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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하기, 붙여넣기 자녀인생/창세기 26:24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17|조회수0 목록 댓글 0

창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5월 한 달간 가정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입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본 것을 정리합니다. 가정은 왜 존재합니까? 가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세상은 다양한 답을 내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은 정서적 안정을 위한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가정은 자녀를 낳고 양육하기 위한 사회적 단위다."

심리학자들은 "가정은 인간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본 공동체다." 이 모든 답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성경이 말하는 가정의 목적의 핵심을 담아내진 못합니다.

 

성경은 가정에 대해 단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합니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첫 번째 단위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전제입니다.

 

가정을 단순히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행복하기 위해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실을 늘 강조합니다. “결혼은 행복하기 위해 하는게 아니야. 결혼은 사명이야”

 

혼자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배우자를 만나 더 건강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자녀를 낳아서 그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저는 설명합니다.

 

결혼의 목적을 더 큰 행복과 연결시킨다면, 정말 큰 일이 납니다.

 

왜냐하면 결혼 생활이 늘 행복하진 않거든요. 그 사실을 신혼여행 때부터 깨닫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가정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는데 행복하지 않아요. 그러면 결혼생활을 후회하고 뒤를 돌아보게 되고, 결국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이 가정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가정의 목적 앞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결혼생활을 사명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진정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저도 아내와 영적전우애를 느낍니다. 함께 사명을 이루어 나아가며 서로 돕고 힘을 모을 때, 그것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이처럼 함께 자녀를 양육하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이 과정에서 함께 땀흘리고 헌신하는 영적전우애는 우리를 더 강력하게 하나로 결속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십니까? 창세기 1장 28절을 보십시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단순한 번성의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통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당신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실 때, 그 첫 번째 도구로 가정을 택하셨습니다. 아담 한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곧 부부가 함께 이 사명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의 목적에 대한 성경적 질서를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먼저 부부의 연합에서 시작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고 한 몸을 이룰 때, 그 연합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작은 단위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나라를 그 두 사람 안에만 가두어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부부의 연합 속에서 자녀를 선물로 주십니다. 자녀는 단순히 부부의 사랑의 결실이 아닙니다. 자녀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민으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부부는 그 자녀를 하나님 나라의 건강한 시민으로 양육할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부부의 연합이 견고할수록, 그 가정 안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더욱 온전하게 형성되어 갑니다.

 

이것이 지난 3주간 우리가 살펴온 가정의 달 설교의 전체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가정안에서 만들어지는 그 하나님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자녀의 인생을 통해 확장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 키워드는 ‘부모의 삶’입니다. 부모의 삶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흘러감으로 하나님나라의 확장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삶이 어떻게 자녀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부모의 가치관이 어떻게 자녀에게 흘러가지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함께 같이 따라 해보겠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랍니다.”

 

“부모의 발자취는 고스란히 자녀의 인생이 됩니다”

 

이 말은 자녀는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녀 교육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묻습니다. 어떤 말씀을, 어떤 가치를, 어떤 원칙을 가르칠 것인가에 우리의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을 배우기 전에, 부모의 삶을 흡수한다고 말입니다.

 

창세기 26장을 펼치면, 어떤 사건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랄땅에 있습니다. 그곳은 흉년을 피해 내려온 낯선 땅입니다. 그런데 그 낯선 땅에서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림1-이삭이 그랄땅에 서다]

 

왜냐하면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탐내는 눈초리가 느껴진 겁니다. 이삭의 가슴에 두려움이 스며듭니다. 그 순간, 이삭은 결정을 내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리브가는 제 아내가 아니라 제 누이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이미 어딘가에서 보았습니다.

 

창세기 12장에도 또 20장에도 동일하게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며 사라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내 누이라 하라." 그리고 창세기 20장에서 그랄땅에서 바로 이삭이 지금 서 있는 그 땅에서 아비멜렉에게 또 한 번 같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림2-창세기 12장 / 20장의 사건]

 

아버지가 거짓말한 바로 그 땅에서, 아들이 같은 거짓말을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결코 우연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랄 땅 아비멜렉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과, 그의 아들 이삭이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속인 사건은 대략 4~50년 정도의 시간차가 납니다.

 

아비멜렉은 왕의 이름이 아닌, 왕의 호칭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면, 속으로 엄청 황당했을 겁니다.

 

50년 전에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정말 내가 황당한 일을 당할 뻔했는데, 이번에도 또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와서 똑같이 거짓말하는 바람에 자신이 괜히 나쁜 사람이 될 뻔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참 이상한 집안이네..” 보통 이런 집은 집이라고 안 하죠. 집구석 이라고 하죠. “이 집안은 도대체 어떤 집구석이길래?...”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게 이 집안의 가훈인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거짓말하는 법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앉혀놓고 "얘야, 두려울 때는 이렇게 속이는 거란다"라고 가르친 적이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아버지가 두려움 앞에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고 기억을 했을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땅, 바로 그랄에서 똑같은 두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던 대로 말입니다.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이기에 같이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처럼 자녀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랍니다. 부모가 두려움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 갈등 앞에서 어떻게 회피하는지, 유혹 앞에서 어떻게 쓰러지는지 그 모든 것이 자녀의 몸과 마음에 새겨집니다.

 

반대로 부모가 고난 앞에서 어떻게 무릎을 꿇는지, 억울함 앞에서 어떻게 참아내는지, 가난과 부족함 앞에서도 어떻게 감사하는지, 그것 역시 자녀에게 흘러갑니다.」

 

아빠 엄마가 서로 간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는지, 부부가 현실의 위기 앞에서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마음 모아 함께 기도하며 어떻게 현실을 용기 있게 직면해 내는지, 자녀에게 고스란히 흘러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이삭의 실패가 아브라함에게서 흘러왔다고 해서, 이삭의 운명이 아브라함에 의해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일부 신학사조에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조상의 죄와 영적인 저주의 사슬이 후손에게 대물림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 균형을 잃은 가르침입니다.

 

에스겔 18장은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기에 기록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 사이에 떠돌던 속담이 있었습니다.

 

겔 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

 

이것은 단순한 속담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항변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고통을 받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이 없는데, 조상이 잘못 먹은 포도 때문에 우리 이가 시리다는 것입니다. 책임 회피이자,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었습니다.

 

겔 18: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하나님은 이 속담을 단호하게 금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선언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섭니다. 조상의 죄가 자동으로 후손에게 전가되어 저주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주장의 주된 근거로 사용되는 구절이 출애굽기 20장 5,6절입니다.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그러나 이 구절을 정확히 읽어야 합니다. 문맥을 보면 이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죄를 갚는다"는 표현은 저주가 자동으로 대물림된다는 뜻이 아니라, 부모의 우상숭배가 가정의 문화와 환경을 형성하고 그 환경 안에서 자녀들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게 될 때 하나님의 심판이 미친다는 뜻입니다.

 

즉 죄의 패턴이 이어질 때의 결과를 경고하는 것이지, 아무관계없는 후손에게 자동으로 저주가 유전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스겔 18장은 바로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두 본문은 모순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0:5은 죄의 환경적, 문화적 영향력을 경고하는 것이고, 에스겔 18장은 그 영향력 안에서도 각 사람의 책임과 선택이 분명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지금 내 삶이 부모 탓이라고 해선 안 됩니다. 부모가 어두운 인생을 살았고, 죄와 저주 가운데 살았더라도 성경은 이렇게 말하죠.

 

겔 18:14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겔 18:15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겔 18:16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저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강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겔 18:17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리나 이자를 받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부모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엉망으로 살아도, 자녀가 그 자리에서 돌이켜 다른 길을 가게 되면 얼마든지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신약에서는 우리는 얼마든지 예수님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부모가 이걸 기대하고 막 살아선 안 됩니다. 내가 마음대로 살아도 자녀가 제대로 선택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자녀는 대체로 부모의 삶을 답습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고 자란 것이 무섭게 그의 자녀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물리법칙 중 관성의 법칙이 있죠.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물체는 계속 그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성질입니다. 방향을 바꾸기 위해선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인생도 비슷합니다. 가정 안에서 반복된 언어와 태도와 습관은 대체로 다음 세대 안에서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분노는 분노를 배우게 하고, 냉소는 냉소를 배우게 하며, 반대로 성실은 성실을 배우게 하고, 믿음은 믿음을 배우게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삶은 자녀의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세계의 유명한 도시에는 거의 공통적으로 거대한 강이 흐릅니다. 특히 나라마다 수도로 지정된 도시들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강입니다.

 

런던에는 템즈 강이, 파리에는 센 강이, 서울에는 한강이 흐릅니다. [그림3-도시의 강들]

 

 

그 강이 도시의 중심을 흐르며 생명을 공급합니다. 사람들이 강 주변에 모이고, 문명이 강 따라 형성되었습니다. 강이 막히면 도시가 시들고, 강이 흐르면 도시가 살아납니다.

 

믿음의 가정에도 이런 은혜의 강이 흐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조상들의 집에는 이런 거대한 강줄기가 대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세우신 그 가정에도 바로 이 강이 흐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은혜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26장에서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실 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바로 이 내용이 은혜의 강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창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에 이삭이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삭 세대에 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것이 언약의 강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가정 가운데 흘려보내시는 은혜의 흐름을 말합니다.

 

이 강은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계속 흘러갑니다. 그래서 요셉이 애굽의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렸을 때도, 그를 붙들고 있는 것은 조상들로부터 흘러온 언약의 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여러분도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아 신앙의 2대 3대를 이루고 계신 분들은 이런 은혜의 강물이 여러분 개인과 가정에 흐르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 그냥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강이 흐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비극은 이것입니다. 이 은혜의 강이 흐르는 언약의 가정에서 어느 순간부터 부모가 그 강물을 외면하고 다른 샘을 찾아 헤맬 때, 그 은혜의 강물은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패턴 역시 자녀에게 흘러갑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가지 반복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두려움 앞에서의 거짓말,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 그것입니다.

 

그 조급함이 하갈을 들이게 했고, 이스마엘을 낳게 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가정의 분열입니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 이삭과 이스마엘의 긴장. 그리고 그 상처는 이삭 가정에도 흘러갑니다.

 

이삭과 리브가두 아들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 각자 편애를 선택합니다. 이삭은 에서를, 리브가는 야곱을, 한 가정 안에서 부모가 갈라서서 자녀를 편드는 비극이 일어나죠.

 

그리고 이 편애의 패턴은 다시 야곱에게 흘러갑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가운데 요셉을 편애합니다. 채색옷을 입히고, 특별히 사랑합니다. 그 결과는 형제들의 질투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요셉이 노예의 삶이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의 편애 → 이삭의 편애 → 야곱의 편애.

 

이것이 패턴의 무서움입니다. 세대를 거칠수록 죄의 패턴은 더 깊어지고 더 복잡해집니다. 작은 균열이 큰 단층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단층으로 물이 새어 나가고 은혜의 강물의 수위는 점점 더 낮아집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세대가 거듭하면 그 수위는 메말라 바닥을 드러냅니다.

 

두려움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이 패턴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거짓말은 이삭에게 흘렀고, 이삭의 가정에서 자란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도둑질하는 자가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팔아넘기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뿌린 불신의 씨앗이 야곱 가문 전체의 비극으로 번져갑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이것은 부모의 삶을 통해 흘러간 배움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가정에 흐르는 은혜의 강물 대신 자신의 판단이라는 잘못된 웅덩이를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우리 믿음의 가정에는 조상 때로부터 흐르고 있는 은혜의 강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거절하고 다른 웅덩이를 의지한다면 결국 자녀들은 은혜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믿음의 가정에 흐르는 그 은혜의 강줄기를 더 크게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그 은혜의 강물이 더 풍성하게 흐르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잘못된 되물림의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모의 복된 삶이 자녀에게 더 큰 복된 삶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오미는 이방 여인 룻 앞에서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아들들도 다 잃어버린 그 처절한 절망 가운데에 나오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의 그 등을 보았습니다. [그림4-나오미와 룻]

 

룻도 같은 상실감이 사로잡혀 있었죠. 그녀도 남편을 잃어버린 상황입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남편과 아들들을 다 잃어버렸으니,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시어머니는 하나님을 붙잡고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삶을 놓아 버리지 않고 주께 새로운 삶을 기대고자 큰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며느리는 큰 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결단하죠.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이 구절의 핵심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삶을 가까이하길 원하고, 그 삶을 따르길 원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른 선택의 옵션이 많았어요. 더 편하고 더 쉬운 길이 있었어요.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의 길을 따르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가정에 대대로 흐르고 있는 거대한 은혜의 강물에 자신의 인생을 띄워 맡기는 행위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고, 그 삶을 가까이하는 걸 꺼리죠. 하지만 룻은 달라요.

 

룻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시어머니 나오미가 위대한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삶, 그가 보여준 삶이 위대했던 것입니다.

 

지구촌교회에 많은 시어머니들이 계시죠?

 

며느리에게도 믿음의 길, 사랑의 길, 복된 길을 삶으로 보여주는 복된 인생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삶이 며느리와 손주들에게 아름답게 흘러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에 바울이 그렇게 아끼던 제자 디모데를 보십시오.

 

바울은 늘 디모데를 놀랍게 평가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바울이 늘 보고 싶어 했던 제자가 이 디모데였습니다. 스승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스승에게도 위로를 주는 특별한 인생입니다. 그 디모데는 모든 걸 고루 갖춘 초대교회의 리더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디모데의 삶이 누구에게서 흘러온 것인지 이렇게 말하죠.

 

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디모데로, 외가로부터 믿음이 강처럼 흘렀습니다. 그 강물 위에서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고, 에베소 교회의 목자가 됩니다.

 

이것이 은혜의 강이 흐르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부모가 그 강물을 마시고, 그 강물 따라 걸어갈 때 자녀도 그 강가에서 복되게 자랍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 인생은 목이 마를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압니다. 두려울 때 어디서 힘을 얻어야 하는지를 압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등 뒤에서, 부모가 그 강가에 무릎 꿇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타자를 칠 때, 컨트롤 C, 컨트롤 V 를 아주 많이 사용할 겁니다. 복사하기, 붙여넣기입니다.

[그림5-컨트롤 C, 컨트롤 V]

 

오늘 설교 제목이 「복사하기, 붙여넣기 인생」 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삶을 매순간 복사합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삶에 붙여넣습니다.

 

원본이 좋으면 복사하고 붙여넣는 인생은 정말 복된 인생이 될 겁니다. 하지만 원본의 잘못된 경우에는 붙여넣기 인생은 재앙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녀 앞에 어떠한 삶을 보여주며 사십니까?

 

두려움 앞에서 거짓을 선택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두려움 앞에서 무릎 꿇는 삶입니까?

 

갈등 앞에서 도망치는 삶입니까? 아니면 갈등 앞에서 화해를 선택하는 삶입니까?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고난 앞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는 삶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에는 은혜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모든 부모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말씀 앞에 반응하여 삶에 많은 부분에 변화가 찾아오게 되길 바랍니다. 가정 안에서 우리 부모의 모습이 달라지게되길 바랍니다.

 

자녀 앞에서 무릎 꿇는 그 모습이 시작입니다. 완벽한 부모가 되려 하지 마십시오. 은혜의 강가에서 함께 걷는 부모가 되십시오. 은혜의 강물에서 그 생수를 마시고 만족을 얻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은혜의 강물 외에 다른 저수지(주식, 투자)를 찾지 않는 우리 모든 부모 세대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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