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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새로운 것/롬7장 6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영의 새로운 것

 

롬7장 6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인사(축원)와 연결과 서론(천천히 이해확인 반복 멈춤 한교훈 톤을낮게 관심과 집중할 질문이나 예화 짧게)큐티

오늘 "영의 새로운 것"주제로 깨달음과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구호:주여!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오직 예수와 십자가만 선포-예수 영접 구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신자들이 가지는 구원에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

‘나는 이제 지옥에 가지 않는다’,

‘나는 죽어서 천국을 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은혜와 영생의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우리의 구원을 설명할 때 그런 차원말고도 다른 차원이 있는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은혜와 영생의 자리로 옮겨졌을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삶과 신분이 부동한 이유가 무엇이야 하는 것입니다.

곧 구원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신자에게 허락된 복된 하나님의 사역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율법에 관한 차원에서 신자 된 안전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율법과 결별했다는 뜻을 알려면 본문에서의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표현으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않는다’는 설명 속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 

다시 말해서 의문에 묵은 것으로 하지 않는 신자된 원리들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피려고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따질 때에 잘못하면 율법과 영이라는 두 개의 실체를 놓고 둘을 대조하고 적대하는 오해를 할 수 있지만 

내용을 따라 들어가보면 그런 뜻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부터 찾아봅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안한다’의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입니다. 

글자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3:3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여기에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먹으로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썼다.

돌비에 쓰지 않고 심비(心碑)에 썼다라는 평행을 이루는 이 두 비교말입니다.

먹으로 썼다고 하면 우리 자신의 내부가 아닌 바깥 어디엔가 기록한 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 안에 기록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두 번째로 나오는 것과 같이 돌비에 쓰여진 것이 아니고 심비에 쓴 것이라는 데서 드러납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의 영으로 썼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밖에 있는 하나의 지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면적인 원리와

내면적인 방향과 내용으로서 우리의 것이 된 것임을 대조합니다.

율법과 영,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논할 때마다 강조했던,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내 의지와 내 노력으로 선택하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바깥에 있는 어떤 목표를 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안의 내용과 원리로 속에 있는 것이어야 함을 이렇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3의 내용이 고린도전서 2장에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이 말은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입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전혀 들은 바 없는 항구 도시 고린도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할 때입니다.
바울은 어떤 원리와 사상을 전하고,

그 사랑을 상대방에게 설득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죽어 있는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도의 하나의 수단으로 삼으시길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시고,

죽은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내용을 듣고 알았고 선택했다는 잘난 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내 지혜를 전한 것도 아니고

또 너희가 내 말을 알아 들은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이 일에 대하여 자랑할 수 없다. 왜냐?

내 스스로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에 역사하사 너희의 죽은 영혼을 소생시켜,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불쌍히 여기시며 너희에게 무엇을 허락하셨는가를 알게 하기를

원해서 내가 심히 떨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말로 전하고 인간의 사상이 되어 너희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하여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오직 한 마음으로 갔기 때문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절)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으로 쓴 자들이라고 합니다

.밖에 써 있는 무엇을 보고 너희가 ‘아 그렇구나’라고 깨달아 신자가 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수술하시고 바꾸어 놓고 새로 태어나게 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용에 있어서 같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스스로 책임지고 내 능력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것을 만들어 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레미야의 글을 살펴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이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3). 유명한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있으면 그 전에 있었던 옛 언약이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새 언약이라는 말이 붙었으면 옛 언약과는 다를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내용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 언약의 내용을 봅시다. 33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새언약의 내용은 옛 언약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약속이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스라엘을 출애굽시키고 모세 입을 통해 약속한 계속 반복되고 확인되는 동일한 약속입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과 같으면 새 언약일 필요는 없습니다.

언약을 성취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방법에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옛 언약을 봅시다.

32절 “나 여호와 말하노라 이 언약은”에서 ‘이 언약’은 새 언약입니다.

“새롭게 세울 언약은 옛 언약과 다른데 옛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입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우셨습니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라는 동일한 내용으로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남편이 되어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가장 가깝게, 가장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 언약을 파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십니다.

이 새 언약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 여호와가 말합니다.

그 날 후에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동일한 내용을 바꾸어 놓기로 한 것입니다.

외부에서 압력을 넣고 좋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인도하며 끌어당기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순종할 마음과 하나님의 요구대로 좇아갈 마음이 없는 자들을 성공시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이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를 변화시키기로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합니다. 그 뜻은 신자란 이제 영원히 죽을 신분과 운명으로부터 영생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바뀔 수 없는 영광된 신분의 자리에 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죄만 좇아가고 죄 아래 있고 자기밖에 몰랐던 우리를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 뜻에 부합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바꿔놓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킨 것입니다. 같은 예레미야 31:34을 보시면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서 새 언약의 결과를 말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 내부로부터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의와 거룩을 향한 생각과 그런 원리와 소원과 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시오,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신자 된 것을 점검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자신 안에 주를 사랑하며 주의 뜻을 사모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려는 소망과 원리가 들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마음속에 죄를 사모하는 것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배우고, 교육을 받고, 무엇을 알아서 행동하려 했지만, 점점 더 죄를 따라서 삽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자가 된 지금도 우리는 연약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고 실패할때가 많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을까? 옛날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제 주를 향한 내부로부터 소원이 있습니다. 주를 사모하며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의와 거룩에 대한 우리 자체의 본성적인 열심과 지향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성화의 단계에서 훈련의 문제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중생했다, 구원을 얻었다 하는 자일지라도 시험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왜 필요하냐면 여러분이 신자가 된 이후에도 실패했을 때 이런 시험에 빠져들곤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원받은 것 같지 않아, 아직도 죄에게 지는 것을 보니까 죄된 성품이 하나도 변화되지 않고 죄가 아직도 나를 주장하고 있고 내 속에 죄가 아직도 그냥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옛날에는 죄가 주인이고 의와 거룩이 손님이었다면 지금의 의와 거룩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인이고 죄가 손님입니다. 그런데 원수들이 신자들을 계속 유혹하고 있고 갓 태어난 신자이기 때문에 이 죄를 이길 힘이 없곤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구원 얻은 자입니다. 죄에 대하여 시련과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확인할 영으로 삶을 사는 신자의 현실이며 신분입니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본문의 표현은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가지도록 시사하고 있습니다. 구원 얻은 신자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그 이야기는 율법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지를 그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압니다. 예전에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길 때는 다른 사람과 비교된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의 우월감밖에 없었습니다. 윤리를 지키고, 도덕을 지키고 혹 종교를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잘난 것을 증명하는 그런 시각과 그런 기준으로 율법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에 대해 깨우침과 중생한 자로서의 주님의 마음과 연결된 어떤 본능을 가지게 됩니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이의 율법관을 누가복음 18장에서 살펴 보십시다.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18-25).



이 말씀은 결단코 부요함에 대하여 꾸중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요함 역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지금 중생하지 못한, 죄인으로 남아 있는 시점에서 인간이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 율법을 지켰느냐?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 지켰습니다.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거짓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냐, 그럼 네 재산을 네 이웃에게 다 주어라.” “그것은 못하겠습니다”이렇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결론내리셨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6-40).



율법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율법을 지켜라.” 그런데 주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그러면 네 재산을 네 이웃에게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곧 부자는 율법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너는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는 물으심은 바로 “네 재물을 다 팔아 네 이웃엑 주어라”하는 이야기 속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것은 못하겠습니다.”하고 도망간 셈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을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느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느냐의 차이입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결단코 율법을 배척하거나 율법을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대신 영이라고 말할 때는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해서 하나님과 직통하는 어떤 신비한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는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나라에서의 영광과 영생을 약속받고 있고 취소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과 뜻이 통하는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생각 속에 어떤 변화를 크게 받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신자는 그렇게 변한 자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차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변화된 자임을 느끼고 구원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자들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3-15).



모세가 40일동안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앞에서 법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자 영광의 하나님과 마주했던 것만으로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내려왔을 때 모두 그 얼굴을 주목하고 모세에 대하여 평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놀라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온 율법이 전달되어야지 나를 보지 말라.” 그 광채를 보고 사람의 마음이 미혹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얼굴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을 보았던 것은 오해를 율법에 대하여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아직 수건이 덮여 있는 것같이 가리워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여러 가지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한번은 블레셋과 싸우다가 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에 있는 장막 가운데 안치한 벱궤를 가져오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궤 자체가 어떤 신통력을 가진다고 믿었습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법궤 자체의 어떤 신통력을 믿었기 때문에 그걸 갖고 와서 싸워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죽는대패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법궤는 빼앗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오해, 즉 불신자들일 때 우리가 율법을 보는 개념, 신에 대한 개념, 종교에 대한 개념 그것은 다 진리와 생명으로의 접근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치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지켰다는 자기 의지의 높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도덕적, 윤리적 고결함을 나타내는 것이지 하나님과 연결된 어떤 원리와 내용, 생명과 진리, 영원 등 그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과 연결된 것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원을 얻고 나면 의문의 묵은 것이 우리의 원리가 아닙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서 율법의 정신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사람들은 의지의 화신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잘못 미화된 사람 하나가 욥입니다. 욥은 마치 인내의 화신같이 되어 있습니다. 욥이 얼마나 믿음을 지키고 인내했는가 욥기를 보십시오. 욥은 하나도 인내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처음 며칠은 좀 참고 있다가 그 다음부터 소금맞은 지렁이같이 원망을 합니다. ‘왜 내가 태어난 날이 달력에 있었는가?’ ‘왜 우리 어머니가 건강해서 나를 낳았는가?’ ‘왜 내가 튼튼하게 자라났나?’ 자기 자신을 향해서 별별 악담을 다합니다. ‘왜 내가 살아서 이 꼴을 당하는가? 하나님 도대체 왜 그러는 것입니까?’ 얼마나 아우성을 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욥을 인내의 화신이요, 믿음의 화신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즉 기독교 신앙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옛날의 본성, 종교든, 도덕이든, 윤리든, 교양이든 다 우리의 의지를 근거로해서 획득되려고 하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밝히 말하려 하는 것은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홀로의 노력으로 우리밖에 있는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잡는 식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뀐 자들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권면하시며,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이하에서 보았을 때 옛 언약은 내가 그들의 손을 잡고 남편이 되었어도 나의 말을 안 듣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우리 안을 바꾸어 놓기로 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 생각을 바꾸어 놓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구원 얻은 자의 지금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받은 것인가를 잊어버린 채 노력 일변도로 가려고 합니다. ‘나는 희망 없어’ 하고 무너집니다. 지면 다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하도록 만들어 진 존재인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만 섬겨라 함이 아니라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산다는 것은 이제 우리는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요인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옛 동기는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의 동기요, 요인입니다. 로마서 8:15 말씀을 보면, “너흐니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로서 사랑이 기준이 되고, 모든 문제의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정죄가 없습니다. 사랑의 매와 형벌의 매는 이야기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율법이 무엇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내용입니다.



우린 율법에 매여 있지 않지만 율법의 정신을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명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사랑이 동기고, 사랑이 기준이고, 사랑이 목표입니다. 신자는 그가 잘못했을 때도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으로 그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야지 나는 이제 희망이 없다고 자포자기 하면 안됩니다. 부끄러운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송스러운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실패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장입니다.



요한일서 4:18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가를 보십시다. 형벌의 두려움이 있는가, 그것이 있다면 아직도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자꾸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두려워한 만큼 신자에게 손해일 뿐이지 두려워해서 이익 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사랑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여자 성도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거기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축하전을 보냈습니다. 글자 수가 많으면 돈이 많이 들어서 ‘요일 4:18’라고 보냈습니다. 결혼실 할 때 축전이 도착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축전이 온 것을 보고 부부가 허니문을 떠나면서 차 안에서 성경을 펴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우체국에서 실수를 했는지 ‘요4:8’이라고 써있었어요. 1자가 없어졌습니다. “여인아 네게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니라”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유명한 요한일서 4:18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따라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니라’는 우리에게 명령이 아닙니다. 그런 자가 된 것을 일깨우기 위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 속에 포함된 자로서 허락된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신분이요, 우리의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빼앗기지 마십시오. 신자에게 가장 큰 병은 자기가 누구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허락된 것을 사용할 줄 모르고, 누릴 줄 몰라서 많은 것을 가졌으나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하면서 늘 울기만 합니다. 감사와 찬송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복된 신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해서 이 말씀을 증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제 우리도 두려움을 내어 쫓고 사랑 가운데서 우리 주님과 동행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기쁨으로 주를 만날 것을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맛보게 하시고 구원 얻은 기쁨을 누리게 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더 많은 감사와 찬송이 있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더 많은 사랑의 열매가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이들로 주 앞에 사랑을 입은 자요, 구원을 받은 영원한 나라에 속한 시민임을 알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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