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5-6)
로마서 7:4로 신자란 율법과 결별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라는 것이 7장에 가장 중요한 요점임을 확이했었습니다. 5절, 6절에 이르면 그것이 왜 중요한가? 왜 그래야함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있지만 5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5-6).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왜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가? 육신에 있는 것이 이렇게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원래 육신을 들먹이지 않았고 율법과의 결별을 강조했습니다. 5절에서는 육신으로 나옵니다만 ‘육신에 있다’는 말과 ‘율법에 있어다’라는 말이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일, 죄가 우리에게 사망을 열매 맺게 했다는 이 중요한 내용으로 5절과 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육신에 있다는 말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정신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마음속으로 가끔 착한 일을 하는데 실제로는 실천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실 악한 생각을 선한 생각 이상으로 합니다. 또한 정신은 악한데 육체가 선하다는 사람은 아직 못만나 봤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정신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말은 변명으로 쓰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래뵈도’라는 말을 합니다. ‘겉으로…속은…’어리석은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헛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 중에 육신이라는 말, 육체라는 표현을 대단히 죄악시하는 버릇은 그리스적 발상입니다. 성경에서는 육체를 한정된 것, 영원한 가치를 갖지 않은 것으로 ‘육체는 풀과 같다, 이슬과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본문의 ‘육신’이라는 말은 사람이 자신을 혼자 책임져야 되는 존재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것’도 ‘은혜아래 있다’는 말과 대치된 말이고,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자기를 책임져야 하므로 외부로부터 다른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를 표현할 때 ‘율법 아래 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이 육신이라는 말이 그런 표현, 어떤 원리하에 있는가, 어떤 체제아래 있는가에 상징적인 표현인 것을 증명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4-5). 영을 좇는 자, 육신을 좇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8-9).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않다고 하면 예수 믿는 자들은 다 귀신입니까? 아닙니다. 영에 있다는 것은 영적 원리 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했다와 영에 속했다는 말을 결부해서 육신을 죄악시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인간을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셔서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가 사람이 되었으므로 인간 존재 중에 육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육체를 죄악시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에 이 육체로 한 번도 선한 일의 도구로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인간이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쌓았던 모든 것이 죄를 지은 것밖에 없고 그 죄를 이 몸으로 지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그리고 죄를 따라 산 대표적인 표현으로써 육신, 육체라는 말을 쓸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적 사고방식에 의한 영이 갇혀 있는 츅체로부터 해방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사람의 모든 존재가 끊기고 죽어서 생명이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체를 인격과 결부하여 표현하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죽었어도 누구누구라고 하지 훍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가 다 썩어 뼈만 남아 있어도 이것은 누구의 머리카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인격과 분리되어서 인식되거나 호칭되지 않습니다.
육체에 대한, 물질계에 대한 어떤 거부감, 부정시하는 것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고 세상적인 개념인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즉 성경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육신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여태껏 죄밖에 지어 본 것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짓고, 죄 아래 있고 그래서 죄를따라 사는 그 원리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으로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영’으로 표현합니다. 영과 육신 이 두 가지를 상징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영은 공유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7:5,6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즉 죄를 따라서 살 때, 율법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간섭하시지 않고 스스로 책임져야 했을 때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앞서 로마서에서 살펴본 것같이 죄가 우리의 주인이었고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거부할 수 없고 선을 마음에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ㅡ지킬 의지력되 힘도 없었습니다. 육신에 있을 때에는 죄가 어느 만큼 우리를 좌우하고 흔들었느냐면 율법으로도 우리에게 사망을 열매 맺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죄의 가공할 권세입ㄴ;다. 율법이라는 것은 ‘원래 이것은 크다, 이런 것은 하지 말라,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이것이 의다’라고 가르칩니다. 죄는 우리에게 그것으로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선한 것을 갖다가 입력시켜도 결국 열매 맺는 것은 어쨌든 악과 사망밖에 없습니다. 육신 아래 있을 때는 우리가 스스로 책임져야 했던 것이 인간의 현실이었습니다.
그것이 로마서 7장의 전체 내용입니다. 4절, 5절, 6절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 로마서 7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율법으로도 우리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율법을 가지고도 의를 맺지 못하고 , 죄밖에, 사망밖에 열매 맺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 아래 있으므로 스스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
자기가 자기를 책임져야 했던 사람들, 자기밖에 자기를 보호할 수 없었던 입장이었을 때 인간은 도덕과 율법이 그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려고 해도 선을 행할 힘이 없고 그 선을 행하도록 마음에 어떤 법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선한 율법을 가지고 (율법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만들어냈습니다.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니고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을 들이대면 우리는 좋은 것을 가지고도 죄를 만들어낼 줄밖에 몰랐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9-11). 이것이 육신에 속한 자,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처지였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군에 갔을 때 처음 훈련소에 가니까 훈련소 소대장이 거듭거듭 이런 경고를 하더군요. 담요 갖다 주고 떡 바꿔 먹거나 총 갖다주고 떡바꿔먹는 군인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이죠. 저 같은 사람은 정신도 없지, 군인이 어떻게 담요를 갖다 주고 떡을 바꿔 먹고 총을 갖다 주고 떡을 바꿔 먹을 수 있겠느냐 생각했습니다. 두 주일쯤 훈련을 받고 보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지 말라고 가르친 그 경고를 듣지 않았으면 모포 갖다주고 떡 바꿔 먹는다는 발상은 안 일어났을텐데 그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아 이것을 주면 떡이 생기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사격장 철조망 바깥으로 “떡 사세요”하는 것은 그것 주고 이 떡과 바꾸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고 다니는 군장비 중에서 삽, 수통, 탄띠 무엇이든지 바꾸어줍니다. 얼마나 큰 유혹이었는지 모릅니다. 의지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기회가 없어서, 늘 서 있는 자리가 철조망과 멀어서 못바꾸었지 가까이 있는 이들은 예외없이 바꿔 먹고 밤새 기합받는 그런 일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요즈음 영화나 TV에 폭력물이 난무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재미있게 보는 것은 내가 그것을 직접 사용할 이유가 없는 동안만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누적되어서 얼마나 나쁜 일을 만드는 지는 나중에 화를 내야 할 일이 생길 때 알 것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황야의 무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태껏 보아 왔던 것이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때는 즐기는 오락에 불과했지만, 분노를 터뜨리면 여태껏 보았던 모든 것이 갑자기 무기가 되고 방법이 되어버립니다.
미국 영화들을 보면 욕들은 예사 낮춤 정도로 된 것이 많습니다. 요즘은 조금 없어졌습니다만 저희가 클 때는 이런 욕이 많았습니다. 누구누구를 부를 때는 ‘새끼’라는 말이 꼭 붙곤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예사 낮춤이었고 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욕입니다. 너무 흔하게 쓰이고 아무나 써서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썼습니다. 그러면 친구를 부를 때 그렇게 불렀으면 욕을 할 때는 그것 가지고는 안될 것 아닙니까? 욕을 할 때는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을 써야 됐습니다. 그러면 싸울 때 써야 하는 것을 욕할 때 써먹었으니까 싸울 때는 전쟁할 때 쓸 것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혼자서 책임져야 하고 육신에 거하며 율법 아래 있을 때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상태인가를 각자가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것과 구원 얻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인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 세상 속에서 성경과 반대되는 영향을 받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교육학인 것 같습니다. 교육은 사람은 무지해서 죄를 짓는 다고 가르치고 사람을 교육시키고, 계몽시키고, 좋은 환경과 조건들을 제시하면 고쳐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타락은 제일 좋은 환경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낙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인류가 지구상에 사는 동안 범죄가 제일 많은 곳은 환경이 좋은 곳입니다. 자연과 싸워야 되는 곳에서 범죄가 적습니다. 자연과 싸울 필요가 없는 곳에서 범죄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조건을 좋게 만들어 주고 환경을 개선한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교육계에서는 끊임없이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는, 이것이 인간의 선행을 격려한다는 의미이며 그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반발심이란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좋은 일에 대하여 반발심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억울하다는데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과 의와 진리에 대하여 반발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 공통적으로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모든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자를 향하여 불평하는 것 중 으뜸은 왜 너희만 옳으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험을 봤을 때 정답 쓴 사람은 맞다고 하고 틀린 사람은 틀렸다고 했는데 틀린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왜 너하나만 정답이냐고 하는 것과 같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틀립 답은 똑같이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정답이 10이면 틀린 답이 9, 16, 8로 다 다릅니다. 그나마 수학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만 더 큰 진리에서 사람들은 그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네 숫자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교육의 한계, 사람이 이 육신에 거하고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절망감에 대한 뼈저린 인식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이런 좋은 교훈이 나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리라.” 신자들이 꼭 기억해야 될 중요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이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고 부패한 꼴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죄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형태가 아니고 마음의 상태이고, 마음의 경향입니다. 죄가 고상하고, 명분 있는 데는 끼어들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죄는 어느곳에나 끼어듭니다. 남을 돕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식할 때도 끼어드는 것이 죄입니다. 가장 고상한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에도 끼어듭니다. 그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것입니다. 기도돋 자기 자신을 치장하기 위하여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자신을 숭배케 하기 위하여 금식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의 잘난 것을 증명키 위해서 구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로마서 7장에서 본 바와 같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입니까? 가장 선한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 선한 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구제 불능입니다. 오죽하면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했겠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자리에 오지 않고는 가독교가 무엇인지 이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피해가야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도움 없이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방법도, 자신을 고칠 방법도 없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에서의 절망에 찬 부르짖음이 어떻게 연결되는 가를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바로 예수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예수를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까? 그가 어떤 이상을 갖고 있거나 어떤 선행을 하고 있거나 어떤 도덕성에 의하여 고취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으로 육신에 거하며, 율법 아래 있는 처지일 뿐 혼자서는 그 문제로 절대 영생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는 그것으로 사망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처한 이 절망을 제대로 인식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일에 대한 그 진정한 핵심을 이해하게 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다른 사람보다 선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분명하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살고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멸시의 눈을 보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혼자서는 그 이상의 답을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은 은혜가 무엇이냐 우리가 얻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처지입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신자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확인해야 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이 자기 자신만 믿고 사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고 난 이후에 신자들이 여전히 자기 자신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셨으니까 구원 얻은 자로서 또 다시 ‘나 혼자다’라고 이렇게 살지 마십시오. 그것이 아니라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혼자였습니다. 그 때는 무엇을 주든지 다 나 혼자 책임을 졌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혼자였습니다. 곧 율법 아래 있다는 것,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나에게 아무리 좋은 지도와 좋은 내용과 무슨 좋은 것들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나 혼자 그것을 결심하고, 그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책임져야 했을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사망으로 끌고 갈 뿐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므로 그의 간섭과 은혜가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것으로, 영생으로 열매맺게 되어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신자입니다.
예수안에는 자랑이 없고 감사만 있습니다. 낙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성경이 설명하는 대로 분명히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면서 실패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십시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신앙에 제일 중요한 순종, 거룩을 놓치지 마시고 수행하여 열매 맺으시길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를 주 안에 묶어 두셨습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며 우리 자신만이 우리를 책임지지 않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책임지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순종하게 하시고 두려워하게 하시고 기뻐하게 하시옵소서. 주의 자녀 된 우리의 이 복된 운명을 인하여 남은 여생, 주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주 앞에 서는 날 칭찬과 영광 속에 그리고 감사와 찬송 속에 다 서게 하시옵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