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청구서
신약성경에는 빌레몬서와 유다서, 그리고 요한 1서, 2서, 3서가 한 장 밖에 없는 성경입니다. 분량이 굉장히 짧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빌레몬서처럼 편지글로 된 서신서가 여러 권이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빌레몬서는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쓴 편지라서 편지의 내용이 굉장히 내밀(內密)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서를 읽으면, 옛날에 형부가 언니랑 결혼하기 전에 언니한테 썼던 편지를 몰래 읽는 것처럼 실감이 나고 친밀감이 느껴지고 그렇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의 교인이었는데요, 워낙 부자였기 때문에 나중에 자기 집을 교회로 내주기까지 했고요, 결국 골로새교회의 담임 목회자까지 되었습니다. 원래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라고도 하고 ‘에바브라디도’라고도 하는 평신도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였습니다. 물론 그 복음의 씨는 바울에게서 떨어진 것이었고요. 골로새교회가 세워지면서 빌레몬은 바울에게 많은 신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울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렇게 세워진 골로새교회였는데, 바울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만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로마 황제 외에 다른 것을 섬기거나 경배하는 것은 법으로 엄하게 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오네시모라는 사람도 감옥에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빌레몬의 집에서 부리는 종이었는데, 도망을 나왔다가 어찌어찌해서 이곳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거예요. 그런데 세상 일들이 다 우연히 되는 것 같아도 하나도 우연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오네시모를 만나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두 사람이 결국 감옥 안에서 만나게 된 줄 믿습니다.
사실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이 골로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부터 오네시모와 바울은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감옥에서 다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아는 사람 하나 만나서 반가운 것이 아니라, 어쩌다 종이 되어서 남의 집 머슴으로 살던 오네시모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바울은 그게 너무나도 기뻤을 겁니다. 감옥 안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저 시간이 나는 대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면서 그 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누면서 상담도 해 주고 그랬겠죠. “바울 선생님! 아시다시피 저는 빌레몬 어르신 댁의 종이었는데, 도망을 나왔습니다. 이제 잡히면 난 죽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런 얘기들을 나누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바울 사도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보니까, 오네시모 이 청년이 학교를 못 다녀서 그렇지 사람이 꽤 똑똑한 거예요. 똑똑할 뿐 아니라, 성실하고 사람이 됐어요. 그래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는데요. 옛날엔 우체부도 없고, 누군가 직접 빌레몬에게 가서 바울 선생이 쓴 편지를 전해 줘야 되는데, 갈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오네시모에게 편지를 줘서 보낸 겁니다.
그 편지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지금 바울과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로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편지를 쓰는 거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 그리고 우리의 동역자인 빌레몬, 그리고 그의 부인 압비아, 그리고 빌레몬의 아들인 아킵보, 그리고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빌레몬의 집이 교회였다는 겁니다. 골로새교회로 보여지는데요, “압비아 사모님도 잘 계시죠?”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 빌레몬의 아들 아킵보가 요샛말로 하면 신학생이 되었나 봐요. “아킵보 전도사님도 공부 잘 하고 있죠?” 그러면서 빌레몬의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렇게 점잖게 운을 띄운 다음에 빌레몬을 살짝 띄워 줍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풀어 줘서 자유인이 되게 해 주고, 더 나가서 ‘내가 오네시모를 데리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으니 오네시모를 나에게 달라!’는 얘기를 하려니까 먼저 빌레몬의 기분을 좋게 해 줘야 되잖아요? “내가 항상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 목사님,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떨어져 있지만, 들려 오는 소식에 의하면, 우리 예수님께 대한 것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 대한 빌레몬 목사님의 사랑과 믿음이 대단하다고 하니 참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모름지기 교회라는 것은 빌레몬 목사님처럼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죠. 세상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교제를 보고 그들도 예수를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성도들의 마음이 목사님으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다고 하니, 내가 목사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내가 신앙의 선배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떳떳하고 아주 당연하게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사랑으로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아시다시피 나는 나이도 많이 먹었고, 이 나이에 지금 옥에 갇혀있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러면서 은근히 동정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의 부탁을 좀 들어 줘라! 감옥에 있는 나를 수발하면서 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오네시모를 좀 내게 다오!’ 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오네시모는 내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복음으로 낳은 믿음의 아들이오! 그 전에 목사님 집에 종으로 있었을 때에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복음을 위해서 나와 목사님에게 아주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에게 맡겨서 보낼테니, 오네시모 이 사람을 잘 살펴 보세요! 오네시모는 내 심장과 같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이미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끝까지 자기 곁에 두고서 같이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거예요. 어차피 빌레몬도 사도 바울을 도와야 할 건데,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대신해서 바울을 도울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다만,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의 승낙 없이는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괜히 좋은 일을 하면서 억지로 하면 되겠어요? “그러니 빌레몬 목사님이 자의(自意)로 결정을 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예를 갖춰서 편지를 쓴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할 것인지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네시모를 데려간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은 잠시 떠나있지만, 오네시모가 나와 함께 있는 이상, 오네시모는 빌레몬 목사님과도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옛날처럼 오네시모를 종으로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날 봐서도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욱 오네시모를 살갑게 대해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 목사님이 나를 동역자로 여기신다면, 오네시모 역시 내 동역자라는 걸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네시모 보기를 날 보듯 해 주시기 바랍니다.”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동일한 동역자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오네시모 때문에 발생한 민사상의 피해가 있거든, 그거 내가 다 변상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청구할 것이 있으면 다 나한테 청구하세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빌레몬이 감히 사도바울에게 돈을 물어내라고 하겠어요? 게다가 바울이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아세요? “내가 친필로 쓰는데...” 이 말은 “내가 당신에게 대놓고 하는 얘긴데...” 그 소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따지자면 당신에게 받을 것이 많아! 그렇지만 내가 당신에게 받을 것 다 얘기 하지 않을게!” 그 얘기예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좀 많이 나간 거 같죠?
그래서 바울이 분위기를 살짝 환기시키는 뜻으로 “오, 형제여!”라고 합니다. 이건 그냥 친밀감으로 부른 호칭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그냥 “빌레몬 목사님~” 그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다 알아들을 만큼 얘기를 했으니까, 이제는 주 안에서 우리 빌레몬 목사님 때문에 내가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빌레몬 목사님께서 내가 말씀 드린 부탁을 다 들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내가 말씀 드린 것 보다 오히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진 않으실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마무리 했는데요, 오늘 본문은 21절까지만 정했는데, 22절에 보면 “내가 출소하게 되면 내가 머물 집 한 칸 마련해 주소!” 남들이 보면, 정말 염치 없는 부탁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요, 목회자가 동역자에게나 또는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처럼 뭔가를 요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요구하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들어줘야 할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쉽진 않은 일이겠죠? 그런데 제가 산청에서 목회할 때 바로 이웃에 있는 덕산교회에서 목회하셨던 이호준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이호준 목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전도사로 시무하실 때였으니까, 한 40년 전쯤이나 되었겠네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 교회에 하태봉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 당시에 ‘아리아 피아노’ 사장님인가 그러셨다는데, ‘전도사님이 필요하신대로 쓰시라!’고 그러면서 1,000만원짜리 통장을 주시더래요. 그 바람에 마음껏 사역을 하셨고, 1986년에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빌리그레함 목사님 집회에도 참석하고 오셨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선 144명 밖에 참석을 못한 자리였답니다.
그런 걸 보면, 성도와 목회자는 뭘 달라 말라 해서 주고 말고 그러는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의 호위호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사역 때문이라면 바울처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빌레몬처럼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청구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