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군사가 됩시다.
본문: 딤후 2: 3- 8
미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론 세버린(Ron Severin)이 주류상회 앞을 지나다가 그 앞에 산적해 있는 헌 맥주 캔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는 곧 주인을 만나 그 캔들을 자기가 치워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주인은 감사하다고 하며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세버린은 캘리포니아 롱비치 주립대학의 학생으로서 다우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었습니다. 헌 캔들이 줄지어 쌓여 있는 것을 보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음악적 영감이 섬광처럼 그의 영혼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세버린은 한 아름의 캔을 실어와 손질을 했습니다. 위와 아래의 뚜껑을 모조리 따내고 깨끗이 소독을 한 다음 긴 파이프가 되도록 납땜을 했습니다. 어떤 것은 길게, 어떤 것은 짦게 만들고 파이프의 주둥이 부분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파이프의 길이를 달리하여 플룻과 비올라 소리를 나게 하는 데는 한 시간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리드 음을 내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인류에 새롭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악기 하나가 탄생한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을 혼미케 하는 술이 담겨진 캔이 깨끗이 단장되어 아름답고 고상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를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좋은 군사로 귀하게 쓰임 받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신령한 싸움을 하도록 부름받은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 11- 12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죄에서 떠나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군대의 가장 엄한 규율은 상관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군인이 만일 상관 명령에 불복한다면 그 사람은 감옥에 가야합니다. 전시 상황인 경우에는 사형입니다. 십자가의 군병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20)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듭 말씀하시기를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순종이란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복종이란 이해가 되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따라갑니다. 이것이 복종입니다. 일반 병사들이 지휘관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일반 병사는 전쟁 상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휘관은 고성능 장비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을 지휘합니다. 그러므로 군인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막강한 군사력과 전략으로 많은 땅을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한번은 아주 적은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한 도시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곳의 왕을 직접 만나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그 도시의 왕은 제아무리 알렉산더지만 그 적은 군대로 무슨 싸움을 할 수 있겠냐며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자신과 그 군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겠노라고 공언했습니다. 알렉산더는 군대를 일렬로 세워 낭떠러지를 향해 행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알렉산더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한 사람씩 낭떠러지로 행군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 도시의 왕은 저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도자의 명령에 따르는 군사들에게는 제아무리 강한 요새도, 큰 군대도 견디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한낱 인간을 따르는 군대에게도 목숨을 건 담대한 순종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령관으로 모신 우리가 순종의 결단과 의지를 지니지 못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적극적으로 거역하는 것은 물론, 능력이 모자라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 역시 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에, 능력이 모자라 순종하지 못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고 순종하고자 몸부림치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청종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은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이 아니라 죄입니다. 그 죄에서 떠나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둘째,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 말씀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7, 8절)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을 생각지 않고 있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주님을 부인한 배신자임을 깨달았습니다.
셋째,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5절) 모든 운동경기에는 규칙이 있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규칙을 어기면 실격 당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지켜야 할 규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넷째, 자기 직무에 충성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사역자를 군사, 경기하는 자, 농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종은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기 직무에 전신 전력함으로 헌신합니다.(고전7: 32, 34, 요일3:22)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기위해 힘껏 수고하는 자는 하나님의 상급을 받습니다. 또한 삶의 우선순위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 제일 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다섯째. 자기 생활에 얽매어서는 안됩니다. 본문 4절 말씀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군인의 특성은 개인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입영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군인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든 부모 형제, 친지와 친구들을 뒤로하고 눈물을 삼키며 입대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가정형편이 딱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영하는 장병의 발걸음을 붙들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국가가 있어야 평화로운 사회가 있고, 가정이 있고,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면 안됩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 얽매여 성도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의 영혼은 파멸에 이르기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의 저주로 멸망을 받을 때, 하나님은 롯의 가족들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빨리 이 성에서 도망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하나님의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미련에 얽매여 뒤를 돌아보다가 멸망을 받았습니다.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2:1 말씀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나아가는 길에 나를 붙들어 얽어매려는 유혹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 유혹의 끈에 얽매이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승리자가 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유혹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궁에서 제공되는 왕의 진미였지만, 그것이 신앙양심에 어긋나는 물질이므로 먹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은 하나님의 남다른 은총을 받았습니다. 군인은 '생업'이나 '사적인 일에 마음을 빼앗기며 얽매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본분을 수행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그 분께서 맡겨주신 일에만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갈1:10)
여섯째, 주의 종과 함께 주님을 위한 고난에 동참해야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3절) 1776년 겨울. 미국 조지 워싱턴 장군의 군대가 펜실베이니아주 포지 계곡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 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습니다. 식량은 떨어지고 옷은 찢어졌으며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군인들은 추위와 굶주림과 질병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때 워싱턴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여름철의 군인과 햇빛 날 때의 애국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고통과 역경의 밤을 극복한 사람들만이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희생의 피를 흘린 사람만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땀과 눈물이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평안한 상태의 군인, 태평성대에 나라 사랑을 부르짖는 애국자는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땀과 희생과 피를 쏟는 사람이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편안한 곳에서 싹튼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난에서 시작됐습니다. 예수가 쏟은 붉은 피는 인류의 죄를 씻어냈습니다. 전쟁에 종군하는 자들은 겁을 먹고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고난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면서도 교회를 위한 염려 때문에 날마다 속에서 눌림이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주님의 군사는 말씀과 기도를 방패삼아 매일을 승리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삶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은 순간을 승리하는 것입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 이 순간, 그리고 오늘 군대의 지휘자 되신 주님을 의지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 십자가 군사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찬송가를 함께 부릅시다. 십자가 군병들아(찬송가 352장, <통> 390장)
1.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기들고 앞서 나가 굳세게 싸워라 주께서 승전하고 영광을 얻도록 그 군대 거느리사 늘 이김 주시네 2.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그 나팔소리 듣고 곧 나가 싸워라 수없는 원수 앞에 주 따라 갈지니 주 예수 힘을 주사 강하게 하시네 3.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 믿어라 복음의 갑주 입고 늘 기도하면서 너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라 4.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이 날에 접전하고 곧 개가 부르리 승전한 군사들은 영생을 얻으며 영광의 주와 함께 왕노릇 하리라 아멘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느헤미야 4: 17- 18)
* 기도: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미천한 저희들을 부르셔서 십자가의 군사로 삼으시고 갈릴리 공동체와 사랑하는 형제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의 몸된 갈릴리 공동체에 귀한 직분을 맡았사오니 맡겨진 일에 충성하며 온전한 헌신이 이루어지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집사들은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믿음이 경건하고 진실하여 사람들에게 칭찬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들도 그들을 본받아 열심히 주를 섬기는 좋은 군사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군병되어서 앞에 가신 주님을 좇아 마귀들의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승전고를 울리게 하옵소서. 늘 이김주시는 대장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갈릴리 공동체 전화: 010- 2289- 1638 (빛의 자녀) 010- 9975- 9996 (빛의 사자) http://cafe.naver.com/newgalilee 이메일: allcome@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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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확장
본문: 사도행전 1: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교회와 우리의 가장 큰 사명은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꼭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z과 희락이라’(롬14: 17)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 9, 10)
만약 교회와 내 안에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없다면 이는 죽은 교회요 죽정이 교인입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과연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합니까? 아니면 청년들이 세상에서 창업하듯이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 사업을 위해 세워진 교회입니까? 모든 교회가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도 있습니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유명한 어거스틴의 책 가운데 ‘신의 도성’ 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있습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당시로 보면 절대로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도끼를 휘두르면서 벌거벗은 채로 쳐들어오는 야만인 오트족한테 로마는 함락됩니다. 아우성과 화염 속에서 거대한 로마성이 무너지는 순간에 어거스틴은 굉장한 고민을 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이 나라가 무너지고, 저 야만인들이 점령하게 되는가? 그 때 모든 기독교인들이 고민을 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유명한 역사관을 내어놓게 됩니다. ‘사람이 세운 이 세상 나라는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무너지는 로마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가는 것을 그는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칠흙같은 캄캄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어두움을 치른 후에야, 아침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우리는 때로 어린이들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저 하늘에 있단다." "하나님 나라는 네 마음에 있단다." 이런 답을 하십니까? 그러나 그 어린 아이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을 때, 어떤 답은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곳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사상은 하나님의 지배라는 뜻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 있는 통치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손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의 지배가 임하시는 때, 사탄과 그 아래 있는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사랑과 의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에덴 동산이라 할지라도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할 때,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일 수 없습니다. 그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사탄의 말을 들을 때, 사탄이 대신 ‘이 세상 임금’으로 되었습니다(마 4:8-10, 요 14:30). 하나님 말씀이 다스리지 않은 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에덴을 떠나야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방주를 지었을 때, 그 말씀대로 지어진 방주는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그 방주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 방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방주는 심판이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택정되고(삼상 16:1-13), 다윗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에 의해 통치될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참 사람이며 또는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계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입니다(행15:14-17). 다니엘과 세 친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그가 풀무불에 들어가도, 사자굴에 들어가도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습니다. 사자도 풀무불도 그들을 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의 임함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가 되셨습니다. 살아계셔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선, 임하지 않습니다(눅17:20, 21, 롬14:17).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 신자는, 현재, 지상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습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 안에서 현재, 지상에 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척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눅9:1, 2) 여기서 부터 갈릴리 3차 전도 사역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불러모아서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그들은 당시에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 돌이켜 볼 때, 그보다 값진 결단이 없습니다. 그들보다 존경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르시고 보내신 그들의 생애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나아간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열두 제자들은 세상에서 어부였습니다. 세리였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평범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신분을 더 부여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 신분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원인 것입니다. 로마 식민지 국가의 무엇이 아닙니다. 유대 갈릴리 지역의 어부나 세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한 구성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특권입니다. 모세는 그 일원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 26)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에 내어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합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갈 때, 그곳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채색 옷을 입고 사랑을 받는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불러내어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또 옥살이를 하게 하십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함으로 그가 가는 곳은 감옥이라 할지라도, 감옥이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 19- 20)
3.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곳에 이루어집니다. 요즈음에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 보면,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신학교육과 목사 안수 등의 자질과 신분을 갖춥니다. 선교지의 정보를 모아 교육합니다. 선교비를 확보합니다. 선교사 파송식을 가집니다. 이런 신중한 절차를 따라서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좀 색다릅니다. 그냥 12명의 제자를 '불러모아 내어 보냅니다.' '세상에 던져버렸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9:3, 막6:8) 우리가 파송함을 받은 그 당시의 제자라면,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두둑하게 선교비를 주신 것도 아니요, 비자카드라도 만들어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런 보장이 없이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제자 파송은 요즈음 선교 관점에서 보기에는 참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스쳐가지 않습니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전도자로 파송되어 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여행 장비들이 있습니다. 여행 경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숙식을 위한 기본적인 의류나 식량, 또 험로를 대비한 지팡이 따위가 그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같이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고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러한 여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일체 금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처럼 보편적으로 여행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장비들을 금하셨을까요? 첫째,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지팡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거친 들에서 여행자를 보호하기도 하고 높은 곳을 오르는 데 큰 힘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어쩌다 넘어졌을 경우 용이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지팡이 소지를 금하셨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가 의지해야 할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다윗도 내게 부족함이 없노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둘째,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 역시 여행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입니다. '양식'이 없어 배를 곯습니다. '돈' 또한 생활 필수품입니다. '주머니'란 요즈음 여행가방 정도입니다. 여기에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습니다. '두 벌 옷' 정도는 여행하는데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필수품들을 의지하지 말라 명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보기에 일차적인 필수품이지만, 하나님 나라 측면에서 보면, 2차적인 문제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이 모든 필수품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양식'이 주린 영혼을 채우지 못합니다. '돈'으로 그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주머니'에 영혼의 양식을 담을 수 없습니다. '두 벌 옷'도 벌거벗은 영혼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몇 번이고 망설입니다. 이름도 주시고, 이적도 주시지만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합니다. 대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우도 이런 망서림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1:5- 7)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파송은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이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책임지십니다. 이것이 귀합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헤롯의 태도로 보아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권세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으로 그 능력을 시행할 권리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는 열 두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 행하시던 사역의 연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고 하나님 나라 확장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일꾼으로 부름 받아 그 일을 감당할 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어두움의 권세가 떨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팔레스틴 전역에 퍼져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중에서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분봉왕 헤롯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가 당황한 것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분봉왕 헤롯은 대 헤롯의 아들로서 세례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왕권의 새로운 시작이 그를 본능적으로 위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분봉왕 헤롯은 어두운 권세자의 표상적 인물입니다. 그는 에돔인으로서 당시 유대 사회의 권력을 관장하고 있던 사두개 교도였으므로 죽은자의 부활 같은 것은 전혀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통치 관할 구역인 갈릴리에서 예수의 명성이 높아가고 그를 추종하는 백성들이 많아지자 예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그의 제자들도 놀라운 일을 행하자 그 소문은 즉시 헤롯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어두움의 권세도 떨고 있습니다. 워나메이커는 미국 제23대 대통령 벤자민 해리슨 정부의 내각요원으로서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며 큰 발전과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또한 워나메이커는 미국의 백화점을 초기에 본격적으로 운영했던 백화점 왕으로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아주 훌륭한 생활과 헌신을 한 사람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워나메이커 체신장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워나메이커씨, 당신은 그 큰 사업에 바쁠 뿐만 아니라 체신장관의 업무를 수행하고 또 다른 일들이 많을 터인데 어떻게 4천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을 다루는 주일학교 교장직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워나메이커는 정색을 하고 답변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을! 주일학교가 나의 정작 본 사업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일들은 그저 일들입니다. 나는 이미 45년 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의 말씀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받고 거기에 머무르고 안주하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 23- 25)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았어도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도리어 화가 있습니다. 마25장 14- 30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다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했습니다. 저는 방언과 예언과 환상과 치유의 역사 등을 볼 수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가 있다고 해서 가본 적이 있습니다. 성도가 20여명 정도되는 교회인데 성도의 대다수가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듣는 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맛보는 데 그치고 교회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는 힘쓰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들도 전도에 힘쓰고 있으나 그 전도는 교인수 확장을 위해 하는 것이지 진정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단 이 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기존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조차 모르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역자(인간) 중심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 확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과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인이 되거나 인간이거나 물질이나 우상이라면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런 교회로 전도한다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까? 내게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주신 목적과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왕으로 모신 곳으로 불신자를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순절 성령의 은사를 받고 제일 처음 한 것이 의와 평강과 희락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 42- 47) 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복음전파에 힘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내 것을 희생하며 동행하고 따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8장 2-3절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는 ‘여인들이 자신들의 소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다.’는 말을 강조합니다.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으로 치유받고 주님을 따른 여인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주의 능력으로 치유되어 자신의 소유로 주님을 섬기며, 주의 나라 확장에 기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은 그냥 가만히 있는 데 이루어지 않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이루어지지 않고, 기도한 만큼 내가 희생하고 손해 볼 때 이루어집니다. 열정만 있어도 안 됩니다. 내 것을 드리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주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를 보면, 많은 신앙인들이 물질과 명예를 버리고, 가족과 생명까지 버리며 헌신하였습니다. 내 것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제자들 중 일부, 또는 여인 중 몇 명의 헌신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은 헌신된 개개인이 하나가 되어 사역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열 두 제자, 어떤 여자들, 다른 여러 여자! 예수님을 제외한 한 단어도 단수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이들의 삶은 참으로 열악하고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귀신이 들려서 고생하였고, 각종 질병으로 앓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사도들을 보아도, 어떤 이는 세리출신이고, 어떤 이는 어부 출신이었고, 어떤 이는 열심당원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헌신된 개개인이 하나가 될 때, 결국 주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주신 것은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쓰라고 주셨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와 능력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데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갈릴리 공동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가 되고, 우리 모두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영육간에 복주시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갈릴리 공동체를 통하여 병든 자가 치료받게 하시고 낙심가운데 있는 자가 기쁨과 소망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 갈릴리 공동체 전화: 010- 2289- 1638 (빛의 자녀) 010- 9975- 9996 (빛의 사자) (http://blog.naver.com/allcome)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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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소문, 누명)
▣ 예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인
본문 : 마가복음 5장 25∼34절, 찬송 ‘주여 나의 병든 몸을’ 471장(통 528)
오늘 본문의 한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너무나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 병은 레위기 15장 3∼12절에 나오는 ‘유출병’으로 사람들이 매우 부정하게 여기던 병입니다. 그가 앉았던 자리, 그와 접촉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부정하게 여기는 이 병은 요즘의 자궁암과 같은 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여인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희망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첫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의 소문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내야 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기에 구원을 받고 12년을 앓아 온 혈루증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문제가 해결되고 변화되며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이 여인은 소문을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로 왔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도 예수님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이 여인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갈수록 영향력을 잃고 성도가 힘을 잃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27절 하반절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 곁에는 각종 병으로 고통당하며 여러 가지 문제들로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옷깃을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주인공은 오직 이 여인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본문 2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여인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받고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낫게 하실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그동안 고칠 수 없었던 우리의 혈루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와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십시오. * 기도 : 주님! 우리가 육신의 혈루증과 영적인 혈루증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우리를 고쳐주시고 구원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림형천 목사 (서울 잠실교회)
▣ 소문을 잠잠케 하라
수 년 전에 사탄은 소문을 퍼트렸다. 그는 몇몇 크리스천에게 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불행과 실패, 가난과 좌절을 겪으며 살아야 된다고 했다. 소문은 점점 퍼져갔다. 여러분도 아마 그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교묘한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편 91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재앙이 가까이 하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에서 우리를 해하는 세상의 권세를 주님께서 빼앗았다고 하셨다. 출애굽기 10장에 애굽의 온 땅에 캄캄한 흑암이 둘렀으나 이스라엘 자손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성경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세상의 고난을 당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의 자녀들이 세상의 고난을 넘어서는 삶,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드러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기적을 베푸시기로 유명한 분이셨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기적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그리하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다면서요." 혹은 "아이들이 마약중독에서 풀려났다면서요." 혹은 "정말 하나님께서 경제적인 위기에서 구해주셨군요." 이제 왜 당신이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고통 받아야 된다는 소문을 사탄이 퍼트린 줄 알겠는가? 만일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산다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어떻게 하면 그들도 능력과 평화, 건강과 번영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물어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바로 그것이다. 이제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하여, 약속하신 축복을 담대히 받으라. 하나님의 빛의 능력으로 사탄의 흑암의 소문을 잠잠케하라.
▣ 소문, 누명, 억울함에 관한 성경 말씀
0 (여호수아 2: 8- 11)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갈릴리 공동체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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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약속, 서원)
▣ 축복의 언약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펜’은 윌리엄 펜의 이름을 땄습니다. 많은 주(州)에서 인디언들과 전쟁을 했지만, 크리스천인 그는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꿈꿨습니다.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 그는 맨손으로 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을 나의 친구요, 형제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존경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친절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어 나갈 것을 제의합니다.” 이에 추장은 멋진 말로 화답합니다. “강물이 흘러가고 태양이 빛나는 한, 우리 자녀들은 평화 속에 살게 될 것이요.” 그들은 단지 악수만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기념으로 주의 수도를 ‘필라델피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는 헬라어인 ‘필리아’(친구 간의 사랑)와 ‘아델포스’(형제)의 합성어로, ‘우리는 형제의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후 펜실베이니아 주는 인디언들과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역사에서 언약을 지킴으로써 아름다운 복을 나눈 좋은 사례입니다. ‘시내 산 언약’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셨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 시내 산에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언약의 중요한 기초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입니다. 이 언약은 순종을 조건으로 체결되었으며, 이스라엘은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복이 약속되었습니다. 『출애굽의 오후』/ 이동원
* 금언: 건강이 마음의 특징이라면, 거룩함은 영혼의 특징이다.- 존 플라벨 -
▣ 확실한 약속광고들 중에 가장 화가 나는 광고는 마치 무료, 공짜로 다 줄 것처럼 해놓고는 구석대기에 눈에 보일락 말락한 크기로 단, 5만 원 이상 구매고객에 한해 응모자 중에 10명을 추첨하여.... 같은 글을 보는 순간입니다. 언 듯 보기에는 그 물건이 내 것 같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그 행운이 나에게 올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행운에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물건을 사고 결제를 하게 하는 그 얄팍한 광고의 수법에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면서 확실한 말씀 한 절을 붙잡습니다. 수많은 눈속임에 가까운 광고들과, 성경이 말하는 약속이 얼마나 차이가 많이 나는지 비교해 보세요.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 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주님이 바로 정의의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그 날에 주님은 내게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쉬운 성경 디모데후서4:8) 잘 읽어보면, '줄지도 모른다, 몇 명을 추첨하여 준다, 어느 정도의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을 하면 준다, 선착순으로 준다' 등등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무조건 주는 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다 준다'입니다. ⓒ 최용우
▣ 작은 노력이 쌓은 신뢰
본문 : 잠 13:3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다른 사람의 제안을 잘 거절 못하는 짐이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짐은 상대방의 기분이 언짢아 질까봐 들어주기 힘든 부탁이라 할지라도 일단 거절을 하지 못하고, 알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리였거나, 다른 약속과 많이 겹칠 때가 많아서 결국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약속은 취소해야 했습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점점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짐은 전문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두 가지 처방을 내렸습니다. 첫째, 절대로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할 것. 둘째,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 이후 짐은 전문가의 조언을 반드시 지켰습니다. 누군가 이미 약속을 했다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요구해도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미 그 시간엔 약속이 되어 있소.”, “그 일은 내가 도와주기엔 좀 무리요, 미안합니다.” 상대방이 통사정을 할 때는 마음이 매우 힘들었지만 그래도 조언을 지켰습니다. 이렇게 6개월이 지나자 짐은 주변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약속을 거절당한 사람도 그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자신의 제안은 거절당했지만, 다른 약속을 지키기 위한 거절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뢰는 사소한 약속으로 쌓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한 약속이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기회나 조건이 와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반드시 믿을 수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기도: 주님! 작은 약속부터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 묵상: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시오. /김장환 목사, 제공 : 나침반출판사
▣ 결혼 서약
당신이 다른 사람과 영적인 동반자가 될 것을 서약했을 때, 당신과 동반자는 영적으로 동일하게 발전할 수 있는 가치와 인식과 행동들을 바탕으로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반자의 영적 성장에 대한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서 당신 인격의 욕구를 제쳐놓기 시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도 성장하는 것이다. - 게리 주커브의《영혼의 의자》중에서 -
* 인생의 많은 서약 중에서 최고의 서약이 바로 결혼 서약입니다. 혼자 사는 삶을 내려놓고 '영적 동반자'와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겠노라 다짐하는 행복 서약입니다. 지난 시절의 모든 경험을 행복의 조건으로 전환시켜 함께 성장하겠노라는 영혼의 서약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약속에 관한 금언 0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행13:32,33) 0 약속을 하는 사람은 약속한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탈무드) 0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부도난 수표와 같다. 약속들이 우리를 파산에서 지켜 줄지는 모르나, 가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는 못한다.(프란시스 리들러 해비갈) 0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자는 그 실행에서는 가장 충실하다. 0 약속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 약속하고 행하지 않는 것보다 백 배나 더 좋다.(아더 워웍) 0 우리는 우리의 희망대로 약속하지만 우리의 이기심과 두려움에 의해 이행한다. (둑 드 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한 에이커(acre)의 이행은 약속의 온 세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 (제레마이어 브라운 하우엘) 0 성실한 사람은 약속만 하는 사람을 비웃고, 약속은 이행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로버트 번즈) 0 장황한 약속일수록 항상 의심해 보아야 한다.(데오도 파커) 0 용감한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피에르 코네일) 0 당신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조심스레 약속하라. (로마스 풀러) 0 모든 신의 약속은 네 개의 기둥으로 세워져 있다. 그것은 거짓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 또는 거룩함과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 또는 선, 결코 변할 수 없는 그의 진리, 성취하게 하는 그의 권능 등이다. (사무엘살터) 0 그대가 실천할 수 없는 일은 착수하지 말고, 일단 맺은 약속은 조심성 있게 지켜라. (죠지 워싱턴) 0 너무 많은 약속을 하는 자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자는 둘 다 몸을 망친다. (고트홀드 E. 레싱) 0 많은 약속은 신용을 잃게 된다. (호라티우스) 0 비통에 빠져 있는 사람과의 약속은 쉽게 깨어진다. (죤 메이스 필드) 0 사람들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유리할 때에야 약속을 지킨다. (솔론) 0 사람들은 서약은 빵 껍질과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0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 만한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프리드리히 W. 니체) 0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게 만든 사람의 결점을 계산한다.(프랑스 격언) 0 안 된다. 절대로 강요당하여서는 말하지 말라. 또한 지킬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 (제임스 러세로웰) 0 약속은 빠르고 실행은 어렵다. (랄프 왈도 에머슨) 0 약속은 빚이다. (조나 게일) 0 약속은 약속을 하는 사람 수에 반비례하여 속박한다. (죠지아 퀸시) 0 약속은 태산처럼 해놓고, 실천은 두더지 둔덕만큼 한다.(스펼젼) 0 약속을 잘 하는 사람은 그 약속들을 잊어버리기도 잘 한다.(토마스 풀러) 0 약속을 가장 잘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안 하는 것이다.(나폴레옹 보나프르트) 0 약속을 하는데 가장 느린 사람은 약속을 실천하는 데 가장 신실하다. (쟝자크 루소) 0 약속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다. (스펼젼) 0 약속이 없는 자는 고독한 자이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는 불의한 자이다. (이태리 속담) 0 올바른 사람은 약속을 절게 하고 실행을 많이 하지만, 옳지 못한 사람은 약속을 많이 하나 실행하는 일이 적다.(탈무드) 0 우리는 성인이 아니지만 약속을 지켰다고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는가? (사무엘 베키트) 0 옛날 미생이란 사람이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날 약속을 하였는데 끝내 오지 않자 그 약속을 지키려고 물이 불어 홍수가 나는데도 끝까지 지키다 죽었다는 말로 융통성이 없이 약속만을 굳게 지키는 것을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 한다. 0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남과의 약속도 쉽게 져 버릴 수 있다. (앤드류 카네기) 0 약속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신 앞에서처럼 신실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약속할 때 상당히 주의해야 한 것이다. (토머스 풀러) 0 즉시 거절하는 것은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영국속담) 0 아이들에 대해서 항상 바르게 하라. 아이들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아이들에게 허위를 가르치는 것이다.(탈무드) 0 해놓은 약속은 상환되지 않은 빚이다.(로버트 w. 서비스) 0 쉽게 약속하는 사람은 쉽게 잊는다. (김경선) 0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기신 때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않는 것은 내가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김경선) 0 하나님의 율법은 물론 우주자연 법칙도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하신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이다. (김경선)
갈릴리 공동체 |
주제별 추가 자료편(인도, 안내)
▣ 구두닦이 아이들의 선생님
당시 서울역 주변에는 다방이 많아 구두닦이 아이들이 역 근처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왜 시각장애인이 되었는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나는 원래 맹인이 아니야. 맹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어. 나는 불어 선생님이었거든. 맹인이 된 후에도 여자고등학교에서 프랑스말을 가르쳤는데, 어느 날 맹인인 것이 탄로났지 뭐야. 그래서 쫓겨나게 되었어. 내 인생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서울역으로 인도해 주셔서 너희를 만나게 된 거야." 그 때 아이들은 제게 확 달려들면서 목을 껴안았습니다. "아저씨가 선생님이었다고요? 그럼 됐어요.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이 필요해요. 다시 저희 선생님이 되어 주시면 되잖아요."라며 울부짖었습니다. "다시 선생님?" 그 순간에 제 온몸이 뜨거워졌습니다. 성령님이 제게 속삭이셨습니다. "요한아, 알았지? 이것이 너를 향한 내 계획이었단다. 너는 끝난 게 아니야.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그 약속의 말씀은 가슴에 항상 남아 제 인생을 이곳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왜 저입니까?"라는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구나.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알면 알수록 그분 앞에 기도의 무릎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오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 안요한, 낮은 데로 임하소서, 그 이후.
* 금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희망으로 가득하다. 비록 고통의 길을 거쳐 가야 할지라도 말이다.(조니 애릭슨 타다)
▣ 현명하고 사랑 많은 안내인
당신 가슴이 충분히 슬퍼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을 때까지 두려움과 슬픔을 뚫고 당신을 누군가 인도해야 할 때 현명하고 사랑 많은 안내인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눈물이 상처 입은 곳에 떨어질 때 그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자유롭게 놓아주길 바랍니다. 허기진 상처를 용서로 채우길 기원합니다. - 존 오도나휴의《사람이 사람에게》중에서 -
* 밴쿠버 강연에서 만났던 한 노신사께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고선생님, 이민생활의 성공과 실패가 언제 갈리는지 아십니까?", "언제 갈립니까?", "처음 공항에 내렸을 때 누가 마중나왔느냐에 따라 이민생활의 성공과 실패가 갈립니다." 비단 이민생활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처음 가보는 낯선 인생길, 현명하고 사랑 많은 안내인을 만나면 자기 인생도 달라집니다. 행복해집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하나님의 인도하심, '떠나라'
2000년 11월 1일, 우리는 이삿짐을 날랐다. 예수전도단에서 공동으로 생활했던 집을 나오기 위해…. 짐이라야 이불과 텔레비전 한 대 그리고 두 돌 된 아들과 그해 3월에 태어난 딸의 옷가지가 전부였다. 문희곤 목사(전 예수전도단 대표)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길아, 나가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실은 나도 걱정이다. 가장 큰 걱정은 '내가 거룩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나는 대학생 때 예수전도단에 들어가 5년 넘게 간사로 일했다. 사실 선교 단체 간사를 그만두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월급을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산다 해도 단체의 보호가 있는 것과 혼자 있는 것은 차이가 있다. 선교 단체에서 훈련받고 간사 생활을 하면서 겨우 거룩함이 주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누리게 되었는데, 나가서도 여전히 거룩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먹고사는 것도 걱정이다. 하나님이 조용히 물으신다. "길아, 지난 5년 넘게 너를 먹여 살린 게 예수전도단이냐, 나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래. 그럼 내가 너를 먹여 살릴 수 있으니 나가라!" 나는 스물한 살 이후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따라 살아왔다. 세상이 다 없어져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있으면 된다. 여러 걱정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다. 예수전도단을 떠나서 교회를 개척하는 삶, 그것이 내게는 부르심이요 인도하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서른세 살에 아무런 신분 보장이 없이, 아내와 분유 먹이는 아이 둘을 데리고 전 재산인 이불과 텔레비전을 들고 공동생활 집을 나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삶이 시작 되었다. /김길(증언)
▣ 태풍이 부럽다
한반도를 스치고 지나가는 강력한 태풍의 뉴스를 보던 대학생 아들이 푸념과 같은 말로 “아! 태풍이 부럽다”고 했다. 젊은 청년이 태풍이 부러운 이유가 뭘까 궁금해 “왜 태풍이 부럽다는 것이니”라고 물었다. 일심 젊은이로서 태풍의 강한 위력, 영향력이 부러워서 저러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물었는데 돌아온 아들의 답변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아들은 태풍의 위력이 부러운 게 아니라 정해진 진로가 부럽다고 했다. 시간대별로 지나갈 진로를 기상 캐스터가 예고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진로도 저렇게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가진 나름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아들에게 “태풍의 진로를 기상 캐스터가 아는 것이지 태풍이 알고 있겠니?”라며 “너의 진로를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있음을 의심하지 마라”고 말해줬다. 때로 나 스스로도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음을 느끼며 위대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전적으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됐다. /김상현 목사(인천 부광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