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40-44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한국교회가 정한 맥추감사절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맥추감사절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보리농사 짓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왜 유대인들이 지켰던 맥추절을 우리가 지켜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맞는 것 같지만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로 성도로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사절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들이 1분 동안의 모든 전기를 끄고서, 그동안 항상 혜택을 누리면서도 감사하지 못했던 에디슨의 수고와 노력에 감사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우리가 누리며 살아왔으면서도 잊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며 감사하자는 것이 감사절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감사주일을 맞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할 일들이 많은지 다시 한 번 되새김할 수 있는 시간으로 드려야 합니다.
맥추감사절이 한 해 반년의 감사이면 추수감사절은 한 해의 감사입니다.
감사는 내 삶에 대한 감사입니다.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신 소중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잘 자라주는 아이들, 그리고 사랑스런 나의 교회. 좋은 우리교회 성도들, 그리고 일할 수 있는 직장, 생각할수록 감사하며 정말 소중합니다.
세상에 어떤 보화가 이보다 소중하고 감사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나의 삶속에 선물로 주신 작은 감사들을 찾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분문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감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감사의 기도를 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하십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납니다. 수족을 베로 묶었지만, 얼굴을 수건으로 쌓지만,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몸이 썩어가지만 다시 살아납니다. 동굴 무덤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감사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의 심장은 하루에 무려 10만 3,689번을 뛰고, 몸속의 혈액은 하루에 1억 6,800만 마일을 달리고, 숨은 하루에 2만 3,040번을 쉬고, 하루를 사는 동안 우리는 두뇌 세포 700만 개를 사용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몸의 모든 기능은 언어에 의해 좌우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감사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의 심장은 더 잘 뛰고, 몸 속의 혈액은 더 잘 달리고, 숨은 더 잘 쉬어지고, 두뇌 세포는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통해 감사의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미리 감사입니다.(40-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사람의 값은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알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인격이나 삶이나 생각이나 정신이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것은 인격이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중에서 가장 얄미운 죄가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감사의 삶은 기본의 삶입니다.
감사라는 말은 '생각한다.'에서 나온 말로써 '깊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니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는 '야다'라는 말로 '마음의 샘 줄기'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에 따뜻한 샘이 흐르는 사람은 감사가 나오고 마음에 메마른 사람은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신약성경에 많이 쓰이는 감사는 '마음의 줄기가 달게 흐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들어올 때는 우리의 마음의 줄기가 쓴 물로 왔다할지라도 나갈 때는 단물로 변화되어 흐를 것입니다.
성도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받은 것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공을 돌립니다.
감사는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할 것이 많은데,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이 볼 때는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아무리 감사할 것이 많아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감사할 것이 많고 감사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이내 이루어주실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죽은 자가 살아난 후 감사하는 상황이 아니라,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는 냄새가 풍기는 무덤 앞입니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직 응답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응답해주셨다고 믿고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한 소년이 먹어야 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안드레가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렸을 때 예수는 그것들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축사하시고”란 말은 “축복하시고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드리는 사람을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더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세계를 바라보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과 비교하면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와 자신을 비교하는가에 따라 감사의 깊이, 빈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은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계속 얻기 위하여 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계속 공급해주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평, 원망, 분노, 짜증내는 존재로 돌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거기에 세상의 마귀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며 감사할 수 있는 조건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수 있는 조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생각나게 하십니다.
본문에서 친구의 죽음이라는 가장 좋지 않고, 가장 슬픈 소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지나간 날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 해오신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과거의 은총들이 주님의 머리 속에 떠오르며 하나님은 변함없이 성실하신 분인 것을 기억하자 주님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현실이 우리에게도 절망이나 불안을 안겨주고 짜증과 원망이 솟아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위기감이 느껴지고 피곤하며 답답함에 감사보다는 불평이 당연하게 생각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날에 삶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간섭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보호하신 일들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샘솟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지켜주시고 질병으로 신음할 때에 치유해주시며 수많은 위험 속에서 평안하게 보호하시며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감사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의 능력은 미리 감사에서 나옵니다.
2.믿게 함입니다.(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진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 대신, 소경이 보고 앉은 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듣게 됨을 가서 말해 주라고 하셨습니다(마11:4,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병 고침을 통해 치료하시는 메시아임을 우리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 42절에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 때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 됨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주변에 둘러선 무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둘러선 무리는 두 그룹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여기에 속했습니다. 또 한 그룹은 아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컨대 죽은 나사로의 가정에 문상을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표적을 행하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로 이미 믿는 제자들은 그 믿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일으킨 기적 중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기적이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린 기적입니다.
요한복음20장30-31절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표적을 주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고 또한 그 사실을 믿게 하려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표적이 제자들의 믿음을 유발한 예는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흔인 잔치 기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요한복음2장11절에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리고 본문에서도 기록된 표적들이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7장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을 통해 자신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임을 세상이 믿기를 간절히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7장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그 아들을 보낸 분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 가운데 보내셨습니까? 그것을 알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오셔서 하신 모든 일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은 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인 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혜가 넘쳐나고 감사가 일어납니다.
사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백지 한 장의 차이밖에 되지 않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며, 천국에서 지옥으로 직행케 하는 지름길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아느냐? 모르느냐? 에 따라서, 그것이 은총이 될 수도 있고,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저절로 알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에 힘쓰지 않는다면, 제대로 알 수 없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도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예수님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메시야로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하여 표적을 보여주시며 감사하였습니다.
3.기적을 불러 옵니다.(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은 정말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오늘 나사로는 병들어 죽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살 수 있다는 소망을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이제 괴로움을 넘어선 슬픔과 완전한 절망이 찾아 왔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죽기 전에는 그래도 살 수 있다, 죽기 전에는 그래도 살려 보자라는 희망이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다음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희망과 소망이 없었는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그의 동생 마리아도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32절)고 합니다.
33절 말씀에 보면 이 죽음의 현장에 마르다도 울었고, 마리아도 울었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것은 그들 속에 있었던 소망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오셨습니다.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인접한 곳에 있으며(요 11:18), 예수님의 행적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마 21:17, 눅 24:50).
한편 ‘나사로’는 ‘하나님의 위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입니다. 그 이름들이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신 이유를 말해 줍니다. 죄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지배당하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처럼 캄캄한 절망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리다굼’의 소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교회가 전개하는 복음운동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세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아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수건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입니다. 무덤의 돌문을 옮기는 일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여기에 구원의 놀라운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죽은 자의 수건을 풀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셨을 때 사망은 더 이상 나사로를 무덤에 묶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하시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상태가 너무 절망적이었습니다. 죽을 뻔 한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벌써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상태였습니다. 완벽한 절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사로를 불러내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읽게 하시는 대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상태가 혹시 오늘 나사로와 같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말라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만 부르시는 분이 아니시라, 나사로와 같은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나사로를 다 부르시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로마서4장17절에 “기록 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의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과 같이 큰 소리로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십니다. 생명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친히 부활의 주가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얼어난 것은 예수님 명령이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 사실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된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군중예수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든지 살릴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사건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큰 이슈로 등장하였습니다.
요한복음12장9절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그리고 10-11절에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님 되시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증거 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고전 1:18-23).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줍니다. 이 복음의 특징이 지상교회를 통하여 달리다굼의 능력을 행사합니다.
감사는 기적을 불러 오는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는 어떤 불편이나 상황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이끌어줍니다. 감사는 내 앞에 놓여있는 어떤 어려움도 이기고 극복하게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게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기적이 일어나는 능력입니다.
1.미리 감사입니다.(40-41)
2.믿게 함입니다.(42)
3.기적을 불러 옵니다.(4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