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인생 길 행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인사(축원)와 연결과 서론(천천히 이해확인 반복 멈춤 한교훈 톤을낮게 관심과 집중할 질문이나 예화 짫게)큐타 오늘 "새로운 인생 길"주제로 깨달음과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구호:주여!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오직 예수와 십자가만 선포-예수 영접 구원) 사람에게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한 사람에게도 기회를 안주는 일은 없습니다. 일어날 수 있는 기회, 구원의 기회, 우리에게 복의 기회가 다 주어집니다. 공부할 기회가 다 주어집니다. 행복할 수 있는 기회,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누구에게나 다같이 주십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살리는 자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믿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 수 없다고 하나님을 믿겠다는 거룩한 결단을 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처럼 괴롭고 힘든 일이 없습니다. 한 신학교수는 무신론적 삶을 지속하는 것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무신론, 불가지론, 유신론" 이 세 가지 입장을 가지고 삽니다. 사실 마음이 새로워지면, 사람도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의복을 입기보다는, 또 새로운 환경을 만들기보다는, 마음을 새롭게 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는 화목하게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등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들의 죄가 모두 용서되었으니 예수님 앞에 나와 새로운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 믿을 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밖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은 머리나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도로서 성경을 배운 사람은 사도로서 바울의 그 대단함에 이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는 요즘 말로 하면 태생적으로 금수저였으며 평생을 엘리트 집단에 속해 스카이 케슬에 살 수 있었던 상위 1%의 집단에 속해 있었는데 그것을 스스로 포기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이 놀라운 가치관의 변화는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삶을 이끌어 갔습니다. 노동을 하며 복음을 전하고, 매를 맞으며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위해 독신의 삶을 자청하고,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우려는 일에 자신을 희생 재물로 내놓겠다는 고백과 함께 그렇게 살아갑니다.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낙망하지 않는 자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사30:31) 성도들에게 믿음도 귀중하고 예배도 귀중하고 기도도 귀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인생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잘못된 열심에서 바뀐 새로운 인생 길(1-3)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받기 전까지는 별 소용없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1,2 다멕섹 지방에 창성한 새로운 신앙 "다멕섹에서 그 새로운 신앙은 생기와 힘을 얻은 것같이 보였다. 억압하는 일이 거기에도 어김없이 시작되었고, 이 일을 위하여 사울이 택함을 입었다"(청년 지도자 1900. 11. 15). 사울은 현혹되고 기만을 당하였음(22:4; 26:11) ":사울은 그릇된 신앙을 옹호하기 위하여 힘과 열성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투옥시키고, 죽이는 일에 열심이었다. 비록 그의 손으로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결정하고 열렬하게 지지하는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 길을 예비하였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그들의 생명을 취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 주었다. 그가 이 일을 얼마만큼의 열심을 갖고 했는지에 관해서 바울은,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 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라고 하였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무식한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아닌 세상에 있던 최고의 종교가들, 그리스도를 처형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들에게로 갔다. 그들은 가야바와 그의 공모자들이 가진 것과 같은 정신과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사울은 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고 결단력을 가진 조력자들만 있다면 한 웅큼도 안되는 소수 집단의 광신자들을 틀림없이 쳐부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그리스도는 이것을 허락하셨고, 많은 사람, 참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잃었다. 바울은 정직한 마음으로 자기가 연약하고 무지한 광신자들을 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기만을 당하고 현혹된 자로서 멋모르고 흑암의 왕자의 깃발을 따르고 있는 자라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원고 142, 1897) . 그는 하나님을 열심히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도 하나님을 제대로 잘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긴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훌룡한 일입니다(롬12:11). 하지만 만일 그 열심이 잘못되어 분별력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람을 교만케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수 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지독히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박해자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 순교한 사람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집사가 돌로 맞아 순교할 때, 뒤에서 조정을 한 사람이 바울 이였습니다. 스데반을 죽게 한 바울은 살기 등등하여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외국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까지 가는 열심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밖에 있는 열심이라는 것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 없는 열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비극과 암흑을 가져 다 주었습니다. 1-4 사울의 불신은 정직한 것이었으나 용납될 수 없는 것임(행 26:9; 고전 15:9) "진리를 거역하는 마음은 모든 사물을 왜곡된 빛 가운데서 본다. 그것은 원수의 올가미에 걸려서 사물을 보되 원수의 빛 가운데서 보기 때문이다. 다소의 사울이 이런 사실의 본보기가 된다. 그는 불신자가 될 도덕적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권고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그도 메시야를 가리켜 보이는 예언의 말씀들을 갖고 있기는 하였지만 사람의 말인 랍비들의 어록을 더 좋아하였다. 그 자신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도 알지 못하였다. 후에 그는 그의 경험을 되풀이 해서 말하면서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많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사울은 믿지 않는데도 정직하였고, 아무런 가식이 없었다. 예수님은 도중에서 그를 붙잡으시고 그가 어느 편에서 일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셨다. 그 핍박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불충성의 길에서 돌아섰다. 사울은 자기를 사단의 길로 행하게 하여 땅에서 가장 귀한 사람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죽는데에 내어 주게 하였던 불신을 무관심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자기의 판단의 착오는 용서받을만 하다고 변명하지 않았다. 회심하고 난 뒤 오랜 후에 그는 자기 자신을 죄인들 중에 괴수라고 하였다.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하였다. 그는 양심에 받은 거짓된 인상을 충실히 따른 결과로 그가 행한 잔인한 행동을 조금도 변명하지 않았다"(원고 9, 1898). 사울왕은 승리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전쟁 중에 무모한 금식 명령을 내리게 되고,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 군대와 요나단은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처럼 신앙적 열심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욕심에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되고, 따라서 그 일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군사들에게 적을 무찌를 때까지 무슨 음식이든 먹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무언가 고상한 동기를 부여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이 명령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전투 중에 먹지 못한 군사들이 체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사들에게 사울의 명령은 현명한 지도력이 아닌 허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노아의 후손이 번성함으로, 언어가 하나가 됨으로, 생각이 일치 되 고 행동이 일치됨으로,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것으로, 벽돌로 돌 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는 능력이 있음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또한 성과 대를 쌓아서 하늘에까지 닿게 하자는 하나님을 무시한 처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열심으로 엉뚱한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 없이 독립정신으로 명예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진리에서 벗어난 사랑이나 열심은 무의미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변형시키고, 잘못된 진리를 열정으로 전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이로써 공동체는 진리에서 떠나고, 사랑과 신뢰가 깨어집니다. 성도는 사탄의 거짓에 속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옳은 일이 아니라 악한 일에 열심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옳다고 고집합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자세를 바로 가져야 합니다. 정신적인 자세를 바로 가져야 하고, 생활의 자세를 바로 가져야 하고, 신앙의 자세를 바로 가져야 합니다. 정신적인 자세가 삐딱해지면 항상 남을 볼 때 삐딱한 눈으로 봅니다. 자신이 삐딱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자꾸 남을 보고 삐딱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남을 비판하는데 아주 열심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이 정의의 사도인양 착각을 합니다.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생활의 자세가 삐딱한 사람은 내 것도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이라고 그럽니다. 또한 신앙의 자세가 삐딱한 사람은 혼자 잘 믿는 양 떠들면서도 교회에 나오면 불평은 혼자 맡아 놓고 합니다. 회사에 나가도 불평, 가정에서도 불평을 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거들랑 믿음의 자세가 삐뚤어진 사람인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자세를 바로 해야 됩니다. 삶의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혹 자기의 힘으로 성취하겠다고 과도하게 열심을 내는 행위는 냉엄한 허사를 가져 옵니다. 성도된 우리는 무척 열심히는 하나 우선순위가 바뀌어서 그 인생이 실패하지 않도록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관리하고 바울처럼 잘못된 열심에서 바뀐 새로운 인생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2.회심을 통한 새로운 인생 길(4-6)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인생의 전환기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의 사도행전 강해 주석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다”라고 진술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있는 사울은 예수님이 바로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행2:25-28; 시16:8-11 (참고 눅24:27).)라고 선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하였으며, 더욱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 즉 메시야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부활케 하셨다 하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에 분노하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하고 특히 스데반을 신문할 때 증인으로 섰고, 돌에 맞을 때에는 그가 사형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행 7:55-58, 8:1.) 주장하였으며, 또한 다메섹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넣기 위해 산헤드린에서 발급한 정식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강한 빛을 보매 그는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때 그는 눈을 뜰 수 없었으며 홀연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사건의 경험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것처럼 불 붙는 떨기나무와 호기심에 사로잡힌 경험은 모세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오게 됩니다. 위대한 성자 성 프랜시스가 큰 은혜를 받아 거듭나게 된 계기도 그가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은혜를 받고 온전히 그 자신을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또 모라비안 교회를 창립한 진젤돌프도 어떤 미술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성화를 바라보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아서 온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 후 유명한 모라비안 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이러한 크고 작은 계기들을 통해 교회가 발전하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생겨남으로 이제는 전 세계의 3분의 1이라는 인구, 10억의 인구가 기독교를 믿고 변화 받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그 뿌리와 줄기가 튼튼하고 무성한 종교입니다. 신앙을 할 때에 인생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극적인 전환점을 만들지 못하면 \ 그 신앙은 밋밋한 신앙이 됩니다. 세상에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생의 전환기에 포기하지 않고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잘 대처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변환의 시기가 다가와도 자신이 처한 열악한 조건과 상황에 굴하지 않고 꿈꾸고 과감하게 실행한 사람들입니다. 넘어갈 수 없다면 뚫고서 간다는 신념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전환기에 주어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결단의 연속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인생의 전환점에서 강인한 결단력을 보이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하고 지친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즘 현대인들 중에 "나는 삶에 지쳐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동안 수 없는 나날을 아침 일찍부터 뛰어다니며 일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회사의 재정적 압박과 악순환 때문에 거의 탈진되어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오래도록 앓고 있는 병 때문에 지치고 시달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좋은 병원, 좋은 의사, 좋은 약을 먹어도 여전히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갈수록 더욱 지쳐만 갑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무력감과 의기소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피곤과 탈진이 우리에게서 에너지를 다 빼앗아 버립니다. 이러한 때에 시선을 나에게서 떼어 하나님께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지치지 않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지쳐있는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오늘도 실패한 당신을 위대한 인생으로 전환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나갈수록 우리들의 인생은 역동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에게 힘을 주셔서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올라가는 인생으로, 힘없이 처지는 자가 아니라 달려가는 인생으로 그리고 인생의 목표와 비전을 성취하는 믿음의 위인이 되도록 새 힘을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입니다. 우리 모두 참고 견디어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다메섹의 도상에서 자기를 핍박하는 사울이라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난 것은 그를 징계함도 아니고 그를 책망함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그를 부르셔서 그의 종교로부터 자유함을 주시고 아울러 그에게 이방 민족의 선교라는 사명을 위탁하시려고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회심을 경험한 후 새로운 인생길을 간 것처럼 날로 새로워진 갱신 즉 변화 체험을 통해 오늘보다 내일이 나는 새로운 인생길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에서 새로운 인생 길(7-9)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먹고 자고 활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생체리듬은 건강할 때 원활하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체리듬이 깨지면 전반적인 몸의 균형이 금이 가고, 그로 인해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질환에 걸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신경 하나가 잘 못되면 반신물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손발이 마비되고 소리가 안 들리고 눈은 볼 수 없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람이 볼 수 없고 먹고 마시지도 못한다고 하는 것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일부러 3일 단식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동안에는 기운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회심 후에 지금까지 기지고 있던 그의 고정적인 자아, 고정 관념, 절대 신념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깨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곳에서 철두철미 하게 자신이 부서지는 아픔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 엄청난 변화에 충격을 받고는 3일 동안을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고 깨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울이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이 바울이 새로운 인생길을 가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오직 하늘에서 홀연히 비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인간적 범주에 머물러 있으므로 하나님의 가능성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간적 가능성 위에 섰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설 때에야 제한된 가능성은 사라지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마음속의 미움과 증오로 고통 할 때 지식이나 철학, 사람의 언변으로 미움은 제압되지 않습니다. 가진 것도 없어 용기가 없어 질 때 절망과 좌절에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오직 말 아래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가능성을 체험합니다. 교회는 ‘정보(information)’를 얻는 곳이 아니라, ‘변화(Transformation)’가 생기는 신묘막측한 변화의 현장입니다. 이곳에 오면 하나님을 만나 죄인이 의인으로, 걸인이 왕으로,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우리 모두 기쁘게 이런 변화의 체험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다 변화하리니.’ 기쁨과 설렘으로 변화의 체험현장을 확장해 머무는 그 곳이 또 하나의 변화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말이 적어지고 이론이 없어집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온전히 사람의 두뇌만 믿고 살기 때문에 이론이 많고 말이 많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깊은 신앙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사람의 논리와 사고방식이 그 뒤를 따릅니다. 그래서 십일조 바치는 것도 아깝고 안식일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신앙이 깊어지고 중생의 체험을 하고 성령을 받게 되면 이른바 말이 없어지고 하나님 앞에 순종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 에너지 입니다. 결론 적용(나 청중)호소 결심 결단합시다 오늘 "새로은 인생 길"주제로 깨달음과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 땅과 세상에 고착되어 있는 시선을, 눈을 들어 하늘과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소망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최악의 상황을 지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그러한 참담한 현실을 걷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사면초가를 통과하며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고, 아무리 힘써도 달라지지 않는 동굴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극한 외로움으로 나날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과 가능성이 있음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하늘을 보게 하시며, 가능성을 찾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바꾸어 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 영광스런 하늘을 보여 주시고 우리의 오염된 시각과 관점을, 정화된 시각으로 바꾸어 주사 가슴 벅찬 미래와 주체할 수 없는 현실을, 느끼게 해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 은혜만 받을 수 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다시 솟아 날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된 우리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1.잘못된 열심에서 바뀐 새로운 인생 길(1-3) 2.회심을 통한 새로운 인생 길(4-6) 3.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에서 새로운 인생 길(7-9) ㅇ참고 보도록 하고자 장님으로 만듬 하나님을 섬기고 있노라고 생각하면서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힘을 다 쏟고 있는 동안 실상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었다는 것을 바울이 알았을 때, 그 부끄러움이 어떠하였겠는가? 구주께서 바울에게 영광의 밝은 빛 가운데 계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그의 마음은 자기 자신과 그가 행한 일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하였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능력이 그를 죽여 없앨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희망에 사로잡힌 자가 되었다. 그는 그가 모독해 온 그분의 임재의 영광으로 인하여 육신적으로는 장님이 되었지만 그것은 그로 하여금 영적 시력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그의 지각을 마비시키고 우둔하게 만든 영적 혼수 상태에서 깨우기 위함이었다. 일깨움을 받은 그의 양심은 이제 스스로를 책망하는 힘이 되었다. 그가 열렬히 행한 일과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하여 그에게 비추어 주셨던 빛을 완강히 거절한 것 등은 이제 그의 영혼을 정죄하였으며, 그의 영혼에는 쓰라린 후회의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지 않았고, 그의 사상과 정신과 행동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았다. 자신을 볼 때 그가 핍박해 온 구주가 없으면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된 죄인이었다. 눈이 멀어 있던 날 동안에 그는 주야로 반성의 시간을 가졌고, 의지없고, 소망이 전연 없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내어 맡겼다. 그분만이 그를 용서하실 수가 있었고, 그분만이 그에게 의를 입혀주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원고 23, 1899). 6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 필요함 "주님은 항상 인간 대리자에게 일을 주신다.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 여기에 있다. 주어진 하나님의 빛에 순종하며, 일하는 사람이 있다. 만약 사울이, ‘오 주여, 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당신께서 상세히 말씀해 주신 당신의 지시를 저는 전연 따를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주께서 사울에게 열배의 빛을 더 비추신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인간의 뜻과 방법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되게 하는 것은 가장 힘들고 혹독한 투쟁이며, 인간의 큰 결심과 결단을 요한다. … 품성은 그 결심과 행동의 성질을 결정할 것이다. 행동을 감정이나 경향성에 맞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알려져 있는 뜻에 맞출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고 복종하라"(편지 135, 1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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