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한 복판에 이르렀습니다. 이럴 때 시원한 강가로 간다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인생은 마치 무더위속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전에 택배를 하는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급한 일로 물건을 배달하게 되어 복잡한 서현역 주변으로 들어 갔답니다. 주소를 보고 가는 데 잘 찾지 못하겠고 주차공간은 없고 해서 잠시 불법 주차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교통경찰이 많아서 주차 스티커를 뗄까봐 차에다 이렇게 메모를 해 놓았답니다. “죄송합니다. 주차 안 하면 실직할 것 같아 별 수 없이 주차합니다.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돌아와 보니 과연 스티커가 붙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경찰이 남긴 메모가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으면 실직할까 봐 별 수 없이 스티커를 붙입니다.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둘 다 교인이었습니다. 하나는 불법주차한 택배기사요, 다른 하나는 스티커를 발부한 경찰이었습니다. 하나는 불법주차하면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다른 하나는 스티커를 떼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같은 교인이면서도 일이 달라 다른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스티커를 떼고 하나는 스티커를 받고,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힘든 거구나. 먹고 살려고 힘들고 마음에 안드는 사람 만나서 힘들고 자기 마음대로 안돼서 힘들고 서로 입장이 달라 힘들고, 인생은 그런거구나”.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인생은 힘들다고 생각합니까? 최근에 한 권투선수가 죽었습니다(사진 1). 충남 예산에서 열린 슈퍼플라이급 챔피언결정전에서 부은 얼굴로 힘겹게 싸우던 배기석씨가 시합때 받은 충격으로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세살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자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고 배기석은 어린 동생과 함께 외할머니집에 살아야 했습니다. 독한 외로움속에서 그래도 성공해보겠다고 붙든 것이 권투였습니다. 낮에는 회사에서 금형 조립공으로 일하고, 일이 끝나면 체육관으로 달려가 샌드백을 두드리고 그러다가 챔피언에 도전하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챔피언만 되면 그의 말대로 할머니도 호강시켜드리고 그의 인생은 대박을 만난 것입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23살의 배기석은 제대로 꿈을 펴보지도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성공이 가까이 보이는 데 성공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안고 사는 것은 인생의 목마름입니다. 얼마전에도 “한국리서취”에서 40대 이상 성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가진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첫번째가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물질 문제, 사업문제가 심각합니다. “사업이 잘되어야 할텐데. 부도나지 말아야 할텐데. 직장에 문제가 없어야 할텐데" 늘 걱정입니다. 그것이 38.9%, 다음은 건강문제였습니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여기 저기가 아픕니다. 몸이 옛날 같지 않고 혹시 어디가 아프면 큰 병이 아닌가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래서 건강문제가 23.9%, 2위입니다. 그 다음이 가정, 가족문제, 다음이 노후의 문제. 한국인은 이런 문제로 고민하며 삽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사는 성경적 인물을 만난다면 어떤 인물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마리아여인은 한마디로 인생의 목마른 여인입니다. 갖은 인생고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의 목마름은 남편을 다섯명이나 두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또 한 남자와 사는 데 그가 여섯번째입니다. 이 여인은 무슨 사연이 있길레 남편을 여섯명씩이나 전전했을까? 지금도 사마리아 세겜에 가면 이 여인이 마셨던 우물이 있습니다. 긴 두레박을 떨어뜨려 물을 퍼올리면 그 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시원한지 모릅니다. 우물의 깊이는 기록에는 32미터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50미터가 넘는 것 같습니다. 이 우물을 만일 야곱이 팟다면 지금부터 4천년 된 우물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맑은 물이 나온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물이 아니라 우물앞에 선 여인입니다. 물은 깨끗하고 시원한 데 여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은 마시면 갈증이 풀리지만 여인의 갈증은 풀리지 않은 채 여전히 거기 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셔야 하는 것이 물이기 때문에 이 여인은 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6절에 보면 여인이 물길러 온 시간은 육시입니다. 6시는 이스라엘 시간으로 12시, 정오에 해당합니다. 보통 때도 더운 데 12시, 정오에는 얼마나 덥겠습니까? 지난번 캄보디아, 베트남도 보니까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휴무입니다.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더위를 피하여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 쉬는 시간에 혼자 물길러 온 이 여인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물을 길어야 했습니까?
문제는 물을 찾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지금 두 종류의 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마시는 물과 하늘의 생수, 사람이 퍼 마시는 우물물과 예수님이 주시는 물, 땅의 물과 하늘의 물, 목을 축이는 물과 영혼을 축이는 물, 두 가지 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중 마시는 물을 구하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생명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직업의 차이가 아닙니다. 세상적 지위의 차이가 아닙니다. 인격이나 도덕적 차이도 아닙니다. 안 믿는 분들이 우리보다 경제적인 면에서 인격적인 면에서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딱 하나 차이가 있습니다. 마시는 물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우물물을 마시고 우리는 하늘의 물을 마십니다. 그들은 목을 축이는 물로 살고 우리는 영혼을 축이는 물로 삽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의 차이입니다.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그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세상에는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의 물이 없고 우리는 그 생명을 가졌습니다. 그나마도 풍성한 생명입니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문제는 생명이 무엇이냐입니다. 생명은 “살다, 살리다”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추상명사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예수님은 쉽게 풀었습니다. “생명은 물이다. 물과 같다. 생명은 곧 물이다“. 왜 이 말이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우리는 물없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70%가 물이고 수정란 때는 99%가 물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물없이 못삽니다. 누구도 물없이는 못삽니다. 밥은 며칠 굶어도 살지만 물을 며칠 못 마시면 살 수 없습니다. 물은 마시는 것입니다. 목마른데 물을 앞에 두고 바라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은 마시는 것입니다. 요7:37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누구나 목마르면 마십니다. “마신다”는 말은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체험되는 것입니다. 물처럼 우리에게 체험됩니다. 물을 마시면 살아납니다. 컬컬할 때 물을 마시면 시원해집니다. 목에 무엇인가 걸렸을 때 물을 마시면 쑥 넘어 갑니다. 아플 때 물을 마시면 회복됩니다. 힘이 없을 때 물을 마시면 힘이 솟습니다. 물은 한번만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매일 마십니다. 매일 물을 마시지만 그 물은 매일 다릅니다. 그런데 같은 물입니다. 그래서 물은 신비합니다. 물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을 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물로 세례주시고 물로 생수를 주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물이요 생명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생명이 전달되면서 변질되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헬라, 그리스로 가서 철학이 되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로마, 유럽으로 가서 종교가 되었습니다. 교황이 되고 교권이 되고 권력이 되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영국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생명을 회복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철학이 아닙니다. 문자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공부도 아닙니다. 종교도 아닙니다. 문화도 기업도 아닙니다. 생명은 살리는 생수입니다. 예수믿으면 살리는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가졌습니다.
생명은 내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생명이 어디 있느냐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생명을 말하면서 그 생명이 “그 속에” 있다고 말한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다같이 “그 속에”. 우리가 생명을 말할 때 자주 실수하는 것은 우리는 생명을 밖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의 주인공 사마리아 여인과 같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마을의 우물은 동네 밖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지금의 텔 브엘쉐바에(사진 2) 가도 우물은 밖에 있습니다. 성이 있고 담이 있고 사람들은 그 안에 살고 물을 긷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사진3). 사마리아 여인도 물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볼까봐 사람들이 안 다니는 한 낮에 나왔습니다. 밖에 나와 물을 깃듯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를 찾기 위해 일생 밖으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가 만난 남자들은 다 밖에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은 인생의 생수를 마시기 위해 일생 밖으로 다녔습니다. 그날도 그는 물동이를 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다같이 “그 속에서”. 영어로 "in him", 물은 물을 마시는 그 사람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안에 있습니다. 본래 생명은 예수님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님과 함께 그 생명이 우리안에 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요7:38절도 같은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생수는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에서 나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더 정확합니다. "Stream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him". 그 안으로부터 생수가 나옵니다. within him 그 안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종교와 생명은 다릅니다. 종교는 언제나 밖에 있고 생명은 안에 있습니다. 목을 축이는 물은 밖에 있고 영혼을 축이는 물은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진리를 붙잡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믿을 때 예수님이 우리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요15장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15: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슴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하리라”. “내가 네 안에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믿는 우리속에 거하신다는 이 진리야말로 우리가 붙잡을 최고의 진리입니다. 모든 능력이 여기서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의 의지적 노력이 아니라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 대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살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적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언제나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한 소녀가 방직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얼마 동안의 수습기간을 거쳐 일을 시작했습니다. 반장이 기계 작동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말했습니다. “이제 네가 배워야 할 것은 다 배웠지만 가끔 고장날 때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때는 모든 일을 멈추고 나에게 즉시 와라”.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는 올이 풀려 천을 전혀 못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올 한 올 풀다 보니 실이 엉켜 작업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여러 시간 고생하다가 할 수 없이 반장을 찾아갔습니다. 반장이 보더니 아주 간단하게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 고장이 났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녀가 말했습니다. “몇 시간됩니다”. 반장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제 왔니?”. 소녀가 말했습니다. “웬만하면 제가 고쳐 보려고 했지요. 그러나 안돼서 온 것입니다”. 그때 반장이 말했습니다. “너의 최선은 고치는 것이 아니야. 고장 났을 때 즉시 나에게 오는거야”.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을 홀로 두고 웬만하면 내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될 때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 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선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 즉시 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하는 나의 의지적 행동이 아닙니다. 내안에 계신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삶의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감정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열심히 선교하던 선교사가 오랫동안 일하다가 지쳤습니다. 그렇게 사랑스럽던 사람들이 갑자기 밉고 싫어졌습니다. 기도하다가 사랑의 감정도 없이 선교하는 자신이 위선자 같아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떠납니다. 사랑없이 일하는 것이 싫어 떠납니다. 제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면 그때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선교지를 떠나지 말고 계속 일하라. 네가 하고 싶어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켜서 선교하는 것이다. 네가 사랑해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네 감정을 나타내지 말고 내 감정으로 일하라”.
우리가 정말 자주 실수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싫으면 싫고 내가 좋으면 좋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만하면 계속 하고 내가 힘들면 그만 두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교만한 태도가 없습니다. 마치 우리 삶의 주인이 우리 자신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윌리암 헨리라는 무신론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l am the captain of my soul. l am the master of my fate”(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며, 내 운명의 주인이다). 어떻습니까? 이 말이 맞습니까? 우리가 바로 우리 영혼의 선장이며 우리가 바로 우리 운명의 주인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한다면 그 분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면 그 분은 우리 인생의 하인입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굳이 그를 믿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싫어서 싫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싫어야 싫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만하니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라고 하니까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힘드니까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싫어하시니까 그만 두는 것입니다. 모든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기분이 좋고 하는 일이 잘되고 행복하더라도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이 싫어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즉시 그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의 선장은 예수님이고 우리 운명의 주인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최근에 내린 결단은 누가 내린 결단입니까? 여러분이 최근에 결심한 일은 누구 한 결심입니까? 모든 행동의 근거와 기준이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켰기 때문에 하고 하나님이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본질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의 의사와 감정대로 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 분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그 분의 의사와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양로원으로 봉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중증 노인을 목욕하여 방으로 누이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70킬로가 넘는 뚱뚱한 노인을 맡았는 데 그 노인을 들어올리는 순간, 무거워 바닥에 “콰당” 넘어졌습니다. 이유는 노인이 무겁기도 했지만 나에게 몸을 맡기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몸도 약한 데 나에게 몸을 맡기면 목욕시키고 옷입혀서 방에 편히 누여드릴텐데 노인은 자기 몸을 맡기지 않으려고 몸을 비비 꼬다가 사고가 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과 상관없이 행동하고 결단합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과 상의도 안 합니다. 그리고 예수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믿는 것은 내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삶과 행동을 예수님께 맡기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시37:5에 말했습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히브리어로 하면 “골 알 아도나이 다르케카”. 여기서 “맡긴다”는 “골”은 공을 던지듯이 문제를 굴려 보낸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공을 주님께 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공을 가지고 골인시킵니다. 믿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모든 결단과 행동을 맡기는 것입니다. 공을 굴리세요. 이번에도 월드컵 보니까 공 가지고 있다가 뺏깁니다. 내가 가지고 시간끌고 있으면 뺏깁니다. 빨리 주님께 패스하세요.
생명은 흘러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다시 14절을 봅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내 안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생명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솟아납니다. 솟아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흘러갑니다. 요7:38절,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물은 흐릅니다. 물은 고여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물은 많아지면 넘치고 넘치면 흘러갑니다. 누구도 흐르는 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막으면 둑을 허물면서까지 흐릅니다. 그래서 홍수가 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물처럼 우리안에 있으면 흐릅니다. 안에 있던 생명이 것이 밖으로 흘러갑니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여러분은 포도를 좋아합니까? 알알이 익은 포도는 보기만 해도 싱그럽습니다. 그런데 포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잘 익은 포도가 툭 깨어지고 발로 밟혀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어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까지 포도는 목적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행복에 두고 어떤 사람은 성공에 둡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용되어야 합니다. 공부 많이 했습니다. 지식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쌓여 있는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지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은행에 넣고 땅에 투기해서 여기 저기 널려 있습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떠나면 끝납니다. 하나님이 그 재산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윗 시대에 충성스러운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중에 목마를 때 목숨걸고 물을 구하여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삼하23: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드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목숨걸고 구한 물을 다윗은 차마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세 용사는 자기의 목숨을 피처럼 쏟아 다윗을 위해 부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용사가 되는 데 인생의 목표를 둡니다.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남들보다 뛰어난 용사가 되려고 애씁니다. 그러다 막상 용사가 되면 그 때부터 뒷짐지고 놉니다. 예수믿고 직분얻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안에서 어떤 직분을 얻었다고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부을 일만 남았습니다. 쏟을 일만 남았습니다. 정 쏟기 싫거든 자리를 비켜 주세요.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는 데 목사님 때문에 십자가가 안 보였습니다. 그 십자가에는 예수님도 함께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아이가 엄마와 함께 예배드린 후 교회를 나오멵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목사님이 내려오니까 예수님이 보여”. 무서운 말입니다. 가끔 목회자가 예수님을 가릴 때가 있습니다. 가끔 교회 지도자가 십자가를 가릴 때가 있습니다. 많이는 가졌는 데 쏟지 않으면 예수님 가립니다. 많이 은혜받고 많이 성령받고 많은 직분을 받았는 데 붓지 않으면 물은 계속 고여 있습니다.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축복으로 자신을 깨뜨려 거룩한 생수로 흐르게 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축복으로 나만 만족시키려고 한다면 그 축복이 나를 부패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와 절약의 개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질적인 삶은 절약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끼지 말고 낭비해야 합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렸습니다. 주기철, 손양원은 민족을 위하여 감옥에서, 공산당에게 피를 흘렸습니다. 거룩하고 과감한 낭비가 필요합니다. 병들어 죽지 말고 닳아서 죽어야 합니다. 자기 몸을 너무 아끼지 말고 거룩한 소모품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흘러가야 합니다. 막지 마세요. 흘러가게 합시다. 그래야 쉽고 행복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 대신 살게 합시다. 그 분이 살아야 쉽고 가볍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 생수이신 예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