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성도 된 우리의 참 모습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생길 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과 인생이 언제나 슬픔과 고통의 일들이 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누구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보통 예수님을 믿으면 환난과 고통은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병이 안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병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사업에 실패해서 재산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의 아들이 대학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장로님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는 일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고난은 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가장 부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가장 만족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가진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구리반지를 끼고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지는 돈으로 살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어도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귀찮은 장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 작은 것 부터 감사하고 기쁨을 얻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요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소유에서 오는 기쁨, 그 다음엔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 한 차원 높이, 또 한 차원 높은 것은 믿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사실 어머님 품에 안긴 어린아이는 마냥 행복합니다. 가진 것이 없습니다. 아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 지금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는 어머니가 함께하고 있는 것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쁨은 생에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그냥 하는 일보다는 기쁨으로 하는 일이 몇 배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성도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기쁨의 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쁨을 퍼내면 삶을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기쁨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보답이 됩니다. 돌이켜보면 오늘까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사고로, 질병으로,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환난이 닥쳤다 해도 오히려 그 속에서 기뻐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1.복음증거의 방해 앞에도(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람들은 ‘기쁨’을 자기 나름대로 정의합니다. 어떤 이들은 ‘만족함’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마음에 근심이 없는 것’이라고도 하고, ‘하는 일들이 잘 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기쁨이란, 흐뭇하고 만족스러운 일로 인하여 마음에 일어나는 즐거운 감정’, 혹은 간단하게 ‘마음이 즐거움’이라고 정의합니다. 모두가 옳은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쁨’이라는 것이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의 원천은 한계가 있는 것들입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기쁨’이 끝없이 지속될 수는 없음을 말합니다. 기쁨을 제공하는 원인이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계적인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되기 못합니다. 사실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깨달아지면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도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쁨”이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기쁨은 건강한 삶의 지름길입니다. 기뻐 찬송하며 사는 사람은 장수합니다. 기뻐하며 사는 인생은 피곤치 않습니다. 기뻐하면 건강하고 아름답고 젊어집니다. 기쁨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게 합니다. 기쁨은 무너졌던 것을 다시 세우는 능력입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는 복을 가져옵니다. 본문 40절에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산헤드린 공회의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가말리엘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충고에 설득 당하였지만 분노로 격앙된 그들은 사도들을 순순히 놓아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한 공회의 결정을 무시한 죄로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석방하였습니다. 유대인의 태형이란 가죽끈을 세 줄을 꼬아 만든 형장(刑杖)으로 때리는 것으로 보통 40대에서 한 대 감한 매를 칠 수 있었습니다. 이 형장으로 매를 맞을 경우엔 살가죽이 벗겨지고 심지어는 뼈가 드러날 상태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고난을 당하면서 까지도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와 초대교회에 욕과 매와 죽음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이러한 피의 고난을 통해서 찬란하게 꽃피어 오늘의 성도와 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는 사람의 이성을 초월한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기쁨을 잃었다 면 타락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향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늘나라 백성이 항상 우울해 하고 불안 해 하고 공포에 찌들어 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가고, 고된 노동과 먹지 못함으로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에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록 태양 빛이 우리에게 비취지는 않지만,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지금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기 진실 된 사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그들은 지금 깜깜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뢰가 그 핍박과 고난의 밤을 이기도록 한 힘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환경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처법입니다. 빛은 어두울수록 더욱 밝게 빛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더욱 신앙이 밝게 빛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영혼의 평안과 기쁨으로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이 기쁨이 있었으므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 방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전도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기독교인은 어떤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마음 속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즐겁기 때문에 찬송과 기쁨의 표현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 된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도의 사명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방해를 받는다 해도 기뻐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을 때도(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사도들은 복음전도가 방해를 받음에도 그것을 기뻐하며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을 석방하기로 결의한 시점에서 사도들에 대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한’ 공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예수 이름을 전하지 말라는 협박과 폭력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자신들이 능욕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나 집에서 가르치는 일과 전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요 구세주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아무리 협박하고 죽인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않고 담대하게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가는 곳 마다 능욕을 당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 고난은 순전히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그들은 오히려 즐거워했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이 행복감은 소유나 즐김에서 나오는 행복감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이 주는 행복감이고 즐거움이고 기쁨입니다. 신앙인은 마땅히 이 행복함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가난하였습니다. 위 구절에서 바울은 궁핍과 곤고를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재산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지역에서 전도할 때는 물론 비방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천막 꿰매는 일을 하면서 먹을 것을 마련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잠자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잠잘 곳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헐벗었습니다 (고후11:27). 다른 교회에서 선교비를 부탁하지 않으면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방하는 자들로부터 물질을 탐하는 자라는 비방을 들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환난과 핍박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핍박과 능욕을 받는 것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수없이 맞고 죽을 뻔 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에게 5번이나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3번 태장으로 맞고, 1번은 돌에 맞고, 3번은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음 지내기도 했습니다. 강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여러 번 당했습니다. (고후11:23-26). 성경에 기록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고통 대신에 얻은 대용품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이 지나간 후에 찾아온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고난이 지나면 큰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맞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자리에 찾아온 기쁨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감옥 에서 나온 것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게 풀려나서 그들이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만약 감옥 밖에 나와서도 예수님을 전할 수 없었다면 그들은 다시 감옥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전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이나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오직 예수님 그 이름을 위하여 어떤 고생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자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매를 맞고 능욕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고초 당하신 매 맞음과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기쁨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모범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예수님께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진 핍박 속에서도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사람의 탁월한 능력과 상황에 있지 않고 어떤 고난도 뚫고 헤쳐 나가는 전적인 순종에 있습니다. 기쁨은 순종이고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고 끊임없이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을 찬양하며 섬기고자 할 때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큰 어려움 속으로 빠져들어 갈 때가 있습니다. 그토록 오래 기도해왔는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께서 어찌 이 사람은 이토록 날뛰게 만들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까짓 사람 지옥에 가든 말든 난 몰라.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도 않아.”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들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더 악하게 굴고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이 계속될 때 그냥 주저앉고만 싶습니다. 모두지 사방이 캄캄한 것이 어디로 한 발도 더 나갈 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밤이 깊다는 것은 새벽이 가깝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짙고 긴 것 같아도 이윽고 밝은 아침이 옵니다. 어둠이 짙고 그토록 추웠기에 아침의 여명은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요 밝은 햇살 아래 따사로움은 그저 감사로 넘쳐납니다. 성도 된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능욕을 받을지라도 기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공회 앞을 떠날 때도(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공회란 유대인들의 산헤드린을 지칭하는 것으로 신앙적인 문제를 다루는 법정이며 23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공회는 사람을 죽일 수는 있는 집행권은 가지지 못했지만 사형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은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고 빌라도의 권력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게 결정을 내린 곳이 바로 그 공회입니다. 당시 사도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명예가 있는 자들도 아닙니다. 수양이 잘된 사람들도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철인도 아니고 고명한 스승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촌의 어부들입니다. 그들의 성격도 제각각 입니다. 과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유부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약삭빠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인간성도 제각각 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오면 다 도망갑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날 것 같으면 언제라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뗍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게 되니까 낙심하고 불만을 터뜨리면서 각각 제 고향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이런 자들이었는데 이들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이처럼 이들을 변화되게 하였습니까? 세상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정치적인 환경이 변한 것도 없습니다. 경제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여전히 그들의 상황은 흑암이고 무질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변했습니다. 연약했던 자들이 능력의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능욕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능욕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가말리엘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옳고 그들도 옳을 수도 있다는 적당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오직 그 이름을 위하여, 예수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아니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한 것처럼 여기지 아니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려났습니다. 앞으로 또 체포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기를 기뻐하며 자초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본문41절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이는 단순히 공회에서 풀려난 것으로 사도들이 안도하고 각각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나아가고 있었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세상에서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세상 사람보다 더 구차하게, 고난 당하며, 멸시를 받으면서 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더 좋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으로 인하여 오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매질을 당한다면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상급이 큰 것이니 면류관 받아 쓸 것을 생각하니 매를 맞으면서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미워서 나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순교의 영광을 얻은 것이니 영생의 면류관을 쓸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하고 기쁩니다. 성도 된 우리들도 이런 담대함과 기쁨으로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4장5절에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직무를 다하라는 말은 내 맡겨진 일을 끝까지 완성하라는 말입니다. 온전히 성취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전도의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전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복된 일 일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를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성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사도들이 공회에서 풀려난 것으로 안도하고 각각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공회를 떠난 것처럼 성도 된 우리들도 어떤 방해가 있다하더라도 복음전하는 것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1.복음증거의 방해 앞에도(40) 2.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을 때(41) 3.공회 앞을 떠날 때(41)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