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속담에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지요.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그 우물 안이 세상의 모든 것인 줄로 착각하고 세상 넓은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의 생각이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그러기에 이런 속담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이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우리의 생각을 맞춰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의 생각을 품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길로 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멋진 고백을 했습니다. 그 고백은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했지만, 곧 이어 베드로는 예수님께 큰 책망을 듣고 맙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이 가져야 할 길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셨는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권력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했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22)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책망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했다’고 말할 때 ‘항변하다’는 단어의 정확한 뜻은 ‘책망하다. 꾸짖다, 경고하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잘못 생각하셨고 잘못 말씀하셨다는 듯이 예수님을 책망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쓸데 없는 생각을 하시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책망한 이유는 자신의 기대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인 베드로의 입장에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랬겠지요. 누군가가 죽는다는데, ‘잘 되었습니다. 그래야지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바가 분명 있었는데, 그 기대를 예수님께서 무참히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께 건 기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메시아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메시아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하고 고백한 것처럼 메시아인 것이 맞습니다. 그럼 제자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어떤 분일까요? 그것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입니다.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고 죽으신다는 것을 제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니 되옵니다!’라고 항변한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신다면 우리의 기대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말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지켜줄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만일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지켜줄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아니 최소한 내가라도 지켜줄테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런 베드로의 간언에 예수님께서 오히려 베드로를 호되게 나무라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복음 16:23) 베드로는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저 네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베드로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도 종종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기대, 우리의 경험이라는 작은 우물에 갇혀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마치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이 짧은 생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늘보다 넓은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는 것은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환경과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이고 밤에는 기온이 급하강하기 때문에, 낮에는 태양볕을 피할 그늘이 필요하고 밤에는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문제에는 전혀 걱정이 없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햇볕을 가려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생활이 힘든 또 하나의 이유는 도처에서 생명을 노리는 위협적인 적들 때문입니다. 때로는 베드윈과 같이 광야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역에 몰래 들어온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말렉과 처음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거주지를 침입했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온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전갈이나 독사, 또는 사막 늑대나 자칼과 같은 위협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한두 명이 아니라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공동생활을 할 때에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셨고, 물이 필요할 때에는 반석을 깨뜨려서라도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제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집이 없을 때에는 월세방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다가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조금 더 넓은 전셋집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러다가 더 안정적으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자기 집을 마련하는 꿈을 꾸며 열심히 일을 합니다. 자기 집을 가졌더라도 그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조금 더 크고 깨끗한 집을 갖고 싶어 합니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똑같은 음식만 먹는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굶어 죽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그것이라도 있는 것이 더없이 고맙지만, 어느 순간엔가 좀 더 나은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물론 처음 그들은 만나로 만족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먹었던 만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민수기 11:7-8) 출애굽기 16장에서는 처음 만나를 주실 때에 만나를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출애굽기 16:31)고 짧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1장에서는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과자를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만나를 여러 가지로 요리해서 먹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겠지요. 한 가지로만 먹으면 금방 질릴테니, 그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어 먹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백성들의 마음에 탐욕이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탐욕이 일자 ‘꿀 섞은 과자’ ‘기름 섞은 과자’와 같았던 만나가 ‘하찮은 음식’처럼 여겨졌습니다. 광야의 음식인 만나보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생선,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 같은 것이 먹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잘 알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 그런 것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나가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선물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탐욕에 사로잡히니 현실을 보지 못하고 욕망만 끓어오릅니다. 그리곤 먹고 싶은 그것을 먹지 못하는 현실에 한이 서려 그랬는지 밤새도록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그 모습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모세 역시 이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하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자기들의 욕구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이런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이들을 이끌어간다는 것이 모세에게는 너무나도 부담도 되고 힘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더 이상 이 짐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탄원합니다.
그렇게 힘들어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대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백성을 위해서 고기가 싫증날 정도로 고기를 주시지만, 힘들어 하는 모세를 위해서는 70인의 장로를 세워주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17절) 하나님께서도 모세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짐을 나눠질 장로들을 세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짐을 나눠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을 임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맡기실 때 당신의 영으로 붙드시고 힘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길에서 힘듦을 이겨내고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엄청난 권력자 바로와 대결하게 하실 때에도, 홍해 앞에서 백성들이 두려워 떨며 불평할 때에도 하나님께는 당신의 영으로 모세를 붙드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막강한 권력 앞에서도, 또 길이 전혀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영을 70인의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짐을 나눠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모세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영을 70인의 장로들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자 장로들이 예언을 했습니다.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25절) 여러분, 70인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예언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을까요? 우리는 종종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성령의 은혜를 내려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8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권능을 받는 것입니까? 증인이 되는 것입니까?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그 권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제자들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걷게 했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는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살렸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사도 바울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던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고쳐주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에게서 그런 기적이 나타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신 목적은 기적을 행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방언을 말하게 하심도 아닙니다.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방언을 말했는데, ‘방언을 받았으니 이제 됐어!’라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떨치고서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은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신 목적은 어떤 능력을 행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70인에게 임하셨을 때 그들은 예언했습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이 예언하는 것이었다면 오늘 본문에 그들이 무엇을 예언했는지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언의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일꾼으로 택하심을 받아 이제부터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세가 소집한 장소에 엘닷과 메닷 두 사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고, 그들도 예언을 했습니다. 그 두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짐을 지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자신들의 장막에서 예언을 하자 ‘그들을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모세의 권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호수아를 오늘 본문 28절에서는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모세가 모이라 할 때에 모이지 않은 사람은 모세의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이 예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여호수아의 잘못된 생각을 꾸짖습니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고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아니라 모세를 위한 열심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9절) 여호수아는 모세와 70인에게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예언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택을 받았음에도 모세의 소집 명령을 따르지 않은 엘닷과 메닷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예언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지 못하도록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말입니다.
우리도 종종 여호수아와 같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판단하려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 짧은 경험이나 생각으로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70명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모든 백성이 선지자가 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선지자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선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제가 왜 발생했습니까? 탐욕 때문입니다. 하늘의 음식인 만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생선, 그리고 오이와 부추 등을 먹고 싶다는 탐욕 때문에 말입니다. 탐욕이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 생각에서 나온 욕망입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서 공급하는 음식과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엘리야처럼 3년이 넘도록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으로 생존하는 사람이 선지자이고, 예레미야처럼 깊은 우물에 던져져 죽음의 위기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상황이나 나의 욕망에 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시길 원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이 되는 것을 소원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요엘 2:28)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꿈은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백성들로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짧은 생각에 끌려 살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큰 꿈을 우리도 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고기를 먹지 못해 불평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삶에 조금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 가능합니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 두려울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으로 인해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우리에게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에게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