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일 우리는 유다서를 묵상하게 됩니다. 유다서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힘써 싸우라는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사워야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시대에 우리가 힘써 싸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것에 핵심이 있습니다.
유다서를 포함한 공동 서신들의 특징은 전부가 생활을 강조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공동서신이란 특정한 교회나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수많은 교회에 보낸 서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서의 저자는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야고보는 야고보서의 저자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고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의 막냇동생이라는 것입니다. 이 유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별로 없으나 그는 예수의 막냇동생(마 13:55)으로 예수가 살아 계실 때는 그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지 않았으나(요 7:3~8) 부활 후에 믿고 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설립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행 1:14; 고전 9:5).
유다서의 기록 연대는 학자마다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에 정확히 확정하기 어렵지만, 예수의 동생인 유다의 저작이라는 사실로 볼 때 상당한 근사치의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유다서가 1세기 후반에 일어난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한 경계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과 예루살렘 함락(A.D.70년)에 대한 예언적 형태의 기록이 없다는 것으로 미루어 A.D.70년 이후에 본서가 기록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유다가 A.D. 70~80년 사이에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저작 연대를 A.D.70~80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유다서의 기록 장소는 유다가 주로 활동하였던 예루살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다서에서는 수신자들이 어느 지역에 사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서의 내용을 보면 이들은 영지주의 이단의 공격으로 인하여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을 볼 때 본래 유다는 수신자들에게 ‘일반으로 얻은 구원’, 즉 기독교 구원론에 대한 교리적인 서신을 띄우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어떤 이유로 인하여 본래의 계획을 변경하고 영지주의 이단과 맞서 믿음의 도를 지키라는 이러한 전투적인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1.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1절)
우선 우리는 1~2절의 인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는 귀신이 들렸다고 잡으러 왔던 형제들입니다. 요 7:3~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동생들의 눈에 예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에 이름을 내기 위해서 뭔가 초자연적인 일을 하면서 열심을 내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 이름을 내려면 어디로 가라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는 수준이 낮아서 형님이 하시는 일이 잘 먹히지 않으니 기왕이면 큰물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에 사도 요한이 뭐라고 해설을 붙였습니까?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그럽니다. 아마 본문의 정황으로 볼 때 형제들은 처음에 귀신 들렸다고 잡으러 오는 수준은 넘어선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본질이나 메시아 되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 이름을 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낮아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입니까? 전형적인 바벨 정신의 영향을 받아서 높아지고 이름을 내기를 원하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믿음이 영접이며 동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주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을 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예수를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랬던 그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모두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와 유다서의 저자인 유다가 모두 예수의 동생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노예’라는 의미를 가진 ‘둘로스’입니다. 이 말은 ‘오직 한 주인에게만 절대적인 복종을 하는 자’(마 6:24)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함한 모든 소유가 주인에게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막냇동생 유다가 자신을 ‘종’이라 부른 것은 자신의 신분이 비천함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자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동생이 야고보도 약 1:1에서 같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는 명칭은 당시 교회 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유다는 자신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인 야고보의 형제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마 13:55과 막 6:3에 언급된 주의 형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만, 형제를 전도하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형제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진정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앞에서 철저한 겸손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저는 야고보와 유다의 신앙고백 속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형제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자신을 종이라고 말하는 이 고백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합니까?
그런데요? 예수님의 막냇동생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먼저 말한 후에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말은 모든 성도의 거룩한 소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목사, 선교사만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중생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주권적인 선택의 은총으로 아브라함을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로부터 부르셨습니다(창 12:1). 또한 애굽의 압제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 주권적인 선택의 은총으로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르심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인’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특별한 소명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요? 그 부르심을 입은 자에 대한 설명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라는 말입니다. 사랑받는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즉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며 그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닫고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지키심을 입은’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곧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이 지키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를 위협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들로부터 보호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신다는 성도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감수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은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고, 사랑을 받고, 보호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신분이며 현재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갖 이단들의 발호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들에게 주시는 위로요 확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요 사랑받는 자녀이며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2. 힘써 싸우라는 편지(3~10절)
유다는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말합니다. 상황이 급박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우리의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라는 말을 직역하면 ‘우리의 공동적 구원’이란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통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전혀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단순히 택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구원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유다는 본래 체계 있는 구원론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서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편지의 내용을 바꾸게 된 것입니까? 4절에서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가만히 들어온 사람은 꿈꾸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주범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권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라는 말의 ’하기오스‘는 히브리어 ‘카도쉬’를 번역한 말로서 구약에서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습니다.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단번에’(하팍스)라는 말은 ‘한 번으로 영원히’(once for all)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라는 말입니다. 즉 유다는 복음의 불변성을 강조함으로 복음을 변질시켜 거짓 진리를 전하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 이 편지의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자라고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정에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힘써 싸우는 것은 성도의 숙명입니다. 힘써 싸우라는 말의 헬라어 ‘에파고니제스다이’(ejpagwnivzesqai)는 ‘강하게 싸우다’를 의미하는 ‘아고니제스마이’(ajgwnivzomai) 의 현재형으로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성도들의 영적 투쟁이 항상 지속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도가 싸우는 싸움에는 비무장지대가 없습니다. 휴전도 없습니다. 주님 다시 오셔야 끝나는 전쟁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싸움도 치열한데 교회 안의 적그리스도의 세력들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매일 힘써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유다는 “너희가 본래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편지를 쓴다”고 말합니다. 앎이 참된 앎이 되는 것은 그것이 생활이 될 때입니다.
3. 힘써 싸워야 할 것들
자,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가 깨어서 조심해야 할 미혹하는 자들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이들은 4절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입니다. 이 말은 ‘안에’와 ‘가라앉다’의 합성어로 비밀스럽게 몰래 들어온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정체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4절입니다. 이들은 옛적부터 심판을 받기로 작정 되었다고 말씀하면서 첫째 4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이단의 특징 가운데 극단적인 방임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또 다른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가현설 주의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쓰게 된 편지가 바로 유다서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8절에서 꿈꾸는 자들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들은 말씀이 아닌 다른 계시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8절에서 꿈꾸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꿈꾸는 이 사람들은 말씀의 계시보다 무엇을 더 신뢰한다는 의미입니까? 직통 계시, 즉 꿈꾸는 것과 관련된 직접적인 계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권위를 업신여기며 육체를 더럽힙니다. 여기서 육체를 더럽힌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과 연결된 것입니다.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갔다는 말은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지으시고 거룩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직통 계시, 즉 꿈꾸는 자들은 그것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은 9절이 10절을 설명하기 위한 예화입니다. 9~10절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럽니다. 9절은 다소 생소해 보입니다. 이 구절은 위경인 ‘모세의 승천기’(Assumption of Moses) 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8절에서 ‘경건치 않은 자’들의 죄의 하나로 언급된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죄가 그들의 교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 ‘모세의 승천기’에 보면 모세가 죽자 하나님의 명을 받은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치우려 할 때 마귀가 나타나 시체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면서 미가엘과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때 천사장 미가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았으므로 그것을 훼방하는 마귀를 물리치고 심판할 능력이 있었으나 심판 및 보응의 일체를 자신이 행사치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만 논하면서 자신을 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0절에 거짓 교사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하는 것으로 멸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애찬에 참여하고 교제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한 질타가 쏟아지는 구절들을 보십시오. ‘두려움이 없이’, ‘뻔뻔스럽게’ 경건과 사랑으로 가득해야 할 애찬에 이단자들이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참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 들은 애찬의 암초입니다. 마치 물속의 암초가 선박을 파손시키듯,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형제애를 손상시킨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들은 12절에서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 목자의 사명이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는 데 있음에도 거짓 선생들은 양떼 들에 대하여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거짓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입니다. 농사철에 비를 간절히 기다리는 농부들에게 구름은 너무나 반가운 손님과 같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왔으나 정작 기다리는 비는 내려주지 않고 지나가 버린다면 농부들의 실망은 여간 크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 선생들과 물 없는 구름과 같아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것처럼 기대를 부풀게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므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공급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실망시킬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마치 바람에 불려가는 구름처럼 불안정한 자들입니다. 한 시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을 뿐 아니라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이 하나님 진노의 심판을 받올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갖지 못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죽고 또 죽는다는 말은 이들이 당할 심판을 말해 줍니다. 더 나아가 유다는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라고 합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온갖 오물들을 거품과 함께 물결에 담아 해변으로 쏟아내듯이 이 단자들이 말과 행동으로 성도들을 유혹하지만,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악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합니다. 궤도를 이탈하여 유리하는 별들을 의미합니다. 잠깐 빛을 발하지만, 곧 그 빛을 잃을 잃어버리는 별똥별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영원한 흑암에 묻혀버리고 말 것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지금은 빛을 발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들은 이미 진리의 궤도에서 떠난 자들이기 때문에 곧 빛을 앓고 그들을 위해 예비 된 영원한 흑암과 사망의 길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11절에서 세 가지 길로 소개합니다.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당의 길입니다. 성도가 싸워야 하고 성도가 본받지 말아야 할 삶의 세 가지 유형인 셈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가인처럼 시기 질투에 눈이 멀어 살인을 불사하는 어리석은 자의 길을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돌아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예배를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발람의 길은 탐욕의 길입니다. 탐욕에 이끌려 부끄러움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어그러진 길’(플라네)이란 의와 진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내 던진 거짓 교사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라당의 길은 광야에서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함께 당을 짓고 이스라엘 회중 250명을 선동하여 모세와 아론의 지도권에 대해 반역하였다가 멸망당 한 인물로(민 16:1~35)입니다. 권위에 도전하며 부끄러운 죽임을 당했던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은 종교적 시기 질투를 발람의 길은 끝없는 탐욕을, 고라당의 길은 권위에 대해 끝없는 도전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도가 싸워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시기 질투와 탐욕,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16절에서 정리하기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고 정리합니다.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해 아첨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신적 성품과 올바른 성경 해석이 이단들과 구분되는 가장 확실한 열매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심판
그러면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심판 밖에 없음을 천명합니다.
11절에서 유다는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멸망을 받았도다.” 그럽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심판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14~15절은 에녹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라는 표현은 이런 심판에 관한 말씀이 홍수 이전으로 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라는 표현은 에녹1서 1:9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서 악한 자들을 멸하기 위해 오시는 주의 재림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그런 주님의 재림을 심판의 재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이런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심판에 관한 예화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5~7절입니다.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럽니다. 먼저 5~7절에서는 세 심판의 전례로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멸망(5절), 자기 지위를 떠난 천사들의 멸망(6절),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7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중 첫째는 광야 세대의 멸망은 하나님을 불 신앙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실례로, 둘째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교만에 대한 심판의 실례로, 셋째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육체를 따라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부인하고 욕심을 부린 자들의 심판을 실례로 소개한 것입니다.
5절의 광야 생활의 불 신앙에 대한 말씀은 민 14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열두 정탐꾼 사건으로 다시 광야로 돌아가게 된 광야 1세대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리어 반역함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멸망을 받았던 사실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민 14:11; 신 1:32). 왜 이 사실을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도 범죄하면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율법의 요구에 관계 없이 살아도 된다는 영지주의 사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잘못된 구원론은 지금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구원 받은 이후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은 믿음으로 유월절을 지켜 광야로 나왔으나 광야에서 불 신앙으로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심판을 받은 사실이 이것을 증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6절은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벧후 2:4절과 병행 구절인 이 구절은 일단 타락한 천사를 심판하셨다는 의미로 읽어집니다. 다만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었다는 것과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마귀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사탄의 정수리를 깨트리셨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하수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결박당한 천사가 누구인지 어디에 갇혀 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이라는 원어의 설명에 만족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단락은 이런 사탄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에게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7절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거울이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이들이 심판받은 것은 오고 오는 세대에 이와 같이 살면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결론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다른 계시를 따름으로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당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저는 이 말씀이 성도가 싸워야 할 내용이 바로 이것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이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계시를 받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든 계시된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순종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말씀을 외면한 사람들은 방탕과 탐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길을 따르지 않기 위해 날마다 깨어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발람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라당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부정하고 높아지고 이름을 내려는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자꾸 게을러지려는 나와 싸워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싸움을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싸움이 외부의 적과 싸움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짓 교사들이 유혹하고 떠들어 댄다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분명한 확신이 있으면 그런 소리들은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얼마나 복음에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주도적인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을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힘써 싸워야할 것이 무엇이냐가 오늘 묵상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신사도주의가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싸움은 편안함에 길들여져 가는 우리 믿음과 신앙에 있다고 봅니다. 타성에 젖는 것도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힘써 싸워야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묵상하고 그것들로부터 떠나는 일은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게 계속되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천국의 영광이 아니라 심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게 선물로 주신 날에 우리가 힘써 싸워야할 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싸워 이겨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