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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시선으로 오늘을 살라/전 3:11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영원한 시선으로 오늘을 살라

전 3:11

 

그림 한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죠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대표작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1884년부터 1886년까지 작업한 대작이며, 파리 시외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유명한 것은 네오인상주의의 회화 방법인 점묘법(pointillism)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그림을 가까이에서 본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이것이 점묘법입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점들이 모여있는 추상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그림처럼 멀리서 보면 풍경화입니다.

이렇게 점묘법은 관객의 시선에 따라 추상화로도 보이고, 또 풍경화로도 보이는 색다른 체험을 하게 해줍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풍경 전체를 볼 수 없지만, 멀리서 보면 점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근시안적으로 보면 하나의 사건들이 이해하기 힘든 추상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시안적으로 멀리 저 영원의 시선으로 보면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명확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인생 이야기입니다.

먼저 요셉의 인생을 가까이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던져지고, 애굽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보디발 집에서 충성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만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잊혀져 버렸습니다.

이때 요셉의 삶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점점이 흩어진 사건들이 왜 일어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추상화같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요셉의 삶을 멀리서 바라보면, 모든 점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그려내듯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흉년 때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왔을 때, 결국 가족이 다시 모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창 50:20을 보면, 요셉은 이 모든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 요셉의 인생에서 점 하나하나는 고통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모든 점들이 모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풍경화를 완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지금 눈앞의 사건만 보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추상화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멀리서 영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 그려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아름답게 하셨다

 

전 3:1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는데, 그것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드러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는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하신 때가 되면 그것이 아름답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헨델의 [메시아]를 들을 때마다 이런 말씀에 공감하게 됩니다.

 

헨델은 젊은 시절부터 오페라와 음악으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오페라는 점차 인기가 사라졌습니다. 빚더미에 앉아 재정적으로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게다가 건강까지 무너져 뇌졸중 증세로 손이 마비되어 작곡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더 이상 음악가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헨델 자신도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당시 그의 인생은 누구도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뜻밖의 방법으로 헨델을 붙드셨습니다. 1741년, 한 시인이자 친구였던 찰스 제넌스가 성경 구절들로 엮은 대본을 헨델에게 건넸습니다. 헨델은 병든 몸과 지친 영혼 가운데 이 말씀을 마주하다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라는 첫 구절이 그의 마음을 강하게 울렸습니다.

놀랍게도 헨델은 그 자리에서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무려 260페이지가 넘는 악보를 단 24일 만에 완성했습니다. 당시 그는 거의 잠도 자지 못한 채 말씀에 곡을 붙이며 눈물로 곡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가 ‘할렐루야 합창’을 작곡한 뒤에는, 방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다고 전해집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나는 하나님 보좌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 메시아는 오늘까지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 전 세계 교회와 공연장에서 연주되며, 수많은 이들이 감동 속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헨델에게 고난의 세월이 없었다면 메시아의 이 탁월한 작품은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 전체의 시각에서 보면 고난의 세월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당장 우리가 그것을 동의하기 어려울 때가 참 많습니다. 때로는 오늘은 내 인생에서 지워졌으면 좋을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오늘 때문에 내 인생에 오점이 생겼다고 말할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를 따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날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때가 올 것입니다. 심지어 그날이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느냐고 말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에 대한 평가를 미루어야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험악한 세월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인내하고 참고 견디십시오. 아름다웠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이 말씀은 원문을 의역한 것입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을 두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을 감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류의 고대 역사를 연구해 보면 모든 민족과 문화에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후세계를 준비해 온 유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에서 다시 삶을 이어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미라를 만들고, 피라미드 속에 음식과 보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례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준비입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이나 귀족이 죽을 때, 함께 저승에 데리고 갈 하인을 함께 묻는 순장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기’라 해서 저승에서 쓰는 도자기 모형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인 죽은 자가 저승으로 갈 때 스틱스 강을 건너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동전을 넣어두어 망자가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예에서 보듯이 우리 인간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이 있다는 것을 믿어왔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닌데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죽음 너머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원을 갈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한국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재벌이었습니다. 막대한 부를 가졌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자 마음 속에 풀 수 없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천국은 정말 존재하는가?” 그래서 이 답을 찾기 위해 당시 가톨릭 정진석 신부에게 서면으로 24가지 질문을 보냈습니다.

이분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원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을 잘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저 깊은 내면에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저 영원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영원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시선으로 오늘을 살라

 

그러면 전도서 저자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려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영원을 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영원의 시선으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현실만 바라보면 낙심과 절망에 빠지지만, 영원을 바라보면 소망과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눅 24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들의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던 시선이 영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뀐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현실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두 눈이 열리고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십자가의 실패에 머물렀던 시선이 부활의 영광으로 옮겨졌습니다.

시선이 바뀌자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던 걸음이 다시 돌이켜 예루살렘을 향해 가게 됐습니다. 절망하며 세상을 향하던 발걸음이 희망을 품고 사명을 향해 나가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시선이 달라집니다. 땅을 바라보던 시선이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뀝니다.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던 시선이 희망이 가득한 영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 바뀐 시선으로 행동이 달라지게 됩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오늘을 보게 됩니다. 영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오늘을 살게 됩니다. 용기 있게 일어섭니다. 힘차게 앞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원의 시선으로 오늘을 살 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우선 세상 것의 헛됨을 깨닫게 됩니다.

 

전 1:2에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세상 것의 헛됨을 깨닫고 한 탄식입니다.

현실과 세상만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대단해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부귀와 영화가 그렇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그렇습니다. 지식과 명예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시선을 가지게 된 후 그것들이 다시 보이게 됩니다. 정말 헛되게 보입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를 보면 그가 죽음을 앞두고 세 가지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관을 의사들이 메고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의술도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둘은 자신이 정복한 보물을 길바닥에 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재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다는 교훈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셋은 관 속에서 자신의 두 손을 관 밖으로 내놓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정복했지만, 빈손으로 떠난다”는 메시지를 남기기 위함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죽음이 찾아오자 그제야 영원의 시선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 시선으로 오늘을 보니 대단하게 보였던 것들, 그것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왔던 것들, 그래서 가지게 된 것들이 모두 다 헛되게 느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안에 있게 되면 이런 시선을 일찍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 하늘의 것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마 6:19–20을 보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참된 가치는 땅의 것이 있지 않고 하늘의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 6:33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우리가 하늘의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참된 가치를 깨달았으면 그것을 먼저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 참된 가치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원의 시선으로 오늘을 살 때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고후 4: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라” 오늘 겪는 고난이 영원에서 빛나는 영광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의 시선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오늘 겪는 고난과 역경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고난을 감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찬 496장 2절을 보면 가사가 이렇습니다.

 

비가 오는 것과 바람 부는 것을 겁을 내지 말고 뿌려봅시다

일을 마쳐놓고 곡식 거둘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영원의 시선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씨를 뿌리는 것의 의미를 깨닫고 삽니다. 그리고 고난과 역경이 있을 지라도 자발적으로 씨를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원의 시선으로 거두는 그날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원의 시선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 영원의 시선으로 오늘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원의 시선으로 오늘을 의미있게 기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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