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게디 굴에서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베고 그의 목숨을 베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사실도 모르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 굴을 나갔습니다. 얼마 후에 다윗도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소리쳤습니다. "왕이여 제가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습니다. 왕의 겉옷자락을 보십시오. 저는 겉옷자락만 베어 내었을 뿐입니다. 이제 제가 왕을 대적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저의 결백을 믿어주십시오."
다윗의 이 말을 듣고 사울이 소리를 높여 울며 말했습니다. "다윗아! 나는 너를 학대했으나 너는 나를 선대하는구나! 하나님께서 너의 그 선한 일을 선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앞으로 네가 왕이 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내 후손을 끊지 말아다오." 사울은 다윗의 행동에 감명을 받고 일시적으로 다윗 쫓기를 포기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축복(신명기 28장)을 받는 자"가 갖추어야 할 3가지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겸손한 성품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상관없지만 머리가 되는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겸손함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의 겸손한 성품이 여러 장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를 끊임없이 죽이려는 사람이지만 변함없이 "내 주 왕이여"라고 호칭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8절). 사울은 그 호칭을 듣고 큰 자책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둘째, 다윗의 호칭을 듣고 사울이 돌아보는데 그때 땅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보십시오(8절). 그 공손히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사울은 공연히 다윗을 쫓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셋째, 다윗이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으로 묘사하는 부분을 보십시오(14절). 그토록 겸손한 언행을 취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 사울의 마음속에 있던 노기가 상당 부분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함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겸손함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을 머리에 두십니다.
2. 인정하는 성품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상관없지만 머리가 되는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앞서 머리가 된 사람을 떨어뜨리려 나무를 흔들지 말아야 합니다. 앞선 사람의 특징과 장점과 지위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조금이라도 사울의 왕권을 흔들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이 아무리 잘못했을지라도 왕이 기름부음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 자신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을 개인적으로 흔들려고 했다면 그도 언젠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시로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원리입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있을 때에는 교인들을 비교적 훌륭하게 보다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오히려 교회와 교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분들을 가끔 봅니다. 왜 그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교인들에게 잘못된 모습이 너무 많이 보인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의 잘못된 모습을 아무리 많이 볼지라도 교회와 교인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절대 비뚤어져서는 안됩니다.
물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교인의 부족한 삶을 더 많이 목격하기 때문에 비판거리가 많아졌을 수 있습니다. 아마 상처도 많았고 실망거리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교인됨을 소중히 여긴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교회와 교인을 더 훌륭히 여길 줄 아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부족한 모습이 보여도 세상 사람들보다는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교인들이 더 나빠!"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도 교인이면서 교회와 교인을 비판하는 것이 마치 교양인 것처럼 교인과 교회를 마구 비판하는 사람을 보면 그런 사람은 교양인, 인격자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비판주의자는 하나님의 복된 머리가 되는 축복을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연히 머리가 되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머리가 되는 순간부터 그 자신도 필연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판주의자가 정당하지 못하게 비판한 만큼 다른 비판주의자에게 비판받게 하십니다.
물론 정당한 비판은 바른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 아니면 전혀 엉뚱한 비판은 절대 금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사귀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후에 "남자는 늑대야!"라고 하는 것과 같은 단정을 내린다면 얼마나 엉뚱한 소리입니까. 마찬가지로 교인에게 한 번 상처를 받았다고 "교인은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엉뚱한 말입니까. 그러면 세상 사람을 교인들보다 더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이제까지 그 사람과 지냈던 좋은 시간은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특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런 비판적 습성을 없애야 한다. 일전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 같은 분이 나올 수 없다!" 누군가 조금 이름이 올라갔다 하면 자꾸 나무를 흔들어대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앞선 경우에 그를 흔들려는 자세를 가지면 절대로 머리가 되는 복된 삶이 다가오지 않는다. 앞선 사람을 정당한 이유 없이 흔들지 말고 그의 지위와 장점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에게 축복된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앞선 사람을 정당한 이유 없이 흔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처럼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기만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그는 머리가 되는 복된 자리에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
3. 포용하는 성품
평범하기 살기 위해서는 상관없지만 머리가 되는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학대하는 사람까지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이 다윗의 선하고 진실한 태도를 보고 다윗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 이 경우에 누구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겠습니까. 선대하는 사람을 학대하면 사울과 같은 "저주받은 머리"가 됩니다. 그러면 말로가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학대하는 사람을 선대하면 다윗과 같은 "복된 머리"가 됩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창대하게 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용서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본문 19절에 나오는 사울의 말을 통해서 용서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용서는 "원수를 평안히 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이런 포용정신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이런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복을 하시고(12절), 자신의 사정을 틀림없이 신원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15절).
그러므로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십시오. 그 원수로 하여금 그냥 가게 하십시오. 그래도 억울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된 그 사람이 회개하면 그는 심판을 면할 것이지만,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로 그냥 가게 해서 원수갚은 일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그 일을 처리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냥 가게 하지 않고 여러분이 원한을 갚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 사람과 여러분 사이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힘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됩니다. 처리하는 과정에서 상처가 깊어지고, 처리해도 상처가 심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서 그냥 그 사람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음 원리를 오늘 꼭 기억하십시오. 용서가 작은 자! 하나님은 그의 축복과 지위도 작게 하실 것입니다. 용서가 큰 자! 하나님은 그 축복과 지위도 크게 하실 것입니다. 용서가 적은 자! 하나님은 그에게 주시는 사람도 적게 하실 것입니다. 용서가 많은 자! 하나님은 그에게 주시는 사람도 많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을 얻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큰 용서를 실천함으로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