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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처럼 빛나는 삶(마9:35-37)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16|조회수0 목록 댓글 0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한 번 뿐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제한이 있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생에 몇 번이나 있을지 모르는 ‘기회’라는 것은 더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영이 깨어있어야 하며, 확실하게 붙잡고 선용해야 합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기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고 하였습니다.

 

“규모 없이 행한다”는 말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며 무질서하고 산만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모두 시간 속에서 살고 있고, 시간 속에서 살고 있기에 시간과 관계되어 있으며, 관계된 시간을 관리해야 합니다.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며 인생을 사느냐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입니다.

 

욥기7장6잘에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실로 우리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더 빠르고 우리의 생명은 한 호흡 사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 한번 주어진 삶 그리고 조각만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될 제한적인 인생, 이러한 인생의 일회성과 유한성에 대한 진지한 자각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순간을 의미 있고 값진 삶으로 장식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그것이 가정, 교회, 사회를 막론하고 어떠한 여건 속에서든지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느끼는 감동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곧 삶의 에너지가 되는 사명감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일이든 사람을 대하든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즐겁고 기쁘게 살아 갈 수 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야 향상과 발전이 성공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더 낳은 환경에로의 진일보가 가능합니다.

 

반대로 환경을 탓하고 저주하고 적개심을 품는다면 악한 무리의 젊은이들처럼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어진 삶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실했나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삶에서도 열정과 헌신을 기대하십니다.

 

주어진 삶에 집중하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이 흐르면 높아지고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도로서 주어진 삶에 시간을 잘 선용해서 샛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예수님을 따르는 삶(35) 3대 사역을 따르는 일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3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가르치시는 일과 복음을 전파하는 일, 그리고 병을 고쳐주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하신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닌 세 가지 사역을 항상 병행하시고 균형 있게 하셨습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일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주특기로 앞세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각각 가르침을 받아야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깨우칠 수 있습니다. 지적인 회복입니다. 모든 사람이 천국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영성 회복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각종 질병과 약함에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육체적인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 이것이 기독교의 선교 역사를 보면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 들어가서 교육기관을 만들고 그 교육기관을 통해서 전도의 접촉점을 만들고, 그 교육기관에서 신학문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르침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일은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파하는 사역, 예수님은 어느 한 곳에도 줄곧 머물지 아니하고, 여러 곳을(성곽이 있는 도시마을이든, 주변 촌락이든) 다니며 부지런히 복음전파사역을 공간적으로도 얼마나 부지런히 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셨는지, 그야말로 동분서주하시며 바쁘고 고단한 생애를 살다 가셨습니다.

 

성도는 복음 전파 사역을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이를 행함에 있어서 그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괴로움을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고백하는데(골1:24) 이러한 고백이 동일하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요15:19:행 5:41).

 

또한 예수님의 고치는 사역, 병 고치는 예수님의 사역은 참 갖가지로 다양하게 실행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닿기만 하였는데 병이 고쳐졌고 예수님께서 눈 먼 자에게 손을 대어서 직접 고쳐주시기도 하였고 예수님께서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간 그 네 명의 믿음을 보고서 병을 고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 수많은 병들을 고쳤을까요? 의사를 무시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병을 고친 이유는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치유에 대한 근거와 사례들을 제공해 줍니다. 성경은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 대한 치료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록인데, 하나님께서는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시고 강하게 하시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바라십니다.

 

출애굽기15장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병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가진 의사이심을 단호하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왕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치유를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무한대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적으면 하나님의 능력도 제한하고 우리의 믿음이 크면 수많은 병도 고치는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는 곧 우리들의 믿음의 한계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라야 합니다.

 

2천여 년 전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세계는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파에 의하여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똑같은 일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바뀌어 왔듯, 오늘날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요, 그분을 따르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 스티븐 로슨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온산에 서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든지 혹 환난의 길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샛별처럼 빛나는 삶입니다.

 

2.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삶(36)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하나님께서는 힘없고 불쌍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장 50절과 54절은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절망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시고 돌보아 주십니다(시 103:13).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아십니다. 그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진토와 같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시103:113, 14). 그리고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역하16:9상).

 

사실 신앙생활 하다가 때때로 영적인 딜레마에 빠지거나 영적인 무기력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성도들은 이런 때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내게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때가 도리어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시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때입니다. 때로 예수님을 떠나 자기 혼자 살 수 있는 것처럼 교만을 부리다가 넘어진 사람을 위해서도 오히려 그를 찾아나서는 분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찾기까지 산과 들을 헤매신 그 모습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혀서 돌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함 여인에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면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가산을 탕진하고 아버지를 떠나 허랑 방탕하게 살았던 아들을 용서하고 다시 맞아 주는 아버지의 모습도 한없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하실 때 자비의 눈, 긍휼의 눈으로 보십니다. 공의의 눈으로 보는 결론은 심판이지만 자비의 눈으로 보는 결론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긍휼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가르치시고 그 구약성경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야로 오신 자신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보는 마음을 무엇이라 하셨느냐 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 수밖에 없는 가여운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주로 육신의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질병에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저들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문제로서 일차적인 문제는 영혼의 병을 고쳐주시며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큰 고통에 처한 사람일수록 더욱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신의 힘으로, 의지로, 실력으로, 도무지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에 고통당하는 우리들을 예수님은 더욱 불쌍히 여기셔서 오늘 만나주시러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시편103편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로 살 수가 있습니다.

 

본문36절에서 예수님은 무리들을 목자가 없어 유리방황하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민망히 여기셨다’ 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이해하시고 그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존재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애정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심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용서하시기를 속히 하시는 우리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삶이 샛별처럼 빛나는 삶입니다.

 

3.추수할 일꾼을 보내는 삶(37)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교회의 존재가치는 선교입니다. 교회는 선교로 말미암아 교회가 됩니다. 선교가 없으면 교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주시고, 선교사를 통하여 복음을 전해 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르치고 전하였으며, 이것을 우리는 전도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교회들은 이 전도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을 하고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적으로 행하였습니다.

 

먼저 구원받은 우리는 복음전파의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부활 승천하시면서 땅 끝까지 이르는 복음 전파의 남겨진 사명을 교회 일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 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이러한 복음 전파의 사명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3:17-20)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단순히 구원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 들에게는 누구나 복음을 전파할 사명이 있습니다.

 

믿는 우리는 패역하고 강퍅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이요 성령님의 뜻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감정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선진들은 감옥에 갇히고 죽어가면서도 증인이 되었는데, 우리는 너무나 안일과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추수할 일꾼이 미치지 못해서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추수할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추수를 기다리는 영혼들을 추수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일꾼이 해야 할 과제이며 지금의 모든 필요는 추수할 수 있는 일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꾼을 계발하여 땅 끝까지 하나님 라를 확장시키는 것이 주요한 과제입니다. 

오직 충성과 사명에 대한 충직한 결심과 주를 위한 생사불고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웃을 향한 최고의 사랑은 일시적인 물질적인 도움이나 친교나 격려가 아닙니다.

이웃을 향한 진정한 도움과 궁극적인 사랑은 나와 관계된 이웃에게 내가 소유하고 있는 최고의 복, 영적인 복 예수님을 믿도록 하여 구원을 받고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육적인 모든 선행과 도움은 그들의 영혼을 살리고 구원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전도로 나타나며 그 영혼들이 구원을 받기까지 끊임이 없는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제시하고 가르쳐서 하나님께 인도하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 사람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 천국을 소유하고 그 나라를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디모데후서4장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예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는 자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힘써야 합니다.

또 예수님의 오시는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더욱 힘쓸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세상은 멸망 가운데 있는데 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멸망할 세상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면 안 됩니다.

 

노아의 방주를 교회라고 한다면 노아는 방주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날짐승들을 몇 차례 보내봅니다.

오늘도 교회는 멸망 가운데 있는 세상에 복음 전하는 자들을 파송합니다.

 

추수 때에 일꾼을 보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권념하시는 긍휼이 어떻게 세상에 역사했는지를 알고자 해서 노아가 방주 밖으로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낸 것 같이 오늘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의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힘 쓰는 삶 뿐만 아니라 영혼 구원을 위해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는 삶이 샛별처럼 빛 나는 삶입니다.

 

1.예수님을 따르는 삶(35) 3대 사역을 따르는 일

2.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삶(36)

3.추수할 일꾼을 보내는 삶(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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