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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지 못했다 말하는 이에게/시편 27:10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슬픈 어버이날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온 가족 주일이면서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감사하며, 귀한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라고 하신 주님의 십계명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 말씀을 여러 번 인용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함께 기억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늘 이때가 되면 항상 부모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날에 가족을 돌보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 쓸 것을 아껴 자녀들을 먹이고 교육비로 사용했던 어머니의 소박한 모습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자녀를 위해 헌신을 다한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물에 빠진 아이를 살려 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아버지의 이야기, 중증 장애인 자녀와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노부부에 대한 이야기, 북에서 홀로 탈출한 뒤 남겨진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에서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의 이야기 등…. 어머니와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하자면 아마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이날마다 부모님 사랑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날은 당연하고 기쁘고 즐거운 날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조금 뜻밖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사실 어버이날이 되면 마음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어버이날을 기쁘게 보내지만, 뜨거운 축제 같은 이날이 때로 어떤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숨겨져 있는 이야기이자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라는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힘든 과제이자 가혹한 폭력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에 나쁜 부모는 없다”라는 말이 상처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보호막이 아닌 감옥처럼 느껴지는 삶을 산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삶이 이해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분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가길 원합니다.

2021년에 출간된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의 기록』(글항아리, 2021)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1명의 생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직접 쓴 수기 형식의 글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명아’라는 이름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 예쁘다는 말을 꽤 들었던 명아에게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이 시작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후인 아직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이 가시지 않은 때였습니다. 명아는 반복되는 성폭력을 당하며 공황장애, 정체성장애, 우울장애, 불안장애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가해자인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받았던 성폭력의 역사를 종이에 씁니다. 가해자인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음에도 그는 아버지에 대한 고소장을 경찰서에 제출합니다. 하지만 친족 성폭력에 대한 책임을 묻는 사회적 판결을 얻어 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자 명아는 자기 스스로 직접 판결문을 씁니다. 친부의 친권 즉시 박탈, 그리고 총 120년 형의 선고를 담은 판결문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법적 효력이 없는 판결 문서였습니다. 그러나 명아에게는 30년간 막혀 있던 목소리가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간의 억울함, 고통이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버이날은 과연 어떤 날일까요?

2025년 8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4년 아동학대 연차 보고서에 의하면 한 해 아동학대 사례가 24,492건으로 나타났습니다. 2만 건 이상의 아동학대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학대 행위자 중 부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84%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전체 학대의 82%가 가정 내에서 발생했습니다. 부모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한 사람들에게 어버이날은 어떤 날일까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말이 이들에게는 또 다른 죄책감을 부추기는 폭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큰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여러 조그마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데, 과거의 기억으로 부모님에 대한 약간의 원망이 일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버이날만큼은 그런 마음들을 잠시 묻어 두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가정의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27편에 아주 짤막하지만 뭉클한 느낌이 드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10)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말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단호하고 명백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시편 27편 앞부분에 저자의 이름이 새겨 있습니다. ‘다윗의 시’라는 표기입니다. 다윗의 삶이 어떠하였기에 그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과 부모님과의 관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경에서 다윗의 부모님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기름을 부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새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때 아버지 이새는 일곱 아들들을 사무엘 앞에 세워 놓습니다. 하지만 다윗만은 들에서 양을 치도록 남겨 두었습니다. 이새가 엘리압을 먼저 앞세웁니다. 그는 사무엘이 언뜻 보기에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를 거절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이후에 이새는 아비나답을 불러서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또 삼마로 지나가게 하였지만,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머지 아들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6:10~11)

 

사무엘이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라고 묻기 전까지 이새는 다윗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다윗이 가족의 중요한 결정 상황에서 배제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다윗이 아버지의 마음에 그리 희망적인 아들이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17장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군대에는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막기 위해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새의 아들 중에는 장자 엘리압,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가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40여 일간이나 지속되고 있는 전쟁 중에 이새는 막내 다윗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심부름을 시킵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찾아가서 형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먹을 것을 전해 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그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중이더라 (삼상 17:17~19)

 

이새는 전쟁통에 어린아이를 보냅니다. 오고 가는 사이에 다윗의 안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형들이 배고플 것 같으니 먹을 것을 전해 주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킬 수 있을까요? 이새의 마음에는 전쟁터에 나간 세 형제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천부장에게도 먹을 것을 갖다주어서 형들이 잘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버지 이새에게 다윗의 안전과 생사는 그다지 관심거리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에 대한 가족들의 멸시와 편견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한 구절이 있습니다. 다윗이 마침내 골리앗과 대치하고 있는 장소로 들어가 형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큰형 엘리압은 그곳까지 먹을 것을 가져온 다윗을 칭찬하거나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야단칩니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삼상 17:28)

 

이 말 속에는 막냇동생에 대한 무시와 편견이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을 걱정하기보다는 도리어 들에 두고 온 양들을 걱정하는 마음뿐입니다. 형들의 마음에 다윗은 그저 들에서 양이나 치는 아이일 뿐, 전쟁터에 나올 자격도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경험들이 압축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시 27:10, 새번역)

 

이 고백은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와 가정으로부터 정서적인 지지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대우받지 못한 만큼 그렇게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할까요? 남은 상처 때문에 부모를 볼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도리어 원한을 갚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비로소 다윗은 한 가정의 아이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행동하였을까요? 부모에게 모든 것을 갚으려 하거나 모르는 척했을까요? 사무엘상 22장에 흥미로운 기록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받고 아둘람 굴에 피해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형제와 온 집안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다윗에게로 내려옵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도 쫓기는 긴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연로한 부모의 안정을 위해 가장 먼저 걱정합니다. 다윗은 부모를 모시고 모압의 미스바로 향합니다. 그리고 모압 왕에게 자신의 부모를 의탁합니다.

 

다윗은 거기에서 모압의 미스바로 가서 모압 왕에게 간청하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 주실 때까지, 나의 부모가 이 곳으로 들어와 임금님과 함께 머물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자기의 부모를 모압 왕에게 부탁하였다. 다윗이 산성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다윗의 부모는 모압 왕과 함께 살았다. (삼상 22:3~4, 새번역)

 

왜 하필이면 다윗은 모압 왕에게 자신의 부모를 맡겼을까요? 이것은 다윗의 가정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증조할머니인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즉, 다윗의 집안은 모압과 혈연관계였습니다. 이새에게 모압은 일종의 외가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를 안전하게 모시기를 원했던 다윗은 부모를 모압으로 옮긴 것입니다. 다윗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성경은 이렇듯 다윗이 부모님에게 서운함을 느꼈을 법한 상황에서도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 부모를 외면하지 않고 공경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차별이나 소외를 뒤로하고 부모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윗의 성숙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다윗의 부모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추가적인 기록이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다윗이 가장 힘든 시기에서도 부모를 봉양하는 책임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차별과 억울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부모를 모시며 공경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말 못할 일을 당한 사람들이 그럼에도 부모님에게 용서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요? 다윗은 오늘의 시편 본문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알려 줍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10)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접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를 영접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영접하다(אָסַף, 아사프)’라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을 넘어 ‘거두어 보호하다’, ‘불러 모으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기억하는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하나님께서 나를 영접해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꽃이 되도록 불러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언제 이런 경험을 했을까요? 사무엘이 기름 뿔을 들고 이새를 찾아왔을 때, 다윗은 아무것도 모른 채 들판에 있었습니다. 정작 아버지는 다윗을 후보군에 넣지도 않고 그를 부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용모가 출중하고 외견상으로 대단한 형들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삼상 16:12b, 새번역)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바로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에 놀라는 이새와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 순간 다윗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한 번도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그가 중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주십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자격 미달’로 통하였던 다윗이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내 마음에 합한 자’가 됩니다.

그 순간 다윗은 지금까지 부모의 눈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던 모든 노력을 멈춥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그 가치를 찾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눈이 맞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후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 꽃이 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상처로 남은 시간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다윗이 부모와 형제들의 무관심 속에서 외롭게 양을 치던 시간은 큰 상처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들판에서 양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윗은 늘 홀로 힘겨운 싸움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험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고 계심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을 아주 아름답게 노래한 시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아버지에게 대우도 받지 못하고 들에서 양들이나 돌보던 억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도리어 그 자리가 놀라운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하나님이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신다.” 그는 어렵고 척박한 현실 속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들판에 어린아이 다윗을 홀로 내보냈지만, 하나님은 그 들판에서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삼상 17:37)

 

다윗은 부모로부터 받은 ‘거절감’에 함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미성숙한 부모의 인정에 목마른 어린아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정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다윗은 칼과 창을 들고 나가지 않습니다. 자신이 늘 들판에서 맹수를 쫓기 위해 사용했던 물맷돌을 들고 나갑니다.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들판에서 양 떼나 돌보고 있었던 다윗입니다. 날마다 그가 던졌던 물맷돌은 어쩌면 고독과 외로움이 담긴 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홀로 짐승들과 싸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삶이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아 주지 않는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느라 혼자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물맷돌 던지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찮게 보이던 물맷돌로 다윗은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립니다.

그 순간 다윗은 그가 고독하게 보냈던 모든 순간이 단번에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광야와 같았던 시간이 바로 오늘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훈련하시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간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부모로부터 받아 온 차별과 불평등한 대우가 눈 녹듯 녹아드는 경험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자신을 소외시켰던 부모를 아둘람 굴에서 정성껏 모시고 모압 땅까지 피신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성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 잔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다윗에게 용서를 구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이 모든 상처와 허물을 메우고도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기가 너무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수백 가지가 넘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모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혹은 부모님들이 회개하였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조건 없이 ‘영접’하여 주셨기 때문에 부모의 부족함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풍성해지면 용서할 수 있는 공간과 받아들이고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이고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부모라는 이름이 따뜻함보다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씀이 쇠사슬같이 느껴지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도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다윗은 부모에게 순종하기 위해 억지로 애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먼저 충분히 사랑받아서 그 상처를 치유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를 사람에게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피해자라 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 부르십니다. 복수가 아닌 승리를 선택합시다.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존재가 온전해질 때, 비로소 상처를 준 부모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 27:10)

 

이 약속이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 주고 새로운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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