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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진리(나타남)(롬3:21-31)-정리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06|조회수0 목록 댓글 0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진리(나타남)

 

롬3:21-31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인사(축원)와 연결과 서론(지난시간에는 "신8장에서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겸손과 순종여부와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하는법"

오늘 이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주제로 깨달음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구호:주여!말씀하옵소서 주의종이 듣겠낭다(오직 예수와 십자가만 선포-예수 영접 구원)

 

인류의 역사를 보면 혜성같이 등장한 사람이나 어떤 사건을 통하여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바꾸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그 정복지에 다수의 도시를 건설하여 동서 교통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디딘 사건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최근에 컴퓨터와 에이 아이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컴퓨터에 에이 아이가 장착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그렇게 되면 컴퓨터가 어떤 일까지 하게 될까? 

기대가 되기도 하고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의 나타남보다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나타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표현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일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3장 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했습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이 왜 인류역사에 가장 놀라운 나타남이 되겠습니까?

 

먼저,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의를 해결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라는 것은 착하게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고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범죄 하기 전 아담과 하와가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방문하여 거니셨고 아담과 하와와 대화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면서도 두렵거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죄가 없는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는 이처럼 죄가 없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세우셨던 하나님의 계획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깨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죄인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범죄 한 아담 이후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려고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노력을 한 마디로 말하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아가려고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율법이 이 역할을 다했습니까?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는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율법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달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내가 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

의로운 사람이 되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였습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경험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전 그는 누구보다도 율법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5-6절)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율법의 613개 조항을 지키며 율법대로 살려고 했던 자였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자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으면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를 표현했겠습니까?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쓰지 않았겠지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가 더 죄인임을 깨닫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롬7:24)

 

 

어떤 부자 관원이 주님에게 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질문을 합니다.(눅18:18-)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부자 관원은 선 듯 그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주님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자 관원은 자기가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눌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다 지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이웃에게 물질을 베풀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 것입니까?

우리는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내 편한 대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지키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내가 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이후 인간의 삶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게 되려는 삶의 연속이었지만 그것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둘째로, 이처럼 율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의를 예수님의 나타남을 통하여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율법 외에, 율법 말고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하나님의 한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너희는 의로운 자가 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즉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안식일에 말씀드린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죄가 없으셨고 죄가 없으셨기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또한 온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인간을 대신해 피를 흘릴 수 있었고 거룩한 피를 통하여 죄 사함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히9:22)

그래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죄를 속하여 주셨기에 그 주님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이고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너희 죄를 대속하신 성자 예수님을 믿는 자는 내가 죄를 사해주겠다. 죄를 묻지 않겠다. 
죄가 없는 것으로 하겠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죄 사함을 받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 축복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됩니다.

25절 말씀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28절 말씀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할 일은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율법을 지킨다든지 헌금을 한다든지 수고를 한다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그대로 믿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를 의롭다고 판단하시고 죄가 없다고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일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주이시기도 합니다.

심판 주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판사가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해도 판사가 ‘너는 죄가 없다 너는 무죄다’ 하면 그는 석방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사람들이 죄가 없다고 해도 판사가 ‘너는 죄인이다. 감옥에 가야한다’고 하면

죄의 대가를 치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죄가 없고 의인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판 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실 때, 

천국에 갈자와 음부에 갈 자를 구분하실 때 다른 것은 보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느냐 그 하나만을 보시고 판단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이 의가 나타나기까지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는 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죄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의가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예전이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이것밖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든지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율법을 고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정말 너무나 안타깝고 분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미 폐하여진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교리, 다른 구원자, 다른 행위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의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놀라운 선언입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를 값없이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해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왜 그렇게 되느냐고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발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는 정말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론 적용(나 청중)호소 결심 결단합시다

오늘 "세상에 가장 놀라운 복음"말씀으로 깨달음과 교훈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에는 두 가지 인생밖에 없습니다.

 

죄인인데 죄인임을 모르는 인생, 

죄인임을 알고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에 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만나는 인생. 이 두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죄와 구원의 문제를

또 다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심으로 해결한 이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은혜의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6.06.07.)

 

참고

31 하나님의 표준은 변하지 않았음(롬 6:15; 삼상 15:22; 계 22:14)(고후 3:17-18; 엡 2:14-16; 계 2:6 주해 참조)

복음을, 인간에게 그분의 의롭고 거룩한 율법을 계속 범하는 것을 허락해 주고 계속 하나님을 거스리고 반역하며 살도록 허락해 주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성경을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은혜 아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나 에덴에서 그가 요구하신 것`―`율법의 완전한 순종`―`이 꼭같다는 것을 모르는가? 심판날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내 아들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왜 계속 나의 율법을 범했느냐?” “누가 너에게 나의 율법을 짓밟으라고 하였느냐?” “보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 신약의 복음은 구약의 표준을 낮추어서 죄인에게 맞게 하고 그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구원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순종 곧 그의 모든 계명에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늘에 들어가는 유일한 자격으로서 항상 “완전한 의”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요, 피난처이시다. 그의 의는 순종하는 자에게만 입혀진다.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아무 죄도 찾아볼 수 없게 하자. 그러나 거룩한 율법을 짓밟는 사람들은 그 의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들로서 한없이 큰 구속의 경륜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리뷰 1886. 9. 21).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요일 2:4)

하나님은 지금도 에덴에서 그 거룩한 부부에게 요구하신 것 곧 그분의 요구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신다. 

그의 율법은 어느 시대나 꼭같은 것이다. 

구약 시대에 제시된 크신 의의 표준은 신약 시대라고 그 표준이 낮아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약화시키는 것이 복음이 하는 일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복음의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받는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믿으라 믿으라”하는 것이 그들의 외침이다. \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고 한다. 참된 믿음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한편 \

그 믿음은 그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일치하게 할 것이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라고 선포하였다(리뷰 1886. 10. 5).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켜 놓을 것인가?

원수는 항상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켜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은 나란히 행할 것이다(원고 11, 1893). 


우리가 율법을 말할 때 아버지와 아들에게 공히 영광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고,

아들은 그 율법을 크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려고 죽으셨다(원고 5, 188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않으면 여호와의 율법을 높이는 일이 불가능하다(원고 5, 1893).

 
여호와의 율법은 나무요, 복음은 나무에 핀 향기로운 꽃이요, 욱매이다(편지 119, 1897). 

 

19-28 율법에는 구원하는 성질이 없음 (갈 2:16, 17; 3:10-13, 24)

하늘을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을 모두 다 찾아가서 경고하고 싶다.

귀한 은혜의 시간을 바쳐서 죄의 결과로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려고 무화과 잎을 꿰매고 있지 말라.

그대가 하나님의 크신 도덕적 거울이요, 품성의 표준인 거룩한 율법을 들여다 볼 때에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율법이 그대를 정결케 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율법에는 구원하는 요소가 없다.

그것은 범죄자를 용서못한다.

죄값은 치루어져야 한다.

주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율법을 폐지함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죄인의 대속자가 형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잔인하거나 자비가 없으신 그런 분인 반면 그리스도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의적인 율법을 폐지하시려고 두 강도 사이에 못박혀 갈바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단 한점의 죄나 단 하나의 악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 하늘 회의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의논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 불충성하면 아버지와 하나이신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에게 내려질 공의의 형벌을 받으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원고 145, 1897).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 5:1)

회개하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그를 위한 하나님의 속죄를 깨닫고 이 속죄를 현세와 내세의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이면

그의 죄는 용서를 받는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다.

모든 믿는 사람은 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일치하게 할 것이며,

구속주의 속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활용하고 힘차게 전진하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감으로

회개와 통회의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용서받음과 의롭다 하심은 하나요, 같은 것이다. 

믿음으로 그 신자는 죄와 반역의 자리를 떠나서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자리로 나아가는데 

이는 그가 착한 마음을 타고 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를 양자로 받으셨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사함을 받는 것은 그의 보증인이시요, 대속주께서 그의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의 하늘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를 “이 사람은 내 아이입니다. 

내가 그의 사형 집행을 유예시키고 그에게 나의 생명 곧 영생을 보험 증권으로 주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라고 하신다.

이렇게 용서를 받은 사람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고 하나님 앞에 흠없이 서게 된다. 
그 죄인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긍휼을 입지 못한 채 쫓겨 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특권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형 집행을 유예시키시고 그분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입히셨기 때문이다. 

그의 희생은 공의가 요구하시는 바를 온전히 충족시키셨다. 
칭의는 정죄의 반대 개념이다. 은혜를 받을 자격이 도무지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값 없는 자비가 베풀어졌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가 되신 예수때문에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허물많은 죄인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로 들어오게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된다"

(원고 21, 1891). 


세상에 보여주는 표징―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품성 변화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표징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교회라는 매일의 증거는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살아있는 증언은 언행이 일치된 신자들의 행동 가운데서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안전은 성경에 매달리는데 있다”고 믿는 한 백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도한 세상에 선언하는 것이다. 이 신앙 고백은 큰 배도의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위 대신에 인간의 지혜와 권위를 받아들였다(편지 83, 1896). 


20 요일 3:4 주해 참조 


20-31 겸손한 마음으로 속죄 문제를 살펴 보라(갈 6:14; 엡 2:8, 9; 딛 3:5; 히 7:25; 계 22:17)

어떤 사람도, 인간이 행한 일 가운데 어떤 것은 그의 죄값을 갚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유한하고 좁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치명적인 기만이다. 그대가 만약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대가 애지중지하는 생각을 따라 옥신각신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속죄 문제를 살펴보라. 
이 문제를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악한 자의 자녀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행위를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선행을 요구하신다. 율법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선행을 아무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죄 가운데 자신을 두기 때문에 예수의 의만이 유효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수를 받으라”는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이다. 인간은 갈바리에서 갚지 않은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열렬한 호소속에서 십자가는 죄인에게 온전한 속죄를 내어밀며 받으라고 초청한다(원고 50, 1900). 


24-26 아버지께서 만족하셨음(롬 5:11 주해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속죄는 아버지께 온전하고도 충분한 만족을 드렸다. 자기도 의로우실 수가 있고 또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될 수 있다(원고 28, 1905). 
칭의는 온전한 용서를 의미함(롬 5:1)―(롬 3:24-26 인용)여기에 그 진리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선하심과 자비하심은 참으로 과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인의 편에서는 아무런 공로도, 권리도 없는데 값없이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칭의는 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용서이다.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는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입혀진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 속에는 우리의 구주가 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믿음은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오는 것이다. 그분이 죄인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써이다. 
죄인은 자기의 선행을 칭의의 수단으로 의지할 수가 없다. 그는 그의 모든 죄를 포기하는 지점에까지 와야 하며, 빛이 그의 길을 비추어 주는 정도에 따라 그 빛을 차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피로 마련된 값없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믿음으로 붙잡는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된다. 그리고 그가 예수를 따르면 그는 빛 가운데서 겸손히 행할 것이며, 빛 가운데서 기뻐하고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의 모든 생활에서 기쁨으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한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그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인가를 보여주는 결과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들,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추이심을 받을 것이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아름다움은 물론 고상함과 순결함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인간의 최고의 능력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사인즈 1898. 5. 19). 


자비와 공의가 섞임(시 18:35; 85:10; 89:14; 계 4:3)( 요 3:16 주해 참조)―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가 햇빛과 소나기의 연합으로 이루어짐같이 보좌를 두르고 있는 무지개는 사랑과 공의의 연합된 힘을 나타낸다. 공의만 주장해서는 안된다. 이는 보좌 위에 있는 언약의 무지개의 영광을 이지러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정부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자비와 공의가 한데 어우러져서 구원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한다. 우리가 세상의 구속주와 여호와의 율법을 볼 때에 우리의 입에서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외치게 만드는 것은 그 두 속성의 혼합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완전한 제도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소망으로 뿌듯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를 청하사 하늘 성문으로 들어오라 하시고, 공의는 희생되어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왕의 가족의 일원, 즉 하늘 왕의 자녀가 누릴 충만한 특권들을 모두 다 준다.
만약 우리의 품성에 흠이 있으면, 사랑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놓으신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의가 입구에 서서 하나님을 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순결과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그 문을 열어서 각자의 품성과는 상관없이 다 들어가게 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하늘에는 사단이 추방되기 전보다도 더욱 악한 상태가 되어 불만과 반역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평화와 행복과 하늘의 조화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을 땅에서 하늘로 옮겨놓는 환경적 변화가 인간의 품성을 바꾸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에 있는 구속받은 자들의 행복은 이 세상에서 그 품성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꼴지워진 결과이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구하시려고 그런 희생을 하셔서 이루신 구원은 죄에서 사람을 구하시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난과 불행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에게까지 미친 사랑은 계속해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이다. 만약 그가 자복하고 회개하며 나아와 복음으로 그 앞에 제시된 소망을 믿음으로 붙잡으면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힘이 약화된 것이 아니며, 죄의 권세가 깨어지고 자비의 홀을 회개한 죄인에게 내어미신 것이다(편지 1f, 1890). 


24-28 칭의와 성화를 엄밀히 구별하려 하지 말것(갈 2:16; 살전 4:3)

칭의와 성화 간의 미세한 구별점들을 엄밀히 정의해 보려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두 용어의 정의에다 자신들의 생각과 사색의 소산을 덧붙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영감의 말씀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하여 정의한 것보다 왜 더 자세히 정의하려 하는가? 마치 영혼의 구원이 이 문제에 대한 그대의 이해 여부에 좌우되기라도 하는 것같이 무엇 때문에 모든 세부 사항을 다 풀어내려 하는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선상에서 볼 수는 없는 법이다(원고 21,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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