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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있어야 할 것(호4:1-2)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16|조회수0 목록 댓글 0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성도 된 우리에게는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있기 때문에 마음 아파할 때가 많습니다.

 

시인 엘리어트는 말하기를 “현대인의 심중에 없어야 할 것은 차고 넘치고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텅 텅 비어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 마음속에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차고 넘칠 때 사람은 공허를 느낀 나머지 몸부림치며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과 좋은 관계였지만 어떤 연유로 그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세상 살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는데 이런 바른 관계인 의가 없어지면 사는 것이 힘이 듭니다. 심리적이나 정신의학적으로 연구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지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속이 텅 빈 것 같으므로 부(富)를 축적해도, 명예를 가져도 재미가 없습니다.

 

더 많이 쌓으면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욕심을 내보지만 결국 만족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속에 마땅히 채워져야 할 하나님의 자리가 비워있으므로 늘 공허함이 생깁니다. 욕심쟁이들은 한강 물을 통째로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인가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우리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이외에도 성도에게는 있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때를 따라 우리를 도우십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기 위하여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땅을 차지하는 복을 주십니다(시 37:9).

 

호세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하나님만 섬겨야 했는데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세상을 향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방치해 두었다가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빠질 것이 분명하기에 심판에 처하게 해서라도 돌이키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를 통해 죄악을 지적하게 하십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살펴보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다 들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진실이 있어야 합니다.(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인생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이며 잘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갖고 즐기고 살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열매를 맺고 살았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은 진실에 대한 심판입니다. 요즈음 가짜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진실의 가치는 더욱 귀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진실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최고의 가치는 진실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설 수 없는 사람의 종류가 나옵니다.

 

첫째는 비웃는 사람, 즉 빈정대는 사람입니다.

괜히 남을 비웃기를 좋아하고 빈정대면서 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중상모략하면서 남을 이간질 시키는 사람입니다.

이사람 에게는 이 말을 저 사람에게는 저 말로 중상모략하면서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위선자라고 하였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훌륭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중인격자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넷째로 거짓말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불의하고 거짓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진실하지 못하면 머리 좋고 재주 있는 훌륭한 사람이 못됩니다. 망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잘됩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거짓, 위선적인, 사람 탄로 납니다.

 

우리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진실성"입니다.

 

성도 된 우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속이는 자가 되지 않도록 늘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행동하며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진실한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시작된 믿음은 머리에서가 아니라 내 가슴에서 머물 때 나의 삶에 생명을 줄 수가 있습니다.

머리에 머무는 지식은 나의 삶에 영향력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순종과 행함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과 가슴의 느낌을 나의 삶을 통하여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행하는 진실한 신앙이어야 한다.

 

진실한 사람은 작은 일에도 충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작은 죄라 도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신앙이 변치 않으며 '나까지''나부터'라고 하는 사상과 믿음을 가지고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듯 진실 한 삶을 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사는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진실한 사람이 되어 정직하게 살아가고, 정의의 사람이 되어 의롭게 살아가고, 죄악과 구별되어 정결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직과 거짓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숨긴 채 그럴듯한 말로 타인을 현혹 시키면서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진실만큼 오래토록 당신을 지켜 주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 진실한 사람이라고 실수가 없다거나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해도 진실하고 솔직한 사람은 죄를 그대로 품고 있을 수가 없어서 토설하고야 맙니다.

 

시편 51편 6절에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죄가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 앞에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진실성이 없는 모든 제사나 기도나 설교나 찬송은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남 보기에 큰 죄인이라도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은 용서받을 길이 있고 구원받을 가능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외식하는 사람은 회개할 수도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앞에 진실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내 양심 앞에 늘 진실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파손한 뼈와 같아서 신앙생활에 파국이 오고 맙니다. 진실 되게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 없다 누구 자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진리 앞에 진실한 사람이 복 되고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진실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진실 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2.인애가 있어야 합니다.(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성경에 아주 좋은 용어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애(仁愛)라는 용어는 매우 함축적인 의미의 좋은 용어입니다. 한자말로는 어질 인, 사랑 애 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인애 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그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칭으로는 인애를 베푸는 자, 인애가 있는 자를 헤시드 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할 때 헤시드 라고 많이 불렀습니다.

 

두란노 사전에 의하면 “인애(Kindness, Mercy, Compassion)란

 

어진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말한다. 인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chesed)이다. 그러나 ‘헤세드’는 개역성경에서 ‘자비’(대상 16:41), ‘인자’(창 19:19), ‘은혜’(창 20:13) ‘긍휼’(마 9:13) 등의 여러 단어로 번역되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또 인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는데, 특별히 이 단어가 하나님에 관해 사용될 때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언약에 기초한 불변적인 사랑’(신 7:12; 미 7:20 등)을 말한다.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바로 그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기다리시는 인애의 하나님이시다(호 2:14-23).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시며 그분은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죄 지은 인간들에 대하여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회개를 촉구하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신 7:9; 욜 2:13; 욘 4:2; 미 7:18). 이 단어가 인간에게 사용될 때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결과 헌신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호 6:4; 12:6). 또한 인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사이에서 행해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며 의무이다(창 47:29; 룻 3:10; 잠 31:26).“라 하였습니다.

 

또한 그랜드 주석에 의하면

 

인애(혜세드)는 단순한 '긍흘'이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말한다. 즉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서 이 에 대 한 반응으로 하나님 을 사랑(경 배)하고(렘2:2) 그 이웃을 피차 사랑하는 모습이 '인애'이다. 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애라는 말은 내가 사랑하지 아니하여도 될 자를 사랑하는 것이 인애입니다.

 

한편 헤세드는 선함과 친절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헤세드는 ① 남에게 호의와 은택을 베푸는 친절(삼상 20:15), ② 낮고 비천한 자, 궁핍한 자 그리고 불쌍한 자에게 베푸는 친절과 자비(잠언 20:28), ③ 하나님에 대한 사랑(렘 2:2, 호 6:4)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헤세드는 하나님이 피조물의 필요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님이 베푸는 친절과 인자이기 때문에 ① 적들과 불화로부터 구해주는 인자하심(창 19:19), ② 죄로부터 구속해주는 인자하심(미 7:20), ③ 하나님의 친절(민 14:18). ④ 친절의 행위들과 자비들(창 32:11) 등이 있습니다.

 

당시 호세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인애를 받은 백성들이라면 서로 간에 긍흉과 자비로 행함으로써 그분께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인애가 없었습니다.

 

룻기3장10절에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은 보아스에게서 인애(仁愛)를 베푸는 여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인애'(헤세드)란 '후대하는 것'(삼하16:17), '긍휼'(느1:5), '은혜'(시107:12)란 뜻입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관계에서 생성되는데, 언약을 파괴한 사람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자비를 가리킵니다(출 34 : 6),

 

실제로 언약은 두 당사자를 '생명과 죽음'의 끈으로 묶기 때문에, 어느 한 편이 계약의 끈을 자르면 반드시 죽음을 초래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땅히'피를 흘려야'함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결정에 의해 목숨을 건지시는 사랑 ! 이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그러나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여성은 결코 사랑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에겐 '이에는 이(齒),눈에는 눈(目)'이라는 단순 대응만 있을 뿐,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마19: 19)는 고차원적 천국윤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당한 자에게 돈을 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돈뿐만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외로운 시어머니에게 몸과 마음 그리고 사랑까지 바쳤던 룻의 인품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보고 싶은 여자'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인애가 필요합니다.

 

‘인애는 의의 열매’입니다. 의로운 자가 인애로 사는 법입니다. 어질게 사랑하며 사는 것은 의로운 자의 행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모순 가운데 빠져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입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와 감사천금. 절기 헌금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신앙 생활이 바르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함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외에는 그 어떤 예배도 받지 않으십니다(요4:24).

 

호세아 선지자도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한 것을 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아니라 다름 아닌 인애와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데 있다고 말입니다(호6:6).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 사랑이 변하여 바알에게 가 버렸습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헤세드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인애입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사람의 본성 속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민족이나 미개한 식인종이라 하더라도 종교를 가지고 있고, 신을 찾는 것은 공통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사람 이상의 영원한 무엇을 붙잡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고, 그 지식을 생활에 적용하는 일은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특히 성경이 말하는 교리적인 지식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믿는가?"하는 교리적인 지식이 없이 믿는 일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믿으면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적인 지식을 생활에 적용하지 않고 삶의 변화가 없다면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신앙보다 더 나쁘고 위험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만 하고, 그 지식의 말씀에 따라 행하지도 않고, 오히려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헌신조차도 막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단순한 교리적인 지식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 교리적인 지식에 따라 행동을 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 10:22)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지금 우리 각 사람이 새롭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신구약 성경 66권속에 모두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주도권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 그분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곧 삶속에서 우리의 인격으로,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며 그 위에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장 합당한 말씀을 가지고 위로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눈물의 선지자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호 4:6)라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도 망하고 그 지식을 지키지 않아도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무식함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며 바른 지식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여 하나님 앞에 무지함으로 범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면 가치가 인생이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많아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엡4:13-14)

성도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으로 자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권세와 능력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다윗의 전 생애를 통해서 자식들에게 남길 수 있는 최대의 유산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교훈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아비의 하나님을 너도 알기를 원한다. 여기에서 '알라'라는 말은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의 알라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는 '야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경험적 지식을 뜻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요한 자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깨닫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또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풍성할 때(사33:6) 우리 삶은 풍성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의 부요함을 우리 삶에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인애하며 더욱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을 알아 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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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애가 있어야 합니다.(1)

3.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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