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회의 꿈을 갖자
본문: 요한계시록 1: 9- 20
좋은 교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교인이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고 그런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중생한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과 행복과 꿈이 교회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교회를 향한 소원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관심사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지도자의 위치와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사자’(2:1)라는 말은 주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너무나 중요한 일을 맡고 있기에 주님이 오른손에 쥐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주님의 일을 위임받는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이며, 가장 예민하게 간섭하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교회의 지도자에게 책임을 묻고, 칭찬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천사의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해 30분, 1시간 기도하기를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을 위해서는 5초짜리 기도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지도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미국의 릭워렌 목사는 새 신자들이 등록할 때 세 가지 서약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도자의 인도를 따르고 순종하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귀의 계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초토화되는 교회를 종종 보게 됩니다. 사실상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지도자가 바른길로 인도하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도자를 섬기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지도자들에게 우리의 영적인 생명과 행복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성장해야 합니다. 자라지 않는 발육부진아가 있는 집단은 고통스럽습니다. 목사에서 어린아이까지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성장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누구나 올라오라!” 우리는 부르심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좋은 교회였으나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었고 썩어갔습니다. 자라기를 멈추면 절대로 좋은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받은 분들은 더욱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변화되고 성장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셋째로 일을 해야 합니다. 성장하면 일하고 싶어집니다. 자라는 아이가 관심과 의욕이 날마다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움직이지 아니하려는 성도들이 우글거리는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위해 충성스럽게 일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헌신하십시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면 은혜가 충만하기에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고 보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또 좋은 교회일수록 기도응답의 경험도 풍성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나쁜 교회는 은혜가 메말라 버리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교회라야 전도를 잘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집안이 좋아져야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교회의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교회의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여러분 자신이 좋은 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행복이 여러분의 심령에 차고 넘칠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
* 기도: 주님의 몸되신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저희들이 좋은 성도가 되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셔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아멘
* 좋은 교회는 교회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교회입니다. 교회중심이 되면 개교회주의, 교단 분열, 담임목사 세습 등의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 갈릴리 공동체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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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라
본문 : 마가복음 12: 28 - 33
영국의 한 시골 노인이 난생 처음 런던 관광을 왔습니다. 그는 그림에 조예가 있어서 유명한 화실에 들러 이 그림 저 그림을 구경하다가 신앙이 독실한 대 화백이 필생의 걸작으로 그린 예수님의 상을 보고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경건되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한참 그림을 쳐다보다가 노인의 두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 !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관람객 중의 한 부인이 그 노인에게 가서 손목을 꽉 잡으며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또 한 학생이 이 장면을 보고 "할아버지,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 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이름 아래서 그들은 서로 통했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삽시간에 칠팔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주님을 향하는 뜨거운 사랑이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항상 있어야 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찬송가 218장, <통> 369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 주께서 우리게 명하시니 그 명령 따라서 살아가리 2. 널 미워 해치는 원수라도 언제나 너그럽게 사랑하라 널 핍박하는 자 위해서도 신실한 맘으로 복을 빌라 주께서 우리게 명하시니 그 명령 따라서 살아가리 3. 나 항상 주님을 훼방하고 형제를 억울하게 괴롭혔다 이러한 죄인을 사랑하사 주께서 몸버려 죽으셨다 속죄의 큰사랑 받은 이 몸 내 생명 다바쳐 충성하리 아-멘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래 이 말씀은 구약 신명기 6장 4-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이것을 쉐마 라고 해서 아침과 저녁으로 외우는 유명한 구절 가운데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령, 우리가 십계명을 봅니다마는 십계명 중에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의 내용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든 계명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모든 계명을 포함하는 계명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 하나만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모든 계명도 잘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소극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사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하나님의 날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힘 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시간 바치는 것이 아깝습니까? 재능을 바치는 것이 아깝습니까? 돈을 바치는 것이 아깝습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하는 것은 힘든 것이 없습니다. 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 1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였습니다. 가정에서 남편을 섬기는 아내가 법에 의해서 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랑에 의해서 섬기는 것입니까? 사랑 없이 섬기라면 무거운 고역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지키면 무거운 짐이 아니라 행복한 생활이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에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1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요 모든 계명의 총괄이요 제일 먼저 순종해야 할 계명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기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존경만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하면서도 자기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다른 면은 질투입니다. 사랑하면 질투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그의 남편이 곁눈질을 하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가 있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저 당신만 사랑해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던 말던 상관할 것 없어요 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질투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이 이 여자 저 여자와 놀아나도 아무 런 감정이 없다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가 이 남자 저 남자와 눈이 맞아 돌아다니는데도 나는 오직 당신밖에 없어 하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족해 라고 말합니까? 아니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면 그는 나만을 사랑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만한 사랑을 요구하십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했습니다. 여기 마음이란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겉모양으로만 하지 말고 중심으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내려오는 말에 비둘기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콩 밭에 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사람인데 먼저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 몸은 어디 있든지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그 마음이 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몸은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지만 마음은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골프장에 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께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숨을 다하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혼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 전체, 우리의 영혼 전체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뜻을 다해서 했는데, 뜻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 지혜를 다해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육체의 능력이든지, 심령의 능력이든지 내게 무슨 힘이 있으면 그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심령 전체를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영과 육 전체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머리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혹은 감정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혹은 감정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외부 생활로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고, 우리의 지·정·의 인격의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제일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정성을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가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극진히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부모님을 극진히 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자녀를 사랑합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아까운 것이 없어 합니다. 그러나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생명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기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말 씀은 내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 계명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요한 1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대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온 것이 아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려고 힘쓰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한 공간에 두 가지가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행음하는 여인 같은 너희들아, 세상을 사랑함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경고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힘씁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장 23 절에도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했습니다. 요한 1서 5장 3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릅니다. 수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데 거기에 수고가 따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겁게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일하는 수고가 있는데 그것이 부담이 되고 무거워서 빨리 벗어버리고 싶습니까? 남편의 속옷을 빠는 아내가 언제까지 이 고생을 해야 하나? 하면서 불평을 하고 있습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수고하면서 짜증내는 것을 보았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그 말씀 따라 살기 위해서 힘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당에 나오면서 시간 낭비라고 짜증내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아까워하지 아니합니다.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이 무겁습니까? 짜증이 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교회 나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너무 기쁘고 즐거우며 기다려지고 말씀을 사모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가 석방의 날을 기다리듯이 사병이 제대하기를 고대하듯이 굶주린 사람이 먹기를 기다리듯이 구차한 살림이 풍요하게 되기를 바라듯이 파수꾼이 새벽 날새기를 고대하듯이 어린아이가 그 어머니의 젖을 사모함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갈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잠시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음부에 가서 숨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이 거기 계십니다. 시편 42편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시편 84편 2절에 보면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궁정을 사모해서 육체와 정신이 쇠약해질 정도로 생각하고 앙망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언제나 사랑하는 분을 사모하는 것이 인간의 정입니다. 자나깨나 하나님을 잊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아직도 그와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하시는 분은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 심령에 만족이 없습니다. 남편을 뜨겁게 사랑하는 아내라야 행복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가정은 이루어졌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가 행복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성도라는 이름은 있어도 불행합니다. 걱정과 근심뿐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지으려고 할 때 모든 백성에게 선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막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막을 짓지 위해서는 실도 필요하고 나무도 있어야 하고 금·은·동·보석도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것 가운데 서 하나님 앞에 바치기 원하는 사람은 자원해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모세가 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자원해서 실이고 천이고 나무·보석·금·은·동·철할 것 없이 가져오는데 너무 많아서 그 다음 엔 모세가 이제는 더 가져오지 마세요. 넉넉하니 그만두시오 라고 선포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전에 에스라 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와서 성전을 지을 때 많은 사람이 자원해서 나아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습니다. 즐겁게 봉사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고 시간을 내서 즐겁게 봉사하시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서 주님께 붓고 머리털을 풀어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주님을 사랑한 때문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내 시간, 내 재주, 내 물질,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드립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때 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처럼 오늘 우리 하나 하나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일을 끝내면 자신의 안일과 휴식을 먼저 찾습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어려운 시험(학기말 고사, 수능)을 끝내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하려 합니까?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고통이 지난 후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한지 아십니까? 사무엘하7: 1- 9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왕의 시기로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은 후 비로서 왕으로 평안히 살게 되었을 때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기를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하면서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의 성전 지을 것을 말하자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다윗을 축복하시고 ‘네가 가는 모든 곳마다 함께하시고,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언약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다윗 이름 이외에 아브라함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심을 보시고, 창세기 12: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하신 약속하신 말씀 대로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다섯째,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쁨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이 웃는 줄도 모르고 자기 남편 자랑하기에 침이 마릅니다. 사랑하는 분의 모든 것이 좋아만 보이고, 훌륭해 보이고, 자랑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랑 예수님께 대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선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전도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매를 맞으면서도, 심문을 받으면서도, 순교까지 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이 되었을 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쁘게 지키는 크리마스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5장 5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세상에 오시고, 우리 위해 일하시고, 우리 위해 죽으시므로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해서 새 나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사랑할 만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다가는 결국 눈물로 끝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요사이 눈으로 보지 않습니까? 세상 권력 사랑하고 세상 재력 사랑하다가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됩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세상의 영광을 우리가 사랑합니까? 그 영광도 지나갑니다. 세상의 물질을 사랑합니까? 그 물질도 다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돌고 도 는 것은 돈입니다. 세상의 사람을 사랑합니까? 그 사람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영원히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세상의 것도 바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친구도 바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물질도 바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다른 여러 가지 일을 잘 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친구 사이에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뵙는 이 신앙생활에서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니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시고 우리 평생에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만이 아는 큰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행복이므로 제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삿5:31) 전도를 너무 잘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 받고 전도를 잘하는지 항상 「주님 없이 살 수 없어요」 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여대생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굉장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주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얘기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보다 더 위대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나 없이 사실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므로 행복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고백합니다. 주여 ! 이 시간부터 하나님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누구보다도 깊이 뜨겁게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깨끗이 살며, 세상을 이기며 참되게, 기쁘게, 만족스럽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빛의 사자
갈릴리 공동체 전화: 010- 2289- 1638 (빛의 자녀) 010- 9975- 9996 (빛의 사자) 후원계좌: 국민은행 083702- 04- 169089(갈릴리 공동체)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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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맡김, 의지)
▣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언젠가 한 애완동물 가게의 트럭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운전사는 정지신호 때마다 차에서 내려 트럭 뒷부분을 막대기로 두들겨 댔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거죠?” 하고 물었다. 그러자 운전사는 “2톤까지만 실을 수 있는 트럭에 4톤의 카나리아를 싣고 가는 중이라 2톤의 카나리아는 항상 날게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 인생의 한 단면 같구나’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두들기며 삶의 많은 것을 날게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한다. 돌파구를 찾다가 부적절한 인간관계와 습관에 매이고, 일에 중독되고, 성에 탐닉한다. 거기에서 헤어 나오려 발버둥 치지만 벗어나지 못해 절망하거나 죄책감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나는 무력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분이 나를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나의 죄책감을 씻어 주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내 문제들을 아시고 해결해 주시며, 내가 변화되도록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당신이 결단하고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내 모든 삶을 주님의 보살피심과 다스리심에 맡기기로 의식적으로 선택하라! 하나님께 드리면, 그분은 새로운 의미와 생명을 더해 내 삶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돌려주실 것이다. [회복으로 가는 길]/ 릭 워렌
* 금언: 하나님은 우리 눈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어김없이 약속을 지키신다. - 콜린 울크하르트-
▣ 비움과 채움
두 친구가 똑같이 20킬로그램짜리 배낭을 지고 등산을 합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죽을힘을 다해 올라가는데 다른 친구는 가볍게 올라갑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배낭을 싸는 법이 달라서입니다. 등산을 많이 다닌 사람은 배낭 싸는 법을 잘 압니다. 가벼운 것을 아래에 넣고 무거운 것을 위에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무거운 것을 밑에 넣습니다. 이것이 아래로 잡아당기니 허리가 뒤로 젖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자신이 뭔가를 해 보려는 의지와 힘을 전부 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집중해서 순종하고 따르는 연습을 하십시오. 자꾸 내가 애쓰고 머리를 쓰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기쁘지 않고 지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길을 목자를 따라가는 양처럼 졸졸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양이 혼자 앞서 가 보겠다고 난리를 친다면, 목자인 예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우실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혼자 그 무거운 짐을 다 지고 살아왔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시고 모두 십자가 밑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물 흐르듯 임하시는 성령님의 만지심과 하나님의 부요가 채워집니다. 험한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충분한 은혜와 부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 송태근
* 금언: 0 선함 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고서는 누구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다.- 토마스 모펫 -
▣ 믿음으로 맡기라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찢어질 듯한 복통으로 뒹굴기 시작했다. 원인을 짐작할 수 없는 심한 복통에 집에 있던 온갖 소화제를 다 먹었으나 소용없었다. 의사의 진단 결과는 신장결석이었다. 꽤 큰 돌이 신장에 있어 고통을 주는 것이니 일주일 뒤에 와서 수술을 하자고 했다. 문제는 이틀 후부터 있을 예정이던 전교인 수련회였다. 나는 그 수련회 기간 중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었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깊은 산속에서 진행하는 수련회이고, 가까운 곳엔 병원도 없을 텐데 응급 상황이 벌어지면 어쩌나? 가지 말고 이곳에 있을까? 그러면 학생들은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진통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불안한 마음으로 수련회에 참석했다. 수련회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가기 직전 화장실에 들렀는데, 달그락하며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소변과 함께 나온 별 모양의 돌 덩어리였다. 이것이 내 몸 안에 있어 그토록 아프게 했구나! 순간 평안이 밀려왔다. 믿음으로 맡겼더니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묵묵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자세이다. 먼저 기도하라. 그리고 항상 감사하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결론을 맡기라. 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교회만이 희망이다』/ 홍성욱
* 금언: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바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 로버트 라이튼 -
▣ 독수리의 비상
본문 :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보통의 새들은 하늘을 날기 위해 날갯짓을 합니다. 이 날갯짓을 통해 새들은 자신의 뜻대로 날아갈 수 있지만, 대신 바람이 너무 강하거나, 폭풍이 몰아칠 때는 날지 못합니다. 게다가 기류가 심한 높은 하늘 역시 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조금 다릅니다.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바람의 흐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공을 날다가 바람의 흐름을 발견하면, 독수리는 날개를 고정시키고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깁니다.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길 줄 아는 능력 때문에 독수리는 폭풍우 속에서도 날 수 있고, 또 다른 새들보다 훨씬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독수리가 거친 바람 속에서도 높이 날 수 있는 것은, 바람을 헤칠 강한 날개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맡기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우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일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은혜의 흐름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높은 하늘로 비상하십시오. * 기도: 주님! 주님의 은혜의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기게 하소서! * 묵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김장환 목사, 제공 : 나침반출판사
▣ 승리를 위한 맡김
주님은 죄를 향한 우리의 투쟁에 자비를 베푸실 것이며, 온전한 승리를 이룰 때까지 인내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죽음에서 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능력, 즉 온전하고 죄 없는 삶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게 한 그 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원수가 우리에게 일으키고자 하는 모든 수작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당신은 “그러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은 어쩌구요?”라고 묻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 신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에 순종하라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보호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사탄의 모든 올가미로부터 그분이 우리를 인도해 내신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원수가 와서 과거의 정욕으로 유혹할 때 성령님을 부르십시오. 그분의 모든 속삭임을 경청하고 그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십시오. 그분을 밀쳐 내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당신을 위한 그분의 구속 역사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분께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도록 힘주시는 일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분은 지체 없이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자신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맡겨야 합니다.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친히 행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 「새 언약」/ 데이빗 윌커슨
* 갈릴리 공동체 (http://blog.naver.com/allcome) http://blog.daum.net/jesuskorea 후원계좌: 국민은행 083702- 04- 169089(갈릴리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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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추가 자료편(상처, 아픔)
▣ 드레싱
우리 몸에는 타고난 면역력이 있어서 상처부위의 세균을 닦아낸 후 다시 세균이 들어가지 않도록 소독만 깨끗이 해도 어지간한 상처는 낫게 마련이다. 그런데 몸의 상처에 있어서 드레싱이나 소독에 해당되는 것이 마음의 상처에 있어서는 위로다. - 최명기의《트라우마 테라피》중에서 -
* 드레싱은, 잘 아시는 대로 소독약으로 상처를 닦아주는 것입니다. 드레싱을 충분히 해주어야 상처가 더 잘 낫는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의 상처도 드레싱이 필요합니다. 뭉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맺힌 가슴을 쓸어주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상처가 쉽게 나을 뿐더러, 그 상처가 오히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누는 감사의 통로가 됩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상처의 힘
생채기 무수한 그릇을 다시 보듬어 안는다 이리저리 부딪쳐도, 끓는 물에 삶아대도, 악착같이 깨지지 않고 살아남은 건 상처의 힘, 내 온몸도 상처투성이다 - 임서령의 시 <상처의 힘>중에서 -
*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이 빠진 그릇이야 버리면 그만이지만 우리야말로 그릇으로 치면 여기저기 이가 나가고 손잡이도 여러 번 떨어져 붙이고 다시 붙인 그릇이 아닐까 싶습니다. 덜그럭 덜그럭, 요란스런 소릴 내며 깨지고 구르고, 그래도 열심히 목숨걸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가진 이 상처들은 모두 자랑이요, 영광의 상처들입니다. 열심히, 잘 살아왔다는 증거입니다. /홍승현(고도원의 아침편지)
▣ 상처와 사랑
성경: 요일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유기견 천상이에게는 끔찍한 과거가 있습니다. 진돗개라는 좋은 품종에 영리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인을 잘못만나 끔찍한 학대를 당했습니다. 턱과 이빨이 부러져 혀를 입안에 넣을 수도 없었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모습으로 거리에 버려졌습니다. 당시 구조된 천상이를 수술하며 치료해준 수의사 선생님은 몸도 문제지만 마음의 상처가 더욱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천상이는 구조된 뒤 치료를 받은 후에도 사람만 보면 몸을 심하게 떨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처받은 천상이의 마음을 치료해준 것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사설 유기견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는 정경원 씨는 천상이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자신이 직접 데려다가 보살펴 주었습니다. 천상이는 사람을 믿지 못했기에 먹이도 뱉어내고 정 씨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정 씨는 천상이를 쓰다듬어주고 보듬어주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정 씨의 꾸준한 사랑 덕분에 천상이는 정 씨를 믿고 따르고 마음의 상처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다행히 천상이는 좋은 사람을 만나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도 심하게 학대받은 동물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몸과 마음이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이 그들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기도: 주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게 하소서! * 묵상: 주변의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이고 위로하십시오. /김장환 목사, 제공 : 나침반출판사
▣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사를 했다. 단칸방에서 스물두 평의 방 세 칸짜리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순전히 주님의 은혜이다. 새로 이사한 집은 아이들 학교 소유의 사택이다. 교직원에게만 혜택이 주어지는 집을 하나님은 나와 두 딸을 위해 예비해 주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럴 때 아내만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나에게 아내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기에 천만금을 주어도 그것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는 어쩌겠는가. 천국에 간 사람을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내가 천국에 가서 만나는 길밖에는…. 어제는 한 선배가 그만 슬퍼하라고 했다. 보는 사람도 힘들다고. 슬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아직은 내 영혼에 금이 가 버린 모습을 감출 수 없나 보다. 모두가 자기 인생에 일어난 일을 두고 반응이 다르다. 난 아직도 마음껏 소리 질러 울어 보지 못했다. 목사이기 때문에, 선교사이기 때문에, 이 슬픔을 절제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난 지금도 내 안에서 절규하는 그 고함을 단 한 번도 질러 보지 못했다. 나의 절제된 소리는 신음 그 자체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심을, 그리고 그분이 나의 신음 소리까지 듣고 계심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은 웃어 봐야겠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한재성
▣ 한 노인의 슬픔
19세기 전설적인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에게 어느 날 한 노인이 스케치북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최근에 그린 그림들인데 유명한 ‘로제티’의 평을 좀 받고 싶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 노인은 ‘로제티’에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있는지를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로제티’는 찬찬히 그림들을 살펴보다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제티’는 할 수 없이 최대한 부드럽게 노인에게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었습니다. 노인은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어느 정도 각오한 듯 그리 놀란 표정을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다시 낡은 스케치북 하나를 더 꺼내더니 그 그림들도 한번 봐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자기가 잘 아는 어린 화가 지망생이 그린 그림들이라고 했습니다. ‘로제티’는 노인의 진지한 태도에 이끌려 그 그림들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놀랍게도 그 그림들이 아주 좋았습니다. 흥분한 ‘로제티’는 이 그림을 그린 젊은이는 아주 탁월한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바로 전문적인 화가 수업을 시작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노인은 충격을 받는 듯 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로제티’는 그 그림들을 그린 사람이 혹시 노인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이 그림들도 제 것입니다. 40년 전에 그린 것들이지요. 만약 그때 당신같이 뛰어난 화가가 바로 이런 칭찬을 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없었기에 저는 그때 너무 힘이 빠져서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당대에 이름을 날리는 화가가 될 수 있었던 한 젊은이가 후회만 남은 노인으로 변한 슬픔, 우리는 여기서 영향력 있는 한 사람의 칭찬과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금주 간에 우리 학생들이 수련회에 참가합니다. 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수련회로서 매우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프로그램은 여러분들의 관심입니다. 배움의 도전을 받고 있는 아이들 모두가 공통으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어른들의 칭찬과 격려입니다. 단 한번의 칭찬이 한 아이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금번 수련회를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꿈과 비전을 구체화하고 삶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얻고 돌아오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예수님의 슬픔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고 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일생은 한 마디로 슬픔이었다. 죄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는 것부터가 슬픔이었고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죄 가운데 끌려가는 무리를 바라보는 것도 슬픔이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건만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외면당하는 슬픈 현실을 겪으셔야 했다. 천국 진리를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완악한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무리가 슬프셨고 많은 이적을 통해 메시아임을 증거하셨지만 끝까지 메시아를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백성들이 슬프셨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고,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 당하고 심지어 가장 믿었던 수석 제자인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였을 때 예수님은 진정 슬프셨을 것이다. 이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은 슬픔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슬픔의 겟세마네 예수님의 일생에서 슬픔의 극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슬픔이다. 마침내 십자가를 질 때가 돼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때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예수님은 정말 죽을 만큼 슬퍼하셨다(마 26:37∼38).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게 되셨으니 그 영혼이 얼마나 외롭고 슬펐겠는가!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다. 이마의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진정 그 모습은 무거운 죄짐을 떠맡은 외로운 영혼의 슬픈 절규였다.
슬픔이 기쁨으로! 예수님의 슬픔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슬픔이 아니었다. 그 슬픔은 인간들이 마땅히 느껴야 하고 울어야 할 슬픔이었다. 하지만 죄악에 찌든 인간들은 죄악 가운데서 끌려가고 있으나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우리 대신 우리의 슬픔을 지신 것이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예언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그 결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했다. 예수님 역시 슬픔의 십자가를 이기고 기쁨의 면류관을 쓰시게 되었다. /박영진<성서원 회장>
▣ 슬픔을 맡기면
헤리 로더라는 가수는 공연 중에 자신의 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고 공연을 마쳤습니다. 공연 후, 헤리는 아들의 시신이 있는 야전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대신에 오히려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헤리 로더는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고난을 맞는 인간의 태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비관해서 좌절하든지, 술을 계속 마셔서 파멸하든지, 하나님께 슬픔을 맡겨 자유하든지.... 저는 하나님께 저의 슬픔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와 힘을 공급해 주셨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찬양을 통해 고난 중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삶의 정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 슬픔 극복 지혜
미국의 시인인 롱펠로는 어느날 아내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달려가 보니 그녀는 촛불로 일을 하다가 실수해 옷에 불이 붙었고 심한 화상을 입었다. 결국 그녀는 그 화상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얼마동안 롱펠로는 그 때의 무서운 경험이 생각나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 자식 셋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초월하여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을 해야 했다. 그는 아이들 손을 잡고서 함께 공원을 걸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같이 놀았다. 또 아이들을 위해서 단테의 ‘신곡’을 번역했다. 그는 이처럼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기 때문에 자신의 비탄을 잊어버렸으며 마음의 평화를 회복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모든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다. 우리는 이 참사를 지혜를 모아 극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예방을 해야 한다. 1년이 걸려도 2년이 걸려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이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떠난 그들의 삶까지 우리가 살아야 한다. 하나님,우리가 일에 몰두하여 이 슬픔을 슬기롭게 극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최염순(카네기연구소장)
▣ 슬픔에서 벗어나는 법
이 세상 살아가며 슬픔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을 모두가 다 이겨내는 것은 아닙니다.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10가지 방법이 있더군요. 실천해 보십시오. 01.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라. 02. 슬픔을 삭이지 말고 밖으로 드러내라. 03. 지난 것은 잊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라. 04. 잃은 것을 생각지 말고 남은 것만을 생각하라. 05. 자기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용서하라. 06.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라. 07. 이제 ‘왜’라는 의문을 내던져 버리라. 08. 몸을 움직이라. 육체적인 일을 하되 가치 있는 것에 열중하라. 09. 슬픔을 믿음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라. 10.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 주님께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naver.com/newgalilee 후원계좌: 국민은행 083702- 04- 169089(갈릴리 공동체) |
주제별 추가 자료편(슬픔, 눈물)
▣ 예수님의 슬픔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고 예루살렘에서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일생은 한 마디로 슬픔이었다. 죄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는 것부터가 슬픔이었고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죄 가운데 끌려가는 무리를 바라보는 것도 슬픔이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건만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외면당하는 슬픈 현실을 겪으셔야 했다. 천국 진리를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완악한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무리가 슬프셨고 많은 이적을 통해 메시아임을 증거하셨지만 끝까지 메시아를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백성들이 슬프셨다.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고,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 당하고 심지어 가장 믿었던 수석 제자인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였을 때 예수님은 진정 슬프셨을 것이다. 이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은 슬픔으로 점철된 생애였다.
슬픔의 겟세마네 예수님의 일생에서 슬픔의 극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슬픔이다. 마침내 십자가를 질 때가 돼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때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예수님은 정말 죽을 만큼 슬퍼하셨다(마 26:37∼38).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게 되셨으니 그 영혼이 얼마나 외롭고 슬펐겠는가!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셨다. 이마의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진정 그 모습은 무거운 죄짐을 떠맡은 외로운 영혼의 슬픈 절규였다.
슬픔이 기쁨으로! 예수님의 슬픔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슬픔이 아니었다. 그 슬픔은 인간들이 마땅히 느껴야 하고 울어야 할 슬픔이었다. 하지만 죄악에 찌든 인간들은 죄악 가운데서 끌려가고 있으나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우리 대신 우리의 슬픔을 지신 것이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예언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그 결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했다. 예수님 역시 슬픔의 십자가를 이기고 기쁨의 면류관을 쓰시게 되었다. /박영진<성서원 회장>
▣ 슬픔을 맡기면
헤리 로더라는 가수는 공연 중에 자신의 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고 공연을 마쳤습니다. 공연 후, 헤리는 아들의 시신이 있는 야전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대신에 오히려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헤리 로더는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고난을 맞는 인간의 태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비관해서 좌절하든지, 술을 계속 마셔서 파멸하든지, 하나님께 슬픔을 맡겨 자유하든지.... 저는 하나님께 저의 슬픔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와 힘을 공급해 주셨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찬양을 통해 고난 중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삶의 정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 슬픔 극복 지혜
미국의 시인인 롱펠로는 어느 날 아내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달려가 보니 그녀는 촛불로 일을 하다가 실수해 옷에 불이 붙었고 심한 화상을 입었다. 결국 그녀는 그 화상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얼마동안 롱펠로는 그 때의 무서운 경험이 생각나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 자식 셋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초월하여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을 해야 했다. 그는 아이들 손을 잡고서 함께 공원을 걸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같이 놀았다. 또 아이들을 위해서 단테의 ‘신곡’을 번역했다. 그는 이처럼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기 때문에 자신의 비탄을 잊어버렸으며 마음의 평화를 회복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모든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다. 우리는 이 참사를 지혜를 모아 극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예방을 해야 한다. 1년이 걸려도 2년이 걸려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이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떠난 그들의 삶까지 우리가 살아야 한다. 하나님,우리가 일에 몰두하여 이 슬픔을 슬기롭게 극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최염순(카네기연구소장)
▣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사를 했다. 단칸방에서 스물두 평의 방 세 칸짜리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순전히 주님의 은혜이다. 새로 이사한 집은 아이들 학교 소유의 사택이다. 교직원에게만 혜택이 주어지는 집을 하나님은 나와 두 딸을 위해 예비해 주셨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럴 때 아내만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나에게 아내는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기에 천만금을 주어도 그것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는 어쩌겠는가. 천국에 간 사람을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내가 천국에 가서 만나는 길밖에는…. 어제는 한 선배가 그만 슬퍼하라고 했다. 보는 사람도 힘들다고. 슬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아직은 내 영혼에 금이 가 버린 모습을 감출 수 없나 보다. 모두가 자기 인생에 일어난 일을 두고 반응이 다르다. 난 아직도 마음껏 소리 질러 울어 보지 못했다. 목사이기 때문에, 선교사이기 때문에, 이 슬픔을 절제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난 지금도 내 안에서 절규하는 그 고함을 단 한 번도 질러 보지 못했다. 나의 절제된 소리는 신음 그 자체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심을, 그리고 그분이 나의 신음 소리까지 듣고 계심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은 웃어 봐야겠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한재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