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마음
본문: 잠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김구 선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 남경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김구 선생을 존경하는 청년 단원과 몇몇 동지들이 선생의 어머니 생일을 알고는 잔치준비를 위해 돈을 모았다. 이런 사정을 눈치 챈 어머니는 아들의 동지들을 불러 생일 준비할 돈을 제게 주면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사서 먹으려고 하는데... 단원과 동지들은 그런 줄만 알고 그 돈을 드렸다. 어머니는 장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가 오시더니 음식은 하나도 사오지 않고 그 돈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사용할 권총 두 자루를 사오셨다. 단원들에게 독립 운동에 쓰라고 하면서 동지들을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잠4;3)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어머니가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비탄에 잠겼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애끊는 기도를 드렸다. “제 아들을 단 5분만 만나보게 해주세요. 단 5분만…”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듣고 천사가 말했다. “아들을 5분 동안만 만나게 해드리죠. 아들의 언제 모습을 보고 싶으세요. 어머니의 품에서 재롱 피우던 모습인가요,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인가요.” 어머니는 한참 생각한 뒤 천사에게 말했다. “아들이 잘못을 저질러 제게 용서를 빌던 모습입니다. 눈물 흘리던 그 모습이 제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어머니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자녀에게 많은 사랑을 주면서도 더 못해준 것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머니는 지우개가 되길 원하는 사람이다. 자녀들의 아픔과 슬픔을 모두 지워주고 싶은 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 12)
6.25 전쟁 중 일어난 실화이다. 만삭이 된 한 여인이 피난길에 아이를 분만해야 만하는 절박한 상황에 빠지게 돕니다. 여인은 어느 작은 다리 밑에 자리를 잡고 분만합니다. 겨울이었고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가운데 엄마는 아이가 얼어 죽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 아기를 감싸줍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어머니는 결국 얼어 죽고 맙니다. 얼마 후 미군 장교하나가 차를 몰고 그곳을 지나가다가 연료가 떨어져 다리 위에서 멈추게 되는데 그때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 가보니 죽은 엄마의 품속에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합니다. 장교는 아기를 자신의 양자로 삼습니다. 그 후 다 장성한 양자와 함께 어머니의 무덤을 찾게 됩니다. 아들은 어머님 묘지 앞에서 오열했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저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은 얼어 죽으셨다니!"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시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 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 나이 든 사람끼리 하는 농담이 있다. ‘기성세대 3대 바보’가 누군가 하는 것이다. 첫째는 예순 살이 넘어서 집을 늘려 이사 가는 사람이고, 둘째는 장가든 자식과 함께 살면서 손자 봐주는 사람이며, 셋째는 자식한테 미리 재산 다 물려주고 용돈 타 쓰는 사람이란다. 아마 그들은 여전히 자식을 향한 기대를 품고 있기에 바보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의 자식 자랑은 유별난 일이 아니다. 주변에서 신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많이 본다. 신장 기증은 대부분 가족 간에나 가능한데, 그중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어느 어머니는 의사에게 “내 신장을 두 개 모두 떼어보고, 둘 중에서 좋은 것으로 아들에게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의사가 “두 개 다 떼어내면 어머니는 죽습니다” 했더니, 그래도 어머니는 “꼭 두 개 다 떼어보고 좋은 것으로 이식해 주십시오”라고 했단다. 자식의 일이라면 어머니는 언제나 최고로 바보가 된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잠15:20)
글을 배우지 못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한 소년이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소매치기를 하다가 결국 소년원에 갇혔다. 소년은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하고 자신을 가둔 사회를 저주하였다. 이런 소년을 지켜보던 한 교도관이 어느 날, 새끼 참새 한 마리를 선물하며 말했다. 네가 이 새끼 참새를 어른 참새로 키워내면 널 석방해 주겠다. 하루라도 빨리 나갈 욕심에 소년은 흔쾌히 승낙을 했지만 새끼 참새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감방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장난을 막아 주어야 했고, 춥지 않도록 감싸주어야 했으며, 때론 먹이를 줘야 했다. 그런데 참새는 조금 자란 뒤부터 자꾸 감방의 창살틈으로 날아가려 했다. 날아가지 못하도록 실로 다리를 묶었더니 참새는 그 실을 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소년이 먹이를 주고 달래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지친 소년이 교도관에게 참새를 그만 풀어주어야 겠다고 말했다. ‘저는 계속 키우고 싶은데 참새는 제 마음을 몰라 주는군요’ 그러자 교도관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자네 어머니의 마음일거야... 다 자라지도 않은 너를 붙잡고 싶지만 너는 줄을 끊고 날아가 버린 거지 그래서 네가 지금 여기 있는거야’ 소년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네 어머니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계신다. 네가 새끼 참새를 생각하는 것보다 수백 배 말이다. 어머니는 너를 위해서 그동안 글씨를 배우신 모양이다. 네 석방을 간청하는 탄원서를 손수 쓰셨더구나...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23:22)
오늘날 어머니의 마음은 어린이 학교교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부모님의 훈계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지 말고, 부모님의 자녀됨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항상 기도하는 믿음의 가정들이 되게 하옵소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부모를 중심으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사는 우리 형제자매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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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몸의 영성)
귀는 청각과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청각기관계의 한 부분이다. 귀는 크게 외의, 중이, 내의로 구분한다. 귀로 듣는 것 만큼 말할 수 있다.(농아는 듣지 못해 발음을 못함) 에픽테투스(Epictetus): 우리가 두 귀와 하나의 입을 가진 것은 말하는 것보다 갑절로 듣게 하기 위함이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많으면 잔소리가 된다. 폴 틸리히(Tillich):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귀로 듣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말이 안 통한다.
1. 하나님의 귀 1) 가난한 자, 억압받은 자들, 의인들에게 열려져 있다. 약5: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시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31: 2: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시34: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단9: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대하7: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2) 교만한 자, 완악한 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신다. 신1:45: 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겔8: 18: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 인간의 귀 1) 지식과 총명을 가져다 주는 분별있는 자의 귀 욥12:11: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사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눅4: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시116: 1- 2: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 듣지 못하는 배역의 귀 사48: 8: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렘6: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누가복음 7: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 하나님의 요청 사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마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 기도문: 우리의 귀를 열어주셔서 주님 말씀의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하옵소서. 깨닫고 감격하여 살게 하옵소서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 서울대 중국어 예배 안내
1. 일시: 매주 토요일 10시- 12시 2. 장소: 서울대 아고리움 건물 지하 1층 3. 인도자: 백동인 목사(서울대 사회과학원 박사) 4. 참가: 중국인 교환학생 가정과 자녀 및 중국선교에 관심 있는 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음 5. 후원: 소망교회(압구정) 권사, 교사 12명 6. 오시는 길: 낙성대역(2호선) 4번 출구로 나와 주유소에서 마을버스 2번 7. 참고: 5월 4일(토)은 한태완 목사 어린이 주일 설교타고 연구공원에서 하차(서울대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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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게 삽시다.
본문: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밴더빌트 대학에 경건한 그리스도인인 수학교수 메디슨 체럿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메디슨 박사는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내줄 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 시험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는 '수학'이고 또 하나는 '정직'이라는 시험입니다. 여러분이 수학시험에 통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일시적 성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 정직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삶에서 진정한 성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학시험에 실패하고도 훌륭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정직의 시험에 실패하면 보람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정직해야 할까요? 정직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이 정직한 자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대상29:17) 미국 시민들의 영원한 존경을 받는 링컨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18세에 집을 나와 상점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스무 살 되던 해에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리노이주의 한 상점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 밤늦게 상점 문을 닫고 장부를 보며 결산을 하던 링컨은 장부보다 3센트가 더 많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날 낮에 한 부인으로부터 3센트를 더 받은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거기서 한 시간도 더 되는 부인의 집을 찾아가 그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부인은 그 돈을 받고, "이것은 백금보다 더 귀한 3센트이군요. 당신의 정직한 마음은 반드시 참된 값으로 인정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라며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과연 링컨은 그 정직한 마음으로 미국의 운명을 바꾸었고, 미국의 대통령으로 세계 역사 속에 뚜렷이 남아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성품이 지향해야 할 덕목 중에 중요한 하나는 정직입니다. 현대사회의 총체적 위기는 서로 속고 속이는 양심의 상실과 부정직이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산 선생은 일찍이, "거짓이여 너는 이 민족을 망친 원수로다" 경계하였습니다. 세태를 탓 할 것이 없습니다. 마치 어두운 밤에 별이 더욱 빛나는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버리고 정직하지 않을수록 그리스도인은 더욱 정직해야 합니다. 이 시대 하나님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정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직하신 분이시기 때문에(시25:8, 사26:7) 정직한 자를 기뻐 하사,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잠2:7) 거짓된 자를 미워하십니다.(잠12:22, 잠19:9)
둘째,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며(호14:9), 정직은 성도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고후13:7) 미국에 "아딜로우"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직합니다. 그곳에 사는 하메닝씨는 사료상과 농기구상을 경영하는데, 아침7시에 문을 열어 정오에 문을 닫고는 목장에 나가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목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창고 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물건을 가져갔는 지, 그리고 얼마를 받아야 할지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문에 걸려있는 장부를 보고 검토합니다. 하메닝씨는 이런 식의 장사를 여러 해 해왔지만 결코 물건을 도난 당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아딜로우"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결코 속이지 못합니다.
셋째, 정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벧전2:12) 어떤 유대인 부인이 백화점에서 코트를 하나 샀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코트 주머니 속에 다이아반지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반지는 코트가게 주인이 코트를 정리하다가 실수하여 코트 주머니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코트를 산 유대인 부인은 다이아 반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백화점으로 갑니다. 그때 그는 자기의 아이를 데리고 가 아이가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그 반지를 돌려줍니다. 주인이 고마워하고 감사해 하면서 부인에게 묻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토록 정직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유대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말을 하고 부인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짧은 행동 속에서 부인은 다이아몬드 반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몇 가지 하였습니다. 먼저 자기아이에게 정직을 가르쳤습니다. 품위 있고 아름다운 삶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자기 아이에게 유대인과 하나님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넷째, 심는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동업으로 골동품 가게를 냈습니다. 둘은 모조품을 진품으로 속여 팔다가 탄로가 나서 장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늘과 땅처럼 가격차가 나는 모조품을 진품으로 속여 폭리를 취하다가 탄로 난 것입니다. 둘은 의논하였습니다. “우리 앞으로 10년 간은 절대로 속여 팔지 말자. 10년만 정직하게 신용을 쌓으면 사람들이 믿어줄 것이다. 그때 한꺼번에 한탕하고 끝내자.” 두 사람은 이때부터 정직하게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찾게 되자 폭리를 취하지 않아도 돈이 벌리고 번성하는 가게가 됐습니다. 두 사람은 말했습니다. “속이지 않아도 잘 되는데 이제부터는 이런 식으로 정직하게 하자.” 두 사람은 정직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다섯째, 정직한 자가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신6:18-19) 학교를 갓 졸업한 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어느 회사사장 비서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통씩 걸려오는 전화가운데 절반 이상은 적절한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장실로 연결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견디다 못한 그 여성은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며칠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고는 며칠 뒤에 그 비서를 경리담당 중역으로 발령 내렸습니다. 사장은 그 그리스도인 여성의 정직성을 높이 산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정직한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은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84:11)
여섯째, 첩경이 평탄케 됩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26:7) 정직은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해 줍니다. 문성애라는 분의 간증입니다. ‘남편 신학 공부 때문에 미국에 살던 때의 일입니다. 당시 나는 시카고의 한 여행사에 근무했는데, 여름휴가를 맞아 막내 시누이와 함께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직원 혜택으로 거의 무료였고, 시누이는 정상적으로 비행기 표를 구입했습니다. 한국에 간 김에 나는 태국에 들러 한 선교사님을 방문하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태국행 표를 구입하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때 기발한 꾀가 생겼습니다. 시누이와 나는 미국 이름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누이의 티켓에 약간의 비용을 더해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미국으로 돌아가는 시누이를 배웅하는 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시누이의 티켓을 들여다보던 항공사 직원이 티켓에는 태국에 갔다 온 표시가 있는데 여권에는 왜 도장이 안 찍혀 있는지 설명하라고 했습니다. 난 중보기도 사역자이신 어머니의 폭넓은 인맥을 의지하며 어머니에게 해결책을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겸손하고 정직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벌금을 내겠다고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이 캄캄했지만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벌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는 "벌금이 얼마나 비싼지 아세요? 별다른 의도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여권을 안 본 것으로 할게요"라고 했습니다. 어떤 형편이든 궁지를 벗어날 방법은 정직뿐이라는 진리를 확실히 마음에 새기는 기회였다고 말했습니다.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벗어나고 어디에 있든지 간에 원하는 자유를 향수합니다. 이번에는 정직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후손에게 복이 있습니다.(시112:2) 영국선교사로서 아프리카 선교에 크게 공헌한 리빙스턴 집안은 평민출신으로 귀족적인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으나 그의 혈관 속에는 천사도 부러워할 만한 귀한 것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신앙과 정직한 정신입니다. 그의 조상이 죽을 때 자식들을 불러놓고 "자녀들아 정직하라" 라는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긴 이후 리빙스턴 가의 가훈은 정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귀히 알고, 자자손손 지킴으로서 이러한 가정에서 리빙스턴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좋은 것을 누리게 되며(시84:11), 영혼을 보존합니다.(잠16:17) 한 자매로부터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가 은행에 가서 예금을 하였습니다. 가져간 돈은 분명히 100만원이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통장을 펼쳐보니 500만원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은행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담당 직원을 찾아 자초지종을 말하니 마침 너무 기뻐하였습니다. 은행 직원은 계수 착오가 생겨 부족분을 찾고 있던 터였습니다. 담당 직원은 그 자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400만원이 어디에 갔나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 전화를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이렇게 친절하시다니, 혹시 교회 다니세요?" "예, 교회에 다니지요." "이런 일이 생길 때 대부분의 고객분들은 먼저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착오가 생기는 부분을 제가 채워야 하는데, 전에도 보면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다르더라구요." 이 자매는 진실함과 정직으로 그리스도인의 위신을 살려주었습니다. "그 돈 보았을 때 욕심은 생기지 않던가요?" "왜요? 하지만 그걸 그대로 놓아두면 제가 시험에 들 것 같았습니다. 제 양심에도 떳떳치 못하거니와 나중에라도 은행에서 먼저 알고 전화가 온다면 어쩌겠어요? 크리스천의 자존심이 있지요. 그래서 유혹을 떨치고 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의 질문에 자매는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나는 그 자매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남의 돈을 떼먹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부정과 부패가 관행이 되다시피 한 오늘날, 이런 성도가 우리 교회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목자로서의 간절한 소원은 이런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며, 기쁨을 누립니다.(시97:11, 시107:42) 어느 독실한 기독교인이 설렁탕집을 인수받아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설렁탕 집을 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을 예수님 대접하는 것처럼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주방장이 이전에 하던 대로 커피에 넣는 크림으로 하루 종일 팔 만큼의 설렁탕 국물을 미리 만들어 놓았습니다. 뼈다귀를 오래 우린 진국같이 보이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는 그 날 음식점 문을 닫고 문에 글을 써 붙였습니다. “오늘 하루 쉽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을 예수님처럼 모시기로 하였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크림 국물을 설렁탕 국물로 속여서 대접하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설렁탕 국물을 모두 쏟아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양심적이고 신앙적으로 음식점을 경영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주위에 퍼졌습니다. 이 음식점은 지금 대단히 번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실 때 그 얼굴을 바로 뵈올 수 있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뿐입니다. 정직한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열립니다. 정직함으로 하늘이 열리고 세상은 밝아집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편 11:7).
넷째, 정직한 자는 그 장막이 흥하게 됩니다.(잠14:11) 비누 제조업으로 성공한 윌리엄 콜게이트는 16세기 소년시절 가난한 집안의 부담을 덜기 위해 자신이 익힌 비누제조 기술을 가지고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성경말씀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옛 이웃인 화물선 선장은 그와 함께 기도를 해 주고 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젠가는 뉴욕에 일류 비누 제조업자가 나타날 거야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바로 윌리엄 너일 수도 있다. 나는 네가 그렇게 되길 빌겠다.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해라. 번 돈의 소유권을 모두 주님께 드리도록 해라. 비누의 양과 질은 언제나 정직하게 만들어 팔도록 해. 그러면 너는 틀림없이 성공해서 부자가 될꺼야!"라고 그는 뉴욕에서 힘겹게 일자리를 구했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주님께 바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마 동안의 정식 고용인 기간이 끝나고 고용주와 동업하기에 이르렀고 몇 년 후 동업자가 죽자 윌리엄은 비누 제조업의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장의 말을 기억하고 정직하게 비누를 만들었으며 돈 계산도 정확하게 하여 십분의 일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후에는 수입의 절반을 주님께 바치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모두 교육시킨 후 그들이 자립하게 되자 소득 전체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다섯째, 정직한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존귀하게 해주십니다. 구약의 요시야 왕은 조상 다윗 왕처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따라갔습니다(왕하22:2).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일을 평탄하게 하셨습니다. 금그릇 처럼 써주셨고 후에 신분을 존귀하게 해주셨습니다(수 1:9). “내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신 13:1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어 표를 삼으라(신 6:8)”는 말씀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번성하게 하시고 흥왕하게 하시고 그의 모든 삶을 윤택하게 하시고 복을 주셔서 한 세대 큰 지도자로 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져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 앞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려면 날마다 날마다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혹과 시련에 빠지지 않도록 힘쓰고 노력할 때 성령님께서 힘을 주셔서 넉넉하게 이겨나가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섯째, 정직은 평생 행복의 비결입니다. 영국 속담에 이르기를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을 해라. 일주일 행복하고 싶거든 결혼을 해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정직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곱째,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잠3:32), 사랑을 입게 되고(잠16:13),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잠15:8) 내가 알고 있는 장로님은 아들 3형제를 길러 모두 훌륭한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장로님과 이 세 가정이 모일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아들이 어릴 때입니다. 아버지가 운전하고 어머니가 옆에 타고 아들 셋이 뒤에 타고 시골길을 달릴 때 오른편에 황량하게 넓은 깨밭이 나타났습니다.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여보! 잠깐만 차를 세워요. 깻잎 좀 따 가지고 가서 된장에 넣어 먹읍시다” 차를 멈추고 5명이 깨밭에 들어가서 순식간에 깻잎을 딴 후 가려고 할 때 아버지가 모두를 세우고 말했습니다. “남이 농사지은 깨에서 잎을 따가는 것은 도둑질이다. 사가야 한다” 그는 지갑을 꺼내더니 1000원짜리 한 장을 둘둘 말아 깨 나무에 붙들어 맸습니다. 그리고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세 아들의 머릿속엔 평생 깨나무에 매달린 1000원짜리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 후부터 아버지처럼 정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직은 도덕의 기초이고 양심의 바탕입니다. 정직을 떠난 진리도, 신앙도 허구요 위선입니다.
성경에 "거짓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잠19:9) 하였고, 정직한 자는 영원하며(욥4:7),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욥8:6) 그러므로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레19:11)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칸트의 아버지가 자기의 고향인 폴란드의 실레시아를 향하여 말을 타고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깊은 숲길을 통과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도들을 만나 값진 것들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강도들은 "네가 가진 것이 이것뿐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칸트의 아버지가 "그게 전부요"라고 대답하자 비로소 강도들은 그를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말도 빼앗기고 겁도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가다보니 옷깃에서 묵직한 것이 손에 닿았습니다. 그것은 옷 속에다 안전하게 꿰매어 보관한 금덩이였습니다. 칸트의 아버지는 즉시 되돌아 강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금덩이를 손에 들고 강도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아까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소. 내가 무서움에 질려서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오. 자 여기 내 옷 속에 감추었던 금덩이를 받으시오." 이 말을 들은 강도들은 아무도 그 금덩이를 받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강도는 빼앗은 지갑을 다시 내어놓았습니다. 물론 요사이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하여튼 진실과 정직 앞에서 강도들도 감격하고 회개한 것을 볼 때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뜻깊은 이야기라고 여겨집니다.
어느 교회 목사가 월요일 아침 일찍 교외에 있는 성도의 집에 심방가기 위해 택시를 대절해 타고 성도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약속한 택시비를 먼저 기사에게 지불하고 거스름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운전기사가 준 거스름돈이 더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아, 하나님께서 쓰라고 특별히 주시는 구나"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심을 속이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불편했습니다. 양심이 소리쳤습니다. 그러는 사이 성도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목사는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까 기사양반이 잘못 계산해서 거스름돈을 제게 더 주셨습니다."하며 남은 돈을 다시 건네주었습니다. 이때 기사가 돈을 받으며 "잘못 거슬러 준 게 아닙니다. 사실은 어제 목사님 교회에 갔다가 "정직"에 대한 목사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싱긋 웃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에서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7:10)
오늘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직의 위기"라고 생각됩니다. 정직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가 곳곳에서 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경영주나 시공업자들이 정직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강들이 오염돼 식수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킨 것도 공장이나 호텔, 농장의 주인들이 정직하지 못한데서 기인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날짜가 지난 식품을 판매해 식중독을 일으키는 것이나 수많은 부정과 사기 사건은 모두 정직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열린사회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어떻게 정직한 사회를 만들어 가느냐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사회를 가르켜 신용 사회라고 부릅니다. 얼마나 크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건강하느냐 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정직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의 모습도 심각한 "거짓의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한국교회는 자기 교회 교인 숫자를 이야기하면서 실제 교인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허수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사이 신문에 나오는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 중에 많은 수가 교회를 다닌다는 교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한국 교회가 갱신되고 회개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잠11:6)하였고, "악한 자의 길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잠14:11)하였으며,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욥8:6) 그리고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15:19)하였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큰 화를 당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수치를 겪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신6:18-19, 잠16:17), 우리 모두 정직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정직한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가 되어 정직한 자에게 내리시는 축복을 받고 진실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이웃에 기쁨 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도구인 제가 변덕스럽고 거짓된 삶을 버리고, 신실함으로 깨끗한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라
본문: 막6:1- 6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마는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무릇 우리 인간이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
예전에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했습니다. 햐얀색 옷 입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얀색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 하얀 것은 좋은 것이고, 까만 것은 나쁜 것이라는 개념이 암암리에 심어졌습니다. 그래서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 등의 시가 나오기도하고 흑인과 백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편견이 있었습니다. 이밖에 우리 민족은 유교의 가부장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여자에 대한 편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편견들을 깨뜨려야 진리를 알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 가를 알고 그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별을 따라 가지 않고 그리스도가 왕궁에서 나실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왕궁으로 찾아가 헤롯을 만난 결과 헤롯이 시기심으로..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부터 그 아래 사내아이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마2장) 우리는 말씀만을 보고 따라가야지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사람의 말을 더 믿고 의존하면 동방박사처럼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생각)라는 것은 보고 듣고 경험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것이 내부에서 하나의 틀을 만들어, 다시 새로운 사건에 부딪칠 때 먼저 경험했던 지식이 앞서가서 작용을 하게 되어, 굴절작용을 하므로 편견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깨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배속에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와 요람처럼 떠있기 좋은 알맞은 습도와 그리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탯줄을 통하여 가장 알맞게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그곳에서 오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열 달이 채워지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태아는 거의 혼절하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시 유일한 영양공급원이던 탯줄마저 끊겨버렸습니다. 태아는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이게 웬일일까요.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내가 구축한 그 세상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하며 어둠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의 교만과 편견과 아집인 내 속에서 갇혀서... 내가 진정 의를 위하여 나를 깨치고 죽을 때 영원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자신의 목적, 삶의 가치관, 삶의 스타일, 삶의 모든 방법을 높이 평가하거나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부한 사람은 결코 천국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받으려면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릇 속에 이미 다른 것이 가득 담겨 있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그릇이 비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자기 주장, 가치관, 철학,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8복중에 첫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19:14) 하셨습니다. 어린이에게는 편견과 선입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전하면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습니다. 젊은이는 과분한 차를 몰고 다녔습니다. 술도 마셨습니다. 현란한 불빛 밑에서 춤도 추었습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등산도 가고 낚시도 가고 바닷가로 여행도 다녔습니다. 용돈도 많이 썼고 낭비와 사치가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건전한 모임에서 예쁜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가씨는 착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 아가씨와 사귀기 위해 할 수 없이 교회당에 나가서 앉아 있기는 했지만 설교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이 너무도 마음에 들고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가장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와 앉아 있을지라도 자기의 생각, 자기의 방법,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전에 맛보지 못한 참된 평안과 자유와 기쁨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을 다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해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이전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빌3:7-8) 우리는 이제까지 나의 교만과 편견과 아집인 내 속에 갇혀서 이제까지 구축한 세상의 지식과 경험만을 최고라고 생각하며 어둠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참된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처럼 과거의 잘못된 편견을 배설물처럼 과감히 버려야 하겠습니다.
한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부는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녔습니다. 성찬시간에조차 이런 행동이 계속됐습니다. 성찬을 받기 위해 강단 앞으로 나올 때도 손을 잡고 나왔을 뿐 아니라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도 남편이 떡과 포도주를 부인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을 보며 민망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 중 아내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목사님이 장례식에 참석해 위로해주었습니다. 그 남편은 그간의 사정을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놀랍게도 이 부부는 둘 다 시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아내의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찬식에서조차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치의 편견은 6백만의 유대인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렇게 크진 않더라도 우리 이웃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수많은 편견이 목격됩니다. 크든 작든 주관적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편견은 매우 잔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장님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길을 걸으면서 이 마을의 여섯 사람들이 코끼리를 타고 오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섯 사람들은 코끼리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한 번도 가까이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코끼리를 타고 있던 사람에게 이 거대한 동물을 만져보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마을에 돌아가서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었습니다. 코끼리를 탄 사람은 이를 허락하고 여섯 사람이 각각 다른 부분을 만지게 했습니다. 모든 장님들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분명히 알기까지 코끼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두들겨 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경험을 보고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진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코끼리랑 광대하고 두꺼운 벽 같이 생겼습니다.’ ‘말도 안 돼.’하고 코끼리의 이빨을 만지고 온 둘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코끼리는 짧고, 둥글고, 매끄럽지만 날카로워요. 나는 코끼리를 벽보다는 창에 비교하겠습니다.‘ 코끼리의 귀를 만지고 온 세 번째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것은 벽이나 창하고는 전혀 같지 않습니다. 차라리 두꺼운 털 양탄자 같은 것으로 만든 거대한 이파리 같아요. 그것은 손만 대면 움직입니다.’ ‘나는 찬성 못합니다.‘ 하고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 온 네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뱀과 같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이 맞지 않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온 사람입니다. ’그것은 나무처럼 둥글고 두텁게 생겼어요.‘ 코끼리를 타본 여섯째 사람이 항의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코끼리를 사실대로 설명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코끼리는 확실히 커다란 움직이는 산처럼 생겼습니다.‘ 오늘날도 마을 사람들은 토론을 계속하며 아무도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편견은 무식의 소산이며, 차라리 무지가 편견보다는 진실에 가깝습니다.
페르시아에 네 아들을 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아들들을 불러놓고 한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들어라. 첫째는 겨울, 둘째는 봄, 셋째는 여름, 넷째는 가을에 정원 뒤편의 망고나무를 관찰하라. 다른 계절에 망고나무를 보아서는 안 된다." 네 아들은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1년 후 왕은 네 아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너희가 본 망고나무를 내게 설명해다오." 네 아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불에 타고 남은 폐허 같습니다. 잎이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꽃은 장미처럼 아름답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가 탐스럽습니다." 왕은 네 아들의 손을 잡고 교훈을 주었습니다. ‘너희들의 대답은 모두 옳다. 망고나무는 계절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급한 결론은 편견을 낳습니다. 편견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화합을 깨트립니다. 한 가지 잘못으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학교공부를 못한다고 그 사람이 모자라고 실패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박찬호, 박세리 선수를 보세요. 그 사람들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못했지만 얼마나 성공했습니까?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결국 아들 함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일 한가지로 우리가 노아를 알콜중독자라고 말해야 합니까? 다윗이 부하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윗을 '간음쟁이'라고 평가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거짓말장이'라고 해야 합니까? 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베드로를 '비겁쟁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 전체를 평가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편견입니다. 대개 사이비종교들이 성경 어떤 한 두 구절을 너무 고집하다가 이단이 되고 거짓종교가 되었습니다.(약3:14, 요일2:21) 예를 들면 구원파는 로마서의 말씀인 믿음만을 강조하여 '우리는 이미 구원 얻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등등의 이단 사설을 주장합니다. 안식일교는 구약의 율법 중 하나인 토요일 안식만을 주장하고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다 거짓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말씀은 모두 진리입니다. 로마서도 구약도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한 면만을 보고 그것만을 주장하면 큰일납니다. 한쪽만 치우치면 병신입니다. 머리만 크면 과분수입니다. 한쪽 다리만 커지면 걷기 힘듭니다. 가슴만 키워도 안되고, 지, 정, 의 (知情意)를 고루 갖추어야합니다.
어떤 물체든 단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물과 물건은 입체로 형성되어 있고 내부와 외부가 있습니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며 인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흔히 일면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외형만을 보고서 판단하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존재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에 있어서 어느 일면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을 편견이라 합니다. 편견 또는 선입관에 사로잡히면 사리를 분별할 수 없으며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없습니다. S. 존슨은 ‘편견에 사로잡히면 항상 약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편견만큼 무서운 질병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소외시켜 사회를 혼란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편견은 무지의 소산이며 경솔한 행위의 원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조언과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명심보감에도 "한 편의 말만 들으면 친한 사이가 멀어지기 쉽다"고 하여 편견에 치우치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는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의 겉과 외모만 보지 말고 속을 통찰해야 합니다. 눈앞에 상황만 보지 말고 앞으로 미치는 파장을 예측해 보아야 합니다. 세밀한 관찰과 주의 깊은 사려를 통해서만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H. D. 도로우는 ‘편견을 버린다는 것은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인생의 거울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종합적으로 경청할 수 있어야 하며,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판단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편견이라고 판단되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과감하게 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일한 편견을 두 번 갖지 않아야 합니다. 본질을 보고 다양하게 생각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길러야만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간청으로 그 도시에서 이틀 동안 함께 유하셨습니다(요4:40).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정서로는 유대인 랍비가 개 취급 받는 사마리아인들과 며칠을 함께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처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좁은 편견을 넘어섭니다. 인종차별, 이기주의, 편협한 교파주의, 분파주의, 개교회주의 심지어 민족주의 속에 숨어있는 자만에 찬 우월감과 자신의 절대화는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편견에 찬 삶에 도전하셨고 잘못된 인간의 벽을 몸소 깨뜨려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배타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지방색이 강한 한국사람들은 마음의 폭을 넓혀 서로 수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로버트 리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수도 워싱턴의 한 교회를 방문하여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한 흑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리 장군은 ‘십자가 아래서는 모든 땅이 평평한 것이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편견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편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평무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종과, 사회 계급과 성별에 관계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위로부터 난 지혜에 따라 살고 있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따뜻한 햇살처럼 편견의 안개를 거두어줍니다. 당신은 매일 평평한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십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니의 오디션에 새로운 심사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이름 하여 "장막 오디션"이었습니다. 심사 위원들이 지원자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장막을 가려 놓고 심사하는 제도로, 아무 편견 없이 순전히 음악 실력만 평가하기 위해 도입된 방법이었습니다. 그 시스템 도입 직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지원자가 너무 뛰어난 실력을 보였는데, 막이 올라가고 보니 일본인이었던 것입니다. 장막 오디션은 남녀 성별의 편견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전까지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연주자는 100퍼센트 남자였습니다. 여자는 남자만큼 연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힘이 약하고, 폐가 튼튼하지 못하며, 손도 작고, 특정 악기를 다룰 수 있는 탄력도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오디션 시스템이 도입된 첫해에 선발된 네 명의 바이올리니스트 모두가 여자였습니다. 1980년 독일 뮌헨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오디션도 장막 오디션이었는데, 트롬본 부문에서 만장일치로 뽑힌 지원자가 아비 코난트라는 여성이어서 모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평생 장막 오디션의 마인드로 살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그 사람의 실력의 소리, 인격의 소리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외모나 나이, 학벌과 집안 배경은 뒷전에 제쳐 두고 말입니다.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편견에 빠집니다. 편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에는 결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편견의 눈을 깨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내신 최고의 순간을 놓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 9장 26절 이하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고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하나 제자들이 그를 다 두려워하고 멀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에 자기들을 핍박했던 사람이었으므로 사울의 회심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 후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수군거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예수라는 분의 행한 것보다 더 많겠는가?’ 그런 수군거림을 듣고 기득권에 위협을 느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이 예수님에게 가보니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소리쳤습니다. ‘이분이 참으로 메시야다.’ 그러자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들이 별 반박거리가 없으니까 지역성을 부각시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 지역에서 나오겠는가?’(요 7:41) 그런 장면을 보면서 하인들이 예수님을 잡지 않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인들에게 ‘왜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서 보니 그분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분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소리쳤습니다. "너희들도 미혹되었느냐? 그 사람은 이단이야!" 그 바리새인들의 말의 듣고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사람의 행한 것과 그 말한 것을 가지고 냉철하게 판단합시다!’ 무조건 사람을 거부하지 말고 그 사람됨과 언행을 보고 판단하자는 말이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니고데모의 바른 소리에 나머지 바리새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톡톡히 창피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창피를 당했으니 무슨 반박하는 말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굴절된 지역감정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하게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요한복음 7장 5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니고데모! 당신도 갈릴리 출신이오? 생각해 보시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해요! 당신이 갈릴리 출신이니까 갈릴리 사람인 예수를 변호하는 겁니까?’
성경에는 니고데모가 어디 출신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갈릴리 출신이기에 예수님을 변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다만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따라 말한 것인데, 그 말에 대응할 말이 없으니까 ‘너도 갈릴리 출신이냐’고 편견을 앞세운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역적 편견을 고취시킴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역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느 지역은 어떻다’라고 하면서 편견을 고취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려는 모습이 종종 발견됩니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실수하는 점이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일반화를 통한 자기 변호'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다 늑대야! 여자는 다 여우야!’라는 식의 말들도 일반화의 전형적인 말들입니다. 20세의 한 처녀가 남자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모든 남자는 다 늑대'라고 말할 권리가 있을까요? 인생 20에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나 보았다고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야 할까요? 이런 일반화의 편견에는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양심을 혼란스럽게 하고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도로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실질적으로 갈릴리 지역에서 선지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요나, 나훔, 호세야,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등 이스라엘 역사상 유명한 선지자들이 갈릴리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근거 없는 편견입니까?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편견 때문에 메시야를 거부하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편견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진정 바르고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화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는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 성숙한 자세를 가지고 진리 가운데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죽음과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도 거절하는 나를 참으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고 받으셨으니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항상 복음을 전하며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우리가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진리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어린이 교육
본문: 눅18:15~17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일본에서 비행 청소년의 어머니로 불리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름은 오히라 미스요이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의 저자입니다. 그녀는 청소년기에 가출해 호스티스가 됐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타락한 삶을 정리하고 공부를 시작해 변호사가 됐습니다. 그런 뒤 비행 청소년을 위해 온 삶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녀가 제시하는 자녀교육 10대 비결입니다. 1.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2. 착한 사람이 되라고만 강요하지 말라. 3. 가정은 자녀의 영원한 안식처임을 인식시켜라. 4. 자녀의 말을 믿어주어라. 5. 당신이 항상 자녀의 편임을 인식시켜라. 6. 끊임없이 희망을 제시하라. 7. 자녀 앞에서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8. 잘못된 것은 근본부터 고쳐주어라. 9. 혼자 고민하지 말고 많은 대화를 나누라. 10. 무언의 구조신호를 보낼 때 그것을 놓치지 말라. 부모는 자녀의 청지기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위탁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에 흠집에 생기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19:14) 하셨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막9:37) 하셨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사회, 국가의 장래(미래)를 알아보려면 그곳의 어린이들을 살펴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며 잘 교육시켜 훌륭하게 자라게 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어린이를 잘 기를 수가 있을까요?
1. 어렸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마태복음 5장의 8복 중 첫 번째가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자기 의(義), 자기 철학, 가치관, 자기 주장, 이념 등으로 가득합니다. 즉 마음의 그릇에 편견과 선입견이 가득하여 참 진리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편견과 선입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받기 위해 세상의 가치관, 지식 등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릴 수 있어야 진리가 내 안에 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어렸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어린 아이 때 마음속에 가르침을 받아 놓으면 나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습니다. 습관화되는 것입니다.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합니다. 사물에 눈을 뜨고 의식이 형성되는 시기에 옳은 것과 그른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이때를 놓치면 자제력과 분별력을 잃게 돼 자칫하면 평생 '미완'의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이가 늙고 난 다음에 신앙생활 하려면 너무나 마귀가 상처를 많이 입혀 놓았기 때문에 진리가 내 안에 거하기가 힘들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아름다운 어린이의 마음에 신앙의 아름다운 복음을 전해 놓으면 어린 아이는 오래오래 동안 신앙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님의 신앙을 언제나 모범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 가 늘 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이고 어디 밖에 나가서 다른 가정과 다른 생활을 별로 본적이 없으니까 부모님 신앙을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주일성수하면 같이 주일 성수를 따라 하고, 십일조 드리면 십일조 하고, 가정예배 드리면 같이 가정예배 드리고, 기도, 봉사,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생활을 하면 어린이는 반드시 부모님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이에게 특히 강조할 교육은 첫째, 아침마다 성경을 묵상하세요. 음식보다 하나님의 양식이 더 중요하고 우리 삶의 정답은 성경밖에 없다고 자녀에게 교육하세요. 성경은 인생의 나침반이요 등불입니다. 둘째, 철저한 십일조를 드리세요.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채우지 않은 분량만큼 가져가시고 십일조에 충실하면 복을 쌓아주신다고 교육하십시오. 즉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청지기임을 잊지 않게 가르치십시오. 셋째, 주일을 성수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새 힘을 충전 받는다고 자녀에게 교육하십시오. 하나님이 제일 먼저(우선)임을 가르치세요. 넷째, 가정예배를 드리세요. 가정예배는 화목의 지름길임을 교육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을 알게 해주세요. 즉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주며 하나님과 늘 가까이 하는 믿음의 일꾼으로 키우십시오. 또한 부모님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면 그 가정은 행복하고 아이들은 결코 잘못된 길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지 못합니다. 누구에게 영향을 받든지 미칩니다. 내가 훌륭한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 있고 나쁜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훌륭한 말로써 다른 사람을 좋게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나쁜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항상 우리는 혼자 살지 않고 남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더구나 우리 자녀들에게 깊은 영향력을 미치므로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청소년 범죄자의 가정 배경을 조사 연구했습니다. 조사 결과를 보니 10명 중에 6명의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10명 중에 6명의 부모가 자주 싸웠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팀은 부모가 술 취하고 자주 싸우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 그들도 부모와 똑같이 알콜 중독자가 되고 부부간에 싸우고 가정이 파괴 되었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이 어떻게 사는 가에 대해서 그들의 사고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이 부모는 자녀에게 인생의 모델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어린아이들에게 입술로만 교훈하지 말고 행동으로써 자녀에게 올바른 삶을 보여 줘야 되는 것입니다. 특히 어머니의 신앙이 굉장히 자녀들에게 영향력이 큽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에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성경 속의 큰 인물은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배우며 기도로 맡겨진 자녀입니다. 우리 자녀가 내 소유가 아님을 알고 하나님께 맡깁시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 17절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성경을 늘 가까이 하고 성경을 읽고 성경 안에 진리를 묵상하게 만들면 그것이 신앙을 지켜주고 튼튼한 믿음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어린아이 때 삶의 가장 기초적인 윤리 도덕인 십계명 교육을 시켜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무질서하고 윤리와 도덕이 깨어진 것은 어릴 때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데로 행하고 마음중심에 계명이 없습니다. 청소년 재소자 선도기관인 ‘유두고’ 에서는 예배 전에 반드시 십계명을 읽게 합니다. 나 외에 다른 신들에게 내게 있지 말게 하라.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것 대단히 간단한 것이지만 이 십계명을 머릿속에 콱 박아 놓으면 어린 아이가 이 세상에 살 때 그가 정치하든, 경제하든 교육을 하든 상업을 하든 무슨 일에도 이 십계명이 언제나 비춰지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비춰서 생각하고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7절에는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 십계명을 가르쳐 주는 것은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울 때 가장 먼저 십계명의 내용을 가슴에 새겨 주십시오. 청년이 되어도 그것을 어기지 않고 지키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 때 예수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확실히 알도록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이 진리를 어린 아이들의 마음속에 꽉 박히도록 심어주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모두다 죄 짐을 짊어지고 태어나고 죄의 빚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죄의 빚을 갚을 수가 없어 우리 빚을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었다는 것을 꼭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는 잘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죄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의 값을 인간의 힘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 죄의 빚을 마귀는 강압을 하고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빚을 예수님이 다 청산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구원을 주셨다는 그 진리를 어린아이에게 확실히 심어주어야 됩니다. 그리고 사후세계의 실상을 이야기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뭐 살다가 죽으면 그뿐이지’ 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을 반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적으로 우리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무덤에 들어가서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시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승천 한다는 것을 꼭 가르쳐 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히 살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들에게 꼭 가르쳐 줘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살면 예수 계시고 성령 계신데 살 것이요, 지금 예수 없고 성령도 없는 세상에 살면 죽어서 예수 없고 성령 없는 지옥으로 내려갈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내 마음에 지금 살고 있는 그 형태 그대로 천국이 있고 지옥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들에게 예수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확실한 이해하도록 가르치고 도와줘야 됩니다.
2. 모든 어린이가 사랑받도록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미숙한 인격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는 참 많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끌어안고 스킨십, 얼굴도 비벼주고 등허리도 쓰다듬어 주고 뽀뽀도 해주고 그리고 서로 대화도 해주고 설득도 해줘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린아이를 부모의 자기 소유물처럼 마음대로 짓밟고 때리고 욕을 하고 그렇게 하면 안돼요. 자기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겨 놓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조심스럽고 귀하게 어린아이들을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에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업신여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왜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노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아이들과 같은 사람의 것이다.”(막10: 13, 14) 그리고 난 다음에 일일이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들의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단순한 마음으로 뜨거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받드는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인격적으로 어린아이를 언제나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크고 작은 문제에 이해를 하든 이해를 못하든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도 우리의 식구니까 우리와 함께 대화를 하고 함께 살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부모에게 이야기 하려는데 피곤하다는 핑계로 듣지 않으려 하거나 듣는 척만 할 때 아이는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어린아이들은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부모에게 이야기합니다. 자기에게 굉장히 큰일이니까 학교에서 경험한 것이 굉장히 중대한 일이니까 오자마자 아버지, 엄마에게 막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들어주지 않거나 듣는 척 하면서도 다른 일하고 있으면 “날 무시하는구나. 나는 별로 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그러한 부정적인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린 아이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부모에게 반항하고 부모의 말을 거역하여 문제아가 되거나, 침울해하고 불안해하는 소심증을 가진 어린아이로 자라고 마는 것입니다. 점점 열등감으로 발전하면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되어 자신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1절에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화내고 낙심하게 만들면 좌절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아아 합니다. 따라서 늘 따뜻하게 대화하고 안아주며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대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부모가 늘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자녀를 키울 때 필요한 것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됩니다. 잘하는 것은 정말 잘했다고 박수를 치고 잘하는 것은 칭찬해 주고 격려해줘야 됩니다.
잠언 27장 21절에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칭찬과 격려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교육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말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의 장점을 들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을 때 자녀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큰 잠재력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은 자녀의 문제뿐만 아닙니다. 한 가정이 행복하게 살려면 남편은 부인을 자주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부인이 하는 일에 무관심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은 칭찬을 해줘야 됩니다. 못하는 것은 눈감아 버리고 잘하는 것은 칭찬해 줘야 됩니다. 또 남편이 무엇이라도 잘하는 것 있으면 부인이 꼭 “여보 참 잘했어~ 정말 훌륭해. 정말 난 존경해” 이렇게 칭찬을 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굉장히 용기와 힘이 생기고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비평만 하는 사람은 가정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늘 부인에게 잔소리하고 “집안 꼬라지가 이게 뭐냐? 소재를 뭐 이렇게 하느냐? 옷 정리를 어떻게 이렇게 하느냐? 몸을 왜 그렇게 하느냐? 머리를 왜 그렇게 치장을 하느냐?” 자꾸 흉을 보고 남편보고는 “남처럼 돈도 잘 벌어오지 못하면서 늦게 들어오고 술 먹고 담배피고 못살겠다. 아주 내 친구들 남편보다 못하다.” 자꾸 비교하고 하면 그 사람 낙심하는 것입니다. 잘된 것을 가지고 자꾸 긍정해주고 칭찬해주면 굉장한 새로운 변화가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칭찬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징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확실히 일을 잘못했을 때는 징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잘못했을 때는 그냥 주먹으로 때리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불러 놓고 설득을 시켜야 됩니다. “네가 이런 이런 것은 잘못했지? 네가 인정하지? 그러니까 잘못에 대한 벌을 받아야 될 것 아니냐?” 그리고 난 다음에 반드시 징계를 내려야 됩니다. 잠언 23장 13절로 14절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잘못해도 아무도 꾸짖지 아니하고 내버려 놓으면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부모가 잘못한 것을 발견하고 꼭 그 아이에게 왜 징계를 받아야 될지 이유를 설명해주고 그 다음에는 징계를 내려야 됩니다. 매를 몇 대를 때린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밥을 굶게 한다든지 용돈을 줄인다든지 반드시 징계를 내려서 ‘아.. 내가 잘못하면은 대가를 받는 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절대로 자식 교육에 그냥 임의로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잘못한 것을 설명을 해주고 징계를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3. 어린이 교육이 내일의 기쁨과 소망을 만듭니다. 어린아이들의 교육이 내일을 만듭니다. 내일은 오늘 어린아이들의 교육에 달렸습니다. 부모의 욕심의 희생물로 만드는 교육을 하지 맙시다. 요사이 부모들은 어린아이를 자기들이 원하는 우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억척같은 교육을 시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여러 학원이나 과외수업으로 아이들이 쉴 틈이 없이 내몹니다. 이렇게 부모의 욕심의 희생물로 어린아이들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 127편 3절에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녀를 공부시켜야 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명왕 하면 '에디슨'을 꼽을 것입니다. 에디슨은 오늘날에도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교장 선생님이 도저히 못 가르치겠다며 학교에서 내쫓을 정도로 열등아였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고 말하면 에디슨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안 되고 하나도 될 수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어떻게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인데 너는..” 그래도 에디슨은 “고양이 한 마리 더하기 쥐 한 마리는 하나밖에 안됩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속이 타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에디슨은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반드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얘는 완전히 저능아로써 공부할 수가 없다.”고 버린 애라고 쫓아냈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가 에디슨을 받아 들여서 하는 말이 “우리 애는 다른 애들보다 생각이 다르지 저능아는 아니다.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다. 두고보라!” 그래서 집에서 자기가 원하는 데로 연구 발명을 하도록 도와준 결과에 그는 세계적인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그는 마음에 있는 잠재력을 마음대로 개발해 가지고 나중에 온 인류에 기여하는 오늘 이 전기 불 백열등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못된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자기가 하기를 원하고 꿈을 가진 것을 하도록 격려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한 때 메스컴에 보면 김연아 붐이 일어났습니다. 김연아는 그 어려운 훈련을 하는 동안 3천 번을 넘어졌다고 합니다. 3천 번 엉덩방아를 찧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렇게 고통스러운 운동을 왜 합니까? 자기가 원하니까 자기가 소질이 있으니까 하는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고 소질도 없는데 부모가 강압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의 자녀들도 3천 번이 아니라 6천 번 실패를 해도 일어나려고 하는 원하는 것이 있고 소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서 일을 하도록 해야지요. 그렇지 않고 부모의 소원대로 부모의 계획대로 틀을 만들어서 억지로 집어넣으면 얼마 안가서 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에 대해 양파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한쪽 유리컵에는 ‘좋아’, ‘사랑해’라는 말을 붙이고 양파를 넣어 놓고 다른 유리컵에는 ‘미워’, ‘바보’라는 말을 붙여서 아이들이 양파를 넣어놓고 애들이 볼 때마다 한 컵은 “사랑해” “좋아” 다른 것은 “미워” “바보” 그렇게 말했는데 한 달이 지난 후에 “좋아” “사랑해”하는 말을 쓴 양파는 파란 싹이 트고 물도 깨끗했으나 “미워” 싫어 “바보”라고 쓴 양파는 물이 썩고 고약한 냄새가 나고 싹도 나지 않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들 보고 “너 잘해. 훌륭해. 기대가 많아.” 그런 말들이 그들에게 굉장한 생명력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아휴~ 네까짓 것 뭐 하겠어? 네가 아버지 닮아 가지고 너는 아무것도 안되겠다.” 그러면 완전히 좌절하고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너는 특별한 사람이야. 너는 훌륭해. 나는 너를 믿어.” 그렇게 격려해 주는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식물인 양파도 ‘사랑해’, ‘좋아’라는 말을 들으면 싱싱하게 성장하는데 우리는 자녀들이 가진 특기를 발견하여 칭찬하고 격려하여 개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를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미래는 달라질 것입니다. 자녀의 가장 좋은 선생님은 부모입니다. 자녀가 잘 되길 원하면 지식 교육이 전부라 생각하며 공부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모태서부터 자녀를 품고 기도해 주고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바로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가장 다른 점입니다. 심력이 다릅니다. 영적인 부분이 다릅니다. 우리가 잘되고 자녀가 잘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큰 신앙 교육은 없습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를 세우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교육에 힘을 써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진흙이요 부모교육은 토기장이인 것입니다. 진흙인 어린아이를 훌륭한 토기로 만드는 것은 토기장이인 부모들의 교육인 것입니다. 어린이는 하나님이 맡겨준 선물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훌륭한 토기로 만들어서 세상에 내어주는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하소서.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어린아이들을 참으로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키워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귀한 존재로 성장하게 인도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서울대 중국어 예배 설교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