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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고린도후서 12장 5~10절

작성자엘리야|작성시간13.01.26|조회수144 목록 댓글 0

제목 / 약함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본문 / 고린도후서 12장 5~10절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1)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인사(연결)와 서론

지난 시간에는 "환경과 역경을 보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약함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나누는 시간이 되고저 합니다.


우리는 강해지려고 애를 씁니다. 힘을 가지면 성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문화는 강함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어떻게 하면 힘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지 애를 쓰며 몸부림칩니다.

누구도 약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약함을 원하지 않고 약함이 있다면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대화할 때도 나의 약함을 주제로 대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언제나 나의 강함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남자들이 모여 있으면 군대 이야기를 부풀려 남성적 영웅담을 늘어놓습니다.

강함을 자랑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건들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누구나 약함에 대해서 자기 방어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강한 것, 센 것, 잘난 것, 가장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합니다.

누가 나보다 나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사람은 일평생 자신의 자랑거리를 만들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세월을 보냅니다.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름대로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는 독특한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9절에서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10절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역설적인 표현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형식적으로 겸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약함을 붙잡고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바울의 신앙을 떠받들고 있는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울 되게 만들었던 위대한 정신적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잘 붙잡으면 우리 일생에 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말씀일 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삶을 움직이고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이 말씀은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중심적 주제이고 승리의 비결이 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약함의 원리를 따라서 사셨습니다.

주님은 약한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결단코 강자의 이미지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주님의 모습은 마른 땅에서 나온 연한 순과 같다고 되어있습니다. 아주 약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가 더해갈수록 더 약해지셨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시는 주간에는 나귀를 타셨는데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사실 왠지 우스꽝스러운 모습 아닙니까?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는 것은 왕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실 때 대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님을 무력으로 잡고자 해서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힘을 써야 하는 순간에 예수님은 굉장히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붙잡혀가셨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힘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세상은 힘을 숭배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힘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경쟁사회에서는 힘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점령합니다.

돈의 힘을 가진 사람은 돈의 힘을 쓰고 싶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그 힘을 사용할 때 짜릿한 쾌감이 있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은 경계선을 넘고 싶어 하는 유혹이 찾아옵니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조심성이 없어지고 자신도 모르게 자만심이 생겨서 방심하게 되고

자신의 힘을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삼손을 보면 그는 힘을 가지고 있는 강한 용사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나귀 뼈를 휘두르며 많이 죽이고 힘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더 큰 힘으로 억압을 받게 됩니다. 힘은 또 다른 힘으로 죽게 됩니다.

다윗은 거대한 힘의 상징인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한순간에 넘어뜨립니다.

강한 힘이 얼마나 허무하게 끝나는 것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스타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힘이 점점 많이 지면서 다윗이 힘의 정점에 선 어느 순간에 무너집니다.

 

사무엘하 11장, 왕이 출전할 시기에 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왕궁에서 낮잠을 잤습니다.

전쟁에 나가도 되지 않을 만큼 힘이 생긴 것입니다.

왕이 출전할 시기에 출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왕이 출전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돌아갈 수 있다고

스스로 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실수를 합니다.

왕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봅니다. 이전의 다윗이라면 고개를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 보니 그 여인은 자기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또 사람을 보내서 그 여인을 불러오게 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브레이크보다 악셀러레이터을 더 좋아합니다. 속도를 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서 그 여인을 데려오고 또 사람을 보내고 데려오고 하는 사람을 통제하고 움직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만능이라고 믿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말할 때 주어가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나는.” 힘을 가졌다는 상징입니다.

자신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순간이 바로 다윗 인생의 추락지점이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정에서 40년 동안 공부하는 가운데 세상적 힘을 길렀습니다.

그 당시 애굽은 오늘날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실에서 힘이 무엇인가를 보며 자랐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 아들로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바로에게는 외동딸인 공주밖에 자식이 없어서 모세는 애굽의 왕이 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감이 충천했고 힘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사람을 죽이는 일에 쓰고 말았습니다.

그는 광야로 피신해서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40년이 지나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말할 줄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의 강함은 아주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힘을 쌓고 싶고 강자가 되고 싶어 하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정반대의 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강함을 자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주님은 정반대의 원리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한없이 약한 자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힘마저도 당신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돌들이 떡이 되도록 하라는 유혹에도 충분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은 돌이 떡이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킬 정도로 무한한 창조의 능력을 갖추신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결단코 당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랑하지 않으시고

힘을 감추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가장 힘없는 자의 모습으로 창조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도 할 말이 많았지만 침묵하셨습니다. 주님은 진리이신 분입니다.

단번에 굴복시킬 수 있는 분이시지만 침묵하셨습니다. 마치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양의 모습으로 가만히 당하기만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자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는 힘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힘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을 결단코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약해질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약해지신 그리스도가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나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힘이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젊음도 힘이고 스팩을 쌓은 것도 힘이고 많은 경험, 돈,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많이 받는 것도 힘입니다.

내가 쌓아온 실력, 배경도 힘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쓰임 받을 것으로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그런 것은 쓰임을 받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역사 속에서 방해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부족함이 많아서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강함으로 인해 쓰임 받지 못한 경우가 역사 속에서 훨씬 더 많습니다.

힘이 넘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힘을 다 빼고 쓰십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힘을 완전히 빼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돈이 나의 힘이 되어있을 때 모든 문제를 돈으로 풀려고 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돈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많은 것 같지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자식의 교육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잔소리만 많아져서 아이를 더 망가트릴 수도 있습니다.

손봉호 교수라는 분은 서울대 교수로 은퇴하셨는데 한국에서 알아주는 지성인이고 교육의 전문가 중의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을 때 자녀가 사고를 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교육의 대가인데 자녀는 말을 안 듣고 속 썩이고 학교에 내 불려다니고 하면서 자녀 교육은 이론대로 안 되더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내가 자랑할 만한 것이 대단한 것 같지만, 별것 아닙니다.

자랑할 만한 것을 위해서 쟁취하려고 노력하고 애썼지만 정작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도 너무나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딱 한 가지만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자랑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딱 하나 나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기도제목을 나눌 때도 최대한 자신의 약점을 감추면서 이야기합니다.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속으로는 울고 있는데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합니다.

약함을 드러내면 그것이 약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약함은 약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함을 드러내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강점이 됩니다.

내가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들춰내실 때가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나의 약함을 발견하게 하시고 허물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베드로의 약점은 강한 자신감입니다. 늘 자신은 다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럴 때마다 실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실패한 제자로 자신감을 다 잃어버리고 디베랴 바닷가에 있을 때 모든 힘이 다 빠지고 어깨가 쳐질 때로 쳐졌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때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더는 감출 수 없는 지경에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절망 끝에서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정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은 아름다움의 힘 때문에 성형외과가 잘 됩니다.

가능한 한 약점이 되지 않도록 감추고 싶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아는 사람이 연약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끌어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어떤 죄인도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의 보혈은 어떤 수치와 허물도 덮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이런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모습도 아닌

오직 하나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 만든 의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과 허물과 수치의 모습이 아니라 그 아들의 피로 의인이라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곧 강하게 하시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더 나의 약함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약한 것을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약함을 거부하고 자랑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입니다.

내가 병이 걸렸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며 거부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병원을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연약함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해야 치유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게 될 때 회복과 치유와 주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지만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젊음도 금방 지나갑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자랑하는 것들이 조금만 지나면 별것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삽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어떤 것도 자랑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쌓아왔던 것들이 내 삶을 이끌어주고 세워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무모하고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들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직 주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주의 은혜만이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약함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다 약한 존재들입니다.

약한 자는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십자가로 가야 우리는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웬만하면 십자가를 잘 찾지 않습니다.

인간은 의지할 만한 구석이 한 군데라도 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고 버틸 때까지 버팁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기도꾼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총리였는데 국정에 아주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탁월한 총리여서 왕이 바뀌어도 계속 총리직을 유지할 정도였고 주변에 많은 뛰어난

베벨론 사람들의 시기, 질투에도 인정받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다니엘만큼 바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국정을 돌보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대충 때우기식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루를 세 등분으로 나누어서 예루살렘 쪽 문을 열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기도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목회하지만 새벽에는 기도하지만 중요한 일도 있는 일상을 세 번을 정확히 나누어 기도에 집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순교적인 태도가 아니면 바쁜 일과 속에서 정기적으로 하루 세 번 진지하게 무릎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기도한 것은 순교입니다. 우

리처럼 편안한 환경 속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함과 시기 속에서 엎드려 기도한 것인데

기도가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일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바벨론이라는 이방의 땅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의 땅에서 국정을 감당하는 총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 없이는 바람 앞에서

촛불과 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의 모함과 질타 속에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이지 다니엘의 실력으로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밖에 붙잡을 것이 없다는 절체절명의 환경 속에서 기도를 배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기도를 배우기에 부적합한 환경이 많습니다.

우리가 믿는 힘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깊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기도가 터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철저히 알고 더 붙잡을 것이 없다는 것을 느낄 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기도는 약함을 처절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배우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다고 당장 죽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당장 실패하고 문제가 생기고 신앙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 삶에서 표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힘만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몸으로 배우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절박한 기도가 터져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밤, 약할 때 강하다는 원리를 전율하듯이 다가오는 은혜가 있기 바랍니다.

내가 약하다고 인정하고 힘을 빼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머물게 됩니다.

약할 때 복음이 제대로 들어갑니다.

한국이 못살 때는 복음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전 한국사회를 보면 복음이 제대로 들어왔었습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 순교자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많은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충청도 어느 지역은 한 교회 성도 전체가 믿음을 지켜 공산당에게 몰살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가난과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시절이라 십자가의 의미가 깊이 파고들어 와 복음이 우리의 소망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이 절절히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앞에 무릎 꿇고 십자가의 능력을 붙잡고 한국교회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금 어떤 약함 때문에 힘들어하고 부끄러워하십니까? 약함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드러내고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내 삶의 한계와 연약함으로 닥친 그 상황이 기가 막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이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밤, 어떤 연약함, 한계, 부족함, 문제를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축복의 호기입니다.

예전에 한국교회에서 크게 쓰임 받았던 목사님들을 보면 몸이 매우 아파서 이 설교가 마지막 설교라고 생각하고 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너무나 약한 그곳에서 능력이 임했습니다.

신학을 잘 공부하지도 못했고 지금처럼 좋은 책들, 자료도 없었고 가난해서 쓰러질 것 같은 교회에서 설교해도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진 것, 의지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나의 약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최대한 가리기 위해서 오만 것들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연약함 자체가 약점이 아닙니다.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약점입니다.

 

약점이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약함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내 자랑이 죽어야 합니다. 내가 의지하던 힘이 죽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자신감이 망가져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연약함과 어려움으로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 이런 연약함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어려운 것들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좋지 않은 상황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어깨가 쳐질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번 고난주간 동안 연약함을 한없이 받아들이셨던 주님께서 어떻게 승리하셨는가를 봐야 합니다.

어떤 연약함을 가졌든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불안정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현실과 무엇인가 결핍이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그리스도를 의지할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면

그 상태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자꾸 우리의 힘을 믿도록 미혹합니다.

그때 거짓 안정감에 빠져 나도 모르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을 실패의 길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나의 어떤 연약함도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나의 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이 만나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지금 연약한 자를 찾으시고 사용하고 싶어 하십니다.

혹시 지금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경쟁심에 불타올라서 이를 악물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결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야!” 하며 안간힘을 쓰며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의 힘을 쌓아가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힘을 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식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약함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주님은 바울의 연약함을 거둬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로 놔두시고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힘을 완전히 빼놓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잘나가고 자신감이 충만할 때 절대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힘, 자신감, 경험들, 여러분이 쌓아왔던 것들을 쓰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쓰고 싶어 하십니다.

그 연약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힘을 가지고 계신 분들 그 힘을 완전히 빼시기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힘을 완전히 다 빼고 나서 쓰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쓰시고자 연약하게 하신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지 마시고 그것을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아니면 내가 나다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연약함을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 가지 문제, 아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터져 나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어떤 것이든 자랑하고 주장하지 말고 다 내려놓으시고 오히려 내 약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를 강하게 하시고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춘교회 2000년 7월 9일 성령강림절 후 네 번째 주일
성경 ; 삼하5:1-5,9-10, 고후12:2-10, 막6:1-13
제목 ;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리라!
작성 방법 ; 한글97 ( A4, 2쪽)
작성자 ; 정 수 환 목사(j3038@kornet.net)
연락 전화 ; 영춘교회 ( 043-423-3038, 011-738-3038 )
참고 ; 공개자료실에서는 A4 용지 4쪽으로 된 자료를 받을 수가 있 습니다. 이 설교자료는, 성서일과와 교회력에 따라 작성된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위대한 설교가로서 너무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한번은 아주 형편없는 설교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완전히 죽을 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도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형편없는 설교를 축복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는 한 주간 내내 이 기도를 했습니다. 밤중에도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은 지난주의 엉터리 설교를 보상하려는 맘으로 멋진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많이 받았노라 했고, 그 자신도 자신의 설교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두 편의 설교에 대한 결과를 한번 비교해 보기로 하고 조사와 분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으로 놀랄 만큼 달랐습니다. 첫 번째의 엉터리 설교를 통해서는 41명이나 주님을 영접했지만, 두 번째의 그 멋진 설교를 통해서는 단 한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후12:5에서 말하기를 『나는, 내가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과, 이런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불러주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위대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연약함을 느낄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내 약한 것을 기쁘게 자랑한다(고후12:9)』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힘이나 내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주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9)』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을 드러내면서 자랑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학식과 지위, 그리고 신분이나 신앙적인 열심에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안 다음부터는 그 모든 것을 분토(糞土)처럼 여겨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를 알고 믿게 된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신비한 체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걸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실 이상으로 과장할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간섭하셨습니다. 그런 경험 때문에, 바울이 교만에 빠질까봐, 하나님은 가시로 찌르는 것과 같은 질병을 주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질병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세 번이나 간절히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네게 내리는 은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사람에게 가장 잘 나타난다(고후12:9)』는 음성을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에 가장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한발 뒤로 물러서십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교만해질 경우, 하나님 대신에 마귀가 와서 우리를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천사를 떨어뜨려 마귀가 되게 하고, 겸손은 사람으로 천사가 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겸손’을 독일어로는 ‘디무트(demut)'라고 하는데, 그 말의 또 다른 뜻은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이 되었을 때에, 사무엘 하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점점 더 세력을 굳히게 되었다(5:10)』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다윗은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과 바울처럼, 겸손히 주님만 의지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있습니까? 물론,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목표도 바울과 다윗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아직 부족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겸손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보다는 나를 드러내고 내 자랑하기에 바쁜 것입니다.

1.세상의 헛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감리교회에서 발행하는 ‘기독교타임즈’ 1면에 충남의 어느 교회 광고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께서 박사학위 받은 것에 대한 감사 예배를 드린다는 광고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물질도 허락하셔서, 그 힘들고 어려운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기에 충분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큰 광고를 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런 종류의 감사 예배는, 대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인간 자신이 그 영광을 독차지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분토처럼 버렸다는 바울의 신앙을 이어가야 할 목회자로서는 멀리해야 할 행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 성도들이 강권할지라도 끝까지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일찍이 에덴 동산에서 그런 유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과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안목의 정욕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습니다. 그들이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유혹의 도전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영적으로 타락할 염려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지위와 체면 때문에 억지로 교회 다니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①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면 그런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결과에다가 그 일의 목표를 두면 안 됩니다. 어떤 결과가 주어지던지,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또한, 어떤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패 하나, 상장 하나라도 받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나’를 앞세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공로 다툼이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그 공로가 돌아가면 그를 깎아 내리기에 정신 없는 것입니다.
②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드러내고 내 자랑하기에 바쁘다 보면, 언제 주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겸손해야 나타나는 법인데, 내가 아니면 안되고 내 생각대로 하지 않으면 결코 안 된다고 할 경우, 어떻게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주께 대한 선입견 때문에,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선입견만 버렸더라면 타지역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히도 주님을 영접할 만큼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겸손하지 못한 까닭에 손해보는 게 참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게 하시려고, 예방주사를 주듯이 찌르는 가시와 같은 질병을 주셨던 것입니다.
③겸손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 믿는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 가운데에는, 미래에 누리게 되는 것보다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그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이미 자신의 손에 그 복을 쥐고 있으면서도 불평과 불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에서 선지자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자신들의 마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하건만, 그들은 그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놀라운 주의 복음을 접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값진 복음입니다. 하건만, 일부 성도들은 몇 푼 어치 되지 않는 세상 명예와 지위 때문에 복음을 헌신짝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버렸어야 할 세상 자랑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주를 믿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어서 속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권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2.우리는 겸손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 능력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헛된 자랑과 교만한 맘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 의지하고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록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세상에서 제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실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
①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내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주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고후12:9)』고 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밤낮 자기 자랑하다가 날 새게 마련입니다.
주께서 비유로 드신 ‘어리석은 부자’는 눅12:17-19사이에서 ‘나’라는 주어를 여섯 번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는 나를 내세우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만을 자랑하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자기 지혜만 믿다가 망하게 마련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주께서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인생은 틀림없이 성공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겸손히 의지해야 합니다.
②우리는 주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을 항상 깨닫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주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인이신 주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내 맘대로 살아놓고서 주님께 책임지라 할 수 없습니다.
김포 어느 교회에는 고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제가 김포에 있을 때만 해도 칠십이 넘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교역자가 아무리 젊어도, 마주 앉을 때에는 꼭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방 내 무슨 행사가 있으면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담임자 이름으로 찬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장로님은 매사 교역자를 존중하고 내세웠습니다. 담임자가 좀 부족해도, 교인들은 담임자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 많은 장로님께서 담임자를 존중하니, 그 누가 젊은 교역자라 해서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도 자연히 교역자를 존경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사람들에게 전도가 되고, 교회는 날로 부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예수를 어떻게 믿고 섬기고 있는지 짐작이 가고 남을 일입니다. 비록 그 교회가 시골에 있지만, 지금도 계속 건실하고 튼튼한 교회로 성장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처럼, 담임자를 존중하면 설교에 은혜를 받게 되고, 그 결과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은 성숙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내세우거나 교만하면 점차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로 알고 섬기면서, 모든 일을 통해서 주님만 자랑하며 영광을 돌리게 되면, 그런 사람은 모든 면에서 크게 성장할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약한 것을 오히려 자랑하라!
고린도후서 12:5-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자랑하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 또는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자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한다는 표현 중 하나이기에, 자랑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능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극한 열등감이나 실패의 모멸감에서 자기 자신을 감추거나, 은폐하려는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자신을 과장해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랑한다는 것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왜’ 자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 가운데서 한 인물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도로서 세계 각처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자랑할 수 있는 많은 요인들이 있음을 말했습니다(고후 11:22)..
자신은 히브리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랑스러운 혈통과 가문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유대인의 전통적 율법을 배웠고,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심오한 헬라 철학의 학력과 학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 시민으로서의 사회적 위치와 명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 외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성실한 믿음의 삶과 자랑할 만한 깊은 영적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주리고, 목마르고, 매맞으며, 갖은 고난을 겪었으며,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심을 가지고 충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령한 환상을 보고, 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신비로운 체험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상하게도 능히 자랑할 수 있는 이러한 것들을 결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장 약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부끄러운 것, 즉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약점을 자랑한 것입니다.

바울은 약한 것(handicap)으로서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간질병’이나’ ‘만성 안질’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었기에 ‘사탄의 가시’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이것이 자신으로부터 떠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자랑할 수 있는 것들보다 자신의 가장 약한 것, 가장 부끄러운 것, 가장 수치스러운 것을 자랑하는 바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귀중한 영적 깨우침을 줍니다.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했습니다.
이는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했습니까?
왜, 약한 것인 ‘육체의 가시’를 자랑했습니까?
우리는 이 자랑의 이유를 찾아봄으로써 깊은 영적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1. 약함을 자랑함은 그 약함이 스스로를 높이는 ‘자고성’(自高性)을 극복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주님이 ‘너무 자고(自高)치 않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스스로를 높이는 ‘자고성’(自高性)은 인간을 인간 되지 못하도록 하는 무서운 병균과 같습니다.
‘자고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며, 진실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소극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바로 보고, 하나님 앞에서 찾아야 할 모습을 찾게 하는 겸손을 만들어 줍니다.

자신의 약함을 바로 보는 것은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게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높이는 것은 자신을 교만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의 참된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바로 깨닫는 것은, ‘자고성’을 극복하게 하여 자기 교만에서 오는 무지를 깨뜨려 줍니다.


2. 약함을 자랑함은 그 약함이 우리를 온전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기를 세 번씩이나 간구하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짊어진 육체의 아픔 때문에 교만하여지지 않고, 그 아픔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감으로써 은혜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여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편안함, 부요함, 좋은 환경이 오히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바울이 갖고 있던 육체의 가시처럼 사람을 약하게 하는 요소들이 오히려 인생을 아름답고 순수하며 가치 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해주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Hellen Keller)는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삼중고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함을 바로 인식하였기에 위대한 정신적인 유산을 남겼습니다.
아인슈타인(A. Einstein)은 대학입시에 떨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운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약함을 바로 수용할 때에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링컨(A. Lincoln)은 초등학교를 아홉 달밖에는 다니지 못했지만, 자신의 약함인 불행한 환경 중에서도 인간의 삶에 대한 참된 질문을 함으로써, 바른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흑인 해방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온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온전함은 온전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며 하나님과 함께하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전함을 이루게 합니다.
나의 약함이 무엇인지 깨닫고, 인식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함께합니다.


3. 약함을 자랑함은 그 약함이 우리를 강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약함을 깨닫고 인식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강함이 인간의 강함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약함이 있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사 35:3),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사 40:29)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네 가지 P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Pardon (용서),
둘째는 Purpose(목적),
셋째는 Peace(평화),
넷째는 Power(능력)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용서를 체험하게 하시고,
삶의 목표를 간직하게 하시고,
평화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며,
강한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약함을 바로 인식하고, 깨닫는 사람에게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강함을 간직할 때, 인간은 강한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강함은, 인간으로서 약함을 깨닫는 데서 경험됩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여사는 금세기 미국이 낳은 위대한 찬송작가입니다.
생후 6주 되던 때, 그녀는 감기로 인한 고열 때문에 눈언저리에 생긴 종기를 치료하던 중, 의사의 실수로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던 그녀는 31세 때 자신의 약함과 한계 앞에서 자신을 온전케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영혼에 빛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다시 태어나는 중생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녀는 약함 속에서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기에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며, 주님의 은총을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찬송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는 약함 중에 함께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감격을 고백한 찬송입니다.
특히 43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는 자신의 한계성을 실감하며, 약함 중에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체험하고 지은 찬송입니다.
이 찬송시는 1874년에 겪은 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날 5달러 정도의 돈을 채워서 쓸 일이 생겼지만, 그 돈을 마련해서 채울 만큼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5달러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54세가 되기까지 일생을 그렇게 살아왔듯이, 필요한 5달러를 위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짧은 기도는 어떤 방문객의 초인종 소리에 중지되었습니다.
그 방문객은 다만 크로스비 여사의 집 앞을 지나다가 유명한 찬송작가인 그녀를 뵙고 인사만 하고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짧은 만남 후 그 사람은 작별인사와 함께 악수를 하고, 크로스비 여사를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녀간 후 크로스비 여사의 손에는 5달러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무력한 자신을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뜨겁게 경험한 것입니다.
크로스비는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여 그 감격을 시로 써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할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스스로 높아질 수 없는 약한 자신을 온전케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감격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깊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이 어떠한 것인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약함을 드러내므로 자신을 무지하게 만드는 자고성을 무너뜨립시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음으로 그 속에서 찾아야 할 나의 올바른 모습을 찾아냅시다.
바로 나의 약함에서 나타나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십시다.
하나님의 그 깊으신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나의 약함을 시인함으로, 그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십시다.
약함을 자랑함으로 자고성을 극복하여, 온전하고, 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아멘.

월간목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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