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현악기 장인인 안토니우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는 바이올린, 첼로, 기타, 비올라, 하프 등 여러 악기를 제작했습니다. 그가 만든 악기는 그의 라틴어 이름을 따라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로 불리며, 현대까지도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가 생존에 만든 악기가 모두 1,100여점에 이르는데, 3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650여 점이 남아 있고, 그중에서도 바이올린은 약 500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가 1721년에 만든 레이디 블런트(Lady Blunt)라는 바이올린은 지난 2011년 런던 경매에서 약 1600만 달러(약 230억 원)에 거래되었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제품이 그렇게 고가에 판매될 정도로 명품으로 자리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트라디바리는 악기의 재료가 될 나무를 고를 때 단순히 눈으로만 보지 않고, 숲을 다니며 나무를 손가락으로 두드려보고, 그 울림이 자신의 귀에 어떻게 전달되는지 직접 확인했습니다. 심지어 나무껍질의 냄새를 맡고 혀를 대어 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의 공방에서 제자들이 악기를 다 만든 후에 스트라디바리에게 “스승님, 완벽합니다. 이제 판매해도 되겠습니다.”라며 가져오면, 그는 아무 말없이 활을 켜봅니다. 자신이 직접 그 소리를 들어보고는 승인된 악기만 자신의 이름인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라벨을 붙여 출고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라벨을 붙였다는 것은 ‘이건 내가 보증한다.’는 확인서와 같았습니다.
그는 악기의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악기에 사용된 나무가 어느 산맥의 것인지, 건조 과정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를 알아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눈과 손가락으로, 그리고 귀로 모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출고되었기 때문에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악기는 명품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스트라디바리가 소리를 듣고 직접 확인한 후에 악기를 완성했던 것처럼,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때로 굉장히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변화산 이야기를 꺼냅니다. 왜 베드로는 그 변화산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요?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경험들이 있을텐데, 왜 하필 변화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인생의 마지막 때에 쓴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장막을 벗을 날’이라는 말은 죽음을 말합니다. 곧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베드로 스스로 그런 순교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와 있음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해옴을 느끼자 베드로의 마음에 걱정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박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당시 성도들을 힘들게 하는 상황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박해입니다. 특별히 네로 황제의 통치 시기였기에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간주했고,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 탓으로 돌리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미움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고립될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습니다. 박해를 겪으면 성도들은 갈등하게 됩니다. 더욱 굳게 믿음을 붙잡고 그 시련의 때를 이겨내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런 박해와 시련 속에서 계속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믿음에서 떠난 사람도 생겨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가진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베드로후서 1:1)이라고 말하며, 그 믿음을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게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쓴 동기입니다.
당시 성도들이 겪은 두 번째 어려움은 지연된 종말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곧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런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시련의 때를 이겨내는 큰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때라 하더라도 조금만 참으면 이 시련과 고난이 끝이 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떠나가신 지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지만, 주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재림이 늦어지면서 힘든 상황을 버텨오던 성도들의 인내심에 점점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날이 갈수록 박해는 심해지는데,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재림은 요원한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낙심되기도 하고, 믿음을 떠나려는 유혹이 그들의 신앙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3:9) 우리 생각에는 주님의 재림이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이 겪은 세 번째 어려움은 거짓 교사들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자 일부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을 왜곡하고,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한 성도들을 미혹한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약속은 거짓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복음을 하나의 신화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마치 철학이나 신화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로 인해 힘든 상황에서 교인들은 내적으로 ‘주님이 정말 오시긴 하는 걸까?’하는 의문이 생겼고, 거짓 교사들은 그런 교인들의 마음을 이용해 복음이나 재림에 대한 것을 교묘하게 왜곡해서 교인들의 마음을 미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이자 순교를 앞둔 베드로의 마음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자신까지 세상을 떠나면 교인들은 더욱 흔들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겪어내야 할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 사도가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기둥과 같이 여겨지던 존재였기에, 베드로 사도가 순교함으로 세상을 떠난다면 교인들은 힘든 상황에서 기댈 기둥을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이 힘들 것이 뻔합니다. 그걸 잘 알기에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믿음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본문의 편지를 쓴 것입니다.
먼저 본문 16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복음이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교묘히 만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변화산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변화산 사건을 ‘친히 본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과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님을 말씀하면서 변화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3명의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럼 왜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그 사건을 특정하여 말씀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신 것처럼, 그런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그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을 ‘친히 본 사람’입니다. 자신이 본 것보다 더 영광스런 모습으로 주님을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변화산의 이야기는 장타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여주는 예고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 변화산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는 것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산의 이야기는 단순히 영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시발점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고 말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뜻을 이루신 그 예수님은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변화산 위에서도 영광을 받으셨지만,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후에는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도록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립보서 2:9-10)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는 박해와 시련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우리가 받은 고난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임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박해가 심하다는 것 때문에, 시련이 너무 힘들다는 것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도 지극히 높여 주실 때가 반드시 온다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그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사람입니다. 변화산에서 골고다 십자가까지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이 얼마나 힘드셨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을 통해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직접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서 자신을 ‘친히 본 자’라고 자신 있게 말씀합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확실한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목격자가 증언하듯이, 복음에 대해 자신은 목격자이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에서 우리가 겪은 확실한 경험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베드로 사도처럼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나 하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때로는 기도에 응답을 통해서, 때로는 예배의 감격을 통해서, 때로는 사죄의 은총을 통해서, 때로는 홀로 외로워하는 내 어깨를 감싸 주심을 통해서 말입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볼 때 ‘아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경험일 수도 있고, 앞길이 막막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할 때 지혜를 주셔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심도 우리에게는 증거입니다. 조용히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묵상할 때 내 마음에 잔잔히 흐르는 샘물처럼 임하심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우리에게도 ‘이것이 복음이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구나!. 역시 하나님을 살아 계시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경험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 분명한 경험을 하면 때론 고난이 밀려오고 시련의 강을 건널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 그렇게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은혜가 참 중요합니다. 경험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줍니다. 확실한 경험은 우리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위에 세워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자로서 보고 경험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법정에서 목격자의 증언은 판결을 내리는데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재판정에서 판결을 내리는 근거는 바로 법률입니다. 모든 판결은 법조문을 근거로 내려집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우리의 직접 목격한 경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통해 복음의 확실함을 증언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복음은 교묘히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영지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허황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이 경험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입니다.
간혹 인간의 경험, 개인적인 체험이 주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변화산의 이야기나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결코 베드로만의 개인적인 체험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느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건 아주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보다 더 확실한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오래 전부터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된 말씀들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성경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복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성경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거나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용도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그 말씀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본질을 변형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기도 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16절의 말씀처럼 ‘교묘히 만든 이야기’로 변질시켜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기도 하고,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러울수록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한 신앙을 세워가야 합니다. 말씀 앞에 무릎 꿇고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의 경험은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방언을 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방언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다 예언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이는 병고치는 은사를 가졌지만, 모든 사람이 병을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병고침의 은혜를 받고 회복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병을 다 고쳐주시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사도 바울도 병을 고쳐주시길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병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다를 뿐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동일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경험한 것은 각기 다릅니다. 예수님의 모든 제자가 변화산 경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세 명의 제자만이 변화산에 올라갔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모두에게 주어진 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늘날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은혜받은 경험이 우리로 믿음을 굳게 붙잡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 때 우리가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말씀에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음성을 듣고, 말씀에서 회복하시는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뽑히지 않습니다. 어떤 가뭄의 때를 만난다 하더라도 시들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 중에서 가장 깊은 뿌리를 가진 나무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야생 무화과나무(Ficus centrifolia)인데, 뿌리가 무려 122m나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깊이 뿌리를 내리니까 가뭄이 심한 지역에 서식하지만 여전히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위기를 맞는 것은 어떤 핍박이나 시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련의 때에 더욱 견고한 신앙으로 세워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에 대한 회의가 깃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말씀이 메말라져가기 때문입니다.
현악기의 장인 스트라디바리는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악기마다 자신이 직접 확인을 했습니다. 그래서 명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고난받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친히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순교당할 때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내려,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고난받는 우리를 ‘실패자’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 위에 서 있는 우리에게 ‘내가 너를 보증하는 나의 스트라디바리우스다’라는 라벨을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려 살아갈 때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연주하시는 최고의 명품 악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