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2022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죄인의 산 소망이십니다.
베드로전서1장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부활의 소망, 영생의 희망, 천국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고 예배드리는 우리는 이미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교리는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고백하기를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흔히 부활장이라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성경학자들이 고전 15장을 높이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고전 15장이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이야기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확증으로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고전15:58)
첫째는 힘쓰며 살고, 둘째는 힘써 살되 세상 을 힘쓰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을 힘쓰며 살아갑니다. 그것도 주의 일을 힘쓰되 죽기까지 힘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특별한 신앙이며, 따라서 이 신앙이 바로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고 다시 산다는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 신앙은 생명 신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부활절은 아주 의미 있는 날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 믿음이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환상이 아니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또한 그 부활의 능력은 예수님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주를 믿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약속되어진 복의 사건입니다.
사람은 원래 절망적인 존재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일은 오늘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아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존재로 예수님은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사람의 가슴속에 영원히 소망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처럼 성경을 믿은 우리에게도 다시 사는 부활을 주십니다. 부활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에 대해 이성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헬라어로 부활을 아나스타시스(ana,stasij)라고 한다. 그 뜻은 앞으로 다시는 죽지 않고 썩지 않을 영체(spiritual body)로 다시 살아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부활한 후부터는 썩지도 않으며 영원히 사멸되지 않는 조직체로 구성되어 죽는 일이 영원히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롬 6:9, 고전 15:42-54).
구약에서는 부활에 대한 전문적 용어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이사야서 26장 19절에서 부활에 대한 용어를 찾아 볼 수 있는데 히브리어로 동사 카야(ה)는 살다, 쿰(םוק)은 일어나다 그리고 키츠(ץיק)는 깨우다는 의미로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는 부활에 대한 많은 용어를 발견할 수 없으며 다만 부활적 사상을 지닌 용어들은 다음 성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욥 14:13-15, 19:25-29, 시 16:10, 17:15, 49:15, 73:24, 단 12:2-3, 호 6:2).
1.나를 기억하옵소서(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욥기14장 오늘 본문에서 욥은 현재의 고난에서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동경함과 동시에 내세(來世)에 대한 자신의 소망과 믿음을 피력합니다(13-15).
“구약 가운데는 죽음을 '잔다'는 말로 표현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대하26:23 ; 32:33). 이는 죽음을 보다 긴 잠으로 생각한 것이며 반드시 깨어날 때가 있음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 부활을 가리키는 표현도 구약 가운데는 등장하는데(사26:19 ; 겔37:. 13) 그곳에는 의인 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부활이 임함이 묘사되어 있습니다(단 12 : 2). 이처럼 구약 성경은 구약 시대 많은 경건한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롬4:17).
그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라가 잉태할 수 없을 때 독자 이삭을 주셨던 하나님이시기에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다시 살려주시 리라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것입니다(히11:18-19). 또한 성군 다욋은 '주께서 우리를 다시 이끌어 을리시리이다'(시71:20)라고 믿었으며, 선지자 이사야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사26:19)라고 확신했었습니다.
이렇듯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는 기독교의 부활 진리는 신약 시 대 에서 야 비로소 생겨 난 것이 아니 라 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분명히 부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신앙에 따라 그들은 '좋은 부활을 얻고자'(히 11 : 35) 그 삶을 하나님께 헌신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 시대부터 세상 끝 날에 있을 모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계시하셨습니다.“ [그랜드 주석]
분문13절은 욥의 기도로서 욥은 당시 거의 삶을 체념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죽음은 인생에 대한 냉엄한 차단이요, 삶의 끝장 이며 무엇을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참담한 죽음 앞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죽음 저편에 소망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나무는 베어도 움이 트고 자라지만, 사람은 한번 죽으면 아주 소멸하므로 나무보다 못한 존재라고 토로합니다. 그러나 욥은 과거 하나님과 교통 한 일을 회상하면서 죽음 이후의 행복이 현재의 고난보다 훨씬 나음을 믿고 음부에 자신을 감추어 달라고 말합니다.
“욥은 여기서 자신이 숨을 장소를 ‘음부’ 라고 말합니다.
‘음부’ 에 해당하는 ‘쉐올’ 은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가는 처소로 나타납니다(창37:35 ; 시31:17). 히브리인들 및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이 세상을 하늘과 땅, 그리고 지하 세계인 스올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음부는 혹암의 장소, 적막한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본절에서 욥이 이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음부에 감추어 달라는 것은 무덤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표현이며,다른 말로 하면 생명을 거두어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자신 이 지금 당하는 재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본문은 당시 욥이 죽음만이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이는 본절 하반절에 나오는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란 표현과 연관 지워 본절 상반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에서 ‘기한’ 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음부에 두는 기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기억하옵소서’ 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난이 지나간 이후 자신을 다시 부활시켜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욥이 육신의 부활을 믿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욥이 육체적 부활을 믿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당시 욥은 영혼은 영존하는 것으로 믿었으나 육체는 한번 소멸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으로 이해하였던 혼적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따라서 욥이 부활을 믿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 따릅니다.
그렇다면 본절의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올 정하시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앞선 표현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와 뒤에 이어지는 14절과의 관련하에서 가정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욥은 지금의 견딜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음부에 던져서라도 고난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한 후 하나님의 진노가 쉴 때까지 자신을 그 음부에 숨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살아날 어떤 시점을 정하여 달라는 의미로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여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욥이 부활 신앙을 믿었다기보다 이를 가정한 표현으로 봐야 합니다.[옥스퍼드 원어사전]
실로 참 신앙인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이 현세만을 보는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내세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결코 이 땅의 삶에 심취하거나 이 땅에서의 행복과 만족만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비록 그 발은 이 땅에 머물러 있지만 그 눈은 항상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 영영한 내세인 그날을 사모하게 됩니다. 정녕 우리가 이러한 이중적인 안목을 가질 때 결코 자신의 만족을 위해 허탄한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며, 다가오는 내세 곧 친국을 준비하며 죄악과 불법이 기승을 부리는 이 땅에서조차도 경건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주일에 우리도 부활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남은 생애를 지혜롭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3절이 부활에 대한 상상을 이야기한 말씀이라면 14절은 만일 부활만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현재의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기다리는 삶입니다.
신앙이란 기다리는 것이고, 신앙인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종달새 알에서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더딘 것 같지만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건조하느라 120년을 보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한 당시 사람들은 노아를 조롱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기다리지 못해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성급함은 지금까지 세계적인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의 후손이 끊임없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400년 전에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한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객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한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오래 기다릴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 없이 기다리면, 그냥 기다리면 미쳐버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실패할 때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할 때입니다. 기다림을 포기해버리면, 불신앙의 행동이 나옵니다. 변절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인생이 더 꼬입니다.
삶의 모든 실패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다림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을 포기한 순간부터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시도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실패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기다림의 실패입니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오면, 버텨내기 힘듭니다.
삶의 압박이 심해지고 고난이 더 깊어지면, 많은 사람들은 ‘그만두고 싶다’, ‘끝내고 싶다.’, ‘이제 끝이야.’, ‘더 이상 갈 곳이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접어버립니다.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기다릴 수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다림에서 포기하는 이유는 조급함 때문입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고난에서 빨리 고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고통이 심해지면, 1분 1초가 힘들어서 고난이 빨리 끝나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이 세상에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리다가 미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이 실력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영력(靈力)입니다. 그리고 기다리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좋은 것이 앞에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리지 못한다면, 앞에 있는 약속된 좋은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현대학자들은 점점 기다림이 없어지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제프 딕슨은 <우리 시대의 역설>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 책에서 현대를 이렇게 꼬집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낮아졌습니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좁아졌습니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가난하여졌습니다. 모든 것이 더 편리하여졌지만 시간은 부족합니다. 학력은 많아졌지만 상식이 부족하여졌습니다. 달나라까지 길이 생겼지만 이웃집과의 길은 막혀 있습니다. 외계를 정복하였지만 자기 마음은 정복하지 못 하였습니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랍니다.”
기다림이 없는 성질 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한 결 같이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2장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은 메시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시므온은 세상적인 유익과 쾌락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은 부귀와 명예와 출세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것은 만민을 향한 주님의 구원인 것. 기다림 끝에 시므온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고 안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종말에 관한 비유 가운데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신랑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잠든 사람은 신랑의 잔치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말합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기다리며 일한 충성된 일꾼은 복을 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못하며 일하지 않은 악한 종은 책망을 받고 쫓겨났습니다. 충성된 종은 열심히 일하면서 주인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상대일 때가 있습니다. 데이트할 때 보면. 만날 가치가 없는 상대라면 기다리지 않고 가버립니다. 가치 있는 상대라면 한 시간이라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기쁘고 보람이 있습니다.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은 낮 시간에 설렁탕 한 그릇을 먹으려고 30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30분을 기다려 10분 만에 먹고 가지만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간절한 소망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은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일입니다.
“본절에서 욥은 만일 자신이 부활하고 회복될 것이라면 이를 인내 가운데 기다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앞선 본문에서 전제한 것처럼 당시 욥의 생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자신이 지금 아무런 소망도 없이 심각한 고난을 당함으로 더 이상의 어떤 것도 견디기 힘든 위경에 처해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옥스퍼드 원어사전]
욥이 기다린 것처럼 부활주일에 우리도 부활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남은 생애를 기다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대답 하겠나이다.(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이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하나님께서 오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고 우리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 초청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 짐을 여기 풀어 놓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럴 때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모여서 예배하고, 성례전을 집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는 종교생활 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형태로 모이는 것입니다.
본문3절에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욥은 그 어떤 경우일지라도 자신은 반드시 응답하겠다는 욥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소환을 바라는 욥의 강한 의지가 잘 드러납니다.(옥수포드 원어사전)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음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선택하신 히브리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명’ 이라고 합니다. 모든 성경의 위인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양을 치다가, 땅을 일구다가, 고기를 잡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명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로 그의 뜻을 이루는사명자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카리스 주석)
사명자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소명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자체가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소명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인으로, 어떤 사람은 과학자로, 어떤 사람은 예술가로, 또 어떤 사람은 전업 주부로도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부름을 받은 소명을 따라, 그 일을 최선을 다하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소명자로서 살면 됩니다.
성도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인정한 그 분야의 적합한 것이라는 소명감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재능과 최선을 다하여 사회와 자신에게 충실한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명이란 생각으로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이끈다면 당신은 어떤 어려움도 물리칠 수 있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자신의 역활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 감당하는 일은 우리의 땀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의 시간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해를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사명의 길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충성스런 일꾼들, 헌신된 일꾼들은 그러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강한 용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들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인생의 기쁨은 자신의 사명을 알고 살 때에 체험합니다. 한평생을 살아도 사명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큰 기쁨을 모릅니다. 엄격히 말해서 자신의 사명을 알지 못하면 삶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사명을 아는 날이 비로소 자신이 태어난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자신이 사명을 따라 산다는 믿음이 있다면 없어도 괴로 와도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명이 없는 삶이란 삶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에게는 더욱 큰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 사명을 따라 헌신하심으로 가정과 사회 더 나아가 이 민족을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15절에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여기서 이 부르섬이 욥의 생전에 있을 것인지 죽음 이후에 있을 것인지 또는 죽음 이후라고 해도 스올에서의 상황(암9:2) 인지 부활 이후의 상황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뉩니다.
몇몇 학지들은 하나님이 부활의 때에 욥을 음부에서 부활케 하시기 위해 부르실 것이고 욥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소생할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M. Henry, J. H. Kroeze, S. ]. Lawson).
우리도 부르심에 대답하며 부활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나를 기억하옵소서
2.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3.대답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