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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은 어디입니까?(대하28:1-7절)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15|조회수1 목록 댓글 0

지금은 환갑이 지난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인데, 겉멋이 심하게 들어서 늘 건들거리며 욕을 잘하던 친구가 어느 날 독서실에 가자고 해서 따라갔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담배를 배웠습니다. 그 친구가 피워 보라고 해서 피웠는데, 목이 따갑고 나중에는 머리까지 어질어질한데도 끝까지 피웠다고 합니다. 또 하루는 친구들과 중국집에 가서 어울려 배갈을 입에 댔다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곁길로 새기 시작해서 술 담배는 물론이고 나중에는 당구장 출입까지 하면서 이런저런 말썽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친구들을 따라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이 이후에 33년간 줄곧 술을 마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46살에 예수님을 믿을 때까지 술과 친구가 되어 지냈다고 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울리던 친구를 따라다닌 것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있어서 누구를 따라 가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의 길을 가느냐에 따라 인생의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나오는 아하스왕은 유다 제12대 왕으로 20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의 아버지 요담왕과 할아버지 웃시야왕은 선조인 다윗왕의 길을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왕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풍습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나라가 흥하고 망하며, 한 사람의 인생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오늘 광복 70주년을 맞아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가정이 형통케 되는지를 깨닫는 은혜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1. 다윗의 길이 있습니다.

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아하스왕은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이 잘 하고 못하는 것의 기준이 된 왕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정직하다고 인정받은 다윗왕이 잘한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서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어서도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둘째, 다윗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기도하고 했습니다.(삼하2:1) 항상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왕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역대상 18장 13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기뻐하시고 그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셨고, 모든 이방 민족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대하14:17). 나그네 같은 인생길을 살아갈 때에 항상 다윗처럼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에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중요한 결정을 점치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성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묻는 사람입니다.

 

 

셋째, 다윗은 백성들을 정의롭고 공평하게 다스렸습니다(삼하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니(대상18:14)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셔서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하지 않고 공평하고 의롭게 모든 일을 행하려고 힘썼습니다. 자기를 대적했던 사람도 등용하려고 힘썼고, 시므이같이 자신을 욕하고 저주했던 사람들도 보복을 하지 않고 용서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사울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후에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자기의 욕심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힘썼습니다.

 

 

2. 여로보암의 길이 있습니다.

2.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한 길이었습니다. 솔로몬왕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솔로몬왕이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맞아들여서 신실한 믿음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위한 우상숭배자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히야선지자를 보내서 북쪽 이스라엘을 여로보암의 손에 맡기게 하셨습니다. 즉 여로보암에게 기름을 붓게 하여 북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히야선지자를 통해서 당부하기를 “너는 다윗과 같이 말씀에 순종하여 공과 의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왕이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마음대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로보암왕이 잘못한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여로보암은 세겜에 수도를 정하고 북쪽 지역인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왕상 12:25-30).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애굽에서 자신들을 건져주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지 말고 단과 벧엘에 있는 금송아지 신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레위인을 몰아내고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절기도 자기 마음대로 정하였습니다(왕상 12:31-33). 여로보암왕이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남쪽 유다왕에게 돌아설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앞서니까, 염려와 걱정이 많아진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제단 곁에 서서 자신이 분향했습니다(왕상13:1).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쏟아지리라”라고 선포하자, 손을 뻗으며 저를 잡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편손이 말라져서 다시 거둬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기도한 후에야 손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셋째, 여로보암왕은 다윗처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일을 결정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앞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따라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이런 일이 생깁니다.

 

 

여로보암의 길은 자기의 뜻이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기분에 맞으면 은혜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뜻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섬기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금송아지 우상으로 변질 시킨 것입니다. 금송아지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만든 우상인 것입니다. 즉 금송아지 우상은 자기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변질된 신앙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인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거룩한 행실도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다.

 

 

3. 이방 사람들의 길이 있습니다.

3.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하스왕은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점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첫째, 아하스왕은 자기 아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인신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짐승을 바친 것보다 사람을 바치면 신이 더 기분이 좋아서 소원을 잘 들어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금한 것입니다.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며 분향하였습니다.

 

 

둘째, 아하스는 여호와께 믿음을 두지 않고,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뇌물을 주어 자기를 도우러 와 달라고 요청하는 근시안적인 정책을 채택하였습니다 (사 7:2-6; 8:12). 또 앗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교 제단에 감탄하고 그것의 도안을 베껴서 그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앞에 두게 하였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전의 문을 닫고 제단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게 한 장본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성전에 나오지도 않고 세상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재물이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의 삶의 질 만족도가 1년 새 세계 75위에서 117위로 내려갔습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전세계 145개 나라 15세 이상 남녀 14만 6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인데요, 1위는 파나마, 2위는 코스타리카, 3위는 푸에르토리코가 차지했습니다. 그러면 돈이 없고 가난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1~3위까지 차지한 나라들을 보면 전부다 우리보다 못사는 중남미의 가난한 나라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육신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것이 문제입니다. 탐심으로 가득한 마음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탐심이 자기사랑이고 우상숭배입니다. 불행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사랑과 감사가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 시기와 다툼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해결됩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고 경건한 삶을 회복할 때 사랑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세 가지의 길을 가는 사람 세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다윗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나옵니다. 나봇이라는 사람으로 이스르엘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밭은 아합왕의 별궁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왕이 나봇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포도밭이 내 왕궁에서 가까우니 나에게 주시오. 그 밭을 내 채소밭으로 만들고 싶소. 그 대신에 그대에게 더 좋은 포도밭을 주겠소. 그대가 원하면 그 값만큼 돈으로 줄 수도 있소.”

그러자 나봇이 대답했습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왕에게 드리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입니다.”

나봇은 자신의 유익에 따라 결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왕의 제안을 받아서 그 밭을 팔았으면 세상적으로는 훨씬 유익합니다. 왕에게 잘 보여 출세할 수도 있고, 더 좋은 땅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가지고 않고 다윗과 같은 길을 갔습니다.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로보암과 같은 길을 가는 아합이 나옵니다. 나봇이 포도원을 팔지도 않고 다른 밭과 바꿔주지도 못한다고 하자, 아합왕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안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합은 그렇게 악독한 왕은 아닙니다. 강제적으로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합왕은 여로보암의 길을 간 것입니다. 미지근하고 변질된 신앙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이방인의 길을 가는 이세벨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 몇 통을 쓰고 거기에 왕의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들을 나봇의 마을에 사는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습니다.

이세벨은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금식일을 선포하고 백성을 불러모으시오. 그리고 나봇을 높은 자리에 앉히고 불량배 두 사람을 나봇의 맞은편에 앉히시오. 그들더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욕하는 말을 들었다고 거짓으로 말하게 하시오. 그런 다음에 나봇을 성에서 끌어 내 돌로 쳐죽이시오.”

이세벨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불량배를 동원하여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나봇을 모함하고 돌로 쳐 죽이게 했습니다.

 

 

4. 나의 길은 어디입니까?

우리 앞에는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 정직한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과 같이 자기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바꾸어 버린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길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완전히 세상을 따라 사는 이세벨과 같은 이방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지금 나는, 아니 우리는 어느 길로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와서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제자들은 배와 물고기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제자는 자기 것을 버리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돈이나 명예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는 자기를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성도는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선물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즉 물과 성령의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은 주 예수그리스도에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상황이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거듭나면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입고 먹고 쓰고 하는 모든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 때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면 사람들의 시선과 생활방식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평범하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나를 알아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조정민지음 왜 예수인가?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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