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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고 격려하라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13.06.22|조회수294 목록 댓글 0

위로하고 격려하라

 

본문 : 이사야 40;1~8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식불명인 형을 지키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명의 방문객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위로할 수 있는 적절한 말, 완벽한 성서 귀절,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의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침대 옆에 오랫동안 서 있었습니다. 긴 침묵이 이어졌고, 돌아서서 동생과 악수를 했습니다. 필요한 것보다 조금 더 손을 잡았고, 힘을 주었으며,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형이 죽고 여러 해가 흘러도 동생이 기억하는 방문객은 조용히, 진심으로, 꾸밈없이 위로하던 그 사람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 정작 상대방이 바라는 건 조용히 들어주는 것과 잠시나마 안아주는 따뜻한 포옹이었는데도 내 말을 더 많이 하고 내 말을 더 들어주기를 원하여 상대방의 정신을 어지럽게 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 봅시다.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러 왔으나 욥은 친구의 말이 오히려 더 고통이 되었습니다.(욥2:11) 우리는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내 주위에 내 작은 위로가 필요한 곳은 없는지 잘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사업에 실패한 사람, 돈이나 권세가 없는 사람입니까? 어려울 때 위로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자가 가장 불쌍합니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전도서 4:1) 종말의 때는 삶의 패러다임이 너무나 급변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삶에 많은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사업에서 실패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자녀들의 문제로 많은 가정들이 상처들이 입습니다. 영적 공허함으로 지친 사람이 많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삶이 편하게는 되었지만 거기서 오는 많은 상처들이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함께 삶을 나누지 못하고 마음의 깊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뼈와 관절의 심한 질환으로 언제나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릴 때도 적응하지 못해 늘 소외됐습니다. 이런 아이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아버지의 교훈과 격려였습니다. 아버지는 「너의 상처를 찬란한 별로 만들라」고 말하며 꿈과 힘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아이는 후에 영국외과학회 회장, 국제외과학회 회장을 지내는 훌륭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현대성형수술의 창시자인 해리 플래트 경입니다. 그는 1986년 1백세로 작고했습니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후서 2장 16~17절)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노만 빈센트 필 목사는 대학 졸업을 하루 앞둔 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졸업생을 위한 환송 파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대학총장인 존 호프만 교수와 함께 길을 걷게 된 데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총장 사택 앞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총장은 필 목사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게 ! 나는 자네를 참으로 좋아하네. 그래서 평소에 눈여겨보았었는데, 자네는 참으로 소질이 많은 사람이야. 장차 큰 인물이 될 걸세. 내 말을 명심하게.」

필 목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총장의 말을 머리에 되뇌었습니다. 대학졸업을 앞둔 마당에 총장으로부터 그러한 칭찬을 들었으니 누가 뭐래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겠는가 ? 그는 그 날뿐 아니라 평생토록 총장의 말을 간직했고, 또 그러한 인물이 되고자 애썼습니다. 한 마디의 격려가 그의 일생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일에 대한 성취 여부는 그 동기가 크게 좌우합니다. 대학 총장의 격려 한 마디가 그러했습니다.

한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마디의 격려가 아닐까요. 어릴 적 부모님의 따스한 한마디, 선생님의 신뢰 어린 격려 한마디로 인생의 좌표를 굳게 설정한 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비록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물결이 모여 큰 물결이 되고, 그 힘은 일찍이 꿈꾸지도 못했던 거대한 제방을 허물어뜨립니다. 부모와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 우리 인생 진로에 미치는 영향력, 참으로 지대합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 한 근원도 그때 그 분의 격려 한마디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너무들 각박하게 사느라 그 고마움을 잊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위로해야 합니까? 위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이 명하신 성도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고후13:11)

본문 1절에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우리는 위로하며 살아야 합니다. 위로하되 2절에 「정다이」마음에 닿도록 말하라 하셨습니다. 위로는 던지듯 내뱉는 말이 아닙니다. 다정히 친절하게 전해야 합니다. 많은 말보다 함께 해주고 울어주고 정답게 감싸주는 것이 힘있는 위로가 됩니다.

위로하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3절). 광야처럼 거칠고 메마른 심령으로는 위로할 수 없습니다. 남을 찌르는 비판이나 상처 주었던 마음으론 위로할 수 없습니다. 교만의 골짜기, 세상 자랑하는 마음도 낮아져야 하나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8절)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말, 내 경험, 책에서 본 내용으로 위로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말라버리고 시듭니다. 영원히 남는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할 때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데드맨 워킹」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 팔리 신부와 검사 같은 󰡐법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 헬렌 수녀와 같이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사형수 매튜와 같이 죄지은 인생입니다. 이중에 헬렌 수녀는 사형수와 같이했고 기도해주었고 살려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리들 역시 헬렌 수녀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갈길 몰라 헤매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기도해주고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며 삽시다.

 

둘째, 위로자이신 하나님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롬15:5, 고후1:3,4)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오늘 본문 가운데 첫 절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근본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 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하였습니다

 

셋째, 우리도 다른 이에게서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고후7:7)

유명한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어린 시절 글쓰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정작 글을 잘 쓰지는 못했습니다. 열한 살 때, 안데르센은 나름대로 힘들여 쓴 작문을 들고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무안함과 실망에 빠진 안데르센은 집에 돌아와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울고 있는 아들을 본 안데르센의 어머니가 그의 작은 손을 잡더니 화단에 데리고 갔습니다.

「한스야, 여기 이 꽃이 참 예쁘게도 피었구나. 하지만 이 꽃 옆엔 싹이 난 지 얼마 안 된 아주 작고 어린 잎사귀도 있잖니. 이 잎사귀는 자라려면 아직 멀었다. 이 잎사귀는 자라서 꼬-옥 예쁜 꽃을 피울게다. 넌 아직 이 어린 잎사귀와 똑같다. 그러니 언젠가는 환하고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어머니는 훌쩍이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습니다. 뒤로도 안데르센의 글 솜씨는 사람들에게 좀처럼 칭찬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안데르센은 절망에 빠져 울고 싶을 때마다 엄마가 하신 그 말을 기억하고 동화 쓰기를 계속하였고 마침내 위대한 동화작가가 되었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66:13)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정도 성장한 형제자매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과오 중 하나는 자기보다 어린 형제자매들에게 격려 받는 것을 무의식중에 회피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어린 형제이건 성장한 형제이건 다른 형제들로부터 격려와 위로를 받아본 적이 없다면 남을 격려할 밑천도,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격려하는 것이나 격려 받는 것은 둘 다 특권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남을 격려하는 것이나 남에게 격려 받는데 인색하거나 체면 차리지 말기 바랍니다. 격려와 위로는 성장한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내리는 하사품이 아닙니다. 사랑과 선행의 격려는 서로서로 하는 것입니다.

 

넷째, 서로를 온전케 하고, 고난을 이길 힘을 얻게 해주기 때문입니다.(고후1:6)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지휘자의 고백입니다.

나는 초등학교 육학년 때 나보다 훨씬 먼저 바이올린을 시작한 동년배들에 둘러싸여서 교내 교향악단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악보를 읽는 법은 알았지만 좌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손가락은 모두 엄지손가락처럼 여겨졌고 활을 켤 때마다 기관차가 브레이크를 잡는 듯한 쇳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집에서 눈물겹게 연습했습니다. 두 마리의 애완용 고양이가 집밖을 돌아다니며 시끄럽다고 울어댔습니다. 나는 제2의 바이올린 주자석에 얼굴을 묻고서 "희망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었습니다. 어느 날 오케스트라 단장이 나의 실력을 점검해 보기 위해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눈물을 찔끔거렸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다리다가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네가 연주를 잘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나도 알아. 그리고 나는 네가 아주 잘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알았으면 좋겠단다. 너는 아주 빨리 향상되었구나,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렴.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확신을 심어주는 그 말이 동기가 되어 나는 계속해서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5년 뒤에 나는 고등학교 교향악단의 수석 주자의 위치에 앉았습니다. 내가 동년배들의 말에 굴복했다면 그렇게 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 나를 격려해 준 사람이 상황을 바꿔 놓았습니다.' 상대방을 세워주고 적극적인 자질을 기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13:11)

 

다섯째, 위로는 용기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소설 <아이반호>로 유명한 영국의 계관시인 월터 스콧은 어린 시절 '멍청한 아이'로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열등생들이 쓰는 종이모자를 쓰고 교실 한 구석에서 침울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스콧은 문학에 관심이 있어 좋은 시를 보면 열심히 외웠습니다. 그가 열세 살쯤 되었을 때 유명한 문필가 모임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그의 운명이 변했습니다. 당시 유명한 시인이었던 로버트 번즈가 우연히 스콧의 시 암송을 듣고는 "꼬마야, 너는 언젠가 영국의 위대한 인물이 될 거다.." 라고 칭찬했습니다. 번즈의 칭찬을 받은 이 '열등생'은 그때부터 용기와 꿈을 가지고 인생을 개척, 1800년대에는 영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시인, 소설가, 법관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용기를 복돋워 주는 말은 한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여섯째, 위로는 상한 심령을 치료해 주기 때문입니다.(사61:1)

휘튼 대학의 교목인 레로이 팻 패터슨 목사님이 어느 날 프로 야구 팀을 위해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목사님은 한 선수가 대단히 의기소침해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내 며느리가 아주 열성적인 야구팬인데, 수년 동안 당신을 좋아했었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을 걸었는지 그녀는 정말 알고 싶어할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놀란 그 선수가 대답하기를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나는 오늘 아침 막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는데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선수의 실력을 칭찬하면서 프로 야구에 계속 남아 있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다음 주 그 선수는 야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고 목사님께 편지해 왔습니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격려의 말이었습니다.

 

일곱째, 신앙생활에 열심을 더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행16:40)

미국 테네시 주의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체구가 몹시 작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였습니다. 마을의 어른들은 자기 자녀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벤 후퍼와 함께 노는 것을 원치 않았고, 친구들도 그를 놀리며 멸시하였습니다. 벤 후퍼가 12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교회에 젊은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벤 후퍼는 그때까지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젊은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 시간에 좀 늦게 예배당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 시간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주일, 벤 후퍼는 목사님의 설교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잠시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에 예배가 끝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벤 후퍼도 사람들 틈에 끼어 나오면서 목사님과 악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벤 후퍼를 보고,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 하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환한 얼굴로 벤 후퍼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누구 아들인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당황하여 빠져나가는 벤 후퍼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주지사 벤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을 만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

말씀의 위로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므로 환난 중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살전3:2,3),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영혼이 소성케 해줍니다. (애1:16)

 

여덟째, 성도간에 사랑을 돈독히 하고 사랑과 선행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고후7:5-7)

성경에 보면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룻을 위로하고 기쁘게 한 보아스(룻2:13)와 환난 당한 성도들을 위로한 디모데와 바울의 모습(살전3:3) 등에서 성도간의 사랑과 위로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가장 많이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근심 걱정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 자는 이론으로 알고 있을 뿐 피상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허다한 쓰라린 일을 겪고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극복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의 경험을 통하여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그 많은 환란과 고통 그리고 그 가운데서 받은 위로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미국에 뷸라라는 한 성실한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갑자기 급성 관절염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몸은 손을 쓸 새도 없이 굳어졌습니다. 오른쪽 손가락의 신경만 왕성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하늘과 운명과 세상을 원망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오른쪽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전화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뷸라는 병실에 전화를 설치하고 병상의 환자들과 가족, 친구를 잃고 슬픔에 젖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새로운 삶을 다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전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육체의 장애가 오히려 봉사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너무 깊숙히 감추어 놓았을 뿐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24)

 

아홉째, 위로는 새 힘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사40:28- 31)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것도 특정한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고루 재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타고난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그림 󰡐모나리자󰡑는 밀레의󰡐만종󰡑과 함께 세계 미술사를 빛낸 걸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또한 그가 스케치한 비행기 모형도가 인류가 하늘을 나는 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의 천동설을 뒤집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천문학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불어 그는 인체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연구에 몰두한 의학자, 과감한 실험정신으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낸 발명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스케치했던 자전거 모형도는 현대인들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폐달과 체인의 모양까지 갖추고 있고 치밀하게 계산된 잠수함 설계도는 수많은 해양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다빈치도 어렸을 때는 고아라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는 소극적인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싫어했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힘없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키웠던 할머니는 다빈치가 집을 나설 때마다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여주었다고 합니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할머니는 너를 믿는다.󰡓

할머니는 숨을 거두던 날까지 그 말을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인정해줌으로써 그 사람을 살릴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위로와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윌리엄 버클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최상의 의무 중에 하나는 격려의 의무입니다. 다른 사람의 정열에 찬물을 끼얹기는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절망시키기는 더욱 쉽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좌절시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격려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한마디의 칭찬이나 격려의 말로도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합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위로와 격려는 좌절의 사막에서 헤메이는 사람에게 유일의 오아시스가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멀리하고 거부할 때 그에게 찾아가 삶의 소망과 의지를 불어 넣어줄 때 그는 소생할 수가 있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걸어가는 동안에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진맥진해서 이제는 더 이상 걸어가기 어려운 상태에 있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실패하여 넘어져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 버림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격려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옆에서 격려해 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여러분 중에 상처받은 심령이 격려를 받아 새롭게 다시 소생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격려 받아 복되고, 이웃을 격려해서 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지금 이 시간 힘들고 슬프며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거나 하루 종일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야 하는 사람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사람들, 슬픈 마음을 안고 밖에 나갔지만 집에 돌아와도 아무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분들, 하루 동안 실망스럽고 마음 아픈 일을 당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슬픔과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 안에서 피난처와 용기를 발견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을 찾게 하옵소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갈 용기를 주시고 말씀으로 위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빛의 사자(갈릴리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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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지 맙시다. 거짓, 이단, 외식

2012/12/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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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지 맙시다.

 

본문: 잠19:9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 가운데 늑대와 소년 이야기가 있습니다. 늑대가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을 속여 놀라게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것이 재미가 있어 또 거짓말로 늑대가 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또 한 번 대소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진짜 늑대가 나타난 것입니다. 놀란 소년은 고함을 지르고 울면서 나타났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어 결국 늑대에게 해를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이란 얼핏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요,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정도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을 잘해서 위기를 피해 가는 것이 세상사는 지혜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농담처럼 하는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이나 사소한 거짓말이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처음부터 큰 거짓말이나 큰 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옛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나중에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거짓말을 큰 죄로 여기기보다는 전술과 전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거짓말을 섞어서 정치를 하고 목회도 합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사회가 있다면 폭력의 사회보다도 거짓말의 사회일 것입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정부나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신뢰를 잃어버린 목사나 교인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지옥 그 자체일 것입니다. 모든 죄악의 뿌리에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사단의 거짓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인간은 언제나 거짓말의 위험과 유혹 속에서 살아갑니다. 성경에 나타난 거짓말에 대한 세 가지 모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모델은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입니다. 그는 병 고침을 받은 나아만을 쫓아가 우리 주인 엘리사가 보냈다고 거짓말하여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취해 집에 감추었다가 결국은 나아만의 문둥병이 자신과 자손에게까지 옮겨졌습니다.(왕하5:20-27)

둘째 모델은 아간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승리의 비결을 성결과 순종에 두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법궤를 앞세우게 했고 백성들을 스스로 성결케 했습니다.(수3:5),여리고 정복 때도 여호수아로 하여금 모세처럼 선 곳에서 발의 신을 벗게 했습니다.(수5:15),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청결을 위해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게 했고 전리품을 취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수6:16) 그러나 아간은 노략질한 물건 가운데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러한 작은 실수가 급기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성 전쟁에서 참패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있어 거짓말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짓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아간을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게 했고 그 모든 탐욕의 물건을 불에 태워 없에 버린 것입니다.

셋째 모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델입니다. 그들은 밭을 판 돈의 얼마를 몰래 감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행전5장3-4에 보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말은 사람에게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게 한 것이요, 그것은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거짓말이 아니라 사단의 조정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사단의 전략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의 거룩하고 성결한 공동체 안에 거짓말을 심는데 있습니다. 사단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에게 거짓말로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 범죄를 심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부흥하며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에 거짓의 영을 몰래 심어 놓으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이 왕성하고 활동이 많은 교회나 사역자나 단체 안에 거짓의 영을 심어서 결국에는 사단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에 대한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 가? 를 살펴봅시다.

 

1. 거짓 행하는 자와 함께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한 신사가 길을 걸어가다가 맹인소녀가 동전통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것이 불쌍하게 생각돼 지갑에서 1만 원짜리 지폐 1장을 꺼내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녀가 눈을 크게 뜨고 큰 액수에 놀라는 눈치로 지폐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사는 「얘야, 너는 맹인이 아니지?」라고 물었습니다. 소녀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아저씨, 미안해요. 사실은 우리 아저씨 대신 앉아 있는 거예요」 신사는 다시 질문했습니다.「그럼 너희 아저씨는 어디 가셨니?」 소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예, 저희 아저씨는 조금 전에 영화 보러 가셨어요.」 많은 이들이 이 사회에 진실이 없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 사람들보다는 일시적으로나마 위기를 모면해보려고 부인하고 변명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을 멀리합시다.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101:7)

 

2. 거짓에서 떠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에서 거짓말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날 최고상을 받은 챔피언의 거짓말은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다󰡓였습니다. 1997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사람이 하루에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갈 까를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사람은 하루에 8분에 한 번 꼴로 200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20명의 몸에 소형 마이크를 부착해 조사했는데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은 약속시간 늦었을 때󰡐차가 막혀서󰡑였고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직업으로는 점원 정치인 언론인 변호사 세일즈맨 심리학자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30: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6)

 

3. 거짓을 미워해야 합니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119:104)

한 주일학교 성인반 교사가 성경공부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주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그러니 예습하는 차원에서 마가복음 17장을 모두 읽어 오세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말대로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음주가 되자 교사는 성경공부 참석자들에게 「지난주에 마가복음 17장을 읽으신 분 손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참 재미있군요. 마가복음은 16장까지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적절한 교훈을 배우게 되겠군요. 오늘은 예수님이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겠습니다.」

거짓말에 대한 가장 엄한 형벌은 거짓말이 들통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되는 「숨겨진」 처벌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세요! 진실 앞에서는 당혹감도 훨씬 덜할 것이고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입니다. 진심을 말함으로 한동안 고통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용기를 귀하게 보시고 옳은 일을 택한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 이르느니라(잠13:5)

 

4.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국민회(Korea National Assembly) 중앙총회장의 직책으로 여러 지방을 순회하던 중 기차를 타려고 정거장에 나왔을 때였습니다. 한 간부가 말하기를 「이번 여행에 경비가 모자라 여기 어떤 한국 목사님의 신분증을 빌려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목사 행세를 하시면 철도운임을 할인 받을 수 있습니다」 도산 선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하다가 들키면 나의 신용도 떨어지고 또 목사의 신용도 떨어질 것이니 그럴 수 없는 일이오. 경비가 모자라면 다시 돌아가 며칠 있으면서 돈을 조금 더 장만해 가지고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아마도 도산 선생은 마음 속으로 자신과 목사의 신용도 보다도 신용 본위 사회인 미국에서 한국인의 신용도가 떨어지는 것을 먼저 떠올렸을 것입니다.

각종 의혹이 난무하면서 도대체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1~2년 뒤면 밝혀질 일들에 대해 누군가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는 잠언의 말씀과 함께 「꿈에 거짓말하였거든 깨어나서라도 반성하라」는 도산 선생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습3:13)

 

5. 거짓 증거에 대해 인내해야 됩니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행6:13)

십계명 가운데 제 9계명에도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웃을 해치려고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왕상 21:7 이하에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깡패들을 사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증거하게 하여 나봇을 때려죽이고 자기가 그 땅을 차지했다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깡패들은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나봇을 죽였고, 이세벨은 그 일을 배후에서 지휘하였습니다. 법적 증언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데, 그 일을 함부로 하여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는 게 십계명 중 제9계명의 뜻입니다. 법정의 거짓말뿐 아니라, 소문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도 이 계명에 저촉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니, 특별히 말을 조심하여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말로 남을 죽게 했으면 그 사람은 살인자인 것입니다. 거짓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에 대하여 특별히 모든 크리스천들은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작은 거짓말을 쉽게 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편과 때에 따라서 작은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거짓말이나 큰 거짓말이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거짓말의 영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요, 더러운 일입니다. 작은 거짓말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곧 더 큰 거짓말을 쉽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거짓말을 요구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화로 나 찾으면 없다고 해줘요.」 라고 부장님이 부탁하는 경우입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해 그 분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 이와 같은 경우라면 「안 계십니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지금은 통화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상냥하게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직업인들은 지금 당장 편하고 싶거나 눈앞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기 위해서 치르는 값보다 거짓말을 함으로써 치르는 값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일터에서 정직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성경적인 윤리 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많은 내용들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 서적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우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나 ‘어떻게 하지?’하며 당황하지 말고, 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실제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크리스천 직업인들이 작은 일에서부터 정직과 진실함을 연습합시다.

둘째, 농담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나를 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웃기기 위하여 유머로 거짓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죄라기보다 재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농담처럼 하는 말속에 무서운 사단의 궤계가 자리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유머나 농담으로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비꼬거나 비판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아주 교활하고 정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직업별로 잘하는 거짓말을 보면

모범생 : 아휴! 이번 시험은 완전히 망쳤어!

회사원 : 예, 다 되갑니다.

옷가게 주인 : 어머! 언니한테 딱이네. 완전 맞춤복이야.

수능 출제위원 : 이번 수능시험은 정상적인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들만 출제했습니다.

남대문 리어카 아저씨 : 이거 밑지고 파는 거예여.

정치가 :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어여.

교장 선생님 : 에..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간호사 : 이 주사는 하나도 안 아파요.

연예인 : 우린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엄마 : 대학가면 살 빠지니까 지금은 부지런히 먹어.

선생님 : 이건 꼭 시험에 나온다!

웨딩사진사 : 내가 본 신부 중에 젤 이쁜데여.

비행기 조종사 : 승객 여러분 아주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A/S 기사 : 이런 고장은 처음 봅니다.

약장수 : 이 약 한 번 잡숴 봐! 팔 다리 어깨 허리 간장 위장 소장 대장이 다 시원해집니다!

수석 합격생 : 잠은 충분히 자고, 학교 공부만 충실히 했고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

미스코리아 : 그럼요! 내적인 미가 더 중요하죠.

중국집 주인 : 아이구, 음식 갖고 금방 출발했습니다.

학원원장 : 전국 최고의 합격률을 자랑하죠.

신인 배우 : 외모가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여.

사장 : 우리 회사는 바로 사원 여러분의 것입니다.

노동자 : 내일 당장 때려치운다 !

 

셋째, 과장에서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과장입니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과장이란 진실이 없는 포장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레19:11)

 

넷째, 선의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선의로 거짓말을 합니다. 또는 그 사람을 위로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좋은 동기라 할 지라도 결국에는 아닌 것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즉 좋은 의도라 해도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가난한 친구를 도와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 차를 들이받아서 보험을 타게 하는 일은 선행이 아니라 범죄입니다. 친구가 나쁜 짓을 한 것을 알면서 자기는 모른다고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엉터리 진단서를 끊어서 불쌍한 사람을 군대에 가지 않게 하는 것도 안 됩니다. 세레 받지 않은 사람을 취직시키려고 세례 증명서 만들어 주는 일,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인 줄 알면서도 좋게 추천서를 써 주는 일등도 모두 범죄입니다. 사적인 것만 생각하여 공적인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대리출석을 해 줘도 안 되고, 나이나 직업이나 고향을 속여서도 안 됩니다. 거짓의 반대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진실에 목말라 있습니다. 진실이 없을 때 정의도 없습니다. 그리고 거룩과 순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정부를 원합니다. 우리는 정직한 국민을 원합니다.

거짓말하는 자의 결과는 어떠할까요?

 

1. 반드시 드러나고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병원에서 시어머니를 간병하는 한 며느리가 어느 날 시어머니의 소변을 받아 검사실에 갖고 가다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의 병은 소변으로 치료를 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핀잔을 듣기 싫은 며느리는 자기 소변을 받아서 갖다 주었습니다. 얼마후 의사가 시어머니에게 오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시어머니는 병이 나았다는 말로 알아듣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임신하였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시어머니는 기절하였습니다. 며느리의 거짓은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요즈음 새끼 손가락만한 컴퓨터 칩 하나에 200권의 책이 들어가고 2000장의 사진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일생의 말과 행동을 바늘만한 칩에 다 기록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컴퓨터에는 개인의 일생이 다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 속여도 하나님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잠14:25)

 

2. 형벌을 면치 못하고, 패망합니다(잠10:10, 잠19:9)

열 두 살 난 소년이 한 소송의 중요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한 변호사가 집중적으로 심문한 후에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지, 그렇지?」 「예.」하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우리들에게 말해 줄래?」 하고 변호사가 채근했습니다. 「제가 증언할 때 변호사가 제 말을 뒤죽박죽 되게 만들려고 하겠지만, 제가 조심하고 진실만 말하면 매번 옳은 것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라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으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의 부정직함으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거짓말을 한 사람은 자신의 속임수의 거미줄에 걸리게 됩니다. 거짓말에는 엄중한 형벌이 따르고, 거짓말하는 사람의 결국은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소한 것이라도 진실이 아닌 것은 입에 담지 말고 정직을 실천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사회에 팽배한 불신을 몰아내고 정직한 세상을 이루어 나가야겠습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잠19:5)

 

3. 유황 불 못에 들어가고(계21:8-2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계22:15)

예전에 온 매스컴이 떠들썩하게 보도한 불교계의 거목 성철 스님이 있습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한 마디로 대단한 고행을 한 사람입니다. 결혼 직후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그 이후로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십 년 동안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십육 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능한 얘긴지 모르겠는데 팔 년 동안 장좌불와, 눕지 않고 앉아서 잤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수양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행을 쌓고도 심령과 양심에 평안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성철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열반송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가 평이한 말로 풀어서 한 번 소개해보겠습니다.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렸있다."」요약하면 한평생 동안에 무지무지하게 많은 사람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산채로 지옥에 떨어지 겠다는 것입니다.

 

4. 입이 막히고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고,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합니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로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시63:11)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102: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20:17)

 

5. 거짓은 잠시동안(일시성)만 있습니다.

젊은 변호사가 멋진 사무실을 빌리고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상을 주려고 사치스러운 전화기를 구입했습니다. 그 전화는 아직 가설되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젊은 변호사는 일부러 그를 밖에서 15분쯤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대단한 인상을 주기 위해 수화기를 들고 정말로 통화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네, 국장님이십니까? 국장님, 그건 시간 낭비입니다. 아, 네 정 그러시다면 하지만 만 파운드 이하로는 안됩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안녕히 계십시요.」 변호사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습니다. 손님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젊은 변호사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 ... 전화를 가설하러 왔는데요.」 거짓은 잠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잠12:19)

오늘, 우리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최대 위기는 정직하지 않다는 평가를 세상으로부터 듣는데 있습니다. 정직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고 정직하려면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직의 대가는 하늘의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이 보여도 모든 것을 다 얻게 되는 것이 정직입니다. 결혼 대상자의 첫 번째 조건을 인물보다는 정직한 사람으로 생각해보십시오. 회사나 조직에 사람을 구할 때 첫 번째 조건으로 능력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십시오.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고(신6:18-19, 시11:7, 잠12:19, 22, 잠14:11), 거짓말하는 자는 망합니다.(계21:27, 계22:15)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정직하고 진실한 분들이 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축복 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하나님,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던 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춰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이 땅의 교회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방황하고 있음을 용서하소서. 어둠의 세력들 때문에 이 땅의 백성들은 점점 완악해지고, 폭력과 음란으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불신과 거짓이 가득하고 용서와 사랑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주님, 이 땅의 교회들이 거룩하신 주의 말씀의 실천자가 되어 밝은 빛으로 드러나게 하소서. 사랑의 빛으로 미움이 물러가게 하시며 평화의 빛으로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게 하소서. 진리의 빛으로 거짓이 물러가게 하시며 선의 빛으로 악이 물러가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어둠 가운데 방황하는 모든 이를 생명의 길로 돌아오게 하소서. 우리의 피난처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힘있고 정직하게 살게 하소서. 우리의 이웃들이 주님에 대한 거짓 증언에 넘어가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정부와 경영자, 그리고 국민이 되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정직하고 생기있는 이 나라와 민족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갈릴리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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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 감사, 불평, 원망

2012/12/1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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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

 

본문: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얼마 전 신문에 성정식이라는 평범한 여인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녀는 전주 예수병원에 입원한 남편을 6년 동안 간호했습니다. 말도 못하고, 눈도 못 뜨고, 의식도 없이 완전히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6년 동안 헌신적으로 보살폈습니다.

결혼한 지 5년 되었을 때 남편이 조깅 나갔다가 오토바이에 치여서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4살된 딸과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아들을 친정에 보내고 그때부터 남편 병간호를 했습니다. 잠시도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습니다. 밤에도 2시간마다 일어나서 몸을 뒤집어 다시 눕혀 주었습니다. 오래 누워 있는 환자는 1년만 지나면 욕창이 생기는데, 이분은 6년동안 누워 있었어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옷도 자주 갈아입히고, 대소변을 못 가리는 남편의 기저귀를 늘 갈아주었습니다. 남편은 말 한마디 없이, 눈 한 번 뜨지 않고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6년을 누어 지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회복될 가능성이 0.1퍼센트도 없으니 포기하라고 했지만 부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늘 감사하며 한 번도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불평했더라면 일찌감치 남편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남편이 죽지만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남편이 살아만 있으면 평생 동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 남편에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뽀뽀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6년 만에 이 남편이 눈을 뜨고 의식이 회복되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영부인이 축전을 보내고 나라가 온통 야단이 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부인에게 병원 입원비가 2억 원이 넘는데 걱정이 안 되느냐고 물으니까 내가 건강하고 남편이 일어났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더랍니다. 남편이 일어난 것만 해도 말할 수 없이 감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감사해야 합니다. 식물인간을 6년 동안 보살피면서도 그렇게 행복해 하는데 건강한 남편과 살면서 웬 불평이 그렇게 많습니까? 불평하지 마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 12- 14)

건강의 비결은 외적인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정신세계는 과연 무엇입니까? 정신성은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 즉 웃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웃고 즐거워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웃음에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크게 웃어도 되는 도덕성이 있고, 또 웃을 때 엔돌핀이 나오며, 엔돌핀이 많이 나오면 면역력도 생깁니다. 웃음이 있는 사람, 남을 웃기게 하는 사람이 인기 있는 사람이며,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웃는 것보다 더 큰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에서 감사와 기쁨, 행복과 축복을 느끼게 됩니다. 감사는 깊은 깨달음 속인 생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Thingk」(생각)와 「Thangk」(감사)는 어원이 동일합니다. 좋은 선물을 받고도 좋은 것으로 깨닫지 못하면 감사도 기쁨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생각 속에서 감사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즉 가치를 모를 때는 감사하지 않지만 가치를 알 때는 감사와 행복을 느끼게 되는 깊은 깨달음과 함께 감사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타인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인격은 지식이나 성취가 아니고 성숙함입니다. 어느 정도 인격이 성숙했느냐에 따라 감사가 나타나며 그 원초적인 기원은 과거에 있습니다. 과거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할 때 감사가 나오게 되어 현재의 일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가 없으면 현재의 감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신 것, 천국에 갈 수 있게 해주신 것, 영생을 살게 해주신 것 등으로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의 신앙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영국의 해군 제독 넬슨은 1770년 르코시마 전쟁 때 오른 쪽 눈을 잃었습니다. 1789년 젠투빈센트 해전에서는 오른쪽 팔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1805년 트라팔 가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와의 접전 때 그만 적의 총탄에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넬슨이 말했습니다. 「어느 편이 승리하고 있나」 부하는 「우리 쪽」이라고 답했습니다. 넬슨의 마지막 말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직분을 다할 수 있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실락원의 작가 밀턴은 소경이 된 수에 불후의 명작을 집필하였습니다. 그가 소경이 되었을 때 이렇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육의 눈은 어두워 보지 못하지만 그 대신 영의 눈을 뜨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그가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더 풍성한 영감을 얻으므로 실락원과 같은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여유있고 풍족하더라도 그 삶에 만족할 줄 모르고 더한 욕심을 내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조금 부족하고 힘들어도 현재의 자기 삶에 감사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하고 멋진 삶이 아닐까 새삼 깨닫게 됩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생활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단지 불평을 하느냐 아니면 감사를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랍니다. 거친 식사, 험한 잠자리… 환경은 비슷합니다만 감옥에서는 대개 불평만이 가득하고, 수도원은 감사로 하루가 지나간답니다. 사랑과 함께 감사하는 생활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최대 덕목입니다.

신학자 본 회퍼는 「무엇보다도 감사하다는 말을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감사에 실패하면 원초적 실패로서 사탄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 17)

영국의 한 시인이 지은 시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는 길에 조그만 장애물만 있어도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어두운 길에 한 줄기 빛만 비춰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다. 좋은 집과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인생이 괴롭고 기쁜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비좁은 집과 겨우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불평은 아무리 좋은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불평대신 조그마한 것에도 감사하십시오. 스펄젼은 「하나님은 우리가 반딧불에 감사하면, 우리에게 촛불을. 촛불에 감사하면 전깃불을, 전깃불에 감사하면 아침의 태양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불평보다 어렵지만 역시 아무리 나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감사는 주어진 환경이 아닌 우리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에 필요한 주변 환경보다 감사를 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드십시오. 이 세상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영원히 찬송 받으실 하나님!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어려운 중에 더욱 더 감사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환경과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감사하게 하소서. 세상근심이 있을 때, 기쁨이 넘칠 때, 아픔이 있을 때, 축하함이 있을 때, 절망할 일이 있을 때에도 범사에 감사하게 하시며 늘 우리 하나님을 먼저 생각케 하시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갈보리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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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희생, 피, 보혈

2012/12/12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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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본문: 벧전1:19, 찬송: 254(186장) 내 주의 보혈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대지진의 참사를 겪는 소련의 아르메니아에서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무너진 콘크리트 건물 속에 스잔나 페트로시안이 갇혀있었습니다. 몹시 추웠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곁에는 4살 난 딸 가야니가 누워있었습니다. 배가 고픈 아이는 계속 울어댔습니다. 스잔나는 자기 손가락을 깨진 유리 조각으로 찔러 아이의 입에 물려주었습니다. 여러 손가락을 그렇게 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14일 동안 엄마의 피를 먹고살다가 구조를 받았습니다. 사랑이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기사의 내용보다 더 감동적인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대신 피를 흘리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희생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는 무감각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직도 믿음의 기도를 기다리며 우리에게 선한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죄인을 위한 끝없는 사랑,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십자가 상에서 흘려졌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19:18)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피는 바로 능력을 말합니다. 힘을 말합니다. 피는 승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콘스탄틴이란 분이 있습니다. 콘스탄틴은 디오크레티안이라고 하는 황제가 죽고 로마가 혼란에 빠졌을 때 황제의 뒤를 잇기 위해서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 두 사람이 치열한 전쟁을 치룹니다. 내일이면 대판 전쟁이 일어나는데 싸움하기 전날 콘스탄틴에게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면서 라틴어로 「너는 이 십자가의 피로 이겨라」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이 십자가를 전 군인의 군기와 깃발에 십자가를 새깁니다. 막센티우스와 싸워서 313년에 대 로마를 세우고 기독교를 콘스탄틴이 공인을 하면서 유럽 천지가 십자가의 국가가 된 것입니다. 이 콘스탄틴 때문에 이루어지고 지금도 유럽 가면 십자가로 국기를 만든 나라가 수십 개 국가인 것을 알 수 있습니. 십자가가 그 나라를 다 복되게 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은혜가 그 나라를 승리하게 하고 그 경제를, 그 정치를, 그 민족을 오늘 세계적으로 만든 것은 십자가 피의 능력이지 그 민족이 동양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4대 문명 발상지하고도 유럽은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최고의 문명국가가 된 것은 십자가의 문명, 십자가의 지식, 십자가의 능력 때문인 것입니다. 솔제니친도 십자가로 인하여서 고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완전히 죽음에서 살아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솔제니친도 암이 걸려 죽음직전에 어떤 여자가 와서 앞에 십자가를 잡고 서있는데 주님을 본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능력이 됩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죄를 범하였을 때에 소를 잡고 양을 잡고 비둘기를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면서 속죄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피로서는 완전히 속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피를 흘려주심으로써 인생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사함을 받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죄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믿으시고 그 분께 나와 죄사함의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2. 희생재물의 피로 예표됩니다.

이에 아론이 제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또 백성을 위하는 화목제물의 수소와 숫양을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그에게로 가져오니 그가 제단 사방에 뿌리고(레9: 8- 18)

미국의 어느 마을에 철도를 건너 통학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이 철도를 건널 때면 어김없이 기차가 지나갔습니다. 소년은 그때마다 승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밝은 미소를 보냈습니다. 하루는 폭우가 내려 철로가 끊겨 있었습니다. 만약 기차가 그대로 지나가면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할 상황이었습니다. 소년은 가방에서 연필 깎는 칼을 꺼내 허벅지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흰 셔츠에 빨간 피로 「스톱」이라는 글씨를 써 기차를 향해 흔들었습니다. 기관사는 소년의 셔츠에 적힌 붉은 글씨를 보고 급히 기차를 세웠습니다. 기관사는 그제서야 철로가 끊긴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선혈이 낭자한 소년을 끌어안으며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너의 피값으로 우리가 살았다」

다시 말하면 그 소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기차의 승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오실 예수의 피 값으로 전 인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소중한 것들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3. 성찬의 포도주로 상징됩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한국인들은 이사를 오거나 새로 개업을 하면 시루떡을 돌립니다. 시루떡은 아날로그식 정보 전달 매체입니다. 이 골목 저 골목,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알립니다. 떡을 받아든 이웃들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관심을 나타내면 누구네 이사 떡이며 개업 떡인지 대답과 설명이 뒤따릅니다. 떡은 이웃에게 자신을 알리는 전달력과 호소력을 몇 배 증강시킵니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게 있습니다. 성찬식입니다.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눔을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온 교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공동체원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 초대교회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 나누는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갔습니다.

시루떡을 나눔으로써 정보를 교환한 우리 문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나누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10: 16)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 25)

 

4. 속죄를 위해 필수적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히9: 22, 23)

미국의 어떤 판사의 아들이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신나게 달리다가 그만 다른 차를 들이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교통 순경에게 이끌려 재판을 받으러 갔습니다. 법정에 들어와 보니까 담당 판사가 바로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흠, 우리 아버지야 나를 용서해 주겠지」하고 자기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본체도 않고 엄숙한 얼굴로 아들의 얼굴을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의 이름을 대시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이 「아버지! 나야요 나!」하고 말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하고 「여기는 법정입니다! 사사로운 말은 하지 못합니다. 어서 이름을 대시요」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예. 죤 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피고의 주소는?」「아니 아버지 주소하고 똑같지 않아요」 그랬더니 그 아버지는 다시 호통을 치면서「어서 주소를 대시요!」 말했습니다. 할 수 없이 주소를 다 댔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꾸며서 낭독한 후에 판결을 내렸습니다.

「벌금 백만 원」 그 때 그 아들은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버지의 불공평(?)한 처사에 통곡했습니다. 그 때 어느새 아버지가 법복을 다 벗어버리고 신사복을 갈아입으시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얘야! 너 얼마나 놀랬니」「나는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될 법관인데 내 아들이라고 사사로운 인정에 끌리어서 법을 어길 수가 있느냐?」 하면서 벌금을 물 수 있도록 l00만원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저기에 가서 싸인을 받으면 너는 나갈 수 있다」 그제서야 이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았습니다. 법을 살리기 위해서 재판도 아버지가 하고 형벌도 아버지가 내렸습니다. 벌 값을 아들이 낼 수가 없으니까 자기가 돈을 털어서 벌 값을 치러 주시고 아들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 값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었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공의도 살리시고 사랑도 살리기 위하여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여러분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려 뜨거운 피를 다 쏟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죄를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5:9)

 

5. 속죄하기에 충분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3, 14)

종교 개혁을 단행한 신앙의 영웅 마틴 루터가 몹시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는데 어느 날 마귀가 들어와서 루터를 비웃듯이 응시하더니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안고 온 큰 두루마리 책을 마루에다 두르르 펴놓는데 보니까 마틴 루터가 평생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더랍니다. 루터는 주눅이 들고 낙심이 돼서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큰소리로 「너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구나. 이것은 다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다 씻었다」라고 외치자 참소하는 마귀와 두루마리가 사라져 버리고 말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심을 확실히 믿으시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능력이 됩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죄를 범하였을 때에 소를 잡고 양을 잡고 비둘기를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면서 속죄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피로서는 완전히 속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피를 흘려주심으로써 인생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사함을 받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죄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믿으시고 그 분께 나와 죄사함의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6. 완전하며 최후의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 26- 28)

오래 전에 강원도에서 버스가 전복하고 많은 사람이 희생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 앞으로 살 것 같은 사람, 죽을는지 살는지 알 수 없는 사람 - 이렇게 셋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지금 피가 모자라서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 사람은 살 것 같지 않다고,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고 여겨지는 사람 하나가 의사를 보고 간청합니다. 「여보세요. 날 좀 보세요. 내 피는 O형인데 웬만하면 누구에게나 맞을 겁니다. 빨리 내 피를 뽑아서 저 사람에게 넣어 주세요. 나는 한 평생 나쁜 짓만 했습니다. 나는 깡패 두목이에요. 남의 것을 빼앗는 짓만 해왔어요. 그러나 이 마지막 시간에는 그래도 좀 좋은 일 한번 해보고 싶어요. 내 피를 뽑아서 저 사람에게 넣어주세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믿음의 형제 여러분, 이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주홍 같은 죄라도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희고 정결하게 씻음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씻지 못할 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예수만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이 구원을 받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무슨 고행을 하거나, 착한 일을 하거나, 돈을 바쳐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간단하고 쉬어서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구원은 너무나 값비싼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쉽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은 결코 값싼 구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벧전 1:2) 우리가 받은바 구원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혹 보면, 기독교의 진리를 오해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내 하고픈 대로 욕심대로 살자.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지옥 갈 염려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이제는 무슨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 사기를 치고, 방탕하게 살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구원파라는 이단이 그들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진리를 오해한 데서 생겨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분명히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의하고, 더럽고, 사악하고, 경박한 행실,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이 곧 망령된 행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이 같은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받은 사람이므로 더 이상 그 같은 행실을 좋아할 리가 만무합니다. 남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람은 더 이상 종처럼 살지 말고 자유하는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 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이같이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실을 아는 성도는 지난날의 망령된 행실을 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려고 힘씁니다. 지난날 주님을 알지 못했던 때에는 정욕을 따라서 살았으나 이제는 세속적인 생활을 하면 신앙양심에 가책이 되고 편치 못합니다. 과거에는 방탕한 생활이 즐거웠는데 이제는 실수로라도 그런 생활을 하면 괴롭습니다. 또 세상일에 분주하게 지내느라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는 우리 속에 임재 해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양심이 시키는 대로,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르기를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1:21)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라고 하신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인즉 그들은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292장<통> 「주 없이 살 수 없네」 1절만 함께 부르겠습니다.

♬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속하시니

구주의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이

내 소망 나의 위로 내 영광됩니다

 

믿음의 형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여러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음을 믿으시면「아멘!」하십시다.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심으로 주님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죄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거룩하신 주님, 긍휼과 자비로 그 귀한 몸 찢기시고, 보배로운 피 흘려 주사 우리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또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주님을 찬양하고,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오늘 나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심을 감사드립니다. 내게 있는 고통도 주님이 함께하시니 겸손히 인내하며 주님께 나아가 그 능력과 사랑을 체험하게 하소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하소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갈릴리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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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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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

 

본문: 마태복음18: 23-34

 

어린 아들이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습니다.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이번 주 방 청소한 값 1000원, 가게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500원,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에 동생을 돌봐준 값 500원, 쓰레기를 내다버린 값 1000원, 숙제 잘한 값 5000원, 거실 청소하고 걸레질 한 값 2000원, 전부 합쳐 10000원󰡑

엄마는 내심 기대에 차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들을 잠시 바라본 후 아들이 건네준 종이 뒷면에 다음과 같이 적어 건넸습니다.󰡐너를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다닌 값 무료, 네가 아플 때 밤을 세워가며 간호하고 주님께 기도한 값 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힘들어하고 눈물 흘려가며 고생한 값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진정한 사랑은 무료󰡑

아들은 엄마가 쓴 글을 다 읽고 나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습니다.󰡒엄마 사랑해요󰡓 그러더니 아들은 연필을 들어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엄마, 전부 다 지불되었어요. 오히려 내가 진 빚이 너무나 많군요. ”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보다 내가 한 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대인들에게 빚을 진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도시인들로부터 농촌에 이르기까지, 작게는 카드 빚에서부터 거액 융자에 이르기까지, 또한 사채까지 오히려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여유를 찾지 못하고 언제나 조급하고 불안해하며, 부드럽지 못한 인생을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부터 '가난'은 속일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생명이 있는 한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수치스럽더라도 채주에게 돈을 빌려 양식을 사고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소위 '빚쟁이'가 되고 싶은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치도 않는 빚진 자의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빚진 것을 아는 자는 열심히 일합니다. 왜냐하면 그 빚이 가져다 주는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한다면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파산 선고가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남은 재산, 가정 모두 파괴되고 심지어 사회에서조차 '신용 불량자'로 낙인 찍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빚지지 마라

 

미국 제 1의 파워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회장은 매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다양한 질문에도 성실히 답변하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주들과의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질 때의 이야기입니다. 캔터키 주에서 찾아온 10세의 한 소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다른 주주들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는 너무도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11세에 주식 투자를 시작했고, 골프장 캐디로 일하며 공을 주워 팔고, 워싱턴 포스트를 배달하며 돈을 모았다. 부모나 어른들은 아이들이 고교생이 되면 ‘네가 돈을 벌 수 있는 건전한 일을 찾아 보거라. 그리고 빚지지 마라’라고 자꾸 얘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모아가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빚 이외엔 그 어떤 빚도 지지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자신의 노력으로 재물을 늘려가고 그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십시오.

아울러 남의 빚에 보증서지 마십시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잠11:15)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잠22: 26)

 

2. 빚을 갚지 않으면 악인

"사악한 자는 빌리고 갚지 아니하나 의로운 자는 긍휼을 베풀고 주는도다"(시편37:21)

꾸고 갚지 아니한 자, 즉 빚진 자는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한 상태에 있는 한 악인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수 차례에 걸쳐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소서 내가 불법 중에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수태하였나이다(시편51:5)

결국 우리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누군가에게 빚진 상태에서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빚을 갚기 전까지 악인, 혹은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이 빚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나올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세상에 머물러야 했고, 공기, 흙, 물 등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을 존속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요한복음1:1-3)

이미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부채를 떠 안고 세상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것인 양 마음껏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악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빛을 갚을 마음도 없고, 혹은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면 이미 그의 파산선고는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실패는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곧 그 증거는 사악한 자를 멸망의 날까지 남겨 두신다 함이니 그들이 분노의 날까지 인도함을 받느니라"(욥기21:30)

 

3. 빚진 자의 신분

우리 자신이 빚을 졌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사실상 우리의 신분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의 신분에 따라 빚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한 자는 가난한 자를 다스리고 빌리는 자는 빌려주는 자의 종이 되느니라"(잠언22:7)

이스라엘 백성들은 빚진 자가 만일 빚을 갚지 못하면 채주의 종이 되어야 하는 법이 있습니다. 이 빚은 당대에 이르지 않고 희년이 돌아올 때까지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분은 빚으로 인해 종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종의 신분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주인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법적으로 빚을 갚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태복음5:26)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행위)이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명상시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도하며,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며, 봉사, 전도, 구제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좋은 이미지를 심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종의 신분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한 채무(빚)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짊어진 빚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빚의 문제를 해결한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록된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로마서3:10)

현재 우리에게는 빚을 갚을 만한 힘이 전혀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설령 힘이 있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너무나 엄청난 빚을 안고 있기 때문에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의 빚을 진 상태일까요?

 

4. 우리가 진 빚

예수님은 마태복음 18:21-35의 내용에서 용서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시면서 빚진 자에 관한 비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속에서 용서를 해야하는 우리의 상태를 설명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계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그에게 데려오매"(24)

일만 달란트라는 액수를 쉽게 환산하자면 금이 약 400돈이나 되는 양입니다.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입니다. 우리의 모두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수 없습니다. 그 까닭에 나를 포함한 모든 가족은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이에 주인이 명령하여 그와 그의 아내와 자녀와 모든 소유를 팔아 갚게 하라 한대"(25)

우리의 상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탕감시켜 주시고 세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망각하고 지냅니다. 우리는 자신의 탕감 받은 사실은 잊고 남에게 빌려준 작은 돈에는 집착하여 받아내려 합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 동료 종들 중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같으라 하매"(28)

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한 데나리온이 성인 남자의 하루 일당에 해당되는 금액이므로 약 500만 원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적은 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매우 적은 액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은혜를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빚을 다시 돌려 받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빚을 다 갚기 전까지 그는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닙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기까지 그를 형벌 주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느니라"(34)

우리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너무도 무거운 짐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아는 것이 이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내 불법들이 내 머리를 덮어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나이다"(시편38:4)

"셀 수 없이 많은 재앙들이 나를 에워싸고 내 불법들이 나를 붙들므로 내가 위를 볼 수도 없사오며 그것들이 내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나이다"(시편40:12)

이처럼 죄악이 넘친다는 것은 곧 엄청난 빚을 안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빚을 청산하기까지는 우리가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빚을 청산하고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요?

 

5.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우리가 종의 신분으로는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이 자녀로 바뀌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종이 아들의 신분으로 바뀌어진다면 그의 채무는 자동적으로 폐기될 것이며, 더불어 상속권까지 부여받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빚을 갚을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요한복음1:12)

성경은 자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가진 빚을 정리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로마서8:12-14)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빚으로 인해 종의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난 것은 아닙니다.

 

6. 복음의 빚을 갚자

저는 여름 어느 날, 시골 교회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서 로마서를 읽다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고 고백하는 말씀을 읽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빚진 자'라는 그 단어가 제 가슴에 큰 감동으로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울었고, 이 종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아니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주님, 이 종은 빚진 자입니다. 도무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저는 형제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저는 조국에 빚진 자입니다. 이 종은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모두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늘의 바람소리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너는 빚진 자다'라는 소리로 들리는 듯했습니다. 모두가 나를 위해 주었건만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제 자신을 보며 한없이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후로는 '나는 빚진 자다' 하는 하늘의 음성이 제 가슴을 떠나지 않았고,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시도 게을리 하거나 함부로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한량없기에, 우리는 도무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받았기에 그 은혜는 우리에게 빚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 고마워 누구에게든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빚진 자의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은 이런 빚진 자의 인생관으로 충만했기에 자기 목숨을 아깝다 하지 아니 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없으므로 빚졌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받음으로 빚이 됩니다. 우리가 풍족히 받은 만큼이 모두 우리의 빚입니다. 배운 사람은 그 배움이 빚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몸이 빚이 됩니다. 물질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물질이 빚이 되어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채무자의 심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근심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나 혼자만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는 것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들의 비참한 가정 형편에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대학시절에도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내 자신이 누리는 물질적 환경과 건강에 대하여 나는 어떤 채무감을 느껴야만 했다. 내가 21세 되던 어느 맑게 개인 여름 아침, 성령강림절에 나는 이런 행복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보답으로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른 살까지는 내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살고, 그 후에는 인류를 위해 직접 봉사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였다."

은혜의 보다 깊은 단계는 빚진 자의 단계입니다. 빚진 자에게는 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감사할 것뿐이고, 세상 어느 곳을 가도 사랑할 것뿐입니다. 행복을 얻고 싶습니까? 그러면 사랑의 빚진 자가 되십시오! 만일 우리가 빚을 탕감받고 상속자가 되었다고 방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본 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의 빚을 지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이나 바바리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노라"(로마서1:14-15)

복음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신 것'(고전 15:3, 4)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쉽게 말한다면 빚을 갚아 주신 분을 소개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면 어리석고 게으른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다해 복음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으니...너희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둠 속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5:26,30)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결코 게으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자들에게는 상급으로 더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보다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피차 빚을 지기도 하고 또한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빚만 지고 갚지 않을 경우에는 그 사태가 매우 심각해집니다. 특히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봉건사회에서의 채무관계는 오늘날보다 매우 혹독했습니다. 막대한 빚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고 임금 앞에 끌려와 야단을 맞는 이야기인 오늘의 본문에서 임금은 “네가 약속대로 내 빚을 갚지 못했으니 네 재산을 몰수하고 네 식구들도 노예로 팔아 빚에 충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라며 호통을 칩니다. 가련한 빚쟁이는 꿇어 엎드려 “주인이시여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소서”라고 애절하게 호소합니다.

임금은 빚쟁이가 지은 너무도 커서 기한 연장으로도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 빚은 어떤 개인이 갚을 만한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만 달란트는 당시 화폐개념으로 한 사람이 5000번 정도 계속 태어나 돈을 벌어 겨우 본전만 갚을 수 있는 천문학적 액수입니다.

임금은 그와 그 가족을 불쌍히 여겨 아예 탕감하겠다는 파격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 빚쟁이는 이제 자신을 근심케 하던 모든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와 죄책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늘을 날 듯이 황홀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굳이 1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쟁이의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셨을까요.

먼저 1만 달란트 빚이란 어떤 개인도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비유에서 채권자는 하나님이며 사람들은 1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의인은 결코 없습니다.

둘째, 이런 엄청난 빚의 해결방법은 오직 채권자가 탕감해주는 길뿐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내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의 형틀에 내어 주시사 우리의 죄 값, 즉 율법이 내 죄에 대해 선고한 벌금을 예수께서 다 지불하셨다는 탕감의 은혜를 실감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바로 내게 임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과 율법에서 나를 해방했습니다. 자, 이제 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셋째, 은혜를 받은 자들이 주변의 이웃에게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 때에만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께 탕감 받은 그 엄청난 빚을 실제로 삶 속에서 어떻게 갚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문 33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니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빚은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갚는 것이 바로 주님께 빚 갚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돕고자 하는 이웃을 찾아 돌보아 주고, 주께서 불쌍히 여기는 영혼들을 찾아 전도하는 삶을 살면 바로 주님께 지은 빚을 갚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피차 빚을 지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빚쟁이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이 있기까지 그 누구의 수고와 도움, 그리고 사랑의 손길이 끼어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13:8절에 “너희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성경에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빚쟁이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없는 이에게 빚쟁이입니다. 학생들은 스승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빚 갚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 순리요, 행복한 길입니다.

 

7. 갚을 수 없는 빚

미국 보스턴에 살았던 ‘스트로사’라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했던 그는 당시 거부인 ‘바턴’을 찾아가서 2천불을 빌려주시면 꼭 갚겠다며 청을 했습니다. 바턴의 주위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청년의 환경을 이야기하며 대출을 반대했지만 바턴은 그 젊은이의 용기와 의지가 마음에 들어 2천불을 빌려주었습니다. 10년 뒤 미국은 대공황으로 경제가 어렵게 되었고 바턴 역시 엄청난 빚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스트로사는 2천불을 투자한 사업이 성공해서 큰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턴의 소식을 듣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이 빚진 7만 5천불을 갚아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빚진 돈 2천불은 예전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은덕은 아직 갚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부담스러운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주택융자금이나 카드 빚, 매월 납부해야 할 공공요금 같은 것들인데 이것들이 우리를 잠시도 편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재정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상으로 물건 사는 일을 줄여나가고 충동구매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요금청구서에 의한 부담은 한결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무거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 분은 허물과 죄 많은 우리를 위해 값없이 대속의 제물이 돼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진 사랑의 빚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우리가 용서하지 못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랑과 평화의 계절을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기회로 삼읍시다.

 

*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어쩌다 신용불량자가 된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을 구하여 주옵시고, 우리에게 빚진 자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 수 있게 하옵소서. 사랑의 빚 이외에는 빚지는 삶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의 이픔을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희생을 한 외국 선교사들에게 사랑의 빚진 자로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빛의 사자(갈릴리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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