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27-31, 개정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교회력에 따라 이번주일은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우리교회는 교회력에 따라 지켜지는 절기는 대부분 지키지만/ 사순절은 지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들마다 다 다릅니다. 사순절은 지켜야 하는지 하지 않아도 되는지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합동) 제83회 총회 결의에 의하면 사순절 절기의 비성경적 이유를 발표 하였습니다.
9가지 중에 1-2 항목과 결론만 소개합니다.
1. 사순절은 부활절 전날 밤까지 40일간 이어지는 로마 교회가 정한 수난주간 기념행사이다. 이 40일간에 로마교회는 금식을 하고 금식을 권장하고 또 음식을 제한해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제를 하고 고기를 많이 먹은 후 고기 양을 점차 줄여가다가 고난 주간과 특히 금요일에는 완전히 고기를 금지하였다.
2. 사순절을 종교개혁은 완전히 폐지하였다. 특히 칼빈은 종교개혁은 사순절이 미신적으로 시행되고 공로를 세우며 금식이 하나님께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고 실행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하였다.(칼빈, 기독교강요 IV. 12)
결론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 사순절은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 경절로 받아서 될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합동에서 사순절을 교회경절로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교단마다 다르고 합동의 목회자들도 개 교회별로 다릅니다.
다만 목회자들이 사순절을 지키려면/ 사순절의 유래를 올바로 알고/ 지키되 천주교의 형식을 따르면 안 됩니다.
혹 사순절의 의미를 부여하여 지키는 교회가 간과해야 할 것은/ 종려주일 한주간만 아니라 /부활절 전날 까지 40일 동안 경건한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좋은 모습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순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40일 이라는 단어를 써서 교회 행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 희롱의 순간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심리적으로는 더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고난 주간에 우리들 대신 욕을 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그 은혜를 감사할 뿐 아니라 나도 예수님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살 각오와 결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1.군병들에 의해 희롱을 당하셨습니다.(27-30)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예수님께서 희롱을 당하신 이유를 이사야53장5-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온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고난, 질병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그가 우리 대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질병의 아픔은 예수님의 고통과 그의 아픔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는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시고,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저지른 악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십니다.
고난주간은 주님이 고난 받으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셔서 고난 받으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나와 상관없는 저 멀리 있는 고난이 아니라 나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실 뿐 아니라 희롱도 당하셨습니다.
1)옷을 벗기셨습니다.
의복은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타락 이후부터 등장하고 있으며, 인류의 문화 발전의 역사와 함께 발전되어 왔다. 그러므로 의복은 그 문화를 반영하고, 그 사람의 부와 지위를 반영한다.
일반적인 옷의 기능은 가리는 것(부끄러운 부분을 가림)이 첫 출발이었다(창 3:7). 거기에 덧붙여 추위에서 몸을 보호하는(덮는 것) 역할도 하였다(출 22:27; 룻 3:9).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다(에 8:15 참조).
이 옷은 중요한 재산 목록에 속한다. 가난하여 급할 때에는 옷을 전당잡기도 하였다(출 22:26; 신 24:12-13,17; 잠 20:16). 사람에게 바치는 예물 혹은 선물로도 옷이 자주 사용되었다(창 45:22; 삿 14:12; 삼상 18:4; 왕하 5:5; 에 6:8; 단 5:7).[한정건 교수]
본문에서는 군병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옷을 벗기셨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섬뜩한 유희가 종종 행해졌습니다. 봄 축제 때 그들은 한 죄수에게 왕의 옷을 입히고,그에게 조롱 섞인 거짓된 충성을 하고,하룻 밤 동안 그의 마지막 소원들을 모두 허락해 주고, 그런 다음 채찍질하여 죽여 버리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바로 이 ‘왕의 유희’를 했던 것 같습니다.
플루타르크에서 우리는 자기가 로마 사람이라고 말하는 한 남자를 조롱 하고,옷을 벗기고, 채찍질하여 죽여 버리는 해적들에 관한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바로 그 군대가 예수님께 행한 짓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에 대한 선례들이 있었습니다. [BST시리즈주석]
이처럼 군병들이 예수님께 왕처럼 옷을 입히고 조롱조로 경의를 표하려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급기야 벌거 벗기우는 모욕을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여수룬 성경주석]
수많은 군병들이 집합하여 있는 장소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옷 벗김의 수치심이야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옷 벗김의 수치가 우리나라 역사에도 나타납니다.
다음은 5.18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의 수기입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은 일차례 구타가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습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공수부대원의 수기에서도 옷을 벗기는 진압방식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사례 역시 공수부대원들이 옷의 심리적 효과를 의식하고 있으며, 옷을 벗김으로써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저항심을 없애고자 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위의 사례는 ‘옷 벗기는 행위’의 심리적 효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피해자에게는 수치심을, 목격자에게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는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옷 벗김을 당하시고 수치심을 받은 것은 곧 우리를 위함임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2)홍포를 입으셨습니다.
“‘홍포’는 장교들이 입는 간단한 모직 외투로서 오른쪽 어깨에서 줨쇠로 고정시켜 입었는데 예수님께서 업으신 옷은 혜롯 왕의 옷장에서 버려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홍포를 입힌 것은 붉은 색 옷은 왕들만 입었는데, 이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는 뜻에서 입힌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왔다는 자면 다윗 같이 자신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구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십자가 하나도 해결 못하는 자가 무슨 유대인의 왕이란 말인가 조롱하는 뜻입니다.
또한 자주색 옷이 부유층에게 선호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상징적 의미 이외에 실용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는 다른 염색의 경우 태양빛이 강한 중동지방에선 금방 빛이 바래버리는 것에 비해 페니키아산 자주색 천은 왠만 해서는 색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달려 나오신 분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앞으로 달려오시기를 바랍니다.
3)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옛날 왕들은 왕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머리에 왕관을 썻 습니다. 관은 두말할 것 없이 금빛 찬란한 보석 왕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머리위에 씌워진 관은 보석 왕관이 아니었습니다. 가시가 숭얼 숭얼 달려 가시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의 학명은 “크라이스트 쏜”(Christ thorn)이라고 부르는 가시나무였습니다. 히브리어 본명은 ”아타드“입니다. “활”이라는 뜻입니다. 가지가 활처럼 휘어 있는 나무입니다. 이 가지를 꺽어서 활처럼 휘면 왕관 같은 모양이 나옵니다. 그것을 사람의 머리에 씌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에는 커다란 가시들이 박혀 있습니다. 이 가시관을 사람 머리위에 씌우면 반드시 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용되던 동전에 보면 디베료 가이사(Tiberius Caesar)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면류관 위에는 빛나는 못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그것을 생각하여 주변에서 자라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예수님의 머리위에 씌웠습니다. 이 가시나무에 관해서는 야자나무나 아칸더스(aC'dnthus) 나무 또는 아랍의 나바(naha)나 나브카(nabka) 심지어 선인장 종류나 아카시아 종류(種類)의 나무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여하튼 가시나무와 가시덤불이 쉽게 자라는 팔레스타인에서 흔한 종류의 것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한편 그들이 가시관을 씌운 원래 목적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결국 그들은 고난의 왕관을 예수님께 씌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가시에 의해 찢어진 예수님의 머리에는 겸 붉은 핏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음에 분명합니다.“ [카리스마 주석]
예수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은 우리에게 주시는 엄숙한 경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워드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는 것이 옛날 로마군인 들만이 아닙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뜻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런 죄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종려주일에 그리고 내일부터 맞이하는 고난주간에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희롱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다시는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는 일이 없도록 삼가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4)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렸습니다.
갈대는 물에서 자라며 키가 크고 줄기에서 꽃이 피는 풀입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희랍어 단어인 “칼라모스”는 신약에서 갈대(마11:7,눅7:24 등) 측량하는 막대(계11:1 등) 갈대붓(요삼3:11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쥐어 주었습니다.
임금들은 금으로 만든 홀을 들었는데 그 홀은 뻗쳐서 지시하기도 하는 지시봉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팔레스타인 시궁창 같은데서 나는 갈대였습니다.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왕권(王願)을 풍자하면서 철저히 모독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하던 자들도 그를 찌른자들 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무릎을 꿇렸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왕의 모습을 갖추게 한 후에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들이 황제에게 보이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래를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말로 로마 황제에게는 “가이사 만세!”라는 뜻으로 왕에게 평안이 있기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이 말을 우리의 정서 맡게 의역하면 ‘유대인의 왕 만세!’, 또는 ‘폐하 만세!’라고 번역해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소꼽 장난하는 아이들처럼 예수님을 왕처럼 분장시켜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조롱한 것입니다.
6)침 뱉침을 당하고 갈대로 머리를 쳐 맞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왕에 대한 충성의 표로 입 맞추는 대신 가장 모욕적인 행동으로서 그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왕을 위하여 목숨 바쳐 싸우는 대신 갈대를 가지고 ‘몇 번이고’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는 더 갚이 그분의 피부 속으로 박혀 들어갔을 것이며 얼굴은 더욱 겸 붉게 물들어 갔을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치더라’ 는 말은 어쩌면 이것은 지상에서의 그리스도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접(待接)이었는지 모릅니다. 한편 마태는 조롱과 육체적 학대를 구별하여 먼저 조롱한 후에 학대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마 주석]
2,군병들에 의해 끌림을 당하셨습니다.(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군병들은 자신의 기분을 마음껏 풀었을 때에 희롱을 멈추었을 것입니다. 군병들은 왕으로 조롱하려고 입혔던 홍포를 벗기고 예수님의 웃을 다시 입혔습니다.
이 옷은 군병들이 제비뽑아 가진 옷(시22:18 ;요19:23)으로 겉옷과 속옷을 다 포함합니다. 대개는 벗기운 채로 십자가 형장까지 끌려갔으나 로마 병정들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 옷을 입혔고 그 일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 즉 제단에 드릴 제물처럼 끌려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귀중한 피로 자신들의 잔인한 분노를 충족시키는데 어떤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가능한 빨리 그를 재촉하면서 끌고 갔으리라는 사실을 쉽사리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 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그를 만물의 찌끼같이 취급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헬라어 ‘아페가곤’ 의 기본형 ‘아파고 ’는 소나 나귀를 끌고 가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눅13:15). 이 단어는 마치 소나 나귀처럼 취급받으며, 또한 모든 사람의 속죄양으로서 끌려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매우 적절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사53:7).
이제 예수님은 총독의 관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장소인 ‘골고다’ 로 끌려가게 되신 것입니다. 사형 집행 장소인 ‘골고다’는 성문 밖에 위치하였으며, 이는 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 진 밖에서 시행하라는 율법에 따른 것입니다(민15:35 ; 히13:11.12). 마27:27-31)
한편 사형 집행 장소까지 죄수는 자기 형틀을 지고 걸어야만 하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에는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 로마 군인들의 조롱을 받은 후 다시 옷이 입혀진 상태에서 다음에 자신이 못 박힘 당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신 것입니다.“ [옥스포드 원어사전]
당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유대 시간으로 '제 3시', 곧 오늘날의 오전 9시였으므로(막 15:25), 본문은 아직 오전 9시가 되기 전의 일이라 봅니다. 여하튼 유대 지도자들의 고소에서부터 로마 당국의 사형 언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판결은 밤새 급속히 진행되었고 급기야 아침에 십자가형을 집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유대인의 습관을 좆아 그 사형 집행은 성문 밖에서 이뤄졌는데(민15:35,36;행 7:58; 히13:11,12),이때 예수님은 관례를 따라 자신이 질 십자가를 친히 지고 형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형장으로의 이동은 원래 죄수 처형을 전담했던 부 총독이 맡아야 했으나 그 부 총독(Li-ctor)이 빌라도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신 말 탄 백부장이 형장 이동을 진두지휘(陳頭指揮)하였으며, 네 명의 군병들이(요 19:17,23)예수님의 신변 호위를 했고 그 뒤에 군병들이 따라 나섰다고 전합니다(Lange, The pulpit Commen-tary). [호크마 주석]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수치를 통해 나는 죽고 남을 살리는 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다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얼마든지 말씀만으로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방법으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이렇게 자기를 희생하는 방법을 택하신 것일까요? 세상에서 남을 돕고 살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오래 전 신문에 어려서부터 당뇨와 만성신부전을 앓아온 약혼녀에게 자신의 신장과 췌장을 기증한 사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돈 내고 다른 장기 기증자를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내 장기를 이식한 것은 이 사람이 참 사랑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은 내가 조금도 희생하지 않고 말로만 겉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내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고 얼마든지 내 생명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쉽고 편한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어려운 길,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길, 그러나 가장 큰 사랑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27장34절에서 쓸개 탄 포도주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쓸개 탄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제로서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가 워낙 고통이 심하니까 자비를 베푸는 의미에서 주는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마저 거부하며 우리를 위해 당하는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받으셨습니다. 이 길이 바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종려주일, 고난주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까지 가진 멸시와 천대 그리고 모욕과 희롱을 당하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1.군병들에 의해 희롱을 당하셨습니다.(27-30)
1)옷을 벗기셨습니다.
2)홍포를 입으셨습니다.
3)가시관을 쓰셨습니다.
4)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렸습니다.
5)무릎을 꿇렸습니다.
6)침 뱉침을 당하고 갈대로 머리를 쳐맞았습니다.
2,군병들에 의해 끌림을 당하셨습니다.(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