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어떻게 기르리이까/사사기 13:8~12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17|조회수0 목록 댓글 0

<백성들이 점차 하나님을 잊어 가던 시대에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들어 있는 사사기는 흥미로운 시작과 마지막을 보여 줍니다. 사사기 1장 1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삿 1:1)

 

이렇게 하나님께 묻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 25)

 

하나님께 묻던 백성이 이제는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이야기가 사사기의 큰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어지는 사사들의 등장 이야기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사사기에는 총 12명의 사사의 이름이 나오며, 사사기의 앞부분에는 사사의 등장과 관련해서 하나의 패턴이 드러납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우상숭배로 죄를 짓는 이야기가 먼저 등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대부분 이방 민족에게 압제를 당하도록 하는 형벌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서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셔서 적들을 물리치시고 다시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다시 범죄의 길을 갑니다.

이것이 사사기가 알려 주는 하나의 패턴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초반에는 그들이 고통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표현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첫 사사인 옷니엘의 등장 장면이 그러한 패턴을 전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삿 3:7~9)

 

이와 같은 패턴이 사사기의 큰 흐름입니다. 이후 에훗의 등장에서도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사 드보라와 기드온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어지는 패턴이 점차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 점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내용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짧게 활동했던 사사들 경우 생략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돌라, 야일, 입산, 압돈 등의 이야기에서 계속 그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삼손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사사기 13장입니다. 13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삿 13:1)

 

보통 이렇게 시작하면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 “주께 부르짖으매”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곧바로 ‘마노아’라는 사람의 이야기로 넘어가서 삼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등장 배경에는 흥미롭게도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거나 부르짖는 장면이 없습니다.

생략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상 맞습니다. 첫 절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미 블레셋 사람들에게 40년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부르지도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 삼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잊은 불신앙의 시대 속에서도 마노아는 하나님께 자녀 양육의 길을 물었습니다.>

 

먼저 한 경건한 가정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마노아라는 단 지파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불신앙의 세대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족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여인에게 나타나 임신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기를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남편에게 전합니다. 그러자 남편 마노아는 즉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이 가정이 여전히 교제를 나누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마노아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마노아에게 사자를 보내십니다. 그때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삿 13:12)

 

우선 마노아는 아기 탄생의 소식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어떻게 행하면 좋겠습니까?”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신앙인의 가정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하는 평범한 질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질문이었다는 것을 사사기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고통의 40년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조차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불신앙의 시대, 무신론의 시대, 하나님을 잊은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마노아는 달랐습니다. 그는 기도할 줄 알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줄도 알았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아기를 주실 때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을 수 있던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노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치 그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하나님께 묻고 부르짖는 이가 희귀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뜻을 물으며 따라가려는 경건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 어떻게 아이들을 기르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 진정한 신앙인이 과연 몇이나 될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찌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외로운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에 모든 관심을 두고 가는 사람들이 현대인들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정보들도 미디어와 강좌, 서적, 육아 전문 커뮤니티, 학원 상담과 교육 전문가를 통해 얻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사실 아기를 키우는 데 있어서 대부분 그 길을 하나님께 묻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방법대로, 부모의 생각대로 아이를 키우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속사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의 흐름을 따라 아이를 키우려고 합니다.

이렇듯 모두가 잠든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유독 한 사람만이 깨어서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마노아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부모들에게도 이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마노아는 자녀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자녀 양육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마노아는 아이 탄생의 소식을 듣고 여호와께 이런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요? 그가 이런 질문을 던진 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마노아는 수태고지를 받았을 때, 자신이 받을 아이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이며, 자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시는 사명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가 한 질문은 유모가 아기의 부모에게 질문한 것과 같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까요? 어떤 음식을 먹이고, 언제쯤 잠자리에 들도록 하면 좋을까요?” 아마도 유모라면 아이의 부모에게 이런 것들을 물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의이자 상식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방식도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노아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실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기를 원하시는지 물어야 한다.” 이것이 마노아의 생각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부모님의 고백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맡겨 주신 이 아이는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의 방법대로 키워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하나님, 나에게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노아가 묻는 질문에는 이 아이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대에 임신하지 못하던 태를 열면서까지 아이를 맡기시는 데에는 특별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에게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 위대한 일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아이가 그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내가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참으로 놀라운 생각이며 큰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막연하게 아이가 좋은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 편하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마음이 병들고 피폐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때로는 부모의 열망이 아이를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부모의 열심이 도리어 아이들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떻게 기르리이까”라고 묻는 마노아의 질문은 “아이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위대한 일에 사용하실 줄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부모로서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먼저 삶의 모범을 보이며 거룩하게 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이제 장차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키우라고 하셨습니까?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삿 13:5)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 (삿 13:7)

 

하나님께서는 우선 이 아이를 ‘나실인’으로 키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나실인(Nazirite)’은 히브리어 ‘나지르(נָזִיר[Nazir])’에서 유래한 말로, ‘구별된 자’, ‘봉헌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일반인들과 구별되어 일정 기간 혹은 평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을 말합니다. 민수기 6장에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선 포도주를 멀리하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시체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나실인으로 키우기 위해서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통하여 부모가 먼저 그의 삶 속에서 모범을 보일 것을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노아에게 일러주었다. 주님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일러준 모든 것을 그 아이가 지켜야 하고, 마노아의 아내는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은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되고,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하며, 부정한 것은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되고, 주님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마노아의 아내가 지켜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삿 13:13~14, 새번역)

 

아이가 독주를 마시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이가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교육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어머니가 먼저 독주를 마시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먼저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의 삶으로 먼저 모범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부모 자신도 아이가 가야 하는 길을 그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주셨던 책무였습니다.

‘신교승어언교(身敎勝於言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소 행하는 가르침이 말로 하는 가르침보다 낫다”라는 뜻입니다. 솔선수범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많은 병사들과의 대결에서 백성들을 구원할 위대한 사사를 이제 길러 내려고 하십니다. 그 사사가 바로 삼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기르리이까?”라고 묻는 마노아의 질문에 “무기를 다루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쳐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구별된 사람으로 키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의 자녀를 구별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너도 구별된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삼손의 부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마노아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장차 백성을 이끄는 사사가 될 것이다. 그러니 구별된 사람,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도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따라오시면서 아마도 부모님들은 ‘우리 아이를 주님의 말씀대로 구별한 사람으로 키워야겠다’라는 다짐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마주하실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을 드린다면 부모님들은 큰 부담을 가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묻고 아이를 키워야 할 텐데,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야 할 텐데….’ 그런데 조금 더 보아야 합니다. 반전 같은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 교육은 자녀에게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거룩한 근원을 심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당당하게 “어떻게 기르리이까”라고 물었던 마노아와 아내는 정말 삼손을 그렇게 키웠을까요? 아마도 부모님은 그렇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며 살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삼손은 그렇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제대로 구별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사사기 14장에 삼손은 부모가 지키려 애썼던 규례들을 하나씩 깨뜨리기 시작합니다. 삼손이 딤나에서 결혼할 때 ‘잔치’를 배설하는데, 히브리어로 이 잔치는 ‘미슈테 (מִשְׁתֶּה[Mishteh])’라고 합니다. 이는 ‘마시다’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술이 빠지지 않는 잔치입니다. 이미 독주를 마시기 시작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실인은 사체를 가까이하면 안 되지만, 삼손은 자신이 죽인 사자의 몸에서 나온 꿀을 떠먹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삼손이 그 부정한 꿀을 부모에게도 가져다주어 먹게 했다는 점입니다. 부모는 그것이 사자의 사체에서 나온 것인 줄도 모르고 먹습니다. 아들의 타락과 부정이 부모의 타락과 부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노아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포도주를 멀리하며 거룩하게 삼손을 키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어떻게 자랐습니까? 그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사자의 사체에서 꿀을 찍어 먹고 이방인 여인과 술잔치를 하며 살았습니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기까지 표면적으로는 나실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내면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독주를 마시고 사체를 만짐으로 부정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부모가 그렇게 기도하며 잘 키웠는데, 왜 삼손은 저 모양일까? 결과가 그렇다면 실패한 교육이거나 부모의 신앙 교육이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로이기도 합니다. 교육은 통제가 아닙니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 인생을 완벽하게 세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도가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신앙 안에서 교육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아이가 자라고 나면 어떻습니까? 스스로 교회를 떠나려고도 하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실패하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신앙 교육은 필요합니다. 돌아올 수 있는 거룩한 근원을 심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삼손은 나실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며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눈이 뽑힌 삼손이 마지막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외쳤던 부모의 기도가 그의 영혼 깊은 곳에 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자녀 교육으로 인해서 좌절하거나 자녀의 일탈로 고통받는 성도님들이 있으십니까?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유아세례를 베풉니다. 세례받는 아이의 부모와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모든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아이의 머리에 물을 적시며 세례를 베푸는 것은 아이가 아무 굴곡 없이 평생 꽃길만 걷는 것을 보장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삼손처럼 세상의 유혹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사자의 사체에서 꿀을 찾는 일탈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 아이들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기르겠다고 서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이들의 인생이 부모의 실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노아가 하나님께 “어떻게 기르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미리 삼손의 미래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다, 할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도리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삼손이 눈이 뽑히는 실패의 자리까지 추락하게 될지라도, 부모가 심어 놓은 나실인의 정체성을 붙잡고 다시 일어설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신뢰함으로 고백합시다. 하나님, 우리는 부족하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할지를 끝까지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살겠습니다. 이 고백과 믿음이 모든 신앙의 부모님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