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풀고 구제하기를 힘쓰라
본문: 누가복음 14: 12- 14
구두장이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꿈속에 나타나 내일 너희 집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어찌나 기뻤던지 온갖 정성을 들여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기다렸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은 그 날 저녁 가게문을 닫을 때까지도 오시지 아니 하였습니다. 단지 거지가 한 번 오고, 또 한 번은 청소부 할아버지가 오고, 저녁때는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을 뿐이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그만, 거지와 청소부 할아버지와 사과장수 아주머니에게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고 실제로 추위 때문에 또 배고픔 때문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 밤 예수님께서 꿈속에 다시 나타나시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왜 오시지 않으셨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이나 갔었는데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 나오는 것으로 마태복음25장에 언급된 최후의 심판광경을 생각나게 합니다. 최후의 심판시 의인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은 오히려 놀라서 언제 이런 일을 당한 주님을 도와 드린 적이 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이에 심판주되신 임금님은 「분명히 말하건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심판의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22:9)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잠28:27)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제를 함에 있어서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느냐에 대해 예수님께서 교훈하시고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에서 남을 돕는 구제의 원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며(레25: 35- 3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히13: 16) 이 지상에서 성도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빛된 행동입니다. 그러면 구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구제는 당연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제는 우리가 우리 것으로 남에게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와 선행의 재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가 나눠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눅12: 42, 43) 우리는 하나님의 재물을 가지고 단지 대신 전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연한 청지기적 정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내 것을 타인에게 준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대개 구제하는 것이 아깝고 힘든 것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또한 축복의 근거가 되지도 못합니다. 이 일이 내가 해야 할 당연한 일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베풀고 나눠 줄 때, 그 마음은 복된 마음이 되고 그런 자세를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2. 구제는 은밀히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그 일로 칭찬받기를 좋아합니다. 더구나 남을 도와줄 때는 자기를 과시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고 구제의 원리에 대해 규정해 주셨습니다.(마6:3,4) 그리스도인들의 구제란 사람 앞에서 칭찬 받고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고, 그것은 하늘 창고에 쌓여 하나님이 주실 상급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구제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제를 하면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갚을 것이 하나도 없는 자에게 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갚을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베풀었을 때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베풀고 그들에게 보답을 받는다면 진정한 구제가 아니며, 우리에게 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진정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베풀어야 부활시에 우리가 받을 것이 있다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도적도 없고 좀도 먹지 아니하는 하늘 창고에 귀한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눅12: 33) 이 땅에서 미리 그에 대한 상을 받는다면 그 날에는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반드시 기억합시다. 그래서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줍시다. 비슷한 사람끼리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야 친교지 그게 어찌 구제라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7)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어떤 제자가 스승인 현인에게 물었습니다.『제게 왜 기쁨이 없습니까? 왜 다른 사람들이 제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까?』 현인은 말했습니다. 『그대는 어찌 한 되짜리 그릇을 갖고 한 말의 쌀을 받아 오려고 하는가. 한 조각의 천을 들고 옷 만드는 집에 가서 한 벌의 옷을 지어 달라 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매사를 찡그린 얼굴로 대하면서 기쁨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정한 이웃,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 어찌 다른 사람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도행전 9장 36절 이하를 보면 욥바에 다비다(도르가)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는데 그가 병들어 죽으매 많은 과부들이 울며 안타까워 할 때 제자들이 베드로를 청하여 그녀의 시체를 보이자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매 그가 다시 눈을 떠 살아난 것을 보고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가이사라에 고넬료라 하는 백부장이 있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마침내 베드로를 만나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렇게 다비다나 고넬료처럼 베풀고 구제하기를 힘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0-11)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진 이희아 양은 양손에 손가락이 두 개씩 있고 무릎아래 다리가 없는 선천성 사지기형 장애인입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 맹활약하여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중 수교 15주년’을 기념하며, 2008년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 성공유치를 기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습니다. 또한 이번 연주회에서 거둔 수익금 대부분을 실명위기에 처한 가난한 중국의 선천성 어린이 녹내장 환자 돕기 기금으로 기부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더 훈훈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장애를 가졌음에도 다른 이를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웃을 위해 대가없는 선을 베푸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닮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고, 또한 건강한 육체를 주셨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물질과 건강을 받은 우리는 아낌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물질을 아름답게 쓸 수 있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웃을 도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십시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112:9)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우리들에게 「베푸는 것이 복이 있다」(행20:35)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그 빚을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그 빚은 누구에게 갚아야 합니까? 바로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웃에게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변의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으로 베풀고 나눠줄 때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은혜 갚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베풀고, 갚을 능력이 없는 자에게 베풀고, 그리고 당연한 마음으로 베풀어서 복된 성도로서 하나님께 칭찬 받는 자녀들이 됩시다.
*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웃을 세워 주며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웃들과 함께 하소서. 그리스도안에서 소외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따라서 저는 받기보다 주는 자로 살았으면 합니다. 지금보다 더 많이 도우며 살 수 있도록 마음도 물질도 넉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 것처럼 우리도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볼 때 더욱더 풍성하게 임하는 주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소서. 주님께 기도하오니 오늘 세상에서 굶주리고 병들어 앓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굽어 살피소서. 평안하고 은혜가운데 살아온 우리가 진정 그들과 공감하며 주님께서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고 구제하기를 원하는 삶을 그들이 누릴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다해 돕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갈릴리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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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기고 간 흔적은
본문: 시편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뉴욕 퀸즈 한인교회 사모님은 어렸을 적에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심하게 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마 자국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연두에 걸려서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 목사님의 기도로 생명을 건지고 난 후 그 사모님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얼굴에 있는 마마 자국은 하나님께 너를 살려주셨다는 증거이고 흔적이란다.」 그 사모님은 그때부터 자신의 마마 자국은 부끄러운 삶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살려주셨다는 하나님 사랑의 흔적임을 자랑하며 한인교회 사모님으로 목사님과 함께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장을 찍히고 나면, 예수에 의해 인박힌 인생이 되고 나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이 그리고 영향 받지 않는 능력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인이 박힌, 예수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성도라는 귀한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몇 년 전에 철원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6.25때 공산당 당사를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관광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6.25의 흔적이었습니다. 보훈병원에 가면 아직도 6.25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땅굴도 남북이 갈라진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적비 남기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 구석구석에 유적비가 널려 있습니다. 열녀비, 치적비, 순교비, 생가...등등, 심지어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유적비를 남기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만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남한에서도 대통령 생가 복원한다고 얼마나 떠듭니까?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디에 자기 이름이 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명예를 구하고, 돈을 구하고, 권력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긴 흔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흔적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들의 절기는 하나님과 관계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칠칠절은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로 거둔 곡식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광야에 묻어 있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흔적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충성된 종」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박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 보면 「옥에 갇히기를 여러 번 하고 매도 수없이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고난의 상처가 바울의 몸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와 복음을 위해 받은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무릎에 기도의 흔적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발에는 전도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지하철 역 화장실에 가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작은 중소기업에 김주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잔정이 그리 많은지 후배들 뒤치다꺼리나 하기 일쑤였고, 아무도 손도 안 대는 서류함을 거의 날마다 정리하느라 퇴근 시간을 넘겼으며, 어김없이 오후가 되면 커다란 쟁반에 커피 여러 잔을 들고는 「즐거운 오후 되십시오.」 하며 설탕 대신에 미소 한 숟가락을 더 넣어 책상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휴직계를 냈습니다. 아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병간호를 위해 그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한심하고 남자답지 못하고 무능하여, 있으나마나 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회사에 없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것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마실 수 있었던 향긋한 커피는 기대할 수 없었을 뿐더러 책상 위의 컵들엔 커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채 먼지만 쌓여 갔고 향기 나던 화장실은 들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더러워졌으며, 휴지통에서는 늘 휴지가 넘쳤고, 서류들은 어디 있는지 서류철끼리 뒤죽박죽 섞여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서내 사람들은 점점 짜증난 얼굴로 변해갔고, 서로에게 화를 냈으며, 시간이 갈수록 큰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에 가득했던 화평은 어느새 조금씩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은 동료였던 박주임이 상사의 짜증을 다 받아내느라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문득 김주임이 끓여다 준 커피가 그리워졌습니다. 김주임이 생각나자 아직 남아있는 그의 책상 앞에 무심코 갔을 때 작은 메모가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편할 때 그 누군가가 불편함을 견디고 있으며, 내가 조금 불편할 때 누군가는 편안할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십니까? 편하십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지금 여러분을 대신해서 불편함을 견디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불편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누군가는 여러분으로 인해 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있으나마나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 필요한 사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그 진가는 사실 지금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여러분께서 남기시고 갈 빈자리는 그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떠난 후 남게 될 빈자리를 생각하시면서 날마다 필요한 사람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아프리카에는 리빙스턴과 슈바이처가 남긴 흔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밟았던 대륙인 숲과 평야와 마을에는 그들의 발자국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리빙스턴이나 슈바이쳐를 한평생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뒤따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어디로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과 인자를 남겨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복의 근원이 되라」고 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창세기 39장 5절에 보면 「그(보디발)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양을 치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양의 거름은 다른 짐승의 거름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다고 합니다. 양의 거름이 목장 전체에 골고루 흩어져 있을 때 토양에 굉장히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 문헌에는 양을 가르켜 「황금의 가축」이라고 했습니다. 양들이 가는 곳에는 풍요와 번영과 광명이 뒤따랐습니다. 양들이 걸어간 자리는 비옥한 목초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곳에는 아름다움과 풍성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데, 우리가 다녀간 길 뒤에 축복과 은혜가 남아있습니까? 알프렛 테니슨 경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번은 두 친구가 동부로 가는 길에 저희 집에 들러 며칠을 지내며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동부에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가던 중 한 친구가 모자를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모자를 제 집에 두고 온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모자를 찾아 보내 달라고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그의 부탁대로 집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그 답장 중에 문장 하나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편지를 받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모자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분들이 여기 남겨 두고 가신 것은 오직 큰 축복 하나뿐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어떤 흔적이 남습니까? 나는 기쁨의 흔적을 남깁니까, 슬픔의 흔적을 남깁니까? 사랑의 흔적을 남깁니까? 화평의 흔적을 남깁니까? 아니면 불화의 흔적을 남깁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대할까? 아니면 나를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을까? 우리는 우리 뒤에 축복을 남겨두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해독을 남겨 두는가? 우리가 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에 우리가 기다려지는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가 가는 것이 귀찮고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일까? 우리의 발자국은 어떠합니까? 지난밤에 눈이 내렸는데, 밖에 무엇이 지나갔나 하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발자국을 보면 압니다. 소가 지나갔으면 소 발자국이 났을 것이고, 개가 지나갔으면 개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사람이 지나갔으면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내 발자국에는 평화와 희망과 기쁨을 남겨두는가? 아니면 불평과 원망과 절망과 좌절과 원한을 남겨두는가?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에게 흘러들어 오는 것과 같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어디로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과 인자를 남겨야 할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52: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복의 근원이 되어 어디 가든지 그곳에 여러분을 통해 복이 임하게 되고, 좋은 흔적과 발자취를 남기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 나의 삶에 주의 흔적이 남게 하소서. 내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때로는 어둠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세상에서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어둠에 동화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살기 원합니다. 우리가 밝은 빛을 드러내 어둠을 이기게 하소서. 정직과 화목, 성실과 진실함의 흔적을 남기게 하소서. 그리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어둡고 썩어가는 정치와 문화, 윤리 속에서 빛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문이 돼 세상 사람들이 이 창문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소서. 이러한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되심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갈릴리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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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바꾸라
본문: 요2: 1- 11
추운 겨울 아이스크림 수요가 뚝 떨어지자 아이스크림 사장은 낙담해 공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서커스 공연 전단지가 그의 발 밑으로 날아왔습니다. 아이스크림 회사 사장은 서커스 공연장으로 달려가 서커스 단장을 찾았습니다. 사장은 「서커스 공연 관람객에게 팝콘을 공짜로 나눠줘도 되겠습니까?」라고 제안했습니다. 단장은 흔쾌히 승낙했고 관객들은 공짜로 나눠주는 팝콘을 먹으며 공연을 구경했습니다. 휴식시간이 됐을 때 극장입구에는 수십 명의 아이스크림 장사꾼이 서 있었습니다. 팝콘을 먹고 갈증을 느낀 관객들은 앞다투어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습니다. 팝콘을 공짜로 제공했던 아이스크림 회사 사장은 아이스크림을 모두 팔아 큰 수입을 올렸습니다. 고난과 위기는 축복을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며,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시119: 109)
주정꾼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형제 중 하나는 술 주정꾼이 되고 다른 하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처럼 술주정꾼이 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술주정꾼이 되었습니까?」 그러자 주정꾼이 된 아들은 대답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목사가 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아버지가 술 마시는 것을 보고도 술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목사가 된 아들도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한자의 위기라는 말은 위태할 위(危)와 기회 기(機)자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위기란 나쁜 것만이 아니라 발전과 쇄신의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위기가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위기를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능력이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홍해를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이 앞을 가릴 때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크레이턴 메이브램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부대원들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져 절망하고 있을 때 장군은 「이제 우리가 전쟁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사방을 공격해 한꺼번에 적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자,사방을 향해 나아가자」라고 외치며 진두지휘했습니다. 그러자 부대원들이 용기를 얻고 전투에 임해 결국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위기가 사방에 있다는 것은 한꺼번에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확실성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50대가 되면 노후대책도 미처 하기 전, 아직 자녀 교육비도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직장에서 명퇴나 찍퇴(퇴직 대상자로 찍힘)의 위치에서 아랫사람들 눈치를 봐야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불안합니다. 실패에 대한 불안, 사고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질병에 대한 불안 등입니다. 그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다음은 외로움입니다. 자꾸 슬퍼지고 실망스럽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쉽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큰소리치고 화를 냅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병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피해갑니다. 아니 실제 상황의 위기가 와도 기회로 만듭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 67)
창세기 37장부터 쭉 읽어 내려가면 요셉이라는 젊은이가 나옵니다.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족이라지만 사랑 받는 이는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이 미워합니다. 사랑 받는데 미움도 받습니다. 미우면 아무리 잘해도 미운 것입니다. 미움 받는 게 개인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형들을 위하여 아버지의 심부름을 갑니다.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들에서 양을 치는 아들들을 위하여 아버지가 요셉을 보낸 것입니다. 그때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합니다. 위기가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동생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형제들을 설득하여 죽이는 것보다 팔자고 제의합니다. 구약의 유다는 요셉을 팔았고, 신약의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것입니다. 동생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챙긴 유다입니다. 여하간 그는 애굽으로 팔렸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이라는 이름 있는 관원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는데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인지라 그 집이 형통하는 복을 받습니다. 요셉은 근본이 노예가 아닙니다. 사랑 받고 티 없이 자란 족장의 아들입니다. 준수한 젊은이에게 유혹이 옵니다.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거절합니다. 여인이 독한 마음을 품으면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모함하여 옥에 갇혔습니다. 위기에서 위기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가 애굽의 총리 되는 길이었습니다. 위기를 축복의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1930년대 미국에 경제공황이 닥쳐 은행, 공장, 심지어 학교까지 문을 닫고 경영주들이 자살하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J. J라코스라는 실업가는 증권에 투자했던 많은 돈을 빼내 많은 실업자들을 동원하여 맨해튼에 거대한 빌딩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라코스는 미쳤어 분명히 망할 거야 라고 했는데 끄덕하지 않았습니다. 그 빌딩이 1929년에 시작하여 1931년에 완공하였는데 유명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입니다. 그 유명한 건물은 경제적으로 위기를 만났을 때 그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된 일이 있습니다. 모르도개가 있습니다. 그는 문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만이라는 높은 대신이 있는데 모르도개가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하만은 교만한 마음으로 볼 때 대궐문에 있는 왕의 신하가 권하여도 듣지 아니하면서 자기는 유다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만은 모르도개를 죽이려고 왕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모르도개 한 사람이 아니라 유다인을 12월13일에 다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모르도개는 사촌 동생인 에스더 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에스더는 금식 기도하고 왕을 만나러 갑니다. 왕이 오라하지 아니하였는데 들어가서 만일 왕이 홀을 들지 아니하면 죽습니다. 왕이 반갑게 맞이하며 그대가 무엇을 원하는가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는 왕이 기뻐하시면 제일 사랑하는 신하를 데리고 제가 베푼 잔치에 오세요. 왕이 하만을 데리고 갑니다. 하만은 좋아합니다. 잔치에 온 왕이 그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라.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 그때 왕이시어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깜짝 놀라 이런 일이 어찌 된 일인가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냐 에스더가 말합니다.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로소이다. 하만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왕이 잔치 자리를 떠나 후원으로 들어갑니다. 급한 하만이 살려달라고 에스더의 앉은 걸상에 엎드려 있습니다. 왕이 들어와 보니 좋지 아니하게 보여 이 자가 왕궁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말이 떨어지자 그를 잡아 모르도개를 죽이려고 세운 나무에 달려 죽었고 유다인과 모르도개는 살게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그것이 부림절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번 위기가 찾아옵니다. 개인적으로 건강에 대한 위기,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신앙을 버리고 싶을 정도의 실망감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이 되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첫째,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쉽게 자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해도 안 됩니다. 이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수록 믿음의 사람은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길이 없다고 생각할 때 길을 찾아야 하는데 예수가 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때 이렇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나는 다해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하실 차례입니다. 주께서 해주십시오 라고 맡겨야 합니다. 이곳을 바라볼 게 아니라 저곳을 바라보세요. 안만을 볼게 아니라 밖의 세계를 바라보세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하늘의 별을 보라 네가 셀 수 있느냐? 땅만 바라볼 게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세요. 위기는 기회로 바뀝니다. 위기는 순간이고 자살은 종말입니다.
둘째, 기다려야 합니다. 조급할 것이 없습니다. 에스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만의 소식을 듣고 왕후가 된 에스더가 이럴 수가 있느냐 가만둘 수 없다고 방방 뛴 게 아닙니다.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왕을 만납니다. 왕이 원하는 게 뭐냐 할 때에도 즉시 말하지 아니합니다. 기다립니다. 조급하면 손해 봅니다. 기다리면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산사람들은 삶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연습을 해야 하겠습니다. 기다리는 게 체질화된 미국인들이 있습니다. 줄을 서서 한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두 시간 그 이상도 기다립니다. 조급해서 유익한 것은 불이 났을 때 외에는 없습니다. 위기가 왔을 때 기다리세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기다립시다. 씨를 뿌렸으면 기다려야 거두게 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4)
셋째,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1967년에 이스라엘의 총리로 당선된 골다 메이어 여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죽은 후에 발간된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못났기 때문에 기도했고 못났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약함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실망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골다 메이어는 수상 자리에 있는 12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백혈병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직분을 잘 감당했습니다. 다윗은 위기와 고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시31:11- 15)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의 풍랑과 밤을 새워 싸우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가버나움으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한 치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한계에 부딪힌 그 순간에, 밤 사경 가장 어두운 순간에 주님은 풍랑 사이로 걸어와 제자들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잘 저을 수 있다고, 한계가 없이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풍랑을 만나고 삶의 위기에 직면하면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절망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위기는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동시에 낙심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한계에 부딪힌 그 순간은 하나님이 나를 버린 순간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 순간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위기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성공하고 행복하게 산 사람들은 위기를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역경이 믿음의 거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모세도 광야 40년간의 위기를 잘 보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면 모든 문제가 작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판단해보세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세요. 걱정할 게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하시면 위기였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좋게 되어집니다.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본문에 가나 혼인잔치 집에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유대인의 잔치는 한 주간 시행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잔치의 주된 음식은 포도주입니다. 그런데 그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이것은 하나의 위기입니다. 잔치집의 위기입니다. 포도주가 없으면 잔치가 바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합니다. 「포도주가 없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매우 소극적입니다. 어머니는 상당히 위기감을 가지고 예수께 보고를 했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 호칭은 우리의 정서나 예법에는 맞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부른다면 버릇없는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앞에 아무리 아름다운 수식을 붙여도 맞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여자여」 이렇게 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유대적인 호칭에는 여인이라는 개념이 존칭어 개념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여」라고 하면서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즉 이 일에 내가 나설 그런 겨를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집에 위기가 왔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위기를 당합니다. 물질적, 경제적 위기가 제일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 위기가 많이 있습니다. 대인관계, 질병, 예기치 못한 사고, 사건... 온갖 위기들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위기가 있습니까? 위기는 극복하면 기회가 됩니다. 위기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위기를 당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때 위기입니다. 그 위기를 극복하면 또 다른 기회가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크고 작은 위기가 있습니다.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이 위기는 우리 가정사의 위기요 오늘 우리 사회의 위기요 내 개인적인 위기와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집은 가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나는 갈릴리 근방에 있습니다. 가나는 포도산업이 왕성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가나의 포도주는 우리나라에서 파는 포도주 보다 훨씬 순합니다. 그만큼 가나의 포도주는 유명합니다. 가나 혼인잔치 당시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포도주를 사지 않습니다. 집집마다 포도주를 장만합니다. 특히 결혼을 할 계획이 있는 집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포도주를 장만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떨어지면 이것은 상당히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은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성공적으로 잘 마쳤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만약 “포도주가 떨어진지라”라고 성경이 끝났다면 이 사건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위기가 극복된 잔치 집의 축복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위기를 극복되는 비결 세 가지 요소가 이 사건 속에 있습니다.
첫째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이 함께 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포도주가 떨어진 이 잔치 집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집은 평소에 예수님과 친분이 있는 집으로 보입니다.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에 초대를 받았고, 예수와 제자들도 그 집에 초대받은 것은 평소에 친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포도주가 떨어진 그 현장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그 위기의 현장에 함께 계셨습니다. 이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오래 전에 제가 경부선 버스를 탄 적이 있습니다. 버스 안의 할머니가 휴게소에서 내리다가 발을 잘못 디뎌 발목이 부러졌습니다. 휴게소에 응급실도 없고 상당히 난처했습니다. 그런데 차는 떠나야 하고 할머니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딸과 함께 서울 가는 길인데 할머니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행히 그 차안에 의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외과의사였습니다. 그분이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기사보고 가다가 더 심해지면 대구에 들러서 병원에 가든지 하자 해서 버스는 출발했습니다. 그 의사가 돌보면서 서울까지 왔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고 현장에 의사 한 분이 계시므로 수습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 속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그 위기가 극복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위기, 고통, 실패의 현장에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계시길 바랍니다. 이 가나 혼인잔치 집은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주님이 우리 집에 초청되고, 예수님이 우리 집에 자연스럽게 오는 신앙생활을 평소에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위기 현장에도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은퇴하신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자신의 목회 중에 아주 씁쓸한 일을 경험한 글입니다. 한 성도가 큰 사업을 시작을 하고, 개업 축하연을 열었습니다. 아주 호화로운 큰 식당에 축하연을 했는데 가보니 상상을 초월을 하는 개업 축하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굵직한 유명 인사들이 많이 초청되었고, 호화로운 많은 화환들과 무대에는 밴드가 초청되어 있고, 탁자에는 양주가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려고 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사장이 와서 「목사님 예배는 간단히 드려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맥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분은 이날 소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날 개업식에 주님이 오시기 힘든 자리였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는 주님이 오시기에 힘든 장애물이 없습니까? 주님이 오시기에 힘든 장애물, 인간적인 화려함은 주님이 오시는 길을 가로막습니다. 인생들이 위기를 얼마나 당합니까? 그러나 그 위기의 자리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당했지만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음으로 우왕좌왕하고, 온갖 몸부림을 치다가 멸망으로 가지 않습니까? 이 혼인잔치 집에 계신 주님이 우리 가정, 직장, 점포, 삶의 현장에 늘 동행하시는 주님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은 순종입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5절에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주목해 보면 처음에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냉담했습니다. 포도주 떨어진 것과 예수님이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마침내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는 하인들에게 당부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예수님은 드디어 하인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첫 번째 명령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하인들이 가득 채웠습니다.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 두 번째 명령이었습니다. 떠서 갖다 주었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두 마디입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떠서 갖다 주어라」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부탁한 말은 「무슨 말이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성도의 순종에 나타납니다. 이 순종의 요건은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요건입니다. 사람들이 위기를 당하면 하나님을 놓쳐 버리고, 잊어버리고, 등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위기를 극복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수록 여호와를 향하여 바라보아야 하고,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세로 그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무엇을 말씀하든지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인들에게 말씀을 하신 것이 쉬운 말씀 같지만 하인들 편에서는 상당히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이 결례를 위한 항아리는 그냥 물을 부어 놓고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 손을 씻는 물입니다. 그런데 지금 포도주가 떨어져서 야단이 났는데 어디 가서 포도주를 구해 와야만 해결이 되는데 결례를 위해서 사용하는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한 것은 헛된 것입니다. 「아니, 여기에 물을 부어서 어떻게 포도주를 만듭니까? 이런 헛수고를 왜 합니까? 그리고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은 손님들이 오기 전에 채워놓고 손님이 올 때 씻는 것인데 이미 손님들이 다 와 있는데 무슨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가?」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명령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사람이 무슨 헛된 행동을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행하라」 순종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자리에 개입하시는 길을 열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순종이라는 것은 위기의 때에 값진 능력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위기를 당하면, 고난을 당하면 순종하는 일을 핑계합니다. 순종하는 일이 면제되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는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이 혼인잔치에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요건중의 하나가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인데 하인들은 지금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있으니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위기의 때에 본색이 다 드러납니다. 위기의 때에 자신을 위하느냐? 남을 위하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느냐? 하는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세 번째,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최선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름다운 최선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께 요청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냉담했습니다. 「나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내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인들에게 당부했습니다. 하인들이 어머니의 당부를 받은 그대로 끝까지 순종을 완료했습니다. 연회장에게 떠서 갖다 주라는 명령은 매우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연회장은 포도주를 가져오라고 호통을 치고 있는데 물을 떠서 갖다 주는 것은 야단맞을 일입니다. 큰일입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연회장에게 맹물을 떠다 주는 일은 꾸중들을 일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이므로 순종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거기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가 허기진 배를 안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먹을 것이 없느냐?」 「예, 가루 한 웅큼과 기름 조금 뿐입니다.」 「그것으로 떡을 구워 내게 가져오라.」 마지막 식사를 이 여인은 떡을 구워 선지자 엘리야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그것을 먹고 축복한 엘리야의 그 손길 때문에 그 통에는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에는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도다.」 최선입니다. 최선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위기의 때에 일어나는 불신앙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불신앙, 죄입니다. 이 하인들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명령이지만 마지막까지 순종하고 있는 최선의 걸음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있어야 합니다. 이 걸음 속에, 순종 속에, 최선 속에 여호와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에 과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책을 한 권 읽어도 최선을 다해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한 장 읽어도 마음을 모아서 최선을 다해서 읽어야 합니다. 헬렌 켈러는 기적의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의 생애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입니다. 이 여인은 3중 장애를 가졌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헬렌 켈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삼일 동안 건강을 주신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첫째 날에는 나와 친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둘째 날에는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을 한번 경험해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내일 벙어리가 될 것처럼 말하십시오. 내일 소경이 될 것처럼 많이 보십시오. 내일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많이 들으십시오.」 이 교훈은 당신이 볼 수 있을 때, 들을 수 있을 때, 말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3중 장애를 안고 막연하게 여호와의 도움과 기적만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말을 하기 위해서 피눈물나는 훈련을 했습니다. 이 여인의 기적 속에는 최선의 땀방울이 묻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섬길 때 최선을 하지 않는 죄를 범치 않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할 때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아무리 교인이 많아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30명의 믿음의 청년들이 최선을 다하여 기도했던 옥스퍼드의 기도회가 영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숫자, 분량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몇 사람 있느냐에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일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하는 일마다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하는 일마다 잘 되었다.」(대하31:21)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은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말씀과 마리아의 순종과 하인들의 최선이 묶어져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어머니와 하인의 역할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어머니와 하인이 없으면 그 잔치 집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다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분명히 믿으십니까? 거기에 어머니와 하인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위기를 극복하게 합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새기면서 여러분의 개인적인 위기를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국가와 사회가 안고 있는 위기도 이 원리 안에서 극복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절망의 죽음을 헤치고 희망의 부활을 가져오신 예수님은 영원한 희망의 씨앗이 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리스도를 모시고 희망을 보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환경을 바라보고 좌절하거나 절망하여 부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우리 속에 심겨진 희망의 씨앗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꿈을 갖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사람으로 삶을 일구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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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성경을 읽읍시다.
본문: 딤후3:15-16 “또 내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즘 세상은 책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도 많은 종류의 책이 산적해 있지만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문제이고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책을 많이 읽기 바랍니다. 그런데 특히 책 중의 책이요 세계 최고 베스트 셀러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의 인류 창조이래 최대의 선물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고 말했고, 토마스 제퍼슨은 “성경이 없었으면 인류는 이미 멸망하였을 것이다” 하였으며 영국의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는 영국을 버릴지라도 성경은 버릴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젼은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배될 때 천사들이 그들과 동거하며 그들의 식구가 될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왜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이 시간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하나님을 섬기면 도리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10장 2-3절에 보면 “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고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하루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신앙생활 정도를 알기 위해 한 유년부 학생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얘야, 여리고 성은 누가 무너뜨렸느냐?” 그러자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결코 성을 무너뜨리지 않았어요” 하며 도망치듯 가버렸습니다. 걱정이 된 목사님은 주일학교 담임교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담임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그 아이는 결코 거짓말 할 아이가 아닙니다! 그 애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리가 없습니다” 이에 너무나 걱정이 된 목사님은 긴급히 장로회(당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느냐 질문을 했더니 글쎄 아무도 모르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한 부자 장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까짓 것 애들이 무너뜨린 성쯤이야 물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지 않으면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2. 우리가 왜 성경을 읽어야 하냐하면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을 찾아보세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젖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젖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성장하고,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17:8절과 시편 1편 3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 17:13절에 “생수의 근원이 도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거룩한 생수가 끊어지면 마음이 황폐해 집니다. 생수인 성경 말씀을 읽지 않고 듣지 않으면 영혼이 사막화 됩니다. 지금 이 세계에는 굶어죽고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이 하루에 4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처음 며칠 간은 밥을 먹지 않으면 음식에 대한 갈망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밥을 먹지 않고 10여 일이 지나면 배고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허기증을 못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듣지 않으면 처음에는 마음이 공허하고, 갈급하나 오래 되면 영혼이 무디어지고 말씀에 무감각해집니다. 영혼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영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영혼이 죽습니다. 어떤 인디언 부족에 하루는 개가 쌍둥이 강아지를 낳았습니다. 쌍둥이 강아지가 자라는 것을 본 인디언이 추장에게“ 이 쌍둥이 강아지가 싸우면 어느 족이 이길(승리할)것 같습니까?”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 추장은 대답했습니다. 많이 먹는 강아지가 이길(승리)것이다.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먹고 듣는 사람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듣는 사람이 먼저 되고 말씀 읽기를 게으른 자는 나중 됩니다. 하나님(성경) 말씀이 꿀보다 더 달지 않고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병들어 자라지 않는 상태입니다. (시119:103, 시119:97)
3. 죄로부터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죄로부터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방해꾼은 바로 죄입니다. 죄로부터 승리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기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6: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강한 사람도 하나님 말씀이 없이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시편119편 9절과 11절 말씀에도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바로 전에 40일간 금식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을 때 마귀가 유혹할 때마다 성경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 행실(품행)이 좋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 악을 이기고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성경말씀과 죄는 상극이어서 성격말씀과 가까이 할수록 죄는 멀어지고 죄와 친할수록 성경 말씀은 멀어집니다.
4. 복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복되고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수아1장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였습니다. 주야로 성경을 읽어보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행하는 자는 인생길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의 말씀대로 생활해야 합니다. 시편 1:1-2절 말씀에도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였으며 누가복음 11:28절 말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여러분, 복 받고 행복한 삶을 누리시려면 꼭 성경 말씀을 읽고 공부하세요. 잠 13:13절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5.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3:15절 말씀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나” 그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 디모데후서 2:2절 말씀에도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네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연약한 그리스도인을 더욱 강하게 성장시키는데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6. 남보다 지혜롭게 됩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성경 시편119:98과 100절 말씀을 보면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더하며” 하였습니다. 성경은 지혜의 말씀입니다. 지혜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고 지혜가 더 합니다. 시편 19편 7-8절에도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해야 됩니다.
7.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말씀을 읽으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예레미아 15장 16절 말씀을 읽어보세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마음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시편 19편 7절과 8절 함께 읽어봅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8. 성경말씀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면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4:12-13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눈앞에 벌거 벗은 것 같이 드러나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만나기 전에는, 우상숭배가 죄인 줄 모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자기가 어떤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지 깨닫지 못합니다. 제가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낮에는 돈 벌고, 밤에는 공부하는 남자 자취생 둘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두 남자는 새벽에는 일찍 나가 일해서 돈 벌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늦게까지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부엌에 전구가 고장이 났지만 너무 피곤하고 전구 사러 갈 여유도 없어 밤늦게 돌아와서는 저녁식사를 하는데 반찬으로는 시골에서 가져온 고추장과 간장이 전부였는데 특히 간장 맛이 제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간장에다 밥을 비벼먹고 “그 간장 맛 참 좋다”라고 감탄하며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휴무일을 맞아 오랜만에 부엌청소도 하고 고장났던 부엌의 전기불도 고쳤는데 보통 때처럼 저녁에 간장에다 밥 비벼먹기 위해 간장을 퍼기 위해 간장 독 속을 보았더니 왠걸 간장 독 속에 쥐 한 마리가 빠져 죽어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 뼈가 드러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보니 입에서 구역질이 나고 소름이 떨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간장이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어두움 속에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으나 빛이 들어오면 먼지가 보이듯이 주님 말씀이 내 안에 비추이기 전에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행위가 하나님이 그토록 미워하시는 죄를 범하는 일인가를 모르고 행합니다. 또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그 색깔로 보이듯이 죄의 안경을 끼고 보면 하나님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은 죄의 눈으로 육안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팔복에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성경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성경은 삶의 나침반 구실을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말씀을 읽고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9. 성경은 인생의 지도요, 나침반과 저울 그리고 거울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하였습니다. 군대에 가면 군인들에게 독도법을 가르치고 훈련합니다. 적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려면 지도가 있어야 하는데 성경말씀은 우리 인생의 지도입니다. 아울러 항해하는 배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가려면 나침반이 있어야 하는데 성경이 바로 천국까지 무사히 인도하는 나침반 구실을 합니다. 또 우리가 길이를 잴 때 자가 있어야 하고 무개를 잴 때 저울이 있어야 하는데 성경은 바로 우리가 삶을 사는 자요, 저울이요 지침서입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우리 얼굴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려면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우리 마음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려면 우리 마음의 거울인 성경 말씀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더러운 것은 회개하여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저는 이십년 전에 한국 청소년 연맹 한별단 학생들을 데리고 군 휴양소에 2박 3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휴양소에 가서 관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글짓기, 사생대회 프로그램이 들어있어 수채화도구 그림물감을 준비하게 했는데 어떤 짓궂은 학생이 밤에 학생들 잠자는데 얼굴에다 물감으로 수염을 그려 넣고 어떤 학생머리에는 치약을 짜서 묻혀놓고 장난을 해 놓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지 않은 학생들은 자기 얼굴 모습이 어떤지는 모르고 다른 학생들만 보고 깔깔 웃고 야단났습니다. 나중에야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이 가관인줄 알고 세수를 하고 머리 감고 야단법석을 떨더군요. 우리가 며칠 간 거울 안보면 자기 얼굴이 어떤 모습이 될까요? 우리도 성경을 안 보면 우리 마음은 아주 더러워지고 보기 흉해 질 것입니다.
10.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으면 거짓 교훈에 속지 않게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29절에서 32절을 보면 초대 교회 때에도 악한 무리가 성도들을 어그러진 말로 유혹하였으나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이를 물리치고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기업이 있게 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 2장 15절에도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였습니다. 오늘 날 우리 주위에는 사이비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대순진리회, 신천지, 구원파, 등등, 이러한 사이비 종교의 유혹에 넘어가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11.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 거듭나게 됩니다. 즉 새사람으로 변화 받게 됩니다. 많은 죄인들과 악인들이 성경을 읽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깡패였던 사람이 목사가 된 것도 보았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젊은 날에 방탕하다가 어머니의 기도로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삶과 신앙의 유일한 기준이며, 매일 먹어야하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이 말씀 안에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와 모든 보화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안에 있는 자를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1:3)
말씀을 읽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믿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바로 성경을 손에 들고 펼치십시오. 그것이 기적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읽고 들으십시오. 눈과 귀를 통해 마음에 새기십시오. 삶과 영혼에 스며들게 하십시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천국이 펼쳐질 것입니다. 2013년 한해도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복 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아름답게 섬기시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형제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매일 성경말씀을 읽고 성경 공부하는 것을 생활화합시다. 이처럼 귀한 성경 말씀을 등한히 하고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고 성경말씀을 매일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여 말씀을 통해서 능력을 얻고 날마다 신앙이 성장하여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진리 되신 하나님, 주의 말씀을 통해 저희들의 영혼이 소성케 되고,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을 주옵소서. 주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느끼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갈릴리 공동체) |
주제별 추가 자료편(구원)
▣ 구원의 유일한 길
본문 :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대 그리스의 수학을 모두 모아 집대성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편찬된 지 23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현대 수학에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매우 수준 높은 책입니다. 이 책을 지은 유클리드는 생전에 이집트의 왕자 중 한명인 소타라는 제자를 두었습니다. 소타는 수학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익혔는데, 그 중 수학을 가장 어려워했습니다. 하루는 수학의 난해함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유클리드에게 말했습니다. “수학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수학을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유클리드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왕자님, 배움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직접 익히고 깨닫는 것 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험하지 않고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아는 방법은 없습니다. 말씀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는 체험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됩니다. 구원의 유일한 방법인 예수님을 믿고 따르십시오. * 기도: 주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고 섬기게 하소서! * 묵상: 우리 주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김장환 목사, 제공 : 나침반출판사
▣ 구원과 믿음
본문: 사도행전 13:44~ 52, 찬송 535장 (통 325장)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두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회당은 성전에 갈 수 없었던 유대인들이 모여서 말씀을 봉독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던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해서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선포한 것은 구원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명료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단 한 번의 희생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작정된 자로 하여금 얻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곧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고 책임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들을 때 화를 내고 대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박해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렇듯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인 동시에 우리에게 기꺼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고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책임적인 행동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만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분명한 복음이 온 인류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믿고 고백하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복음 앞에 다시 한 번 “아멘”으로 응답하며 구원의 은총 안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 기도: 구원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대속의 사랑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아멘. /가정예배365
▣ 구원의 기회가 되도록
본문: 사도행전 16:25~ 34, 찬송 518장 (통 252장)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오늘 말씀은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간수가족의 아름다운 구원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선교사역과 복음을 전하며 겪는 고난과 역경조차도 구원의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불의한 관리의 매질과 수감과 지진은 바울과 실라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했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과 그 장소를 구원의 기회로 만드셨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장터의 관리와 빌립보의 상관들에게 고발당하고 옷을 찢겨 매를 맞은 후에 감옥에 갇힙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린 것입니다. 죄수들은 모두 도망하고 간수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문책과 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자결을 시도합니다. 그때 바울이 말합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절).” 감옥에서 빠져나와 몸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감옥 안에 앉아있다는 말에 놀란 간수는 두려운 마음으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30절)”하며 물었습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절)”고 선포하였습니다. 지진으로 혼란과 혼돈에 빠진 그 밤에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세례를 받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복음 전파자가 겪는 다양한 위기를 구원의 기회로 바꾸시는 위대한 분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관리들에게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희망이 다 사라진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함께 옥에 갇혀있는 다른 죄수들을 위해 소리높여 기도하며 찬송하는 용기있는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도망칠 기회도 주어졌지만 도망치지 않았고 오히려 간수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고, 그의 가족 모두가 영적인 구원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어려운 중에도 낙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구원의 기회를 만드십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낙심하지 맙시다. • 기도: 우리도 바울과 실라처럼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끈기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용기와 믿음을 주소서. 아멘. /가정예배365
▣ 구원의 조건
본문: 고후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대 그리스에 포시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달변가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던 그는 모든 일에 정직해서 시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특히나 그는 잘못을 저지른 죄인들을 변호하는 일을 자주 맡았습니다. 한 번은 아리스토킨이라는 흉악범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포시온이 그를 변호해 주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포시온의 친구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자네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그러나 아리스토킨은 투옥되어서 죄를 받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네. 자네가 굳이 그런 흉악범을 돕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러나 포시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 후에 아리스토킨의 변호를 자신이 맡겠다고 청했습니다. “물론 그는 죗값을 치러야 하네. 하지만 변호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죄없는 사람이 아니라네.”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회개를 할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게 됩니다. 이겨낼 수 없는 죄의 문제를 모두 주님께 맡김으로 참된 구원을 얻으십시오. * 기도: 주님!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하소서! * 묵상: 죄를 스스로 인정하므로 참된 회개로 주님께 나가십시오. /김장환 목사, 제공 : 나침반출판사
▣ 구원의 확신
신앙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은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을 취소하시거나 번복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우주 비행사가 달나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한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주에 무사히 다녀오는 데 있어 가장 많이 의존한 것이 무엇입니까? 최신식 과학기술입니까? 첨단 우주로켓입니까?" 그 질문에 우주 비행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장 신뢰했던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주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관성의 법칙, 중력의 법칙, 별들의 운행 법칙….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이런 법칙들이 불변하기에 우주 비행사는 마음 놓고 우주여행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죽는 순간 천국에서 분명히 눈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하나님의 약속도 변함없이 신실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에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보는 십자가」/ 라원기
* 금언: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의식이다.- 로렌스 형제 -
[출처] 내가 남기고 간 흔적은|작성자 갈릴리공동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