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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기 발견(마18:9-13)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16|조회수0 목록 댓글 0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자기를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이 배우고 , 많이 가르친다 하더라도 자기를 아는 지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민족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 살든지 그 교육열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자기를 아는 지식이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세상 이치를 알고 모든 지혜에 통달했다 하더라도 자기를 모르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자신에 대하여 바로 알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에는, 큰소리도 뻥뻥 치고 고집도 부립니다. 자존심도 내세우고 성질도 부리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자랑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몸매와 미모를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크고 아름다운 집과 고급스런 자가용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 죽으면 그뿐입니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그 육신은 아주 싸늘한 시체로 변합니다. 어지간히도 떠들어대던 그 입술이건만, 죽으면 단 한 마디의 말 도 하지 못합니다.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쩔쩔 매고, 독약 한 방울이면 그 생명이 끝나고 마는 것이 연약한 우리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폭풍을 만나기 전에는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잘나서 돈을 벌고, 자기가 잘나서 잘되고, 출세하는 줄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폭풍을 만나보면 그때는 안 됩니다. 그때 자기를 발견합니다.

 

실로 사람은 때때로 자신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상당히 철학적인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 신앙의 현재 위치는 어디인가?’ 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본분을 을 바르게 알아야만 자기 직무에 충실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아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남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고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덕(德)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만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 하고 종교인들은 자기를 완성하려고 애쓰지만 성경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면서도 또 다른 때에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받으시고 참된 자기 발견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은 본래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특별히 죄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립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는 것이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범죄자들의 범행 동기를 분석해 보면 동료의 비행을 보고 마음에 담대함을 얻어, 혹은 비행에의 유혹을 저버리지 못하거나 동료에 대한 의리 때문에 죄를 범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이같은 사실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바로 사람은 지극히 연약하기에, 죄에 노출되었을 때 스스로 거기서 빠져 나올만한 의지와 힘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는 시구도 있습니다.

 

성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세상 것들은 사람의 죄악 된 성정(性情)을 자극하는 강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지나치게 혹은 경미하게 취급하는 극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곧 죄를 너무 크게 혹은 너무 사소하게 처리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주 사악한 죄악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고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죄에 지나치게 과민하여 실패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5장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애통한다는 말의 뜻은 '스스로 슬퍼하는 의식 있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즉 당하는 슬픔이 아니라, 자발적인 슬픔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닌 것들에 대하여 아파하고, 죄에 대하 여 슬퍼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순수해 집니다. 세상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본문9절에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손이나 발이 범죄 하거든 찍어 버리고 눈이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는 명령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요청입니다.

 

사람은 설사 손과 발이 실족케 했다 할지라도 차마 손가락하나 잘라 버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호한 결단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은 원초적인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죄악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단절하여야만 합니다. 자의에 의한 실족이든 타의에 의한 실족이든 실족으로 이어지는 모든 요인을 찍어 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신앙의 결단입니다. 비록 손목이 잘리고 발목이 잘리는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을 인내하며 영생의 참 소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면 마침내 그것이 올무가 되어 종국에는 죄악의 노예가 되고 말기에 완전한 신앙은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행해야할 회개에 따르는 결단력을 의미합니다. 회개란 이처럼 죄를 끊어 버리는 실행력이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로마서6장1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성도 된 우리는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더라도 죄에 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기에 은행을 털어서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면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잘 되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죄에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에 거한다’는 말은 죄와 더불어 산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전혀 투쟁하지 아니하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영웅들과 교회사에 나타나는 신앙적 거성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죄에 대하여 민감했던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음속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통회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울 왕에게는 심령의 죄를 깨우치시고 회개케 하시는 성령님이 떠나셨기 때문에 비운이 찾아 왔으나, 다윗에게는 성령님께서 죄를 뉘우치게 하시는 애통하는 마음을 주시므로 행복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주의 성령님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시 51:11).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을수록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깨우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나약한 존재로 죄에 노출되어 언제나 죄를 지을 수 있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혹 남을 실족케 하는 죄를 지었을 때 죄를 끊어 버리는 실행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2.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작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60:22). 우리는 작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은 능력으로 최선을 다할 때 우리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통해 천을 이루시고 만을 이루시고 강국을 이루십니다.

작은 것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예수님은 아주 작은 오병이어를 통해 5천명의 장정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작은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어린 아이 같은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작은 것을 받으시고 작은 자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세상에는 약자 동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약자를 무시하고, 약자를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실리주의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세계는 약자를 동정 하기는 커녕, 약자를 무시하고 유린하는 강퍅한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의 벗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이며,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며 성도들의 본분이며, 장차 상 받을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공평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만든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은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향하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그를 마치 납으로 만든 상자 속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만나보면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무척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순수합니다. 정직합니다. 진실합니다. 거짓이 없고 투명합니다. 간교나 간사함이 없습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연약함을 도와줍니다. 덮어줍니다. 작은 자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본문10절에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업신여기다”는 말은 아래로 내려 본다는 뜻입니다. 멸시한다, 얕본다, 깔본다는 뜻입니다. 여기 작은 사람 하나,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라도 멸시하거나, 얕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무시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정도로 소중히 여기실까요? 천사들이 그 작은 자 하나를 관찰하고, 돌아보고, 보호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 항상 보고합니다. “항상”(dia; panto;")이라고 번역된 말은, “모든 일을 통하여”(through all, or every things)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수호천사를 통해 그 작은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돌아보게 하시고, 그 결과를 매 순간 보고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에 지극히 작은 자 한 명에게 잘 했는지 여부로 심판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이왕이면 여러 명에게 더 잘하자는 뜻입니다.

 

성도는 지극히 작은 자들 편에 서서 작은 자 들과 함께하고 작은 것들을 사랑하는 섬김과 나눔과 봉사의 방법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풀고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계기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든 그 계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 이나 클레멘트(Clement)는 말하기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소자를 볼 때 그것은 우리 주님을 보고 있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작은 자를 돌보는 것은 주님을 돌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되게 하고 주의 몸 된 교회가 잘되게 하며 작은 자를 돌보는 것은 예수님을 돕는 것이며 하늘에서 상급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사는 동안 작은 자들에게 사랑의 수고를 많이 하여 하늘나라에 많은 상급을 쌓은 영적 부자가 되고 오른편으로 구별되기를 바랍니다.

잠언14장21절에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성도 된 우리는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고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라는 사실을 발견하여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3.잃은 양을 찾으라.(12-13)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성도 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늘 발견하고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십니다.

99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사랑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마18:14, 40, 25:40).

 

오늘 본문 비유에서 100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그 순간 목자의 모든 관심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양을 찾을 때까지는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람을 양으로 비유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양은 자기 보호 방법이나 자구책이 없는 동물입니다. 변변한 보호색깔하나 없고, 신체 어느 부분에도 공격 무기 하나 없는 못난 동물입니다. 어떤 외부의 도전과 공격 앞에서 싸움 한 번 못합니다.

 

낙타는 멀리서도 물을 발견할 줄 알고, 독수리는 먼 거리에서도 먹이를 재빠르게 낚아챌 재주가 있지만, 양은 목자의 도움 없이는 절대 살아 날 수 없는 생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혼자 길을 잃었다는 것은 양 중에서 가장 멍청하고 못난 양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불쌍한 것입니다. 길을 잃은 양은 혹 절름발이었을는지 모릅니다. 허약한 양이었을지 모릅니다. 동료들과 몰려다니다 나무뿌리에 채어 상처 난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양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먹는 일에만 열중하다, 목자나 동료들과 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더욱 이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양을 단순히 하나의 상품가치로 보아 손익계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목자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목자는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떠납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다른 목자에게 맡겼다거나 안전한 우리에 두고 떠났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흔아홉 마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험을 그는 감수한 것 같습니다. 경제 가치에 밝은 사람은 99대 1이라는 비율로 따져 목자의 처신이 미련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목자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한 마리 양, 지금 당장 찾아나서지 않으면 벼랑 밑으로 떨어지거나 맹수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한 마리의 양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경제 가치와 생명가치 사이에서 결연히 생명가치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며 돌아온 목자는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고 그 기쁨을 함께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드는 비용 또한 양의 값에 비교할 때 적은 액수는 아닐 것입니다. 돈으로 따지자면 주인은 손해를 보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기쁨은 경제적 차원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생명의 차원에서만 얻을 수 있는 높은 차원의 기쁨일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성도는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영혼구원을 위해서 애쓰는 교회와 성도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힘쓰는 교회와 성도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님께로 왔을 때에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잔치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워하는 마음, 아직도 하나님의 품에 들지 못한 영혼들에 대해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으면서 희생 없이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며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는 모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느 때는 시간을 내야 합니다. 자존심을 접어두고 접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친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희생입니다. 바쁜 일과를 끝내고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시간인데,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하고 저주 가운데 있다면, 그 사람을 전도해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령으로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서 전하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만나지 못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 그들이 주변에 많이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을 벌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작정한 모든 자들을 찾아내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할 자라는 사실을 발견하여 쓰임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9)

2.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10)

3.잃은 양을 찾으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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