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면 서로 산다! (마태복음 6:14-15)
사람의 깊은 심혼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한이 서려있습니다. 한은 마음속에 있는 원망과 탄식,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탄원, 억울함, 상처들이 응어리져 나오는 탄식과 괴로움, 눈물, 신음소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가슴속에 한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조상 적부터 가난의 한, 가족 제도 속에서 가족들의 시달림으로 한 맺힌 여인들의 탄식, 사회적 갈등 속에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탄식, 이런 수많은 한을 품고 사는 조상들은 한풀이로 갖가지 굿을 해보았지만 그것으로 한을 풀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민중시인 김지하는 시집「황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반도는 원귀들의 아우성으로 가득차 있다. 외침, 전쟁, 목정, 반란, 악질(惡疾)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한에 찬 곡성으로 진동하고 있다."
수 천년 우리 민족은 역사의 와중에서 외적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일본 36년 압제 속에서 이 민족은 망국의 한을 품고 망명했으며, 그 압제 속에서 탄식하며 살아왔습니다. 또한 해방과 함께 이 민족은 남북의 분단으로 이산가족이 되었고, 6.25의 민족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습니다. 지금도 분단의 상처가 우리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습니다. 민족 전쟁을 통해서 억울하게 죽은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원수가 되었으며, 냉전체제 속에서 수없는 독재와 군사 정부가 자행한 민중 탄압, 이러한 것들이 어우러져 지금도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갈등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역사는 한 맺힌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할 절대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한을 풀어주어야만 이 민족에 진정한 자유가 오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외적인 어떤 압박과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진정한 자유는 자기 내적인 압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격적 자유는 외적인 해방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승리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해방은 다른 사람과 투쟁해서 얻는 것이고 자유는 자기와 싸워서 얻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를 이기는 데서 얻는 것입니다. 똑같은 밥을 먹고도 배고픈 사람들은 가난으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해서 가진 자들과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내 안에서의 자유는 밥을 배불리 먹지 않는 것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갖는다고 자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절제해야 자유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기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치유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치유의 최대 처방은 용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상처를 입고 한 맺혀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형제로부터 받은 상처, 노사간에 억눌린 상처, 인생의 갖가지 갈등, 수모, 멸시 속에서 받는 모든 상처들을 반드시 밖으로부터 풀려고 해서는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무덤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심연의 상처는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속죄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용서의 은혜
용서는 자기에게 상처 입힌 사람의 죄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한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속에 떠나지 않는 괴로움과, 죄책과, 양심의 가책에서 자기를 용서해야 됩니다. 둘째, 자기에게 상처 입힌 사람에 대한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대한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대개 자기 운명을 탄식하는 사람은 운명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 모든 용서가 다 이루어질 때, 우리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임하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와 너무 살기가 힘들다고 가출해버렸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커서 비 오는 날이면 창가에 서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 마음속에는 나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날마다 더해갔고 그것이 상처로 응어리져서 굴절된 자아상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용서 못할 한 인간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나는 매일 죽는다」는 책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 모든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내 속에 응어리져 있는 한이 풀렸습니다. 목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자기 속에 응어리진 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절)
여기 '사람의 과실'은 다른 사람의 과실도 되지만 자기 자신의 과실도 됩니다. 그래서 나도 용서하고, 남도 용서해야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이 말씀 속에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를 용서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과실'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토마'라는 말인데 이것은 곁에서 늘 협력해야 할 사람이 배신하는 손실, 감정적인 상처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자식을 도와주어야 할 부모가 자녀에게 상처를 입힌다든지, 곁에서 도와주어야 할 아내가 남편에게 상처를 준다든지, 은혜를 입은 사람이 배신한다든지, 곁에서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상처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상처가 자기 속에 응어리져 있을 때 이것을 풀어야 되는데 풀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불행하게 됩니다.
첫째로,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 속에 평안히 없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평안히 없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자기 속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에 자기도 모르는 속박을 지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움이 자리잡으면 우리 안에 있는 평안을 갈취해 갑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분노의 쓴 뿌리가 내 속을 얽어맵니다. 그래서 얼굴 표정이 어둡습니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악해집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다른 사람도 미워하고 자기도 미워합니다. 상대방이 잘못되기를 바라면서 복수하려는 악한 마음 때문에 심령이 황폐해지기 시작합니다. 은연중에 남이 망하기를 원한다든지, 남이 잘못되었을 때 고소해진다든지, '저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속에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폐쇄된 마음을 가지고는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달마 대사는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셋째로, 용서하지 않으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닮게 됩니다. 사랑하면 서로 닮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면서 사는 부부는 얼굴이 닮습니다. 미워해도 서로 닮습니다. 자나깨나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예쁘게 닮고 미워하는 사람은 못쓰게 닮습니다.
어느 날 한 자매 님이 나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께 솔직히 고백할 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아들은 사랑하고 딸은 미워하는 풍토 속에서 자랐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늘 저에게 욕을 하고 구박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저는 너무 싫고 미웠습니다. 저는 그때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절대로 엄마와 같이 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보니 저도 제 어머니와 똑같이 아들은 예뻐하고 딸은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여자니까 때리더라도 아들을 때리고 딸은 예뻐해야 할텐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워하면 닮는다.'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제가 제 친정 어머니를 미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로부터 딸만 낳는다고 구박을 당했기 때문에 그 한풀이로 나를 구박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어머니를 용서하게 되었고 내 마음의 상처도 치유 받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은연중에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하고 '내가 왜 이럴까' 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내 속에 용서하지 못한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곧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용서는 주님을 만나는 길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주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준 것처럼 나도 남의 죄를 용서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런 뜻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만약 주기도를 고백하고도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마치 그때마다 사형 판결문을 다시 낭독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계속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것 같이 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주기도를 할 때 이 부분을 빼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하므로 용서의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할 때 효자이신 예수를 만나는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므로 십일조를 받으시는 주님을 만나는 복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려고 할 때 스데반이 어떻게 합니까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용서의 주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아쉬운 편에 서야 합니다. 내 영혼이 살아야 되니까요. 주님을 만나야 하니까요.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자기를 못박고, 침 뱉고, 욕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은 아지 못하여 그러하니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그대로 운명하셔도 되는데 무엇 때문에 저들의 용서를 빌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용서받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단번에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받은 자의 확신은 구원이요, 구원의 확증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확증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는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다른 사람이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나는 단지 용서하므로 구원의 확증을 받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용서를 통해서 자기 영혼을 살려낼 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사울이라하는 청년을 살려냅니다. 사울은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하는 스데반을 보면서 마음이 동요되었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용서하면서 죽을 수 있을까, 어떻게 죽으면서 저런 평화로운 얼굴을 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창출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천년 교회사에서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위대한 스데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사울을 살려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죽을 때 다른 사람을 살려놓아야 됩니다.
교회에서 목사 설교 듣고 은혜 받는 사람은 많지만 목사의 삶을 보고 은혜 받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삶을 통해서 받는 은혜는 집사를 통해서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데반 집사를 표본으로 세우셨습니다. 마리아를 표본으로 세우셔서 주의 종들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용서는 서로를 살리는 능력
우리가 용서할 때 내 마음속에 사랑의 마음이 깃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이 용서로 나타날 때 용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이 상처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부정적으로 옭아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나를 옭아맨 올무도 풀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용서는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새 역사의 창조다. 용서는 상대방을 선대해 주므로 화해의 좋은 관계를 이루어 평화의 사회를 창조한다. 용서는 용서받은 자로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의무와 동기를 부여하므로 한 사람의 인격을 살리는 결과가 된다"
흑인들이 백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차별대우를 받을 때 백인들로부터 자유를 선포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백인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극도로 치닫을 때 마틴 루터킹 목사는 흑인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울면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증오를 증오로 갚는 것은 증오만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며 캄캄한 밤을 어둠으로 먹칠할 뿐이다.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가 없다. 미움은 미움을 몰아낼 수가 없다. 오직 사랑만이 미움을 극복한다. 사랑은 원수를 친구로 뒤바꿀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미움을 미움으로 이길 수는 없다. 미움은 본질상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므로 창조하고 세우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구원의 능력이다. 우리 모두 다 사랑으로 행진하자"
그는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까지 비폭력 무저항주의자 간디의 위대한 정신,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전진했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내 속에 있는 모든 독이 빠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므로 내 육체가 건강해지고 삶 전체가 활력을 얻게 됩니다.
지금 이 민족은 한 맺힌 민족의 상처로 인하여 미움이 응어리져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 민족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용서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죽이지 않고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용서는 내가 별세함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면 그 사람의 모든 저주와, 불행과, 상처의 아픔까지 내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가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부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우리까지 살려놓은 것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므로 내가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사람까지 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치유며, 용서의 자유입니다.
용서하는 자만이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의 행진을 천국까지 멈추지 않고 날마다 전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