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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평생의 희망 예수님 닮기(벧후1: 1- 11)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05|조회수1 목록 댓글 0

주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두 주 전부터 선교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교육이나 훈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 기는 놈위에 나는 놈입니다.

아침부터 저녁 10시 30분까지 훈련받으며 제가 많이 회개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교인들을 너무 많이 괴롭혔구나그래서 하나님이 너도 한번 당해봐라하고 시험을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주에 교인 한분이 저에게 글을 보냈습니다.

이 글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목사님이중표 목사님 별세하시고 부모잃은 고아처럼 지쳐 있을 때 목사님 부임하셨습니다목마른 사슴처럼 갈급할 때 오아시스처럼 행복헸습니다.

그때가 생각나네요여호수아 전교인 새벽기도동터오르는 아침허허벌판 판교 빈들에서 손잡고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부르짖던 때가 눈에 선하네요그러나 요즘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국민일보 보고 목사님 가시는 길 축복하지만 이 마음의 아픔 어떻게 치유받을까요오늘도 아프리카로 떠나는 그 생각 때문에 눈물흘리고 있습니다.

부임하면서 겪은 그 많은 시련구비구비 넘으신 목사님편한 마음으로 목회하지 못한 것 생각하며 혼자서 울고 있습니다연로하신 부모님 생각하면 더 속상합니다”.

 

이 글을 읽고 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분명 저를 힘들게 하려고 쓴 것은 아니지만 교인가운데 저로 인해 속상하고 낙심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 생각하고 있는 데 마침 어떤 목사님이 쓴 시를 읽었습니다.

제목은 목회자의 다른 이름은 죄송입니다” 였습니다.

두 아이 손잡고 학교 갔다 오다

우리 아이 무사하고 집사님 아이 교통사고로 생명 잃을 때

죄인보다 더 머리 숙여 집사님께 죄송합니다.

집사님 아이 무사하고 우리 아이 생명 잃을 때

죄인 되어 교회 앞에 더욱 죄송합니다.

우리 아이 대학입시 합격하고 성도 아이 불합격할 때

내 자식만 위해 기도한 것 같아 교회 앞에 죄송합니다

성도 아이 합격하고 우리 아이 불합격하면

미련한 우리가 죄인 되어

모두 앞에 고개 들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불황속에서 장로님들 기업이 쓰러져 부도나고

성도들 가정은 불화하고 자녀들은 가출할 때

사례비생활보조비전기수도비연료비까지 다달이 받을 때

성도들의 피를 받는 것 같아 차마 죄송합니다

 

성도들 가정 평탄하고 건강한데

목회자 가정 식구들 병으로 쓰러지면

은혜 못 받은 것 같아 교회 앞에 죄송하고

성도들 가정 식구들 당뇨혈압으로 쓰러질 때

목회자 가정식구들 건강하면

우리만 축복 독차지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 땅 어디에선가 내일의 보장도 없이 날마다 위협을 받으며

공산권에서회교권에서비문명국에서

목숨 걸고 복음전하는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목회지 잃고 기도원에서 골방에서 기도하는 목회자들

학비없어 대학에 진학 못시키고

직장으로 보내는 농어촌 개척 목회자들의 아픔 생각하면

큰 교회 목회하는 것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늘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 데 정말 오랜만에 다른 교회에서 드린 예배였습니다. 그 교회가 참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고 점심시간에 성도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서 우리 교인들도 저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밥도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미안하고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 글에 나타난 교인의 마음의 깊은 감정은 무엇일까?

기도하면서 그것이 “낙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잠13: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곧 생명나무라”.

 

왜 우리에게 낙심이 옵니까?

상황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상황의 변화도 내가 원하는 대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원치 않은 일로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생각대로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기도한대로 일이 잘 안 풀려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분명히 옳다고 생각했는 데 옳은대로 일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심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 가지 일로 낙심하지 않습니까?

그때 어떻게 합니까?

누구나 낙심할 수 있지만 낙심하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 주에 히11장을 읽으면서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가지고 사는 법을 생각했습니다, 히11장은 저에게 세 가지 면에서 희망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전체적으로 희망을 주제로 합니다.

진정한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가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을 말하기 위해 히브리서는 믿음을 먼저 말합니다,

1절을 볼까요?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왜 히11장은 희망을 말하기 위해 믿음을 말할까요?

희망은 믿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관심입니다.

1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는 세계만 본다면 어떻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누가 천국을 가 보았습니까?

 

천국에 가면 되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곧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세계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인도 하나님이고 희망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미래에 대해 기대하는 것을 희망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든 희망이든 똑같이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윌리엄 폴 영이 쓴 오두막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마크가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예수님저는 자주 두려워요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 때문에 너무 두려워요저는 왜 그렇게 두려운가요?”.

그때 예수님이 말합니다.

네가 두려운 것은 삶의 이런 저런 이유때문이 아니다네가 정말 두려운 것은 네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네가 두려운 것은 네가 세상에서 잘못될까봐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모든 두려움은 여기서 나온다두려움이 있으면 내가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너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에 대한 두 가지를 믿어야 한다.

첫째는 내가 어떤 경우에도 선하다는 것과 둘째는 내가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삶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문제는 곧 믿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는 첫째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과 둘째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는 데 왜 두려워 합니까?

하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데 왜 근심합니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런데 왜 두려워 합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혹시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면 정말 큰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지 않고 악하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정말 큰 고민입니다.

 

그런대 하나님이 죽지도 않고 언제나 선하시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문제입니까?

6절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고 희망을 갖는 비결은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이 희망을 갖는 방법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레미아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속에 살았습니다.

하박국도 비슷한 상황속에 살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사울을 비롯한 수많은 대적들 때문에 하루 한 날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요엘은 긴 가뭄으로 인한 메뚜기 재앙으로, 느헤미아는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이유는 나쁜 환경이 그들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아 애가 3:22-23절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다른 이유 때문에 희망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하니님의 긍휼과 자비 때문입니다.

 

하박국도 같습니다.

중동의 패권을 잡은 바벨론의 검은 그림자가 이스라엘을 뒤덮고 있을 때 하박국이 선포합니다.

합3:18,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라”.

다른 것 때문에는 즐거워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아로 인하여구원의 하나님때문에” 즐거워 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뒤 바벨론이 쳐들어와 70년동안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그랬어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한 것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일평생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이 사라지자 사울이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사울이 죽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시편 42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같은 구절이 43편에 또 나옵니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그가 나타나 도우면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하나님 때문에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중세시대 한 거리에서 한 사람이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하나님을 믿으라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다”.

그런데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모두 지나갑니다.

옆에서 보던 사람 하나가 물었습니다.

아니아무도 듣지 않는데 당신은 누구에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시오?”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에게 소리지르고 있는거요아무도 나를 유혹하지 못하도록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나는 나에게 소리지르고 있는거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소리질러야 합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하여 살려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소리질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세상이 두 조각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이번에 선교훈련받는 데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이 깨달아져서 눈물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 부활한 것을 모릅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는 사람이 또 몇 명이나 됩니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살아있는 분을 믿는 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보인 태도가 그러했습니다.

요20:19을 보실까요?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여기 두려워하여”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했으면 기뻐해야 하는 데 두려워했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나마 재자들은 다른 것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19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부활이 죽음을 이기고 어둠을 내쫓는 것인데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 했다니 정말 웃을 일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부활절에 부활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다같이 “예수께서”.

부활절 이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사 우리 한 가운데 서 계시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안에 희멍이 있습니다.

환경이 달라져서 희망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희망입니다. 그랗습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믿으면 희망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보여준 두 번째 희망은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6절을 보면 6절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헸습니다.

 

여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했습니다.

자, 다시 점검합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중요한가 하면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아주 훌륭한 기독교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명한 빌리 그래함의 외손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랫동안 방황하다 결국 하나님께 돌아왔는 데 그가 왜 방황했는가를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를 예수님을 믿는 자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믿음을 본받아 어릴 때부터 교회를 빠지지 않았고 열심히 다녔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닐 뿐 아니라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한 가지 더 있는 데 그것은 그가 착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험이 닥쳐오자 한 순간에 무너져 기나긴 방황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했는 데 오늘의 말씀에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마음에 부딧친 단어는 “나아가는 자찾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그를 찾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항상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많아 자기는 더 이상 할 일이 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은혜가 하나님이 나를 찾는 것이라면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은혜가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라면 믿음은 내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시63:8입니다. 내가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내가 가까이 따라야 하나님도 붙들어 줍니다.

 

저는 신4:7말씀을 좋아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을 얻는 자가 큰 나라다”.

 

이 부분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표준 새번역,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분”. 새 번역,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다가오시는 우리 하나님” 우리말 성경. NIV 영어 성경입니다. “the LORD our God is near us whenever we pray to him”. 다른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을 얻은 나라가 큰 나라입니다.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감을 얻는 나라가입니다. 수동형입니다.

 

롬5:1-2을 아십니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 나아감을 얻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감을 허락받은 겻입니다,

에베소서에 또 나옵니다.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3:12에 또 나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댐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하나님께 아무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고 믿는 우리는 그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아 살아계신 것도 대단한 데 우리는 매일 그 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허락을 받았으니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입니까?

언제나 아무 때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고, 그 능력을 성령님으로부터 받았으니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행운아들입니까?

 

“We are happy, because we come to the Lord any time, any where,”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들입니까?

우리의 최고의 희망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믿음은 우리가 언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가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조심할 것은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항상 응답하시지만 응답은 언제나 하나님의 생각대로 옵니다.

낙심은 기도하지 않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응답이 오지 않을 때 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합니다.

우리에게는 기도할 의무가 있고 하나님에게는 응답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응답하든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권한도 있고 그럴 자유도 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응답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하면서 낙심합니까?

하나님 자신보다 기도의 응답을 더 중요시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보다 기도하는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관계보다 기도의 열매를 더 중요시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아들이 밤에 불쑥 찾아왔습니다.

감짝 놀라 물었습니다. 무슨 일있니?”

어릴 때 아들은 등록금 때문에, 용돈 때문에 불쑥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들은 그냥 왔어요”하면서 몇 마디 하더니 잠만 자다 갔습니다.

와서 한 것은 잠잔 것밖에 없습니다. 어릴 때 자녀는 무엇이 필요해서 오지만 자라서 자녀는 그냥 부모가 그냥 보고 싶어 옵니다.

 

그때 진짜 부모고 진짜 자식입니다.

우리도 불쑥 불쑥 하나님이 보고 싶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니님이 주신 선물보다 하나님 자신이 더 좋아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any time, any where,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니 우라는 얼마나 복받은 존재들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희망이 많은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상주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희망은 상 때문입니다.

다시 6절로 갑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11장에는 10명의 사람이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아벨로부터 기생 라합까지입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과 다음은 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4절, 아벨이 믿음으로 예배드렸습니다. 그랬더니 4절, 하나님이 그를 “의로운 자”라 불렀습니다.

예배드린 것밖에 없는 데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5절, 에녹은 믿음으로 동행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를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지상에서 동행한 사람을 천국꺼지 데려갔습니다.

 

7절에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 뒤에도 몇 명 더 나옵니다. 아브라함, 사라, 야곱, 모세, 라합, 이들이 모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그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계 3대 종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라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 해 그는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위한 민족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라합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여리고를 정복당할 때 온 식구가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산 모든 자에게 상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상받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상을 받습니다.

33절 이하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에게도 예외없이 상급이 주어졌습니다.

어떻습니까? 믿음은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믿음으로 살면 내일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어 속담에 “pay today, play tommorrow, play today, pay tommorrow”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지불하면 내일 놀고오늘 놀면 내일 지불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하지 머십시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누구나 생각하지 않는 환경 때문에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슬픔과 절망은 다릅니다.

슬픔은 위로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절망은 위로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슬픔은 정서적 감정이고 절망은 영적인 감정입니다.

슬픔은 사람이 떠날 때 느끼는 감정이고 절망은 하나님이 떠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슬픔은 인간적 감정이고 절망은 우상이 사라질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다른 신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신이요 우리는 오직 그 분만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 때문에 절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성령님은 우리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때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상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제 일로 인해 슬퍼하지만 한국교회는 우리 교회로 인해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놓고 신자는 목회자를 놓을 때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국민일보를 보고 제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목사님참 여려운 일을 하셨습니다사랑하는 교회를 그만 두기도 쉽지 않은 데 오지의 땅아프리카로 가신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결단은 어지러운 한국교회에 희망을 주었습니다한국교회가 세습으로도덕적물량적 타락으로 어려울 때 목사님의 소식은 맑은 물소리 같았습니다목사님과 한신교회는 잘 될 것입니다한신교회는 한국교회에 이중표이윤재로 인해 자랑스러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지금은 다소 여려워도 잘 될 것입니다한국교회는 한신교회를 통해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건강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우리 교회가 모두 잘 잘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고 이 민족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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