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사는 법
벧전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인사(축원)와 연결과 서론(천천히 이해확인 반복 멈춤 한교훈 톤을낮게 관심과집중할질문이나 예화 짧게)큐티
오늘 "세상에서 사는 법"주제로 깨달음과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구호:주여!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오직 예수와 십자가만 선포-예수 영접 구원)
단호히 저항해야 할 악습(히 2:14; 7:25 주해 참조)
"주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생긴 비애와 슬픔을 담당하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은 이 일을 하시되 우리를 동정하시는 친구로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대속자로서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들, 곧 이기심, 거친 성질, 게으름, 그릇된 버릇과 습관 등의 죄는 적극적으로 굳세게 서서 물리쳐야 한다.
사단과 관계를 끊는 사람은 그가 주는 시험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들이여!
그분이 죄를 담당하신 분이심을 깊이 생각하라. …
회개하는 영혼들이여!
그대를 구원하시되, 죄를 계속 짓고 있는데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완전히 벗겨 주시는 구원을 주시려고 준비해 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붙잡으라.
그리스도는 죄를 담당한 분이시므로 죄를 지고 가셔야 하고 병적인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죄인을 구원하셔야 한다"원고 56, 1900).
그 협곡을 가로지른 다리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통은 단절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에 세상 죄를 지시고 갈바리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하늘과 땅을 갈라 놓은 깊은 협곡 위에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리가 건설되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이 큰 협곡으로 인도하여 그 위를 가로지른 다리를 가리켜 보이시며,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다" (원고 21, 1895).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은 모두가 같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삶의 방법 중의 성도 된 우리의 사는 법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철학자 베이컨은
"세월은 작가 중의 작가"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세월만큼 사람의 생을 잘 묘사해 주는 삶의 기준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사람이 어떤 삶,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그가 지나 온 세월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내 나그네의 길의 세월이 130년이며, 나는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참으로 빨리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빠른 세상 속에서 사회에 변화의 속도도 빨라져서 순식간에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쫓아가느라 분주합니다. \
그러나 변화를 잡으려 하면 할수록 변화는 더 멀리 도망가서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속도로 달아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인생의 영혼은 더욱 더 삭막해져 갑니다.
인생들의 몸과 영혼은 마치 물에 젖은 솜뭉치를 얹고 살아가는 것처럼 무겁기만 하고
제대로 쉼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인생들이 찾아야 할 곳이 진정한 평강이 있는 교회 일 텐데
현대교회가 그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1장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는데
막상 인생들이 쉼을 얻기 위해 교회에 왔는데 ‘교회는 오히려 더 피곤하고, 더 안정감이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면 교양과 상식을 갖춘 시민이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민'이라 함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면서도 동시에 현존하는 한 국가의 시민임을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내세만을 생각하고, 내세만을 위해 살아가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악과 어둠의 무대요,
우리에게 소망과 안식을 줄 수 없음에만 그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영원이란 매 순간순간들의 연속입니다.
순간이 없으면 영원이 없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들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으로 살게 된 것은 저절로 되어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매 순간순간을 그렇게 보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꾸 지난 세월을 후회하고 한탄만 한다면 그것은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최선을 다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사는 법을 잘 알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18-20)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성도 된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 앞에도 인정을 받고 아름다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사람에게 좋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구해야 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됩니다,
사람을 좋아하든 말든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한복음 5장에도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였습니다.
성도 된 우리는 하나님께 오는 영광을 구해야 됩니다.
디도서3장8절에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에 힘쓰지 않으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없고 악한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우리들의 실수가운데 하나가
선한 일에 힘쓰지 않으면서 크게 잘못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에 힘쓰지 않는 것이 잘못이고 죄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직장인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을 비유하여 ‘
어떤 환경에서도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부당하게 즉 특별한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뜻이 있는 것으로 믿고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이 기도문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을 무참 히 학살할 때 만들어진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왜 600만 명이 죽어야 만 하는지,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찬양합니다.'라고 기도하였으니
이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생각을 사람이나 사건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려서
하나님에 대한 양심 때문에 고난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만일 이 고난을 부당하게 생각하여 상대방을 미워하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까지 짓게 되고,
신앙에서 떠나 버리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 올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이 고난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섭리하신 바요
하나님의 복임을 믿고 감사할 때 가 옵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고난의 종으로 오셨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기에 하나님이 그를 부활케 하셨고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그리고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한
선한 목적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요
그 고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인내함으로 이 험악한 세상을 이겨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병원 입원실 곁에 있는 휴게실에서 몇 사람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신장 결석(담석증)을 수술한 사람이
“말도 마시오 그 아픔을 어디다 비기겠습니까?”
애 낳는 것보다 더 아팠을 것입니다.
디스크 수술 환자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요 뼈를 깎는 아픔이란 말도 몰라요?”
뼈를 자르고 깎는 아픔은 표현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프다는 얘기를 조용히 들으며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레게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입원 하셨습니까?”
“예 저는 수술 환자는 아닙니다”
“제일 편한 환자시군요”
“저는 몸은 아픔이 덜한 사람입니다만 가슴이 아픕니다.
열흘 전에 제 아들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비가 먼저 가야 하는데 자식이 먼저 갔습니다.
내 가슴에 죽은 자식 묻느라 가슴이 다 찢어졌습니다.
너무 많이 아픕니다”
갑자기 장내가 숙연해 졌고 더 이상 아프다는 얘기들을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각각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견디기 어려운 통증들을 갖고 있습니다.
내 아픔이 제일 크고 내 고통이 제일 깊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더 큰 아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교회의 일을 하다 보면,
또 어떤 일을 하다 보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억울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하나님만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다운 성도가 됩니다.
성경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하면서도 열린 하늘을 바라보고 천사와 같이 환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참 멋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장엄한 순교를 할 수 있었을까.
어떤 고난이 있고 오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된 우리들이 세상에서 사는 법은
곧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르는 삶(21-24)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신약성경의 베드로전ㆍ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그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지역에서 박해를 받으면 다른 지역으로 피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해 받고 있는 성도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에는 가장 포악한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로,
그 당시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가 바로 “쿼바디스”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는 로마의 도시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를 새롭게 건설할 목적으로 사람들을 시켜 일부러 멀쩡한 도시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며 내심 즐기던 네로는 예상 외로 큰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불로 집과 재산을 잃은 시민들의 아우성이 극에 달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는 예수쟁이들이 평소에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는다고 외치더니
그 말 그대로 그들이 불을 질렀다고 하는 거짓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시민들은 닥치는 대로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수만 명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도 순교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박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변함없이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라 아니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지으신 죄로 인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성숙한 믿음을 위해서,
연단과 훈련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것은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그 고난의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고난을 당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바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들에게 본을 남겨놓으셨습니다"(21).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그가 걸어가신 봉사의 길을 따라 봉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물질과 권력과 명예가 없는 가난한 자로 오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봉사하시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행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그가 걸어가신 희생의 길을 따라 이웃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조롱과 멸시 속에 묵묵히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향하여 나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의 모든 오해와 천대 속에서도 변명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참고 견디며 희생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후에 그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본이 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모든 면에서 본이 되셨습니다.
특히 그리스도는 고난의 큰 싸움을 싸우신 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신앙 안에서 당하는 고난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병원 안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 성도는 그 자취를 따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은 회개를 통해서 해결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삶은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의인의 고난이며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고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사랑과 인내로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죄가 있고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고 하였습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믿음의 말,
은혜가 되는 말,
기쁨과 소망을 주는 말,
긍정적인 말을 하고 행함으로 온전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전도와 봉사에 있어서도 앞장서서 바르게 행해 나가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있어서도 성도들의 존경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생명까지 내주신 예수님을 따라 이웃을 섬기며,
그들을 구원과 성화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일, 구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완악함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행하시는 마중물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된 우리들이 세상에서 사는 법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3.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가는 삶(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했고,
때로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고,
\때로는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무덤에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차별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차별대우를 당하는 신앙인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고난당하고 박해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너희가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예수님의 삶의 자취를 따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우리의 입술에서 거짓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욕을 당하시면서도 맞서서 욕하지 않으신 주님,
고난을 받으셨지만 위협하지 않으신 주님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채우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23편2절에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이 풀밭에 누웠다는 것은 그 양이 얼마나 평안하며 만족한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푸른 풀밭과 잔잔한 시냇물’ 때문에 양이 만족하고 평안해 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양이 누리는 평안과 만족은 근본적으로 목자가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자가 없으면 푸른 풀밭도, 잔잔한 시내도 양에게는 공포의 자리일 뿐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만을 목자로 삼았더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완벽하게 보호하고 인도하고 채워주셨는지를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가장 놀라운 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요한복음14장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어려운 삶을 사는 성도들은
언제나 영혼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평안이 있습니다.
한편 25절에 감독’이라는 말은
관리자, 보호자, 안내자를 말합니다.
이 감독이라는 말이 초대교회에서는 목회자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성도들의 영혼을 보호하고 돌보아주는 목사가 감독입니다.
그런데 사람인 목사는 때때로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영혼을 살피고 필요한 말씀의 꼴을 먹여야 하는데,
성도들의 상태를 완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한 양식을 제 때 먹이지 못할 수도 있고,
잘못 먹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감독이신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때를 때라 적절한 것들로 채워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양은 감독에게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잘난 체 하다가는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양이 길을 잃어버린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목자를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자를 따라가다가 때론 험난한 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가면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 길이 험해 보이고 위태하게 보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길이라면 그 길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우리 영혼의 감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적용(나 청중)호소 결심 결단합시다
오늘 "세상에서 사는 법"주제로 깨달음과 교훈을 받았습니다
양은 목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성도 된 우리들이 세상에서 사는 법은
영혼의 새로운 목자와 감독이 되신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1.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18-20)
2.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르는 삶(21-24)
3.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가는 삶(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