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또 다른 영적 아들인 디도가 사역하던 크레타섬은 그야말로 악한 문화가 성행한 지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디도서입니다.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뒤를 이어 거친 현장인 그레데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도 바울의 영적인 아들로 디모데를 제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디도 역시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라고 말할 만큼 바울이 깊이 신뢰했던 인물이었습니다(딛 1:4). 디모데가 다소 내성적이고 온화한 성품이었다면, 디도는 교회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었고, 그리스 사람, 헬라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초대교회 안에는 아주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때 함께 동행한 사람이 디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곳에서 디도를 예로 보여 주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것이지, 할례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갈 2:3~4a)
얼마든지 할례를 받게 할 수 있었지만,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를 증거로 대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해 나갔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당이 나뉘고 음행이 가득하여 사도 바울마저 감당하기 힘들어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바울은 디도를 파송합니다. 그에게 전적으로 교회를 돌보도록 합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교회의 회개와 부흥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바울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디도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지중해에 있는 그레데입니다. ‘크레타섬’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바울이 1, 2, 3차 전도 여행을 다 마치고 로마 감옥에 있다가 1차로 석방된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디도와 함께 크레타섬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바울은 디도를 그곳에 남겨 두고 니고볼리로 떠납니다. 바울은 디도를 남겨 둔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딛 1:5)
여기서 ‘남은 일을 정리한다’라는 말의 원어적인 뜻은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다’, ‘부족한 것을 채워 완성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크레타섬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당시 크레타섬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도덕적인 타락과 사기로 악명이 자자한 섬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표현 중에 ‘크레타인처럼 행동하다’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를 ‘크레티조’(κρητίζω) 또는 ‘크레티제인’(κρητίζειν)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다’, ‘사기 치다’라는 뜻으로 통용되었습니다. 바울 역시 본문에서 크레타 사람들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딛 1:12~13a)
바울도 크레타 사람들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속이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이익을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이 삶의 방식이었던 곳입니다. 이곳이 크레타섬입니다.
그곳은 왜 이토록 타락한 곳이 되었을까요? 지리적으로 크레타는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한 섬이었습니다. 무역이 활발했고 해상 교통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풍요로우며 동시에 온갖 문화와 우상들로 혼란스러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역사적으로 크레타는 ‘해적들의 소굴’이자 용병들의 고향이었습니다. 돈만 주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는 거친 용병 문화가 자리하고 있었고, 약탈을 일삼는 해적 문화가 섬 전체의 지배적인 정서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잔인하고 거칠었겠습니까? 게다가 크레타는 그리스신화에서 가장 바람기 많고 거짓말에 능한 제우스의 고향이었습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빌려 “우리는 원래 이런 민족이다”라며 자신들의 거짓말과 음란함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거짓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망 없어 보이는 타락한 땅, 도저히 복음이 뿌리내릴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척박한 토양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도에게 교인들을 엄하게 훈련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딛 1:13b~14)
바울은 그들을 강하게 훈련하지 않으면 주변에 쉽게 동화되고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거짓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래서 디도서의 시작부터 크레타섬의 성도들을 향한 교훈과 명령을 숨 가쁘게 써 내려갑니다. 디도서 1장부터 오늘 본문 직전인 3장 3절까지,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부터 가정의 남녀노소, 심지어 일터의 종들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삶의 영역들을 하나하나 거론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권면을 계속해서 써 내려갑니다.
1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뼈대를 세우기 위한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온 동네가 사기와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기에, 영적인 지도자만큼은 세상과 철저히 다른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딛 1:7~9a)
그리고 2장에 들어서면서 성도들의 가정과 교회 안의 모든 세대들을 향한 촘촘한 교훈의 말씀으로 이어 갑니다. 나이 많은 남성들에게는 늙었다고 대접받으려 하지 말고, 절제하고, 경건하며, 신중하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라고 명령합니다(딛 2:2). 나이 많은 여성들에게는 행실이 거룩하며, 남을 모함하지 말고, 젊은 여성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고, 인생의 영적인 멘토가 되라고 합니다(딛 2:3~4a). 또 배움을 받는 젊은 여성들에게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전합니다(딛 2:4b~5). 그리고 디도와 같은 젊은 남성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신중하며, 모든 일에 선한 행동의 본을 보이고, 단정함과 썩지 아니함을 나타내라고 단호하게 권면합니다(딛 2:6~8).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성도들의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인 일터와 사회로도 방향을 맞춥니다. 당시 사회적인 신분으로 낮고 억울한 자리에 있던 종들에게는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라는 말과 더불어 기쁘게 일하고, 거슬러 말대꾸하지 말고, 무엇보다 도둑질하지 말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라고 권면합니다(딛 2:9~10). 이어서 세상의 정부와 이웃들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 대하여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고, 아무도 비방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관용하며,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나타내라고 명령합니다(딛 3:1~2).
<바울은 크레타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론과 정신으로만 읽는다면 당연하고 마땅한 이야기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크레타섬의 상황과 현실을 이해한다면, 이 말씀은 참으로 부담되고 시행하기 힘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도서에서 사도 바울은 윤리적인 규범을 하나하나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섬의 현실은 남을 속이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현실입니다. 실상 그들의 상황에는 뇌물과 음란, 거짓말이 만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들과는 정반대로 신실하고 정숙하게 살라, 순종하며 온유하게 선한 일을 하며 살라는 말씀은 어려운 과제일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아마도 이 말씀을 읽어 가는 가운데 크레타섬의 성도들은 두 가지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첫째, 왜 우리가 손해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눈만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에서 왜 순전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가? 두 번째 질문으로는, 과연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이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이 나올 때쯤, 사도 바울은 위대한 복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윤리적인 압박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방향을 바꾸어 성도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할 것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딛 3:4~5a)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남들보다 더 착하게 살거나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그대로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3절의 말씀처럼 그들 역시 전에는 어리석었고, 속았으며, 각종 정욕의 종노릇을 하던 절망적인 상태였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딛3:3)
그런데 우리에게 어느 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일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빛이 들이닥치듯,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생에 뚫고 들어와서 우리를 건져 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여기서 ‘씻음’과 ‘새롭게 하심’은 헬라어 문맥상 단번에 일어난 완성된 형태를 의미합니다. 즉, 이 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단번에 용서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성령으로 단번에 살려내셔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 놀랍고 완벽한 신분의 변화는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 취소되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6~7)
‘죄 용서’와 ‘거듭남’을 넘어서 ‘성령’을 부어 주시고 ‘의롭다’ 하시며 우리를 소망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시제도 모두 완료형 또는 과거형입니다. 한마디로 완성된 것, 이미 다 지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할 필요가 없고, 계속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믿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완전히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복음 위에서 선한 일을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했던 디도서 1장부터 3장 3절까지 많은 윤리적인 규범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 바울 사도는 앞서서 그토록 많은 윤리적인 과제들을 디도에게 이야기했을까요? 바울은 크레타 사람들의 여러 상황마다 바르게 살 것과 온전하게 살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일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우리의 부족함이나 모자람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토록 크레타 사람들을 향하여 바르게 살 것을 권면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확실한 복음의 기초 위에서 이렇게 말을 이어 갑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딛 3:8a)
바울은 말합니다.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제 자기 삶의 현장에서 조심하여 선한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조심하여’의 헬라어 원뜻은 ‘마음을 쓰다’, ‘깊이 생각하다’입니다. ‘힘쓰다’는 ‘지속적으로 그 자리에 머물며 끊임없이 힘쓰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어떻게 선한 일을 할지 늘 생각하면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힘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한 일에 힘쓰며 바르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답고 유익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믿음입니까? 선행입니까? 당연히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은 필요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계속해서 선행을 해 나갑니다. 당연한 과정이자 결과입니다. 믿는 자는 선행을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복음과 선행 사이의 두 가지 극단적인 오해를 가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첫 번째 극단은 ‘쾌락주의와 게으름(방종)’입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강력한 확신이 도리어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강력한 믿음은 때로 우리를 신앙적으로 게을러지게 만듭니다. 어차피 천국에 갈 텐데, 내가 죄를 더 짓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실 테니 마음껏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면 쾌락주의와 방종, 게으름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극단은 반대로 ‘율법주의’입니다. 구원받았으나 선행을 계속해서 강조하다 보면 때로는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갚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생각을 하다 보면, 봉사에 힘쓰던 열심이 나도 모르게 율법적이 될 때가 있습니다. 나 자신을 그 자리에 옭아매고, 하지 못하게 되면 자괴감과 실패감을 갖기도 합니다. 또한 봉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난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때로는 나의 행동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유익할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아름답습니다.>
그렇다면 ‘방종’과 ‘율법주의’라는 두 가지 절벽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딛 3:8b)
바울은 분명히 ‘구원받기 위해 선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힘쓰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그것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삶의 마땅한 ‘방향’(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힘쓰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상태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조금 해도 괜찮습니다. 조금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선한 방향을 잡고 선을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첫 번째 모습입니다. 조금 더디고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선한 일을 힘써야 하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지금 크레타섬 같은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똑같이 이기적이고 음란하며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들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교회에도 유익하지 않고 복음의 문도 막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손해를 보면서도 신실하고, 억울하면서도 온유하며 이웃을 위해서 선한 일을 베풀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주목할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질문하게 될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의 의미를 깨달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세상의 사람들을 감동하게 할 것이고, 복음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귀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올해 ‘선함의 번짐’이라는 주제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선함의 번짐’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선함을 실천한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과거이고 완료형입니다. 성령도 풍성히 받았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또 다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선함의 번짐’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우리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한 나라의 왕과 왕비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왕권의 상속자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겠지만, 왕권을 이미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걸음마를 배우고 뛰어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주 넘어지고 울며 실수도 많이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왕과 왕비가 이 아이에게는 왕이 될 자격이 없으니, 다른 아이를 찾아보자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상속자의 지위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고, 실수해도 다시 노력하며 성장하는 모습은 부모에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도 아름다우며, 아이에게도 유익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행의 삶입니다. 선행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조금씩이지만 방향을 틀어 갑시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선함을 향해 방향을 틀고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곳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귀한 선한 주님의 청지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