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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라(유다서 1:17~25절)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17|조회수0 목록 댓글 0

공동서신은 끊임없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들, 거짓 교사들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유다서에는 4절에서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 사람들은 옛적부터 심판받기로 작정 된 자들로서 경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8절은 꿈꾸는 자들입니다. 소위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삶은 형편없습니다. 육체를 더럽히며 영광을 비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10절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방하고 이성없는 짐승처럼 본능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16절은 원망하며 불평하고 정욕대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입으로 자랑하고 이익을 위하여 아첨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탈탈 털어보면 모든 이런 행동의 배후는 탐욕이며 정욕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성품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형제 우애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들의 삶은 이런 믿음의 삶과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미리 말씀한 것처럼 이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삶을 살아가면서 절제하고 나누며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땅에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 분열을 일으켜 반사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가짜 메시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까? 모두 탐욕 때문입니다. 신적 성품이 가는 길은 화평의 길이며 절제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절제가 필요 없다고 미혹하는 것입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신을 세우고 지키며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특히 세 번 반복되는 긍휼에 관한 말씀은 성도가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봅니다.

2. 성령은 없는 자니라(17~19절)

앞서 심판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는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당의 길을 따르는 자들을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17~18절은 베드로후서 3:2~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그럽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권면의 말을 하려 하므로 주의를 깊게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말세’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마지막 날에’입니다. 이것이 유 1:18 절에서는 ‘마지막 때에’로 벧전 1:5에서도 ‘마지막 때에’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경에서 말세는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의 모든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말세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다 말세라는 말입니다. 말세지말(末歲之末)이라는 말은 언어유희에 불과한 말입니다. 말세 중의 말세라는 말은 성경에서 말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를 받는 성도들이 살았던 시대도 말세이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말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도 말세입니다. 그러니까 시대를 달리하면서 모든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한다.”라는 말입니다. 여기 조롱하는 자들이 조롱한다는 말은 ‘엠파이그모네 엠마이크타이’(ejmpaigmonh ejmpai'ktai)로 두 단어는 모두 ‘아무렇게나 취급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엠파이조’(ejmpaivzw)에서 온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조롱하는 자들이 조롱한다는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단들의 조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기다리며 신적 성품을 훈련하고 절제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얼마나 조롱하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단들, 거짓 교사들은 마지막에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또 책임질 능력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미혹되는 자들을 철저하게 조롱할 뿐입니다. 이단 들이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재림, 즉 종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여기에서 덧붙여 다른 설명을 했지만, 유다는 한 마디로 이런 자들은 “성령은 없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성령은 없는 이런 자들의 특징은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과 육에 속해 방탕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주의해서 볼 것은 이들은 성도들을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로 나눔으로써 성도들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스스로 영에 속하였다고 자부하는 이 단자들이 오히려 ‘육에 속한 자’요 ‘성령은 없는 자’라고 공박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면서 세상의 이익을 취하며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없는 자라는 말은 성령의 열매가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 꿈꾸는 자들의 특징적인 삶의 열매가 16절 18절에 나오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그럽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함께 정리해 보면 꿈꾸는 자들, 은사 주의자들, 뭔가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삶의 열매가 원망과 불평과 분당과 분쟁과 정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믿음의 사람이 가는 길이 화평과 사랑과 긍휼이라는 점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삶의 열매가 혹시 원망과 불평과 분당과 분쟁과 자랑과 시기 질투로 충만하다면 그는 올바른 믿음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의 삶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아는 법입니다. 지금 내가 맺고 있는 열매가 내 믿음의 현주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자신을 지키라(20, 21절)

유다는 성령 없는 자들, 즉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당의 길을 따르며 당을 짓고 육에 속한 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권면하는 부분입니다(20. 21절). 성도가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또한 영지주의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가? 우리는 유다가 제시하는 방법을 주목하면서 유혹 많은 세상에서 자신을 잘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첫째,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20절).

20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그럽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도 잘못된 성경 해석학의 오류에 관해서 말씀한 바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성도의 싸움은 진리에 대한, 말씀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건축하다’(에포이코도메오)라는 말은 주로 사도 바울에 의해 사용되던 말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교회를 세움’에 관련하여 많이 사용했습니다. 고전 3:10~17절이나 엡 2:20~22절에는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한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고전 3:10절 이하에는 교회를 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2:20절 이하는 아직도 건축 중인 교회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교회는 건축 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일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세워져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믿음은 3절에서 말한 것처럼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둘째, 성령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방언 기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하라는 말입니다(롬 8:26; 엡 6:18). 사실 이 표현은 기도하라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앞서 ‘성령은 없는 자’와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사용된 표현입니다. 성령은 없는 자들은 탐욕스럽고 방탕합니다. 권위를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도 부인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기도하지 않는 성도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 즉 주님 말씀의 기준을 따라서 구하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항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21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그럽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성도가 자신을 지키는 가장 좋은 길이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비결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요 14:23 절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그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21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비록 구원을 얻기는 했으나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그때 나타날 그리스도의 긍휼을 소망해야 합니다. 특히 기다리라는 말은 유다의 미래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경건치 않은 자들은 심판하시지만, 그의 백성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심으로 영생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성도들 마지막 때에 있을 긍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지금 현재 이단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이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밖으로는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온갖 미혹의 덫을 놓고 기다립니다. 교회 안에는 가라지들이 활개를 치고, 거짓 교사들이 잘못된 복음을 가지고 성도를 넘어지게 하려고 가진 애를 씁니다. 이들의 모든 행동은 성령은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의 화신인 가인의 길, 탐욕의 화신인 발람의 갈, 권위에 도전했던 고라당의 길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로부터 성도가 자신을 지키는 것은 기본에 충실한 것 이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일이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 우리는 진리의 복음, 생명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무 쉽게 작은 일에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우리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건축해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4. 긍휼히 여기라.

그러나 자신을 지키는 일에는 단호하고 엄격하되 다른 연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풀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은 아마 그런 영지주의자들의 미혹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올바르게 세우는 일은 우리가 감당할 중요한 일입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심하는 사람들보다 심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 가운데 있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이단에 빠지는 것은 불 가운데 자신을 던지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자신을 지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또 어떤 자들은 그 육체를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더럽힌 옷'은 그들의 방탕한 생활의 결과로 오염된 죄악의 실상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죄악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그것들을 미워하며 두려워하되 그 사람은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입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은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며 지옥의 형벌을 피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애쓰라는 의미입니다.

즉 나에 대해서는 엄격하되 연약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24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성도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성도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세우며 굳게 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의지를 드리고 마음을 드려 순종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와 우리의 의지가 드려지는 것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함께 존재해야 하는 성도의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힘써 싸워야할 것을 잘 분별하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영생에 이르도록 인내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싸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음 위에 세우고 지켜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긍휼을 기다리는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세워가는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시대에 나는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원망과 불평과 문당과 분쟁과 자랑과 교만으로 공동체를 힘들게 하고 분열시키고 시기와 질투로 삶을 망가트려가고 있다면 그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자신을 믿음에 세우고 지키며 긍휼히 여기는 삶으로 드려지는 연말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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