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도들에게 닥아 오는 위기는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위기입니다.
사실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 평상시에는 신앙생활의 위기를 모릅니다.
어린 아이가 홍역을 앓으면 건강상 위기인 것이 분명하나 그 위기를 극복하면 느끼게끔 자랍니다. 이같이 우리 경제생활에도 홍역이 찾아오고 신앙생활에도 홍역이 찾아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그 위기를 통과할 때 믿음이 느끼게끔 자랍니다.
신앙의 위기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신앙의 뿌리가 없음을 입증합니다. 신앙의 뿌리는 생명에 있습니다.
생명이 없을 때 온갖 공허감과 불안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 생명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영혼의 생명입니다. 사람들은 이 생명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과 마약과 쾌락으로 내적 생명을 찾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담가를 찾고, 초월명상가를 찾고, 종교의 문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신앙의 위기는 구원 받은 감격을 잃어버린 때 부 터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위기는 너무 안락, 안일, 풍요롭다는 것입니다. 너무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핍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내가 집사입니다. 권사입니다, 장로입니다...” 인사하면 “얼굴이 장로님같이 보입니다... 집사님 얼굴 같이 훌륭해 보이네요.” 하고 좋은 소리 듣지, 집사라고 권사라고 뺨맞고 좇아내는 일이 없습니다.
교인이라고 핍박 받는 시대가 아닙니다. 거기에 신앙의 위기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 생명을 걸 만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 생활을 빼앗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태해집니다. 안일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밥 먹듯이 주일을 빼 먹습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에는 좀 고난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평신도 신학자 C.S 루이스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밋밋하고 평탄하고 전혀 장애가 없다고 말하며,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희가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삶이, 신앙고백적인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도 된 우리가 시험당할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며 변함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자그마한 시험에도 쉽게 무릎을 꿇고 자포자기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기도생활, 예배생활, 말씀생활, 봉사생활을 모두 중단하고 세상으로 나가시겠습니까? 진실한 믿음은 이런 때 다시 말해 신앙의 위기를 만날 때 그 진가가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은 적당이가 없습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 복 아니면 저주 신자 아니면 불신자, 신앙에는 평행선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에 위기가 온 것을 느낀다면 오히려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때입니다 .밤은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밤이 있기 때문에 아침은 더 밝게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시대적인 밤을 만났고 또 우리들이 생각치도 못했던 인생과 환경의 밤을 만났으며 때로 신앙의 밤을 만났다 할지라도, 그것이 캄캄한 밤이라 할지라도 불기둥으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오히려 더 아름다운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밤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호재의 기회입니다. 혹 문제를 만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호재의 기회를 삼아 더 나은 신앙생활의 길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성도 된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시험과 유혹입니다.
이것이 왜 무서운가 하면 한번 시험에 걸리면 거의 7-80%가 무너지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원래 시험이란 것은 넘어지는가, 아닌가 하고 한번 걸어보는 것입니다. 걸어보았는데 넘어지지 않으면 시험으로 끝나고, 걸려 넘어지면 그때부터 시련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시험은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많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이 시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 시험을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문제라는 것은 시험을 본다는 것입니다. 즉 시험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얻습니다. 낙제점수를 얻을 경우 다시 시험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 통과하면 보다 높은 수준의 시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훈련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매년 평균 26 차례의 태풍이 엄습한다고 합니다. 매년 태풍으로 인해 입는 인적, 물적 피해가 어마어마합니다. 그렇지만 태풍 때문에 못살겠다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방비를 잘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이 다가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험을 만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는 것, 아주 정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을 잘 참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에 빠져 죄를 범했을 때 받게 될 참혹한 결과를 예상해야 합니다.
다윗에게 임했던 그 사망의 세력이 우리에게도 임하여 큰 수모와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시험에 빠져드는 과정을 잘 숙지해서 자신이 지금 어떤 단계에 처해있는지를 자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참고 견뎌서 이겨야 합니다.
나무가 흔들리면 뿌리에 바람이 들어가서 말라 죽을 수 있습니다. 신앙도 바람이 들어서 흔들리면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나 이목의 자랑, 이생의 안일에 빠지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뿌리를 땅 깊은 곳에 박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듬직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냐나, 미사엘, 아사랴가 겪은 풀무 불 시험은 성도들이 겪는 '불시험'(벧전4:12)을 연상시켜 줍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 풀무 불 시험에서 믿음의 승리를 거두었던 사실은 우리 성도들이 불 시험을 어떠한 신앙 자세로 극복해야 하는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신앙의 연단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실로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고 지금은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합니다(벧전4:13).
또한 욥은 만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인해 혼란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와 확신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용광로 같은 불 시험의 고통을 견뎌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된 우리들은 환난 당할 때에 인내하는 연단을 통해서 신앙이 성숙되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소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시인 괴테(1749∼1832)는 ‘고통이 남기고 간 뒷맛을 맛보아라. 고난이 지나가면 반드시 단맛이 스며든다.’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1770∼1827)도 ‘고뇌를 철저히 맛보고 극복했을 때 환희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시인도 음악가도 우리에게 위대한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역사를 통해 보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물론 고난 받는 것이 행복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별되고, 거룩하게 살려는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닥쳐오는 시련들은 우리들을 파멸케 만드는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위대한 기회입니다.
혹 우리에게 신앙생활 때문에 불 시험을 만나면 전혀 당황하지 말고 전혀 이상히 여기지 말고 문제는 호재의 기회로 알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2.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 된 누구나 고난을 좋아하고 즐거워할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본 절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하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결과가 되며,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그 고통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신앙의 성숙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고난에 직면할 때 침체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됨을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영광스러운 상급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라도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히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본문13절에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의 권면과 같이,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험을 통해서 더 강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태풍에 대비하듯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좋은 일이 있을 때에나 성공했을 때에 즐거워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을 때에 즐거워하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어느 때에는 훈련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훈련소를 뛰쳐나가려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훈련은 말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고난의 훈련을 받을 때에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승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이나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게 될 때에 자신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고난 받을 때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난을 받을 때에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바라보지 마시고 고난 속에 감추어져 있는 고난의 보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결국은 우리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고난의 길을 따르겠다고 해마다 고백을 하면서도 현실적인 복만을 갈구하는 자리에 머물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뼈저리게 인식하지 못 하고 그 가시밭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아서 불의는 날이 갈수록 팽배해가고 절망한 사회에 감동과 소망, 생명을 주지 못한 채 실망과 비판의 자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에 동참하는 삶이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의 길에 빠진 자, 병들고 버림받은 자, 가난한 이웃, 포로 된 자, 절망에 빠져 눈물짓는 이웃들에게서 교회는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공회원들로부터 심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사도들을, 풀어 주었지만, 매를 맞았던 사도들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움직이기도 어려웠지만,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음을,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고난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준 대로, 의를 위해서 고난 받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심한 매질로 인해서, 큰 고통을 느꼈지만, 마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이 당한 아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용기와 기쁨을 부어주었습니다. 이처럼 때로 사람들에게, 치욕적인 일이, 하나님 앞에는, 영광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았던 고난과, 사도들이 당한 고난이, 바로 이런 예에 속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고난에도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자부심과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런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거룩한 기쁨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가 될 때까지, 교회는 로마 황제들에게, 많은 박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모든 박해를, 기쁨으로 극복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받는 박해로, 하나님께 인도된다면, 그 박해와 고난은, 복의 선물입니다.
본문13절은 성도가 이 세대에서 손해를 보고, 고난에 처하게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성도들 삶의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으로 부터 당하는 불이익과 고난, 그리고 죽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을 따라가는 무능한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를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되어 진 일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혹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다면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문제가 될 수 없으며 그 고난은 호재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3.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14)
“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치욕은 수치와 모욕을 말합니다. 수치는 볼 면목이 없거나 떳떳하지 못할 경우 느끼는 마음입니다. 모욕은 깔보이고 욕된 모습에 스스로 얼굴을 붉히는 경우입니다.
여하튼 치욕 그 자체는 내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리면서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사람이 누구로부터 치욕을 받는 것은 대단한 모멸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본 절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 하였습니다.
치욕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구주로 따름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비방이나 능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방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고 욕을 먹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비방을 당합니다.
꼭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래야만 되나 법을 지키고 양심을 따라 바르게 살고 좋은 일을 많이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지 어찌 만날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느냐고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공하고 멋있게 살아야지 지질이도 못살면서 천국, 천국 하는 것이 믿음이냐 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좀 철저하게 믿음생활 한다고 주일날 모임에 안가거나 술 한 잔 안 마시면 꼭 그렇게 해야 되냐 적당히 하자. 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흔들리지 마시고 꼭 이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이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는 것임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5장41절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능욕을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바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을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합당하게 여겨야 합니다.
불의와 부정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거부 했을 때 오는 여러가지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사도 베드로 자신도 고난의 증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는 고난을 즐거워하고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망한 것 같으나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여정 가운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음을 알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복이 있는 자’는 ‘마카리오이’입니다.
이는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얻게 되는 영원한 기쁨의 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천국에 소망을 둔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복된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해도 영적으로 복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5장11-12절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불신자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을 때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고, 분개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므로 도저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당할 때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 된 우리는 믿음을 바로 지키며 살려고 할 때에 반드시 적대나 질시나 미움이나 중상모략이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임을 미리 알고 이에 대비해야 하며 우리는 반 기독교적 적대감이 증가할 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히브리서11장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삶의 태도 문제입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귀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선순위가 무엇이냐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수모와 이 세상의 부를 택하라면 어떤 것을 택하겠습니까?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한 수모를 택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수모가 영원한 천국의 상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물이냐?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냐? 결정의 문제에 단호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일꾼이었던 바울 사도는, 하나님과 지지하는 성도들 그리고 복음을 받는 자들에게서는 영광과 좋은 평을 얻었으나, 불신자들과 반대하는 교인들에게서는 치욕과 악한 평을 얻었습니다. 사도로서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지만, 실상 하나님과 다른 사도들 그리고 많은 성도들로부터 사도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S. 스미드, 홀런드 부인의 회상록에 “치욕을 피하고 영광을 찾지 말라- 영광만큼 값비싼 것은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혹 우리에게 신앙생활 때문에 치욕을 당하면 두려워 말고 오히려 그 문제가 호재의 기회로 알며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나아가시를 바랍니다.
1.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12)
2.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합니다.(13)
3.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