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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주변의 사람들(요19:23-27)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16|조회수0 목록 댓글 0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 종려주일은 "주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신학적인 뜻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종려주일 이후 부활주일까지 한 주간을 수난주간(the Passion Week) 혹은 거룩한 주간(theHoly Week), 위대한 주간(the Great Week)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 주간에 인류 역사상 단 한번 뿐인 가장 위대한 인류 속죄의 대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완성됐기 때문입니다.

 

이 종려주일이 끝나면 바로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어서 내일부터 일주일은 고난주간으로 연결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고난주간을 신성시하였습니다. 종려나무를 흔드는 것은 승리자에게 보내는 경이의 표시입니다. 시편에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며'라는 말이 있고, 솔로몬 성전의 모든 벽화는 모두 종려나무를 그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공생애를 다 마치시고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갈보리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주변에는 몇 부류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 종교 지도자들, 군병들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이 불쌍한 존재가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메시야일 것이란 주장을 조롱하였습니다(눅 23:32-38). 당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비방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율법의 기록 때문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의하면(“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이고,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명 구약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은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결코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35절), 그렇게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자들로 간주하며 핍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참고, 갈 1:13-14).“ [기독교 연합신문-김경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1.군인들이 있었습니다.(23-24)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를 지키던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네 등분으로 나누고 속옷은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고 제비를 뽑아 나누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렇게 주석을 달았습니다.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 기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일어난 사건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 시편이 성취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원래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벌거벗겨서 때리고 능욕하고 그리고 못을 박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육체적인 아픔과 나아가서는 수치감까지 겹치는 몇 곱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통이 많지만 더러는 영광스러운 고통도 있습니다만 십자가는 수치와 부끄러운 고통이 더 첨가되어 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져야 할 부끄러움을 그가 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형 아래에서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찢어 나누었습니다. 겉옷은 누어서 한 깃씩 갖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라 제비를 뽑았다고 하니 정말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에 대해 도무지 생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명령으로 죽이라고 하니 죽인 것이어서 자기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니 나도 그렇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빼앗겼으면 나도 남의 것을 빼앗고, 내가 속았으니 나도 남을 속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니 잘못이 있다면 지휘관에게 있을 뿐, 우리는 돌아오는 이익만 챙기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한심한 사람들 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끔찍한 사건 앞에서 어떻게 그 옷을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제비를 뽑느냐 말입니다.

 

사실 그 당시 옷은 오늘날처럼 값싼 필수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소름끼치는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집행자 들이 받은 ‘보수’ 의 일부였습니다.

 

“물품이 귀했던 당시로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이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고작해야 땀으로 얼룩지고 다 낡아빠진 냄새나는 겉옷 한 벌, 속옷 한 벌 정도를 나누어 가지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장 가까이서 보면서도 그분을 처형하고 냄새나는 옷 한 벌을 나누어 가지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보다 더 불쌍한 인생들이 어디에 없습니다. 그들은 겉옷을 얻는 대신 영원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아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혹 낡고 냄새나는 예수님의 겉옷은 아닙니까? 우리가 만일 탐욕에 빠져서 예수님께 나와 세상의 이렇듯 날고 냄새나는 것들만 구하기에 힘쓴다면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던 군병들과 다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께 그렇게 자기 욕심에 따라 세상의 것들만 구한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그러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않을 때 우리 또한 얼마든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냄새나는 겉옷 몇 조각을 나누어 자기는 데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 그러한 하찮은 것만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그렇게 하찮은 것들만 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약간의 물질적 만족이 아닙니다. 또 약간의 위로도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구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죄를 씻음 받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오신 우리들이 예수님께 구하는 내용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군인들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옥스포드 원서사전]

 

예수님의 이와 같은 수난은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와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행하여지는 일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여인들이 있었습니다.(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때부터 숨을 거두실 때 사이에 있었던 두 번째 사람들은 네 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 세 명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마리아인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또 한 명의 여인은 예수님의 이모라고 합니다. 즉 어머니 마리아의 여동생입니다. 이 여인은 살로메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세배대의 두 아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최측근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버리라고 해도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충분한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여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십자가를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간 것입니다. 분명히 십자가를 따라갔지만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를 따른 것이지 십자가만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이들은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을 더 따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얼마나 아프실까, 얼마나 힘드실까, 마음 조리며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따를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따를 것은 예수님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는 빈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가 귀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형편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슬픔의 여인'이라 할 만 합니다.처녀로써 아기를 잉태한 것이나,베들레헴에서는 아기를 받아줄 조산원이나 산부인과 병실하나 없이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는 고통,그리고 헤롯이 2살이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가운데 애굽으로 피난하는 일은 어머니로서 엄청난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성장하여 공생애에 들어갔을 때도,사람 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고난당하는 자기 아들을 보아야만 했던 어머니 마리아,지금은 십자가에 달려 물 한 방울 피한방울 남김없이 쏟으며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습니다.

 

3년 동안을 같이 지내던 제자들은 어디가고 없으며,병고침 받은 그 많은 무리들은 지금 어디가고 아무도 없단 말입니까? 죽었다 다시 살아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없단 말입니까?

 

이 처절한 배신과 경멸을 당하고 있는 이 갈보리 십자가,그 곁에 어머니 마리아가 서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모살로메는 세배대의 아내이며 사도 요한 형제의 어머니이며(마 27:56),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며(마 27:56),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간 여인이었습니다(눅 8:2).

 

본문에서 네 사람의 여인 중에 세 사람이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 가운데 가장 어려운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던 제자들은 도망 간 다음이지만 여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위선자와 참 성도는 위기에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위선자는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지만 갈보리까지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몸으로 있으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들은 초대교회의 숨겨진 최고 일꾼이 됩니다. 모친 마리아가 없었으면 사도 요한은 없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없었으면 예루살렘 교회는 재정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베대의 부인(세베대의 아들들의 모친, 곧 사도 야고보와 사도 요한의 모친)이 없었으면 족보 논쟁은 물론, 성경이 기록되기가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오직 연약한 여자들만이 주의 결에 남았습니다.

 

이같이 우리들도 끝까지 주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오래 믿었고 누가 기적을 보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고난과 굴욕의 자리에까지 주를 따라갈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좋고 편한 자리 뿐 만 아니라 억울하고 모욕적인 곳에까지라도 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갈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꾸준해야 합니다. 날씨가 개인 날이나 궂은날이나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따라 생활하는 것입니다.

주위환경이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굽히지 않아야 합니다. 따뜻한 미소를 줄때는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시련을 준다 할지라도, 두려운 말로써 우리를 낙담케 할지라도 혼비백산할 정도로 우리를 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무한히 선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원망 할 수도 불평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그곳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3.사랑하시는 제자가 있었습니다.(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잡히신 후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갔지만 사도 요한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 알고 모시고 살았습니다.

 

사실 어머니 마리아는 일생 고통 속에 지내야 했는데 이제 아들이 죽는 십자가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마리아의 온 몸과 마음은 찌르는 아픔으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아들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죽는 순간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하여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셨을까?

 

예수님께는 같은 혈육의 친동생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는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 13:55-56). 그런데도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긴 것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각기 흩어져 숨어 버린 것과는 달리, 요한은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와 동행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어머니 마리아를 맡길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둘째로, 마리아는 예수를 낳으신 육신의 어머니였지만, 그보다 더 큰 비중은 영적인 관계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오시는 메시야이심을 천사의 전언으로 이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예수의 주요 사역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후에는 마가 다락방 기도회를 통한 초대교회의 태동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영적 사역을 계승할 제자 요한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셋째로,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가장 오래 살면서 교회를 끝까지 지킨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 순교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요한도 박해를 받아 밧모섬에 유배되는 힘든 생활을 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죽은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요한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했던 이유는, 위기에 처한 초대교회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1세기 말 초대교회는 내적으로 영지주의라는 이단과, 외적으로 로마의 박해라는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 요한은 5권의 성경을 쓰면서 교회를 굳게 이끌어 갔습니다. 특히 요한이 요한복음을 쓸 때에 많은 내용을 마리아에게서 도움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긴 것은, 어머니 마리아를 위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초대교회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였습니다. [권혁승 교수의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신 그때부터 평생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그가 에베소에 가서 목회할 때도 마리아를 모시고 갔습니다. 지금도 거기에는 요한뿐 아니라 마리아와 관련된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요한이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고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리아야 말로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지만 나는 죽어도 그를 용서하거나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내 정서로는 용납 안 되지만 예수님이 용서하신 사람이기에 나도 힘껏 용서하며 사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 환자, 창녀, 세리, 과부, 고아들을 용서하고 포용하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먹고 마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요한1서4장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 얼마나 명쾌한 정답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통해 확증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니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분이 우리의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사람을 우리도 다 용납하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요한과 같은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랑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마리아를 모셔온 후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려고 서둘러 되돌아갔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 뿐이었습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종려주일을 보내면서 맞이하는 한 주간은 경건한 삶을 위하여 힘 쓸 뿐 아니라 우리의 생애 마지막 까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군인들이 있었습니다.(23-24)

2.여인들이 있었습니다.(25)

3.사랑하시는 제자가 있었습니다.(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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