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28-31,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관심은 관계입니다. 관계가 없으면 관심이 없습니다.
물질에 대한 관심이 돈을 불러 옵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건강을 지킵니다. 사람이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도 됩니다.
또한 누구로부터 좋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관심에서 벗어난 사람이야말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누가복음10장에 나오는 강도 만난 나그네처럼 갑자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어떤 사람은 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상처 입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상당한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돕기 위해 그의 일. 시간. 정력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 돌보아질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두 데나리온은 이십사일에서 사십 팔 일간 정도의 숙박료에 해당하는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절망적인 필요를 보았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배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남을 향한 배려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 빠져 산다면 그것 역시 초보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사람들은 반드시 약자를 배려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자들의 공통점은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울의 회심이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그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와 어울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도움으로 바울은 자유롭게 지내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헬라파 사람들과 토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그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이 바울을 그의 고향인 다소로 보냈습니다.
그 결과 사역이 더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 한사람을 세움을 통해 헬라인에게 전도하고 예루살렘에서 든든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향한 따듯한 관심과 더불어 복음전도자에 대한 따듯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1,함께 하는 것이 관심입니다.(28)-29)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이웃에 대한 따듯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딤후3:2). 오늘날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남이야 어떻든 자신만 잘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함께하길 원하십니다. 함께 나누는 이웃, 함께 나누는 사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복된 사회입니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눔의 미학을 아는 정이 많은 민족성을 가졌다는 것일 알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무엇이든지 나누고 베풀면 똘똘 뭉치는 힘이 됩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시편1133편1절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삶은 공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삶을 경험하기를 바라십니다. 함께하는 공유된 경험을 교제 (fellowship) 라고 부릅니다. 교제란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어울리며, 음식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의미의 진정한 교제는 함께 삶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 진실한 나눔, 실제적인 섬김과 희생적인 베품과 위로가 있는 교제입니다. 물론 이 모습이 모든 성도와 그런 모습을 나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닿아있는 ‘그 사람’과는 바로 이런 모습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 라과디아(La Guardia)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유명하였느냐 하면 이 분의 이름으로 된 공항까지 생겨날 정도였으며 1933∼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의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했었습니다.
또한 Little flower(작은 꽃)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뉴욕의 시장으로 재직을 하기 전 그곳에서 즉결 판사로 재직할 때 한 노인이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왔습니다.
죄목은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이었는데 판사가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전에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예,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다 떨어지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노인의 사정을 다 듣고 난 뒤에 이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노인께서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저는 법대로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라과디아 판사는 법정 안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비단 이 노인의 책임만이 아니라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동시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자기의 지갑에서 10달러 짜리 지폐를 끄집어내어 모자 속에 넣고는 그 모자를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돌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두어진 돈이 모두 57달러 50센트였는데 라과디아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게 하였고 그 노인은 그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는 법정을 나섰습니다.
성도 된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들 중 혹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짐을 함께 저 주어야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을 복음과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복음으로 돕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 가도록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주변에 어려운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영혼,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자들, 영육이 병들어 고통을 당하는 자들,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자들을 사랑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들은 자를 돌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와서 보와 주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대접을 받고자 하면 우리가 먼저 이웃을 대접하고 도와야 합니다.
본문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이것은 사울이 사도들과 함께 있었다는 진술 이며,이는 바나바의 애정 깊은 중재로 인해 사도들이 사울을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함께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혼자 일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택했습니다. 제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어 세상으로 내어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함께 일해야 합니다.
관심이 없으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사울과 제자들이 함께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같이 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2,형편을 알아주는 것이 관심입니다.(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체험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가 중생 하여 새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모아서 잡아 죽이려고 체포하려고 가던 그 다메섹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요,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잡아가기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온 사람이요.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고 두려워하고 피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결국에는 핍박을 받습니다.
다메섹에서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고 예루살렘에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사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죽이려고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을 안 형제들이 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 도를 따르는 무리들이 모여서 형성한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을 가리킵니다.
또한 다소는 길리기아 연합 속주의 변경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곳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시대부터 자유 도시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 시민이 되었으며, 문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였습니다. 이곳의 학교에서는 철학, 수사학 등을 가르쳤으며, 문화적으로나 교육 적으로 매우수준이 높은 도시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도시 다소가 바울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으로서 문화와 교육의 혜택을 받고 자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헬라어들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휩싸인 바울은 가이사랴로 보내졌다가 다시 그곳에서 배를 통해서 바울의 고향인 다소로 보내졌습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보내는 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다메섹이나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복음을 증거하며 예수님이 메시야 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을 것이라는 사설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카리스마 주석]
성도 된 우리들도 우리 주변 사람들의 형편을 알아주는 관심이 필요합니다.
잠언27장23절에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무엇이나 우리가 맡은 것 그것이 곧 양떼이며 소떼입니다. 양떼와 소떼를 맡은 사람은 그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농부의 밭에는 잡초가 우거질 시간이 없습니다. 틈틈이 뽑아 버리고 돌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항상 그 밭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농부가 열심히 농사지으면 농작물이 그 사람을 책임집니다. 양을 치는 사람이나 소를 치는 사람은 그 양떼나 소떼에게서 먹을 것을 책임집니다.
성도된 우리는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일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복음전도와 사회봉사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명령과 가르침에서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제와 자선과 사회봉사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마태복음25장35-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우리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가 주리고 있는가? 누가 목말라 하고 있는가? 누가 나그네 되어 외로워하고 있는가? 누가 벗었는가? 누가 병들었는가? 누가 옥에 갇혔는가?
형편을 알아주는 것은 따듯한 격려와 배려입니다.
환경이나 사람에 따라 쉽게 흔들리는 사람은 배려하는 마음을 지속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고 일을 준비하는 사람은 그 믿음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성경은 값없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베풀어 준 것이 무엇이든 예수님 앞에 설 때 보상받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한 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칭찬을 듣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유업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이웃의 형편이냐 어떻든 말든 배려심이 부족합니다. 주차를 해도 남을 배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공동주택에서도 이웃을 배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 에 대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배려(配慮), 그 것은 내가 하는 일을 자랑하거나 나타내지 않기에 상대방을 불쾌하거나 부담스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감동(感動)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형제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면 바울을 도와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우리 이웃들의 형편을 관심을 가지고 살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교회가 부흥되는 관심입니다.(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도 된 자들은 교회의 부흥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교회의 부흥이 숫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숫자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성도들의 지상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볼 때, 반드시 지상에 세워진 교회는 부흥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고 바라던 대로 교회가 부흥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관계없이 교회부흥은 하나님의 열망이요, 시대적 사명이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교회를 비롯하여 사도들이 세운 초대교회들이 부흥하는 모습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볼 때 ‘수가 많아지니라’ 는 귀절에만 주목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토대로 교회가 부흥을 거듭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숫자가 많아지게 된 요인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칩니다. 사실 숫자의 증가는 앞서의 몇 가지 요소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흥에 대한 참된 의미와 함께 이 땅의 교회가 부흥을 이룰 수 밖에 없는 요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먼저는 평안입니다.
평안을 잃어버린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는 그 성장의 에너지를 갈등하는데 소모하는데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데 진력을 다해야하는데 어떤 다른 일에 관심을 쏟아버린다면 공부에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장의 에너지를 갈등하는데 써버린다면 교회성장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많은 분쟁 가운데 휩싸인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어떤 요인 때문에 갈등하고 분열되고 마음 아파할 때 그 성도들은 전도할 틈이 없습니다. 전도해봐야 되지도 않습니다. 그저 서로 갈등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해버립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나 고집이 교회를 주장하려고 할 때 그 교회는 평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나 혈기나 감정이 앞장서게 될 때 그 교회는 평안을 상실하게 됩니다. 해서 교회가 평안한 길은 바로 우리가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를 경외함입니다.
교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주님의 몸이요, 신부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전부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비결은 주님을 경외함입니다. 교회가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다면 교회는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신부로서의 교회는 오직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최고로 여겨야 합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최고의 신앙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아무리 교회가 세상을 향한 구제와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곳을 교회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합니다.
교회는 가장 먼저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일환으로 세상을 향한 거룩한 삶을 실천하는 일을 합니다. 주님을 경외함이 없이 세상을 향한 거룩한 몸부림을 친다면 분명히 주님의 교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외라고 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교회, 주님을 높이는 교회, 우리 주님만 높이고 주님의 뜻만 우리가 이 땅에 이루어 나가게 힘쓰고 주님의 이름만 세상에 전하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께서 교회의 부흥을 더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위로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지금은 성령나님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각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가정도 성령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우리 교회에도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부모님에게도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필요하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위로하시면 내안의 탄식이 사라집니다. 성령님이 위로하시면 걱정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성령님은 나를 돕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령님이 위로하시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불평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됩니다.
바울이 변화여 복음을 전 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믿음과 준비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사울이 변화되어 바울이 되고 바울이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계속 헌신하며 사역해 나갈 때 교회는 평안해지고 신앙도 교회도 성장합니다. 바른 신앙으로 기도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전도했습니다. 말씀의 역사로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고 사도를 중심한 신앙이었습니다. 성령님께 순종하는 무명의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평안하여 가고 든든히 서 가며 부흘 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된 우리들도 어렵지만 교회 부흥에 대한 따듯한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1,함께 하는 것이 관심입니다.(28)-29)
2,형편을 알아주는 것이 관심입니다.(30)
3.교회가 부흥되는 관심입니다.(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