는 결코 굴하지 않는 강력한 승리에의 확신과 용맹성을 가지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직접 싸워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께서 싸우신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죽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간단한 말은 많은 내용과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본문은 모세를 ‘여호와의 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수1: 1)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할 운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가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던 시기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태어난 아들이 범상치 않은 아이인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서 길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상자에 아이를 담아 나일강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러 왔다가 모세를 발견하고 자기 아들로 삼아 길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애굽의 왕실에서 왕자들과 함께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학문과 무예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 왕실에서 그렇게 준비되었습니다.

그는 40세가 되었을 때 자기 동족을 돌아보기 위해 나갔다가, 자기 동족을 때리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애굽의 촉망 받던 왕자가 졸지에 살인자, 도망자가 되어 낯설고 황량한 광야에 던져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를 준비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된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으로 다듬어졌습니다. 그가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만 들고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분노하며 날뛰는 절대군주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열 가지 재앙이 내린 후에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냈습니다. 80세 된 노인 모세가 애굽의 절대군주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간 후 바로는 다시 마음이 강퍅해져서 기병대를 동원하여 홍해 앞에서 멈추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갔습니다.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광야에서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아우성을 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손을 내밀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 속에 난 마른 땅으로 홍해를 건넜고,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는 모두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광야는 마실 물이나 먹을 양식을 구할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만 있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모세는 써서 먹을 수 없는 물도 고쳤으며,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 40년 동안 양식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진멸을 당할 위기에서도,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용서를 받아냈습니다. 아무 대책이 없는 광야에서 질병이 돌고 독사에 물려 다 죽을 수밖에 없었을 때도,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모세는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는 대선지자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모세만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그 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신34:10-12)

모세는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모세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과 손실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할 너무나도 중요한 시기에 모세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바로 이러한 엄청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모세를 데려가셨을까요? 가나안 정복 전쟁은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두려운 큰일이었습니다. 그나마 모세가 죽지 않았더라면 훨씬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정복 전쟁까지 감당하고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이 큰일을 앞두고 모세를 죽게 하셨을까요? 모세가 그토록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세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이었습니다. 모세가 행했던 엄청난 일들은 모세가 자신의 능력으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복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모세가 죽었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른 사람, 즉 여호수아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사명과 임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고 광야에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새 시대가 밝아왔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새 시대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가나안 정복이라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교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정복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감당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감당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을 행하시고자 하십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이 귀하고 위대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되겠습니까? 오늘 가나안을 정복할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기뻐하시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당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을 붙드시고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감당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새 시대에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함께 감당해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 것을 예비해놓으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렇게만 하면 어떤 일도 이길 수 있으며, 아무리 크고 어려운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다시금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막중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떨며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평생 함께 하실 것이며 승리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 10)

 

오늘 본문은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를 ‘모세의 수종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본래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이었습니다.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나치기 쉬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종으로 섬기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40년 동안 종노릇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여호수아는 지도자로 준비되어갔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여호수아를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동안 여호수아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요셉도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에 노예로, 그리고 감옥에서 죄수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사울 왕에게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지도자가 되기 전에 연단의 과정을 충실하게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작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일을 맡기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1) 당신은 지금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하는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1: 2)

모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충격과 손실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슬퍼하며 낙심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 ‘이제 일어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죽음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부모나 배우자, 또는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슬퍼하며 실망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나 배우자의 죽음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슬픔을 털고 일어나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느 집사님에게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자녀들에게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에 전념하며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자녀들이 떠나가고 나면 어머니들이 매우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고 감당해나가면 더 행복하고 보람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오늘 내가 박차고 일어나야 할 상황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새로운 사명은 무엇입니까?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3절)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밟는 곳은 모두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싸움도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땅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워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얻는 방법은 나가서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며 최선을 다할 때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해도 가만히 있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일어나 그 땅을 발로 밟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확실하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5절)

이 약속의 말씀은 곧 승리에 대한 보장입니다. 앞으로 여호수아는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적들이 여호수아를 공격해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여호수아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평생에 결코 그를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 계셔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대상18:13)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했는데,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이것이 없거나 흔들릴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고 무슨 일에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말씀은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1:6)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은 7절과 9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고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은 타고 나는 것도 아니고, 훈련을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늘 마음이 불안해지고 두려움과 염려에 시달립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일들을 가장 선하게 인도해주실 것을 확실히 믿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흔들리며 불안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나를 짓눌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영과 육이 지쳐 무력해지고 불안감이 엄습해옵니다. 나는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고 은혜를 간구하자 마음이 다시 평안해집니다.

이것은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며 새롭게 결단합니다. 그러면 평안함과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문제들에 집중하게 만들고, 거기서 다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흔들립니다. 아마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

믿음으로 굳게 서서 살아가기로 결단했는데 또 다시 흔들리고 있습니까? 문제들과 씨름하는 동안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까? 또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강하고 담대하라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선하게 인도해주시는 것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함으로 강하고 담대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제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는 막중한 일을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평생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한 가지 명령하셨습니다. 앞으로 여호수아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이 일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7, 8절을 보십시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 말씀을 지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늘 치우치는 존재입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치우치고 힘들면 힘든 대로 치우칩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치우치고 기쁘면 기쁜 대로 치우칩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치우치고 부하면 부한 대로 치우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순종하라는 말씀은 외면하고 복 주시겠다는 약속만 붙잡으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치우치는 것들입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온전히 순종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치우지지 말고 순종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싸우신 전쟁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날마다 순간마다 총사령관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작전 명령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매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시를 받으려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을 평탄하게 하시며 형통하게 해주십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미지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길을 가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나 당황하며 넘어집니다. 이러한 인생길을 안심하고 안전하게 걸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길에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늘 묵상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길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됩니다.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새 시대의 새 사명을 안고 두려운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7-9)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31: 6- 8)

이 말씀을 굳게 붙잡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 31)

우리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가르치시고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중에 하나가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미28:2)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에게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무장하고 순교자적인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과 충성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에서 끝까지 강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힘이요 반석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에게도 다윗처럼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주옵소서. 어떤 환란과 시련과 핍박과 시험이 몰려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태연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환경보다 더 크시고 강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옵소서. 세상의 어떤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주셔서 위기의 순간에도 전적으로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이 경쟁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너무 기가 죽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씩 실천할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으로 나의 구원을 삼게 하소서.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빛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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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기도 셩경의 인물

2012/10/10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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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기도

 

본문: 삼상 2: 1- 10

 

오늘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의 어머니이며, 기도의 여인 한나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한나라는 이름의 뜻은 '은혜' '은총' '자비' 또는 ‘은혜로운’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나의 남편은 엘가나인데, 그는 레위 지파로 고핫 자손이었으며 에브라임 산지에서 살았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서도 고핫 자손은 특별히 성막일에 직접 참여하는 특수한 제사직을 감당하는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는 남편 엘가나와 함께 해마다 실로에 있는 성막을 찾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용모가 수려하고 마음이 착하여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습니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삼상1:4-6) 그리고 아들이 없으므로 크게 슬퍼할 때 그 남편 엘가나가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고 위로한 것을 보면 두 부부 사이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엘가나의 다른 아내 브닌나에게 멸시를 받고 자녀문제로 많은 상처를 받았어도 그를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영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금식하며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칠 것을 서원하면서 정성껏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모습이 술에 취한 자 같았다는 표현을 보면 얼마나 기도에 몰입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고 한나는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으며, 아들을 얻자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 그가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한나의 이러한 영적 처세와 찬송기도에 하나님이 복주셔서 세 아들과 두 딸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실로 한나는 기도의 어머니였습니다.

사무엘상1:10-11에 보면 한나의 가정은 아주 복잡한 가정입니다. 문제가 많은 가정입니다. 한나의 가정은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 이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부인이 한나인데 한나는 아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브닌나라는 후처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식을 쑥쑥 잘 낳았습니다. 매년 실로에 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제사를 드릴 때에 오늘 본문 1장에 보니 한나에게는 브닌나와 그 아이들보다 갑절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5절에 보니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록 한나는 아이가 없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린 후 제물을 나누어줄 때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랑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까 임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브닌나가 볼 때는 아이도 못 낳는 한나를 남편이 갑절이나 사랑하니 속이 상해서 한나를 달달 볶았습니다. 한나를 심히 격분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년 똑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7절에 보면 한나가 울고 먹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약했던 모양입니다. 똑같이 싸우지 않고 울고 밥도 먹지 않았습니다. 8절에 보면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고 합니다. 남편이 좀 맹꽁이입니다. 당연히 속상해서 슬프고 괴로워서 울 텐데 이렇게 말해서 되겠습니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나만 있으면 되지 않으냐고 하는데 이것이 통하는 말입니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남편이 위로해주고 좋은 말을 아무리 해도 한나의 고통과 슬픔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마음이 괴로워서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 가지 문제로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신 분 계십니까? 한나처럼 문제를 기도로 푸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은 선택을 가장 잘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해결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큰 소리쳐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9장 23절에 보면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아멘!

예레미아 17장 5-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이렇게 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우리가 문제를 가지고 찾아가서 자꾸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면 아주 귀찮아합니다. 한번 와도 귀찮은데 날마다 해결해달라고 하면 자식이라도 귀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그 도시에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한 재판장이 있는데 날마다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그 재판장은 얼마 동안은 듣지 아니하다가 너무 자주 와서 졸라대니까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원한을 풀어주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하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교만하고 완악한 재판장이라 할지라도 계속 가서 졸라대니까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마음을 가졌는데 하물며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를 안고 살지 마십시오. 이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 간 것처럼 하나님 앞에 졸라대세요. 이 마지막 때는 사람들이 기도할 생각을 안 하고 인간의 방법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하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믿음 없는 짓을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문제를 하나님에게 나아가 풀어야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의 말씀은 인자가 올 때에 이 과부와 같은 믿음을 보겠느냐 입니다. 과부가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문 앞에 서서 재판장이 나오고 들어갈 때마다 붙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와 매달리는 이런 믿음을 가진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합니다. 사람에게는 찾아가면 귀찮아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믿음으로 보십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은혜 받게 됩니다. 그러면 큰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그리고 체험적인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죽고 싶을 때 죽을 생각 하지마시고 금식기도 하다가 죽을 생각하세요. 죽어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가 죽을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복을 받습니다. 약을 찾지 마시고 낭떠러지에 가서 떨어져 죽을 생각하지 마시고 금식기도 하십시오. 사무엘의 어머니이며 기도의 여인 한나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1. 자식이 없어 슬픈 여인 사사 시대 말기 레위 족속으로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엘가나’란 사람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첫 번째 아내가 ‘한나’이고 두 번째로 맞아들인 아내가 ‘브닌나’였습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여인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더군다나 한나는 그 일로 인해 후실(後室)된 브닌나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어진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위로해 주며 브닌나보다 그녀를 더욱 사랑했지만 한나는 괴롭고 슬픈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울고 또 울었습니다.2. 한나의 괴로움

매년 그 가정은 실로에 있는 성막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실로에 가게 될 때도 한나는 둘째 아내에게 조롱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삼상1:6)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우대하였고 사랑하였습니다. 자녀가 없는 유대여인들의 고민은 우리의 문화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나는 성전에 가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성전 기둥 옆에 앉아 있는 엘리 제사장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녀의 괴로움은 본문 15절의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나는 잉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던 여자로서 성경 안에서는 네 번째로 나타난 훌륭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넷 중에서도 그녀는 기도를 많이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여인들과 비교해 봅시다.1) 사라: 사라는 늙어서 아이를 갖게 된다는 말을 들을 때에 웃었습니다.2) 리브가: 리브가는 잉태치 못하여 이삭이 그녀를 위하여 자식을 낳도록 기도했습니다. 결혼 후 20년 만에 그녀는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3) 라헬: 라헬은 잉태치 못하였으므로 부르짖기를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면 죽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애통하면서 그녀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아이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녀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취한 첫 번째 단계는 그녀가 다른 곳에 가지 아니하고 성전에 간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의 짐을 주님께 가져가서 거기에 내려놓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3. 한나의 하자(瑕疵) - 사무엘상 1장1∼5절

평범하지 못한 삶은 본인에게 많은 아픔을 줍니다. 결혼했는데 자녀가 없다? 그 아픔을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아픔이 있었습니다. 자식이 있는 브닌나의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아픔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는 아픔이 있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아픔이 있습니다. 삶의 문제, 아픔은 하자(瑕疵)입니다. 하자는 건물의 벽과 기둥에 균열이 생기고, 페인트가 벗겨지고, 물이 새는, 흠이나 결함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아픔, 문제, 부족함이 있습니다. 삶에 이런 하자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하자가 있다면, 하자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자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결핍, 고통, 아픔, 고난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하자를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인생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자 없는 인생은 채워진 것은 잊고, 안 채워진 것 때문에 힘들게 살아갑니다. 이런 인생은 영적으로 둔해져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인생입니다. 인간은 하자가 없으면 홀로 자기 고집대로 살아갑니다. 자기 고집대로 사는 인생은 망합니다. 그러나 하자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찾고 동행하게 됩니다. 풍요 가운데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보다 하자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 축복 받은 인생입니다. 하자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한나는 아들이 없다는 것 외에는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없는 것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고 나에게 없는 것 때문에 고민하지 마십시오. 열등감 갖지 말고 원망,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자 보수하듯 없는 것을 장점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땅 위에는 인생의 하자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도 없고, 해결할 능력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한나에게는 사랑해 주는 좋은 남편이 있었습니다(5절). 그러나 그 남편의 위로도 하자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8절). 삶의 하자는 해결되는 것처럼 보여도 한시적이며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생의 하자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하자를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의 아픔을 통해 아들 사무엘을 주시고,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을 신정국가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에게 기름 부어 다윗 왕국을 건설하셨습니다. 한 개인의 하자를 통해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일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하자를 통해서도 위대한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하자를 통해 미래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십시오. 미래를 통해 현재를 꿈꾸십시오. 한나는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사무엘이라는 보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이 아픔과 고난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언제나 믿음이 있는 곳을 찾아가셔서 일하셨습니다. 하자는 위장하고 찾아오는 축복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시에 찔리면서도 밤송이를 벗기면 달콤한 밤알을 맛볼 수 있습니다.

 

4. 한나의 기도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한나는 나이가 넘도록 자식이 없었으므로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제사드릴 때에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니다’라고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유대인은 무자함을 일종의 저주로 비관했지만 한나는 누구를 원망치 않고 하나님께 하소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엘가나는 한나를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라고 위로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의 기도하는 것을 보고 술에 취한 줄 오해하였지만 한나의 중심 소원을 들은 후 그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응답하시길 소원하였습니다. 한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져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으며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아들을 바쳤던 것입니다(삼상1장). 사무엘은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한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는 우리의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위력을 믿었던 한나는 취한 것같은 모습으로 기도했습니다. 간절한 그녀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절박함이 없이는 간절한 기도가 나올 수 없고 간절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나의 애통함이 기도는 모든 이의 기도의 본이 됩니다. 둘째로 한나의 사건 중에 나타난 교훈은 하나님께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없는 한나를 업신여기고 앝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상황을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한나에게 남편의 사랑과 더불어 자식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언제나 상황을 뜻대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서 나타납니다. 강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께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맙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하나님은 자기 지혜와 용맹과 부함을 자랑하는 자를 물리치신다.

‘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9:22, 23)

본문 삼상2장 3- 5절을 읽겠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세 번째로 한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의 일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는 대신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위한 신앙적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네 번째로 한나를 통해 나타난 것은 예언적 기도입니다.(삼상2:1-10) 이 찬미는 신약의 마리아의 찬가(눅 1:46-55)와 비교할 만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한나가 아들을 얻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도한 것이 메시아적 예언이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도문에 나타난 대로 야훼로 인해 기름부음 받은 왕의 모습입니다. 이 메시아적 예언은 바로 이스라엘을 이끌 사무엘을 얻게 된 한나가 세상을 구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한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구세주의 모형을 나타나셨고 사무엘을 통한 구원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사용해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도태도와 하나님의 약자보호, 구원사역을 나타내셨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삼상 1장 12절에 보니 한나가 오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한두 번 짧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응답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고 하면 기도의 분량을 채워야합니다. 우리가 기도해보면 하나님께서 그 날로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를 통하여 인류의 역사에 기사와 이적을 행하십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하여 갈멜산 상에 불이 내렸고, 사무엘의 기도로 불레셋 군대가 전멸 당하였으며,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으며, 앗수르 나라의 군대 18만 5천명을 하룻밤 새에 전멸시켰습니다.

초대교회의 120명 문도들의 기도로 성령이 임하였고, 베드로의 기도에 옥문이 열렸습니다. 야곱은 루스 광야에서 혈혈단신 피난길을 가다가 돌 단 쌓고 기도하여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 2:1) 통일부 양영식 차관의 간증입니다. 베이징 남북차관급회담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에게 '싸움닭'으로 널리 알려진 북한의 박영수 단장과 굳게 손을 잡은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띄며 입을 열었습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려 가뭄도 해소되고 회담도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자신을 기독교 신자라 설명하고 한국의 목사님과 크리스천 이산가족들이 북한과의 만남을 위해 기도했었다는 말도 함께 설명해 주었습니다. 북한의 가뭄을 걱정해 찬송가를 인용한 그의 인사말에 회담장 분위기는 한결 평안해졌습니다. 또 기독인들 사이에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북한 시민들과 북한 기독인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은근슬쩍 신앙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냅니다. 그것도 아주 지혜로운 전도로 말입니다. 그의 신앙은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것인데 어머니의 기도소리를 인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는 한결같이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해방에서 통일까지 말입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지만 노모의 기도는 원대했고 양차관의 진로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양차관은 자신이 통일부에서 일하게 된 것이 바로 어머니의 기도 덕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기도소리는 조금씩 쌓여 산을 이루게 되고 자녀가 그 산을 오르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목사 부인이었는데 감리교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다섯살 때 수산나는 우리 나라처럼 국어 교과서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창세기를 펴놓고 글자 하나하나를 가르쳤고 문자를 가르쳤고 성경을 가르쳐서 세 가지를 한꺼번에 공부시켰습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성경을 다섯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배웠습니다. 열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수산나는 그 자녀들을 혼자 다 키우면서 저녁마다 돌아가며 한명씩 데리고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목요일 저녁에 어머니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열일곱 자녀를 다 키워서 챨스 웨슬레와 요한 웨슬레 때문에 프랑스처럼 유혈혁명도 나지 않고 영국에 영적 부흥이 일어난 것을 역사가를 통해서 우리는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라든가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등 많은 훌륭한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무디는 “내가 성취한 것 가운데 위대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나의 어머니의 덕택이고 은혜이다”라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모세를 만들어내고 바울을 만들어내고 링컨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교육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우리도 준비하고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로 지원하시는 어머니가 계시다면 그 자녀는 천하를 다 얻은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에 힘입어 집회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가끔 어머니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가 보살이었으면 나도 보살이 되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무당이었다면 나도 무당이 되었을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나도 그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아무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할 것입니다. 한 가정에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신다면 그 가정은 분명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기도로서 막나니 같은 아들을 회개시켜 성자를 만들었고,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기도로써 아들들을 양육시켰습니다. 모든 신앙 운동은 기도로서 시작이 되는 것이며 이 기도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에 큰 기사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한나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그 한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즉 가장 미약한 잉태하지 못한 여인의 기도를 통해 사무엘과 다윗 왕이 등장하며 이스라엘은 새로운 민족으로 태어납니다.(삼상16: 1- 13)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 7)

기도하는 사람의 체험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고 말씀하셨습니다.

 

5. 한나의 서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신23:21) 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 하니라’(삼상1: 25- 28)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2) 한나는 서원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본문 삼상2: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 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브닌나로부터 받은 박해와 모욕 때문에 아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큰 기도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서 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하였으니 얼마나 위대한 기도입니까?

이와 같은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삼상 1장 20절 말씀에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고 하였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축복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는 눈물과 고통과 괴롬이 아침 안개의 사라짐 같이 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한나는 서원 한대로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약속 한대로 하나님께 서원 한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이 젖을 뗀 후에 아기를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감사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수소 세 마리와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함께 드렸습니다. 아들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한나가 간절한 기도로 아들을 낳은 것이야말로 지금까지 괴롭힘을 당한 브닌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한나는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한나의 관심은 인간에 대한 자랑이나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과의 약속대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입니다. 그 아들이 성장하여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의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는 신앙이 위대하다고 본다면 한나의 신앙도 그의 못지않은 위대한 신앙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아들을 하나님께 맡겨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겠다는 의지의 결단입니다. 그로 인하여 후에 사무엘은 훌륭한 선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려고 하나님께 맡긴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 받게 됩니다. 이에 반대로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지 않아서 패역한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로 죽고 말았습니다.

6. 자식을 얻은 은총의 여인 자식이 없어 슬픈 나날을 보냈지만 한나는 그런 문제로 브닌나와 다투거나 남편을 못살게 굴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괴로운 마음을 토로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식을 얻게 되면 그를 하나님께 다시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한나를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은총’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한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토록 바라던 자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여호와께 구함’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무엘’입니다.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삼상1:20)7. 자식을 바친 신앙의 여인 한나는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 구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기도 중에 사무엘을 여호와께 바치기로 서원하였습니다.(23절) 한나는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 어린 사무엘을 데려갔습니다. 참으로 어렵게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지만 한나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기르다 사무엘이 젖을 떼게 되자 그를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가 약속대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다시 말해 성전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제사장의 수하에 사무엘을 맡깁니다. 하나님께 사무엘을 바칠 때 한나는 망설이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격에 찬 심령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기리는 ‘한나의 찬송’을 아름답게 노래했습니다(삼상 2:1∼10).

 

8. 한나의 믿음(사무엘상 1 : 9 - 11)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 「한나」 라는 여인은 참으로 신앙적인 여인이며 고매한 품격을 갖춘 모범적인 여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딸의 이름을 지을 때에 「한나」 라는 이름을 많이 짓는 것을 볼 수가 있고 또 선교회 명칭도 한나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나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저 추상적인 대답만 할 뿐 자세히 알지를 못합니다. 한나에 대한 성경을 읽을 때에 참으로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고 또한 옛날에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고통당하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에브라임 산지에 엘가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엘가나의 가정은 레위족속으로 신앙의 가정이요 부유한 가정이었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여인은 한나(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였고, 또 다른 여인은 브닌나(보물이라는 뜻) 이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으나 본처인 한나는 무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엘가나는 무자한 한나를 더 사랑하였고 브닌나는 이를 시기하여 한나를 격동시켰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인이 자식이 없고 무자하면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가나의 사랑을 독차지한 한나를 향하여 “하나님의 저주받은 여자” 라고 브닌나가 조롱을 하였습니다. 한나는 본처로서 첩에게 억울한 괴롬을 당한 것입니다. 감정을 가진 여인으로서 이와 같은 멸시와 고통을 당하고 어찌 그의 마음이 편하였겠습니까. 원통하여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신을 괴롭히는 브닌나와 다투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한나는 자신의 무자함으로 원통함을 인간들에게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기에 첩 브닌나로부터 어떤 억울함과 괴롬을 당해도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사랑하고 친해도 자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존경받을 만하고 모범이 되는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나야말로 가장 존경받아야 할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한나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오늘의 많은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존경을 받는 여인이 되었을까요? 말씀을 통해서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한나는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한나는 고통을 통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우리들의 신앙과 믿음을 돈독케 하며 오르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 주는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때때로 부딪치는 고난과 고통은 그 일생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사는 동안에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역경은 우리들에게 큰 의미를 주게 됩니다. 고통도 슬픔도 우리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채찍이 됩니다. 채찍을 맞으면 말은 달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들을 연단시키려고 슬픔의 구덩이에 빠지게도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은 거의 고통을 거쳐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눈물 나게 하는 것, 답답한 것들이 우리 주위에 있을 때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렇게도 한나를 괴롭히는 브닌나라는 여자는 이 성경에서는 사탄의 모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나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갔을 때에 더욱 심한 방해와 충동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하고, 은혜 받고 하나님께 위로 받기를 원하는 때에 브닌나는 더욱 방해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의 평화와 기쁨을 방해하는 원수 마귀는 우리가 은혜 받고 하는 때에 더욱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럴 때에 한나와 같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나는 고통당하는 여자입니다. 나는 심정이 슬픈 여자입니다’ 라고 기도하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한나가 당하는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 한나를 위로하며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하면서 위로하였지만 남편의 위로만으로는 감당 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로써 위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목숨을 걸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였던지 엘리 제사장이 보기에 한나가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할 만큼 열정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자기의 체면이나 입장보다는 하나님만을 생각한 기도입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계속하여 잘 돌보았습니다.

(삼상2:18-19)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하나님께 드렸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나는 어린 사무엘에게 세마포 에봇을 정성껏 지어다가 입히곤 하였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예복입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아무런 옷이나 입지 않고 제사장으로서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일 사람은 어려서부터 신앙 훈련과 기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나는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신앙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잘 보살피고 돌보았습니다.

6) 하나님은 사무엘을 바친 한나에게 3남 2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삼상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 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한 아들을 드렸더니 하나님은 다섯을 더 주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도 없어서 한이 맺힌 한나였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하나를 낳았을 때에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니까 하나님은 다섯 배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5병 2어를 가지고 5천 배의 기적이 일어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 하시니까 하나도 못 낳던 한나가 여섯씩이나 낳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비단 자식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를 드리면 30배 60배 100배로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7) 이렇게 드린 사무엘이 장성하여 후에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큰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손의 축복을 말합니다.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후손이 잘되는 축복입니다.

(신28: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이삭과 야곱을 복 주셨다고 하였고, 다윗을 기억하시사 그의 아들 솔로몬이 범죄 하였어도 그 후대에 가서야 죗값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 성도들도 한나와 같이 믿음으로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한나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한나는 자신의 괴롬과 고통을 오직 하나님께 호소하여서 응답 받고 축복 받은 여인입니다. 그가 이와 같은 축복 받은 여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피눈물 나는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괴롬을 하나님께 아뢰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의 후손들이 축복 받는 모범적인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마음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마음의 괴로움이 무엇입니까? 그 고통과 괴롬을 한나와 같이 하나님께 아뢰어 모든 문제 해결 받고 우리들을 억누르는 근심과 염려와 걱정은 아침 안개의 사라짐 같이 사라져 아침 해와 같이 기쁨이 샘솟는 일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9. 하나님을 향한 한나의 찬양

한나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본문 2:1-11절의 말씀은 한나의 감사 찬송입니다. 감사에는 물질로 드리는 감사가 있지만 찬송으로 하는 감사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입에서는 항상 감사의 찬송이 넘쳐야 합니다.

(시69:30-31)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히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한나는 (1) 하나님의 순결하심을 찬양하였고

(2)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찬양하였고

(3)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찬양하였고

(4) 조금도 흠이 없으신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녀는 사무엘을 엘리에게 두고 떠나기 전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찬미의 예표로 불리워지는 승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상 2: 1- 10절과 누가복음 1: 46- 53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위의 두 기도는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어머니 한나의 서원 기도로 태어나고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바쳐진 사무엘은 장차 자라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최초의 선지자가 되어 나라의 기틀을 올바로 세웁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은 한나에게서 사무엘을 곱게 넘겨받아 그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키우셨습니다. 그뿐일까요. 하나님은 한나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사무엘 말고도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도록 그 태(胎)를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한나는 바침으로써 더욱 풍성히 얻은 신앙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김영진이란 분은 한나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소서옛적 사사 시대 말기 에브라임 산지에/슬픈 여인 있었네/늦도록 자식 없어/후실(後室) 브닌나에게 고통과 멸시당했던/한나 있었네/남편 엘가나의 애틋한 사랑도 그녀에겐 힘이 되지 못했구나하나님께 기도했네/슬픔과 고통 가득 안고/성전에 올라가/한나는/눈물로써 하나님께 기도했네/“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소서”한나의 눈물 기도/하나님께 상달되어/드디어 하나님의 은총 입었네/바라고 바라던 아들 얻었어라/“여호와께 간구했다”는 이름의/사무엘얼마나 품에 안고 싶었을까/하지만 한나는 그 아들을 바쳤네/서원 기도한 대로/하나님께 다시 사무엘을 바쳤네/사무엘을 돌려받은 하나님/한나의 태(胎) 활짝 열어/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구나하나님의 손에서 길러진 사무엘,/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되어/이스라엘의 첫 선지자 되어/이스라엘을 올바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네기도로써 얻고/다시 하나님께 바침으로 더욱 커진 한나의 신앙,/메마른 우리네 가슴 흠뻑 적셔주네

10. 이번에는 기도의 어머니 한나를 통하여 우리가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정리하여 살펴봅시다.1) 한나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를 드렸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잘 믿는 듯하다가도 조그만 시련만 닥쳐와도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잃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성도인 우리는 한나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분을 의뢰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고통 중에도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시118:5) 그리고 한나와 같은 서원 기도는 신속하게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하는 정성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2) 이스라엘의 암흑기에 잉태하지 못하는 한나를 통해서 사무엘을 주신 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 간구하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3)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민족적, 신앙적 지도자의 탄생은 그 어머니 한나의 희생적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헌신은 그 당시는 희생과 아픔을 수반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복의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원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 헌신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4) 한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을 영적인 방법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피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합시다.5) 한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선물로 받은 후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이후에도 한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정에 제단을 쌓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될 것들이 상당히 많은데도 감사하지 않고 스쳐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한나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원숙한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대상16:34) 6) 한나는 사무엘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하신 일에 헌신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한나의 인격이 얼마나 참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신앙 자세를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7) 우리가 서원하여 주께 드리면 하나님은 확대하셔서 우리 위에 더 풍성한 축복을 주십니다.8) 우리는 모든 일에 기뻐해야 합니다.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여호와께 다시 드릴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아이로 인하여 여호와께 찬양했습니다. 또한 가장 연약한 자를 귀히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의 위대한 능력을 알고 계십니까? 혹 여러분들은 기도를 무슨 일을 하다 하다 안될 때 마지막으로 주님의 손을 빌리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성도 여러분! 기도는 성도들의 모든 힘의 원천입니다.(막9:29) 기도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언가 하다 안될 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하며, 삶 가운데 항상 쉬지 말고 해야 합니다.(딤전5:5) 보십시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어떤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열심으로 기도한 결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중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4)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한나의 믿음과 기도를 본받자」 성도여러분 모두가 한나처럼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의 삶을 역전시키고 풍요와 이김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매일 경험하며 나의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주신 약속들을 다시 붙잡고 기도합니다. 한나처럼 기도하게 하소서. 내가 지칠 때에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주님께서 보여주실 결과들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하게 하시며, 주님께 속하여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모든 상황마다 주님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나와 함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나의 의견이나 생각보다 주님의 마음과 뜻을 전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쁨으로 행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제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먼저 무릎 꿇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빛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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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공동체의 리더가 되십시오 갈릴리 공동체

2012/10/0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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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공동체의 리더가 되십시오

 

본문: 사도행전 1: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갈릴리 공동체를 소개합니다.

1. 매일 예배드리는 공동체입니다.(히브리서10: 25, 행17:11, 행2:42-47))

공동체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1년 365일 교회에 함께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끊임없이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한편, 나아가 삶의 전 영역을 주께 예배합니다.

2. 인간(인본주의, 담임목사)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과 말씀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말로는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담임목사가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교회가 담임목사실은 두고 있으면서, 장로실과 집사실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도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임무가 엄연히 분리되어 있었고, 월권 행위를 할 때에는 재앙이 임했습니다.(대하26:16- 26, 삼상13: 8- 13) 목사와 성도는 일반입니다.(호4:9) 지도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며,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마23:8- 10)

3. 갈릴리 공동체는 모든 성도가 영육간에 주림이 없는 행복한 삶과 자아실현을 보장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인의 헌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교회 직영의 사업체(예: 농장, 음식점, 백화점, 출판사, 학교 등)를 두어 성도(신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갈릴리 공동체는 하나님도 한 분, 지구도 하나, 진리도 하나,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4: 32, 요17:21- 23, 엡4:4)

4. 갈릴리공동체는 믿음과 행함(실천)이 일치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약2: 16- 26) 성도가 서로 돕고, 베풀고, 격려하며,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천국에 이르는 동반자가 됩니다. 특히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자비, 양선, 충성, 오래 참음) 맺는 공동체를 이룩할 것입니다.

5. 갈릴리 공동체는 나 자신과 공동체를 끊임없이 개혁하고 복음 전파에 전력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한걸음 더 가까이 사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처음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과 하나공동체, 그리고 주님의 교회, 나아가 이 사회를 돌아보아 끊임없이 개혁하는 한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기존의 사고에 얽매이지 않으며, 주님의 복음 전파에 죽도록 헌신할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고(호세아10:12),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합니다.(마9;17, 막2: 22)

6. 갈릴리 공동체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회입니다. 지도자는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위에서 군림하기 보다 맨 앞에 서서 따르는 사람들을 미래로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려고만 하는 이 때에, "나를 따르라"고,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지도자가 목마릅니다. 갈릴리 공동체 성도는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7. 갈릴리 공동체는 누구든지 환영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인생의 길을 걷다가 넘어진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하나교회는 과거와 현재, 빈부(貧富), 남녀노소(男女老少), 학력(學力), 직업(職業), 인종(人種)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를 막론하고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요6: 37, 로마서 10:13)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정, 기도와 말씀과 전도와 봉사와 사명에 대해 미치도록 열정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끼리 함께 모여야 성령의 뜨거운 불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미지근한 기독교인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한다. 이와 같이 네가 미지근하여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므로 내가 너를 내 입에서 뱉어내겠다.’(계3:15, 16)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2서: 9)

갈릴리 공동체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해 미친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는 좁은 길인 갈릴리 공동체를 찾으세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와서 나타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허다한 무리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예수님이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참제자는 12명이었고, 마리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자뿐이었습니다.(숨은 제자)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의 추종자이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따르는 무리와 제자와는 엄연히 구분됩니다.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 25- 27)

하나님은 헌신적이고 충성된 제자를 요구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요한계시록 3:15, 16)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9:61, 62)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 39) 예수와 복음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의 모임입니다.(막8:35)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여기서 교인(그리스도인)과 제자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인(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제자 훈련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교회를 다니시는 분을 우리는 교인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갈릴리 공동체의 가족은 제자이고 성민(聖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갈릴리 공동체는 제자의 모임이고, 영적 공동체이며, 초대교회와 같은 가족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부류의 공동체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족공동체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족공동체는 갈릴리 공동체이며 믿음의 공동체는 기존의 교회(소망교회, 영락교회, 명성교회 등 이단이 아닌 정통교회)입니다.

 

1. 가족공동체(갈릴리 공동체)

갈릴리 공동체는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의와 평강과 희락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러기 위해 초대교회처럼 매일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와 찬송, 말씀을 배우고 기쁨으로 떡을 떼며 음식을 먹고 헌신하며 이스라엘의 기브츠나 강원도 예수원, 가나안 농군학교의 기본정신을 살려서 공동사업을 운영하여 공동체의 소유를 공유, 분배하는 공동체를 이룩하여서 기성교회의 본이 되는 모델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믿음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는 기존의 교회(소망교회, 영략교회, 명성교회 등)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결코 기존의 교회를 배척하고 비판하고 무시하고 외면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존교회에 불신자를 전도하고 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자를 인도할 뿐 아니라 갈릴리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수시로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봉사할 것입니다. 다만 갈릴리 공동체는 기존교회가 인본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로 흐르는 것을 본을 보여 새롭게 변화되고 개혁하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갈릴리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본을 보여주고 사도행전을 이어지게 합시다.

갈릴리 공동체(가족공동체)와 믿음의 공동체(기존교회)와의 관계는 구약과 신약처럼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구약이라면 갈릴리 공동체는 신약에 해당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따라서 갈릴리 공동체는 기존교회(소망, 영락, 명성교회, 사랑의 교회 등)를 배척하거나 버리고 떠나자는 것이 아니고, 갈릴리 공동체는 상부구조요, 믿음의 공동체는 하부구조이고 갈릴리 공동체가 열매라면 기존교회는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면 갈릴리 공동체는 Church in Church입니다.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령운동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유대인의 회당을 자주 찾으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얼마 전 부산에 사는 한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갈릴리 공동체 글을 보고 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몸과 마음이 아파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있어서 다른 도울 방법은 없고 해서 그 여인을 위해 ‘기도해주겠노라’고만 했습니다. 현재 갈릴리 공동체는 서울에만 모임이 있습니다.

지방에서 갈릴리 공동체에 참여하는 방법은 성령님의 인도아래 직접 갈릴리 공동체를 새로 새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갈릴리 공동체의 리더가 되는 사람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가 아니라도 가능합니다. 1주일간만 서울에 오셔서 말씀훈련을 받으시고 지방에 똑같이 세우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키우시고 제자가 또 제자를 낳도록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 19, 20)

갈릴리 공동체는 복음전하는 이유가 갈릴리 공동체 확산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있으므로 어느 곳에서든지(서울지역 제외) 똑같은 취지와 목표를 가지고 세울 수 있고 또 갈릴리 공동체는 사람중심이 아니므로 누구든지 같은 신앙, 같은 목적, 같은 정신으로 똑같이 개척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문의 하시면 상담과 지원을 약속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와 의를 확장하기 위해 갈릴리 공동체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공동체이지 기존교회(소망, 영락, 명성교회, 사랑의 교회 등)를 배척하거나 버리고 떠나자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교회 교인들 보다 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더 하나님을 찬양하고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자 하는 성민들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갈릴리 공동체(가족공동체)와 믿음의 공동체(기존교회)와의 관계는 구약과 신약처럼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구약이라면 갈릴리 공동체는 신약에 해당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다시 말하면 갈릴리공동체는 열매이고 기존교회는 나무입니다. 나무가 없이 열매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무리(예: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날 때 5000명의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자는 모임입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열심히 전도하여 초신자들을 기존교회로 인도하고 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교회와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공동체는 기존교회 처럼 담임목사 중심(인간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의와 평강과 희락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 확산에 이바지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릴리 공동체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후원과 기도를 부탁합니다.

 

갈릴리 공동체 안내

전화: 010- 2289- 1638 (빛의 자녀)

010- 9975- 9996 (빛의 사자)

http://blog.naver.com/allcome

http://cafe.naver.com/newgalilee

이메일: allcome@naver.com

 

* 참고: 갈릴리 공동체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마르틴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제시한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교회로 개혁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제시한 것이지 결코 비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갈릴리 공동체는 담임목사의 권한(영향력)이 축소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목사가 전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를 함부로 비판하지 맙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를 아무런 대안도 없이 무조건 비판하지 맙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1- 4)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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