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인기리에 방영됐던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한 상류층 엄마가 아이를 명문대 의대에 보내려고 몸부림치다가 딸을 망치는 이야기가 기본 줄거리입니다.
한서진이라는 엄마는 예서라는 딸을 서울의대를 보내겠다는 야망을 갖습니다.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입시 성공률 100%라는 비밀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형을 고용합니다. 이 코디는 예서를 감정적으로 통제하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입시를 준비시킵니다. 극도의 경쟁심을 심어주며, 실제 시험문제 유출, 내신 관리조작, 심지어 다른 학생들을 떨어뜨리기 위한 심리조작까지 강요합니다.
그러다가 예서에게 문제의 신호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와 불안감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 파탄을 겪으며 심리적으로 무너집니다. 그 와중에 친구가 죽게 되는데 예서는 죄책감과 혼란 속에 큰 고통을 겪습니다.
엄마 한서진은 뒤늦게 이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딸을 위해 했던 선택들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고, 야망과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딸의 회복을 위해 힘쓰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드라마 속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비록 과장되긴 했어도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들을 향해 보여주는 잘못된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해서 한 행동이 결국 자식을 망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왜 사랑한다고 한 일 이렇게 잘못된 결과를 낳을까요? 어떻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서는 편지입니다. 우선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일까요? 사도요한이 말년에 에베소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에베소 주변의 한 지역의 어떤 가정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왜 이 편지를 썼을까요? 우리가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편지 내용을 통해서 유추해 볼 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랑한다면서 삶으로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사랑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진리 안에서의 사랑
1절을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이 말씀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내가 정말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내가 가장 사랑한다는 말일까요? 내가 마음을 다해서 사랑한다는 말일까요? 이 말에는 보다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원래 성경본문인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에고 아가파오 엔 알레세이아”(ἐγὼ ἀγαπῶ ἐν ἀληθείᾳ) 여기서 “에고”는 “나는”이라는 뜻이고, “아가파오”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이고, “엔”은 전치사로 “안에”라는 뜻이고, 그리고 “알레세이아”라는 말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합해 보면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이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NIV/KJV에서 “I love in the truth” 즉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이라는 말은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ἀλήθεια)는 단순히 사실(fact)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참된 실재를 말합니다.
요 14: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7:17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진리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따뜻하게 대해주고 무조건 받아주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상대를 위해주고 돕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사랑은 우선 감정 중심이 아니라 말씀 중심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순간의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사랑입니다.
삼상 3: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히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엘리 제사장에게 전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엘리 제사장의 집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엘리 제사장이 아들들의 죄를 알면서도 금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제사장이었습니다. 이들이 제사를 멸시하고,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 중에 좋은 것을 빼돌리고, 그리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매우 악한 행동을 저지른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이들의 이 큰 죄악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단호하게 책망하고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습니다.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해서는 안 되는 악한 일을 저지르는데도 아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방치했습니다.
이것이 진리와 무관한 사랑입니다. 그저 감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랑합니다. 그저 자식이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사랑합니다. 이렇게 진리와 무관하게 사랑하면, 그 사랑이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 사랑이 오히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할 때 진리 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 보실 때 어떨 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사랑이 말씀에 맞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나와 사랑 받는 모두를 복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으로 나타나는 진리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사랑은 말씀 실천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인 말씀은 사랑으로 실천될 때 참된 진리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전 13: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남들이 할 수 없는 놀라운 말인 방언을 하고, 천사나 할 수 있는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저 그 말들이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예지력으로 앞날에 대해 말하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요나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가고 싶지 않아서 피하려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어쩔 수 없이 갔습니다.
욘 3: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놀랍게도 니느웨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 말씀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욘 4:1-2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요나가 말씀을 전해서 니느웨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회개했는데 싫어하고 성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럴 줄 알고 이곳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말씀을 선포해놓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자 싫어하고 화를 낸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 없이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채, 아니 오히려 미워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이 진리로 드러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이 할 경우 그 말은 그저 소음이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진리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SNS 공간이 악플 때문에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악플 때문에 상처를 받고, 어떤 경우는 정신치료를 받기도 하고, 심할 경우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연예인들 가운데 이런 악플 때문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연예인들을 괴롭히는 악플 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외모 하나로 버티는 거지, 연기력은 꽝이네.”
“이제 인기 떨어졌으니까 별짓 다 하네.”
“화면에서 좀 안 봤으면 좋겠다. 눈 버려.”
“쟤는 인성이 문제야. 걔랑 엮이면 다 망해.”
운동선수들을 괴롭히는 악플 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쟤 때문에 경기 졌다. 저런 애가 왜 대표팀이지?”
“돈만 많이 받는 무능한 선수.”
“국가대표 수준도 안 되는 실력으로 창피하다.”
“실력도 없으면서 광고는 잘 찍더라?”
이런 말이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말이 맞더라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그 말들을 악플이 됩니다. 결코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담긴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악플이 아니라 선플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담긴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위로하고, 사람을 돕고, 사람을 세워주는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진리와 사랑의 조화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있을 때 참된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는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도 사랑과 함께 있을 때 참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진리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드러나는 진리여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와 사랑의 조화의 본을 예수님께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 8:1-11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우며 말합니다. “모세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를 쓰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하나 둘씩 떠났고, 결국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이 이야기를 진리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무조건 용서하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대로 이 여인이 처벌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굳건히 지키셨습니다. 진리가 진리로 든든히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리로 죄가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와 무관하게 이 여인 편에 서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진리 없이 맹목적인 사랑에 휩쓸리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진리가 흔들립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처럼 잣대가 다릅니다. 내가 사랑하는 내 편을 판단하는 잣대와 나와 다른 편을 판단하는 잣대가 다릅니다. 이것은 진리를 아전인수격으로 이용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진리 안에 서야 합니다.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참 사랑이 되게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죄인이지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죄를 인정하시면서도 이 여인을 미워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지었으니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여 무너뜨리기 보다는 회개하고 회복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땅에 무엇인가 글을 쓰시면서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숨기고 드러난 죄를 정죄하려는 사람들의 또 다른 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위선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이 이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죄 대신 사랑을 택하셨습니다.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다시 진리 가운데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진리를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모질고 삭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를 한 사람을 향해 돌을 들고 던지려 합니다. 마치 그 사람이 무슨 악마인양 공격을 합니다.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 정치적으로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상종 못할 사람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적으로 몰아 부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따르더라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사랑으로 드러난 진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와 사랑은 물과 기름처럼 함께 하기 힘듭니다. 진리를 따를 때 사랑을 잃기 쉽고, 사랑을 따를 때 진리를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진리를 따르면서도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진리와 사랑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