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는 어머니가 신사임당입니다. 그런데 율곡 16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새 어머니 권씨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새 어머니는 술 좋아하고 성질도 괴팍해서 신사임당과는 전혀 달랐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 새 어머니가 자살 소동을 벌이다가 그 후유증으로 사흘 동안 앓아누웠다고 합니다. 청소년기의 자식 입장에서 얼마나 새 어머니가 미웠겠습니까? 그런데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에게 하듯이 손수 약을 달여 바치면서 새 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했다고 합니다. 율곡의 한결같은 사랑에 새 어머니는 서서히 착하고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이지성,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바로 이것이 십자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모의 트집과 방탕한 생활을 원망하고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정성을 다하여 효도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오늘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계모 권씨처럼 예수님 앞에서 비뚤어지고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주제문 : 예수님은 비난하는 사람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1. 무리들이 흠 없으신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고소하였습니다. 누구도 반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편을 들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재판의 희생자가 된 것입니다. 눅23:2절에 보면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세 가지였습니다.
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고 고소했습니다.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것도 2절에 보면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입장에서 본 견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편견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기쁜소식입니다. 그런데 편견에 붙잡힌 무리들이 볼 때에는 백성을 미혹시키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백성들을 소동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②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한다고 고소했습니다.
가이사는 당시 이스라엘 지배하고 있는 로마 황제입니다. 그런데 이 죄목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를 물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마22:1). 그런데 고소하는 자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나라의 반역자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③ 자칭왕이라고 한다며 고소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진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 의미에는 왕, 제사장,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순전히 자기들 중심적인 것이었습니다. 합당하지 않은 억지주장들이었습니다. 억지 주장이라고 해도 숫자가 많으면 진짜같이 생각됩니다. 순간의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2.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하는 지도자들과 무리들의 악함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선거판에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다. 상대방의 트집을 잡기 시작합니다. 고소할 꺼리만 찾습니다. 좋은 점, 업적,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보지 않고 실수나 잘못한 것만 찾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 마음이 굳어지고 메말라서 사랑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는 자녀들을 학대해서 숨지게 하는 일들로 심각한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 평택 실종 어린이가 계모에 의해 폭행을 당해서 숨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친부는 계모의 학대 사실을 알고도 이를 말리지 않고 심지어 계모와 함께 어린 아들을 죽게 해서 시신을 집안에 방치하다가 야산에 암매장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난 것을 보면서 행복해야 할 우리 가정들이 얼마나 많이 무너지고 있는가를 봅니다. 우리 사회의 ‘작은 예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인 약자들이 무관심과 학대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어서 가족까지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돈 때문에, 욕심 때문에 부모 형제간의 사랑과 이웃 간의 끈끈한 정마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는 오직 돈과 성공이 최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매스컴이나 학교에서는 주로 부자 되는 법, 어떻게 하는지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는 방법, 잘 먹고 건강하게 사는 법 등을 소개하기에 바쁩니다. 그보다 사랑하며 사는 법, 서로 화목하고 섬기며 사는 법, 예의 바르고 성실하게 사는 법 등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방법들은 점점 듣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부터 십자가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서로 미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하는 이번 고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가족이나 이웃 간에 진실한 사랑과 섬김의 삶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을 위하여 돈을 벌고 공부를 해야 합니까? 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랑이 식어져 있다면 이번 고난주간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회복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을 무죄라고 선고하였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죄가 없다고 선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빌라도 총독의 마음이 유대인들 보다 더 양심적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사악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고함지르는 사람들이 원했던 대로 폭동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넘겨주었습니다.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민란이 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판결은 빌라도가 무리들의 고함소리에 밀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방법이 없으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이요 아픔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비난하는 무리들을 위하여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무리들이나 권력자들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다가 대적들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그러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악한 무리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십자가에 달려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죄인들을 향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4. 지금도 십자가의 사랑은 유효합니다.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예수님은 사형틀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가 메고 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허물과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거리며 올라가셨습니다. 채찍에 맞으며 피 흘리면서 지고 가는 십자가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지쳐서 쓰러지셨습니다. 도저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구레네’라고 하는 시골에서 온 사람이 붙들려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에게 힘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십니다. 주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가족이나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생각하며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구레네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셉처럼 형들에게 팔려 가더라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더라도 그 십자가를 묵묵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나 사람을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며 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통이 변하여 축복이 되어 임할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은 그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로 인하여 누군가가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 때문에 누군가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주님이 가시는 그 십자가의 길을 수많은 백성들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이 여인들처럼, 지금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따르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십자가의 복음은 널리 전파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교회는 든든하게 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울며 따라 오는 여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과 이웃들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무서운 지옥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되는 문제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고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그 은혜의 십자가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의 능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지금도 우리에게 기적이요 능력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힘입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며 살게 하고, 가정이 회복되게 하며, 교회가 부흥케 하는 힘이 됩니다.
지난 3월 11일 한동대학교를 졸업한 유정범형제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쓰러져 졌습니다. 그래서 이화여대병원 중환자실로 입원했으니 기도해 달라고 저번에 우리교회에서 간증집회하신 전영순집사님이 카톡으로 연락 해 왔습니다. 나이는 31살 정도이며 결혼한 지 얼마 안되는 신혼인데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의 치유를 함께 기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전집사님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그 형제가 의식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뇌에 전혀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담당의사가 심장마비로 의식 불명상태에 있었는데 뇌에 전혀 이상이 없는 경우는 백 명 중에 한 명이라고 했답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빌립보서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낮아지시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가치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주님의 희생과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사망에서 벗어나 천국의 백성의 되었습니다. 마귀의 편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십자가의 정신을 잘 표현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수도 아닌 우리 가족, 이웃, 교인들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수까지는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가족이나 교인, 날마다 만나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사랑하고 사시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힘들게 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박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하고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서 그들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의 크신 십자가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그 십자가의 삶을 본받아 살기로 결단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