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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혁과 영적 부흥
부흥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갱신(renewal), 부흥(revival) 및 각성(awakening)을 구분한다. 갱신은 기존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이고, 부흥은 새롭게된 교회를 통해 지역 사회가 변하는 것이고 각성은 불신자들이 대규모로 회심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갱신, 부흥 또는 각성 모두가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며 다만 그 범위의 차이, 강도의 차이에 따라 갱신, 부흥 또는 각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본질은 같기 떄문이다. 갱신이든 부흥이든 각성이든 사람들이 계획하여 개최하는 전도 대회와는 차이가 있다. 필자는 이 후 부흥이란 말로 모든 것을 대체한다. 그러면 부흥이란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부흥을 이렇게 정의한다. 부흥을 정의하느라고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 부흥이다. 일차적으로 성령께서는 교회에 속한 지체들 속에서 그러한 역사를 한다. 그러므로 부흥은 신자들의 부흥이다. 생명이 없던 것을 부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부흥이란 정의상 무엇보다 먼저 나른해지고 잠들어 거의 죽어가는 교회의 지체들을 활기 있게 하고 깨워 소생하게 하는 것이다. 갑자기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한다. 그들은 이전에 그저 머리로만 믿던 진리를 새롭고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아마 그 깨달음의 차원도 더 깊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겸손해지고 죄를 깨달으며 자신들의 상태를 보고 무서워 하게 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모든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이 위대한 구원을 알게 되고 그 구원의 능력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소생하고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게 된 결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능력이 목사들의 설교 속에 들어간다. 그 결과 전에 교회 밖에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회심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 따라서 부흥의 주요한 두 특징은 첫째 교회 지체들이 이처럼 특이하게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고, 둘째 이제까지 교회 밖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이다. (그밖에 내가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더 큰 교회당 건축, 새로운 사업착수, 많은 사람의 목회 헌신과, 그 훈련시작 등이다). 우리가 부흥이라는 말을 쓸 떄 뜻하는 것은 본질상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1) 쉽게 말하면 집단적으로 사도행전적인 성령 체험,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바로 부흥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을 소생시키심으로서 부흥을 주도하신다. 죽은 영혼에 대해 말 그대로 회복되고 새롭게 되살아나는(re-vive) 부흥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이 먼저냐 부흥이 먼저냐 부흥은 통상적으로 기존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난다. 20세기 전후에 일어난 몇가지 부흥의 실례를 살펴보자. (케이스 1) H 씨는 대도시인 C 시에 소재하는 부흥하는 교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H씨는 이후에 목사가 된 후 C 국의 선교사로 나갔다. H 목사는 자기의 선교지역에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날 지구 반대편에 거주하는 친지가 보내온 조그만 책자 하나가 H 목사에게 배달되어 왔다. 그 책은 지구 반대편에서 성령이 어떻게 신자들에게 불로써 역사하셨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큰 감명을 받은 H 목사 부부는 베네수엘라, 노르웨이, 인도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 성령에 관한 체험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 1909년, 마침내 H 목사의 기도는 응답을 받기 시작했다. 주일학교 출석이 7월에는 363명에 이르렀고, 8월에는 425명, 9월에는 527명에 이르렀다. 10월에는 예배 참석 인원이 팔, 구백 명에 이르렀다. 이런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H 목사는 기성 교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H 목사는 이에 아랑곳 없이 독립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P 교단을 설립하였다. 교인은 해마다 굉장한 성장을 이룩해 갔습니다. 오늘날 P 목사가 세운 교단의 총교인 수는 약 65만 명이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H 목사를 쫓아낸 교단은 교인수가 현재 약 2만 명에 불과하다. (케이스 2) 1906년, S 목사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다는 P 목사를 만난 후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L 시의 A가에 소재하는 이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에서 유명해졌다. 기자인 B 씨는 S 목사의 집회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 . .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치료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과 능력으로 회복되고 세례를 받는 축복을 얻었다. 주안에서 크게 쓰임받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약한 자들이 강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밝은 촛불에 의한 것처럼 살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느 실로 사름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내면의 비밀스러운 동기까지 면밀히 검증되는 엄청난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더 높여지고, ‘그 피’가 칭송되고, 성령이 다시 한번 더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을 반대하는 L시의 유력 일간지는 “별난 혓바닥들의 중얼거림--신종 광신파들의 활거, 어젯밤 A가에서 일어난 꼴불견의 현상”이라는 제목 하에 이 운동을 사정없이 매도했다. 오늘날 A가에서 시작된 부흥으로 인하여 이 운동에 동참한 교인 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1990년 현재 전세계적으로 교인 수가 3억 6천만명으로 추정되며, 천주교 다음으로 가는 제일 큰 기독교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케이스 3) 1906년, 이곳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은 성경공부로부터 시작되었다. 십여년 전부터 전국의 주요 시와 읍에 성경공부의 열기가 더해갔다. 1904년에는 교인들의 60% 이상이 한 두개의 이상의 성경공부에 참가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북부 지방의 한 선교회에서는 800여개의 성경공부반이 개최되어 정규 신자의 두 배가 넘는 약 5만명 이상이 인원이 참가하였다. 1906년 P 시의 K 목사는 인도와 웰쉬 지방의 대부흥의 소식을 듣고 새벽기도를 통하여 자기들에게도 대부흥의 물결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마침내 1907년 P 시에서 개최된 성경공부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였다. ‘통성기도하는 소리가 많은 물소리 같았으며. . . 주에 대한 두려움과 죄에 대한 통분과 근심이 일어나서. . .물건을 훔친 도적과 서방질한 아내가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 . B 선교사를 미워한 K 목사는 땅바닥을 치며 통분하며 회개하였고. . . 선교자와 현지인 간에 응어리진 심령들이 사랑으로 녹아졌고. . . 이 광경을 목격한 외국 선교사들은 마침내 이곳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심을 실제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흥운동의 소문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고 그 후 몇달에 걸쳐 선교사들이 전국 유명 도시에 초청되어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신학교가 속속 설립되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양적인 성장은 이미 십여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1907년의 부흥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된 양적인 성장의 중앙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07년의 부흥으로 인해 교회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선교사와 현지인 간에 이해와 교제의 폭이 더욱 넓어졌으며, 신자들의 도덕이나 윤리관이 개선되고, 종교적인 습관이 확립되었다. 이 부흥은 불신자의 회심을 위한 부흥이라기 보다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새로워졌다. 현재 K 목사가 주도한 부흥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교단은 국내 최대의 신자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케이스 1은 남미 칠레의 부흥운동이다.2) 오늘날 칠레를 위시한 남미 개신교 신자의 약 80%가 후버(Hoover) 목사 등이 설립한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다. 케이스 2는 미국 로스 엔젤레스시의 아주사(Azusa)가에서 윌리엄 세이무어(William J. Seymour) 목사를 선두로 하여 불이 붙은 미국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의 부흥운동이다.3) 케이스 3은 1907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의 주도로 일어난 한국의 부흥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4) 이 세 가지의 부흥운동의 공통점은 19세기 중엽 영국의 웰쉬(Welsh) 지방에서 시작되어 20세기 전후 미국의 D.L. 무디의 부흥운동을 통해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한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이 사실을 환기시키는 이유는 오늘날 개혁파와 부흥파가 양단에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이유는 동일한 성령의 부어주심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서이다. 개혁파는 부흥 이전에 바른 교리를 주창하고, 부흥파는 개혁 이전에 부흥을 주창하여 서로의 입장을 고수하다보니 오해의 골만 깊어진 감이 있기 때문이다 부흥이 먼저인가, 개혁이 먼저인가? 이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란처럼 어느 한가지 정답을 내기가 곤란하다. 두 가지 모두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볼 때 우리는 부흥이 개혁에 선행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소수에 불과하던 신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의 지역에 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괄목할만한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다(부흥). 양적인 성장과 함께 개교회에서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이에 하나님은 사도들을 들어 쓰셔서 서신서를 통해 혼란과 갈등 속에 쌓여 있는 교회들에게 기독교의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지침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개혁). 교회사를 통해 볼 때 개혁과 부흥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루터, 즈위글리 및 칼빈으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의 교리를 통해 교회는 구 천주교의 온갖 악습과 형식에서 벗어나 영적인 대각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의 부흥운동을 살펴보면, 대분의 경우 부흥이 개혁에 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레의 부흥운동, 죠지 윗필드와 죠나단 에드워즈가 주도한 제1차 대각성 운동, 챨스 피니의 제2차 영적 대각성 운동, 20세기의 오순절 성령운동 등을 살펴볼 때 부흥이 앞셨으며 개혁이 미쳐 이를 따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개혁 신학은 항상 종교 개혁을 규범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개혁이 따르지 않는 부흥운동을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으로 비판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개혁 신학은 교리적인 정교함은 가졌을지 몰라도 부흥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었으며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운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개혁신학의 좁은 틀 안에 묶어 버리는 오류를 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제1차 영적 대각성 때 제일 우위에 선 장로교와 회중교회는 당시에 일어난 부흥을 회의하며 반부흥파로 선회하여 부흥의 여러 현상을 비판하였다. 한편 당시에 미미한 세력에 불과했던 침레교와 감리교는 부흥의 물결을 최대한 이용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한 결과 오늘날 장로교를 훨씬 앞질러는 대교단으로 성장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보다는 먼저 개혁을 중시하기 때문에 많은 개혁파들이 부흥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먼저 개혁이 필요하므로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다. 부흥을 위해 기도할 자격을 갖추려면 먼져 바른 교리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혁과 부흥은 극히 어려운 문제이며 그 선은 분명하지 않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참된 영적인 부흥이었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역사이다. 교리 교육의 변화만으로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그외의 부흥운동을 보면 대부분이 먼저 부흥이 있었고 개혁이 따랐다(예, 휫필드, 웨일즈의 하웰 해리스 등).”5) 이어서 로이드 존스는 부흥과 교리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이 논증을 사용하자. 만일 개혁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한다면 알미니안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먼저 어떤 일을 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일이다. 또한 알미니안의 생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고, 개혁파의 근본적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진실로 믿는다면 교회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부흥을 보내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6) 로이드 존스는 이어서 개혁보수파가 부흥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 두 가지를 더 제시한다.7) 첫째, 부흥운동을 반대하는 보편적인 이유는 ‘부흥의 현상’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부흥과 함께 가끔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부흥이라는 문제 전체를 기각시켜 버린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도 최근의 몇몇 부흥사들에 대한 시비는 기독교의 일차적이고 원론적인 교리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그들의 집회에서 일어나는 예배의 형태나 현상에 대한 문제들이 주류를 이룬다. 조용하고 점잖케 예배를 드리는 것을 규범으로 생각해온 사람들이 보기에 울부짖으며 통성기도를 하고, 죄로 인한 회개로 통곡하고, 찬양할 때 박수치고 손을 들고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고 꼭 이렇게 믿어야 하는가하고 회의하기 때문이다. 둘째, 때떄로 신약성경 어디서도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는 신약 교회는 부흥 중에 있었기 때문에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신약 교회는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를 받은 교회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영적 상태는 과연 신약 교회와 같은가? 바른 교리를 전한다 해도 교회가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정통이면서도 죽어 있을 수 있고 완전히 정통이면서도 아무 쓸모없는 교회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신랄하게 책망하신다. -첫 사랑을 잃은 에베소교회에 대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 -교리는 바르나 행위는 죽은 사데교회에 대해.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미지근한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 “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 3:16-17). 부흥에 관심을 잃은 이유 그러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부흥에 대한 관심을 잃었을까? 로이드 존는 유독 개혁파에 속한 람들이 부흥 문제에 대해 관심을 잃은 이유 몇 가지를 제시한다.8)
첫째, 이론적이고 지적인 접근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의 위험성은 무미한 전통과 이지주의에 빠져 자신의 영적 삶과 교회의 삶에 대해 갈수록 태만해질 위험이 있다. 이들은 진실로 ‘신학’(神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귀가 그들로 하여금 순수한 신학자들가 되어 지적인 진리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둘째, 그 뚜렷한 증거의 하나는 지난 19세기에 자유신학을 대적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다버렸다. 그래서 적극적인 메시지보다 변증이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변증학이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라 변증학적인 관심에 의해 지배받는 교회는 적극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마귀가 교회를 장악하고 교회는 소극적으로 되어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합리주의나 이신론(deism)을 대적한 보일 강좌나 버틀러 (Butler ) 감독의 「유추」(Analogy)를 통한 변증학이 아니라 휫필드나 웨슬레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그의 일을 이루셨다. 사실 필자도 신학교에 다닐 때 학생들의 많은 불평이 교수들이 강의 시간에 자유주의를 대적하는 변증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학생은 ‘이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진을 빼게하는 것이 바로 마귀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통찰력을 피력했다. 셋째, 지나친 감정을 천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기질 탓이다. 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감정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사람은 이상한 방법으로 감정에 대한 혐오감을 발전시켜 스스로 불건전하고 그릇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또한 균형을 잃고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기도 한다. 이들은 오순절주의와 그 과도한 탈선을 너무 두려워 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한다. 이들은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해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극단에 빠짐로써 성경이 제시하는 평형을 잃어버린다.
넷째, 파당과 레벨링(--주의나 --파로 낙인 찍는 것)이다. 이들은 웨슬레의 부흥운동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틀린 요한 웨슬레나 챨스 피니 및 알미니안 주의의 부흥운동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청교도 자신이 부흥에 대하여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1) 그들은 자기들이 사는 시대에 부딪친 일들과 싸워야 했다. 그들은 로마 교회와 국교도(High Church)들의 교리와 대항하여 싸워야 했다. 그들은 또한 퀘이커교도들같은 신비주의 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나침’에 대하여 두려워했다. 그 결과 성령에 대한 그들의 저작 중 대부분이 논쟁적 관심을 위한 것들이었고 접근방식도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청교도들이 부흥을 다루지 않은 일부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또한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특정한 전통과 사상의 영향을 받아 ‘질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도 너무 지나칠 정도였다. 그들은 모든 일을 “적당하고 질서있게” 해야한다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령을 소멸한 환경이 많았다.
(3)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인종학적으로 성령을 소멸하기 쉬운 기질을 타고 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이유는 잉글랜드 내에서는 부흥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도 학자적인 조용한 성품이나 점잖은 예배의 형식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성격이나 그러한 예배 형식 자체를 성경의 유일한 가르침으로 믿고 소란스러운 부흥의 현상들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혁과 부흥의 균형 그러면 과연 개혁과 부흥은 같이 할 수 없는 것인가?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를 제시한다. 즉 그는 부흥같이 항상 예외적이고 비상한 것에만 관심을 가져 “작은 것들의 날들”을 멸시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그는 부캐넌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어떤 사람들은 부당한 편벽성과 확신을 가지고 보편적이고 획기적인 부흥이 성령의 은혜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이며 모든 것이 믿음의 기도에 대한 약속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은 보다 갑작스럽고 획기적인 은혜의 역사를 배제하거나 거부할 정도로 복음사역의 조용하고 점진적인 성공만을 기대한다. 그러나 성령의 주권을 지나치게 간과해 버린다 (여러분은 오늘날 이 두 그룹을 알지 못하는가?) 전자는 특이하고 두드러진 것만을 지나치게 선호하고, 후자는 정반대의 오류에 떨어져 보다 통상적이고 조용한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회심의 두 양식을 모두 인정하고 성령의 주권적인 지혜와 은혜에 그 양식을 맡기는 것이 좋다. . . 두 방식--점진적 회심과 돌발적 회심--은 모두 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다. . .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일에 있어서 보다 느리고 고요하고 점진적인 방법을 찾는데 매우 익슥한 나머지 하나님의 성령께서 갑작스럽고 전반적으로 역사하신 일을 들을 때 놀라며 심지어는 어느 정도 회의적인 마음으로 듣는 경향이 있다. . .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9) 리차드 러브레이스는 ‘살아있는 정통’(Live Orthodoxy)을 위해 말씀과 성령, 교리와 체험의 균형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청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이 제시한 살아있는 정통의 관건은 말씀과 성령에 합당한 관심을 가지고 말씀과 성령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 . 청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도 말씀과 성령 사이의 균형을 불완전하게 이해하였다. 복음주의의 어떤 부분은 그 이전의 정통교리들이 세습적으로 앓아온 질병들을 유전해 왔다: 즉 고백주의, 논증적인 자기방어, 비이성적인 열정을 반대하고 크리스챤의 경험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 영적으로나 사회적인 적절성을 잃어버린 설교, 성화의 방치, 현재 상태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들은 교리적인 충성이 영적인 실상보다 우선권을 가져서 잘못된 신학체계나 잘못된 영감 이론을 가진 사람들은 거짓되고 비성서적인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하여 버린다. 이런 짓은 핫지나 메이첸 같은 초기의 개혁 신학자들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오류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적인 갱신을 강조하는 다른 복음주의 운동들은 말하기를, ‘교리는 분리시키지만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로 연합한다’라고 가르치면서 주관적인 극단으로 치닫으며, 실상의 날카로운 칼날보다는 따뜻하고 감정적인 만족감을 목표로 하여서, 부흥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성서적인 생각이라는 관점으로 정의한다.10) 톰 네틀즈(Tom Nettles)도 부흥과 개혁의 균형을 강조한다. 사랑이 없는 결혼이나, 결혼이 없는 사랑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 . 사랑과 결혼은 같이 가야 한다. 부흥과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다른 한쪽을 적절하게 우대하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그 결과는 매우 추잡스럽게 된다. . . . 개혁주의자들과 부흥주의자들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으므로--개혁주의자들은 자주 경험을 두려워하고, 후자들(부흥주의자들)은 자주 신학을, 특히 개혁신학을 두려워하고 있으므로--우리는 열심과 지혜, 사랑과 진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개혁과 부흥을 하나로 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장려하고 실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개혁과 진정한 부흥을 잠식하려는 모든 것은 거부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아마 어떤 경우에는 진지하면서도 잘못 안내된 사람들을 부드럽게 설득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다.11) 번 포이트레스는 개혁 신학의 영향이 없이도 개신교 신자의 80%에 육박하는 남미의 부흥운동에 대해 언급하면서 개혁과 부흥의 조화를 이렇게 말한다. 개혁주의자들은 풍요하고 심오한 신학적 전통을 이어 받아 왔으며 이러한 전통을 방어할 필요성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보수주의와 교리적인 교육을 강조한다(예를 들어, 미국의 개척 시대의 침례교와 장로교의 차이 등). 한편, 성령의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은사 운동’(Charismaic movements)은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을 장려한다.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은 특히 잃은 것이 없는 남미의 저소득층에게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신학 이론에 자신이 있는 개혁신학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신비성을 모두 다 이해하거나 설명할 재간이 없으며, 또한 사회적인 역동성을 너무 두려워 해서도 안된다. 개혁전통은 과도기에 처한 선교 현장보다는 안정된 사회 체제를 가지고 있고 신학적인 교육 전통이 있는 교회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가진 남미에 왜 개혁전통이 반복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개혁 전통은 초창기인 16세기에는 인문주의 및 교부들의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의 전통을 이어 받은 당시 최고의 지성과 학문을 대표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나 전 세계의 대부분의 대학을 자연주의적인 세속주의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성경마저 세속주의자들은 역사적 비판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말하면, 개혁전통의 학문이 더 이상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개혁 전통은 기존의 교회와 관련된 임의적이고 정체적인 사회 및 정치적 법칙들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는 부상하는 중산층의 ‘절박한 욕구’(felt needs)를 잘 만족시킨다. 그러나 남미에는 중산층이 별로 없다. 왜 하나님은 저소득층으로부터,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으로부터도 개혁을 시작하지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는가? 객관적인 교리를 중시하는 개혁 전통과 주관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은사 운동은 서로 하나가 되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성서 신학과 상징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개혁 전통은 성경의 깊이와 수용자인 사람과의 관계를 잘 엮어 준다. 개혁신학자 반 틸은 이성을 중시하고, 극심한 감정이 저급하다는 극기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 하나님이 임재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는 은사 운동은 하나님에 대한 친밀감을 더해 준다. 개혁 전통을 따르는 목사 한 분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웨스트민스터에 다니기 전에 그는 은사운동 계통의 교회를 다녔다. 그는 방언을 말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에 다니면서 방언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 자기 교회에서 방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이해력의 지성과, 축제를 드리고, 울부짖고, 동정하고, 동일시하는 감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시편은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가들보다 더욱 통제불능의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편은 개혁주의자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된다. 한편 시편은 은사 운동가들이 부르는 노래들보다 신학적으로 심오하다. 그러므로 은사 운동가들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된다. 그러면 개혁신학은 상대화 되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렇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전 13:12). ‘그렇다’, 왜냐하면 이직도 신학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으로,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실제의 생활에 소화되고 형성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학적으로는 바르지만 졸리는 표정으로 부르는 노래와 감정이 풍부하게 부르는 ‘복음 성가’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실까? 누가복음 18:9-1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은 형식적인 옳바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배를 통제적으로 드릴려는 어떠한 시도도 전복시킬려고 위협하는 것 같다. 나는 생각하기를 학문적인 신학 전통이 정도 이상으로 비대하고 깊어지면, 구체화의 문제가 어려워 지며, 이전에는 당연하게 무의식적으로 여겨지던 모든 일들을 취급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된다. 나 혼자 생각해 볼 때 개혁 전통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에 불과하며, 전통주의자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 성령은, (남미 오순절의 부흥과 같이) 영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역사적인 전통(특히 개혁전통)과는 무관한 통로를 창조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만인제사장설’은 개혁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강조한 것보다는, (비록 왜곡되고 과장된 면은 있지만) 오히려 은사 운동주의자들이 더 잘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전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은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 하에 일방적으로 가르칠려는 태도는 취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들은 이점에서 얼마나 자긍할려는 유혹을 받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자긍심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이 우리들의 이해를 부패시키는지를 아십니까?).12) 그러면 왜 개혁주의자들이 특별히 부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로이드 존스는 어째서 개혁파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부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를 몇 가지 제시한다.13) 첫째, 부흥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잘 입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부흥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아무리 놀라운 변증가요 굳센 정통의 명수가 기도하고 글을 써고 전도대회를 개최해도 인간은 무능력한 존재이다. 셋째,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이지 단순한 도덕적인 설득이나 재무장이 아님을 부흥보다 잘 입증하는 것이 없다. 넷째, 부흥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잘 나타내는 것이 없다. 그래서 부흥에는 항상 돌발성과 의외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부흥처럼 은혜의 불가항력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없다. 모든 참된 회심을 통해서 이것이 드러난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부흥을 가져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강조한다. 그러면서 부흥에 대해 이와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는가? 청교도의 설교의 본을 따라 충만하고 온전한 복음을 설교하는 정규적인 일을 계속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을 선전하고 변호하기 위해 성경적이고 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하자. 우리의 변증학을 바르게 사용하자. 모든 것을 하자. 우리가 관여하는 개혁의 일을 계속 추진해 나가자. 그러나 동시에. . . 균형을 유지하자. 다른 어느 것으로도 우리가 싸우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으므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자 . . . 우리는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서약하자. . .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을 바라고’기도해야 할 긴박한 의무에 대한 사도들의 말을 많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14) 그렇다. 우리들이 할 일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1995년 아버지날에 임한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해 미국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시 소재 브론즈빌교회에 일어난 부흥운동을 통해, 지금까지 백여만명이 다녀갔고 아직도 매주 나흘 씩 집회가 계속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죄 회개를 통한 영혼의 추수에 동참하고 있다. 이 성령의 불길이 미국 전역은 물론 유럽으로도 퍼지고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에 대한 갈증’(hunger for God)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수년을 두고 부흥을 사모하며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부흥을 주시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주신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부흥은 거창한 구호나 화려한 감투를 쓴 인위적인 조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갈증’(huger for God)을 가진 사람들의 끈질기고 강청하는 기도를 통해서 내려진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한국에도 펜사콜라 부흥같은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행 1:14).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 개혁과 부흥의 조화 문제는 과연 개혁과 부흥은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부흥을 위해 개혁을 버리고, 아니면 개혁을 위해 부흥을 버려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겸손하여 서로가 양보하면 부흥과 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습니다. 부흥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영광인데 우리가 교만과 아집으로 인해 내 것만 주장한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우리의 선한 의도가 지혜와 겸손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를 제시합니다. 즉 그는 부흥같이 항상 예외적이고 비상한 것에만 관심을 가져 “작은 것들의 날들”을 멸시하는 경향을 비판합니다. 그는 부캐넌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어떤 사람들은 부당한 편벽성과 확신을 가지고 보편적이고 획기적인 부흥이 성령의 은혜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이며 모든 것이 믿음의 기도에 대한 약속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은 보다 갑작스럽고 획기적인 은혜의 역사를 배제하거나 거부할 정도로 복음사역의 조용하고 점진적인 성공만을 기대한다. 그러나 성령의 주권을 지나치게 간과해 버린다 (여러분은 오늘날 이 두 그룹을 알지 못하는가?) 전자는 특이하고 두드러진 것만을 지나치게 선호하고, 후자는 정반대의 오류에 떨어져 보다 통상적이고 조용한 것을 선호한다. 우리는 회심의 두 양식을 모두 인정하고 성령의 주권적인 지혜와 은혜에 그 양식을 맡기는 것이 좋다. . . 두 방식--점진적 회심과 돌발적 회심--은 모두 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다. . .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일에 있어서 보다 느리고 고요하고 점진적인 방법을 찾는데 매우 익슥한 나머지 하나님의 성령께서 갑작스럽고 전반적으로 역사하신 일을 들을 때 놀라며 심지어는 어느 정도 회의적인 마음으로 듣는 경향이 있다. . .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15) 리차드 러브레이스는 ‘살아있는 정통’(Live Orthodoxy)을 위해 말씀과 성령, 교리와 체험의 균형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청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이 제시한 살아있는 정통의 관건은 말씀과 성령에 합당한 관심을 가지고 말씀과 성령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 . 청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도 말씀과 성령 사이의 균형을 불완전하게 이해하였다. 복음주의의 어떤 부분은 그 이전의 정통교리들이 세습적으로 앓아온 질병들을 유전해 왔다: 즉 고백주의, 논증적인 자기방어, 비이성적인 열정을 반대하고 크리스챤의 경험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 영적으로나 사회적인 적절성을 잃어버린 설교, 성화의 방치, 현재 상태를 신성화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들은 교리적인 충성이 영적인 실상보다 우선권을 가져서 잘못된 신학체계나 잘못된 영감 이론을 가진 사람들은 거짓되고 비성서적인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하여 버린다. 이런 짓은 핫지나 메이첸 같은 초기의 개혁신학자들이 결코 저질르지 않았을 오류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적인 갱신을 강조하는 다른 복음주의 운동들은 말하기를, ‘교리는 분리시키지만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로 연합한다’라고 가르치면서 주관적인 극단으로 치닫으며, 실상의 날카로운 칼날보다는 따뜻하고 감정적인 만족감을 목표로 하여서, 부흥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성서적인 생각이라는 관점으로 정의한다.“16) 오늘날 정통교리라는 공식으로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사역을 상자 속에 가두워 놓고 이리저리 칼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흥이나 갱신을 지나치게 완벽하게 정의해 놓고는 그러한 공식 전부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이것은 누가 말하는 이런 요소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부흥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도 몰현세적이고 역사성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부흥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부흥의 현장에 가 있으면서도 자기가 읽은 책이 말하는 부흥의 몇 가지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고 해서 “이것은 진정한 부흥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편협하게 결론짓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사도행전의 부흥도 진정한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들 완벽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진정한 부흥이었다면 사도들의 전도사역으로 부흥한 교회들의 교리적, 윤리적, 실천적인 오류를 시정하는 서신서들이 필요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균형은 필요합니다. 톰 네틀즈(Tom Nettles)도 부흥과 개혁의 균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이나 결혼이 없는 사랑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 . 사랑과 결혼은 같이 가야 한다. 부흥과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다른 한쪽을 적절하게 우대하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그 결과는 매우 추잡스럽게 된다. . . . 개혁주의자들과 부흥주의자들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으므로―개혁주의자들은 자주 경험을 두려워하고 후자들(부흥주의자들)은 자주 신학을, 특히 개혁신학을 두려워하고 있으므로―우리는 열심과 지혜, 사랑과 진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개혁과 부흥을 하나로 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장려하고 실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개혁과 진정한 부흥을 잠식하려는 모든 것은 거부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아마 어떤 경우에는 진지하면서도 잘못 안내된 사람들을 부드럽게 설득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다.“17) 번 포이트레스는 개혁신학의 영향이 없이도 개신교 신자의 80%에 육박하는 남미의 부흥운동에 대해 언급하면서 개혁과 부흥의 조화를 이렇게 말합니다. 좀 길지만 인용해 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풍요하고 심오한 신학적 전통을 이어 받아 왔으며 이러한 전통을 방어할 필요성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보수주의와 교리적인 교육을 강조한다(예를 들어, 미국의 개척 시대의 침례교와 장로교의 차이등). 한편, 성령의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은사운동’은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을 장려한다.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은 특히 잃은 것이 없는 남미의 저소득층에게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신학 이론에 자신이 있는 개혁신학은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신비성을 모두 다 이해하거나 설명할 재간이 없으며 또한 사회적인 역동성을 너무 두려워 해서도 안된다. 개혁전통은 과도기에 처한 선교 현장보다는 안정된 사회 체제를 가지고 있고 신학적인 교육 전통이 있는 교회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가진 남미에 왜 개혁전통이 반복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개혁 전통은 초창기인 16세기에는 인문주의 및 교부들의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의 전통을 이어 받은 당시 최고의 지성과 학문을 대표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나 전 세계의 대부분의 대학을 자연주의적인 세속주의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성경마저 세속주의자들은 역사적 비판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말하면 개혁전통의 학문이 더 이상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개혁 전통은 기존의 교회와 관련된 임의적이고 정체적인 사회 및 정치적 법칙들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는 부상하는 중산층의 ‘절박한 욕구’(felt needs)를 잘 만족시킨다. 그러나 남미에는 중산층이 별로 없다. 왜 하나님은 저소득층으로부터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으로부터도 개혁을 시작하지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는가? 객관적인 교리를 중시하는 개혁 전통과 주관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은사 운동은 서로 하나가 되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성서 신학과 상징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개혁 전통은 성경의 깊이와 수용자인 사람과의 관계를 잘 엮어 준다. 개혁신학자 반 틸은 이성을 중시하고, 극심한 감정이 저급하다는 극기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 하나님이 임재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는 은사 운동은 하나님에 대한 친밀감을 더해 준다. 개혁 전통을 따르는 목사 한 분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웨스트민스터에 다니기 전에 그는 은사운동 계통의 교회를 다녔다. 그는 방언을 말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에 다니면서 방언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 자기 교회에서 방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이해력의 지성과, 축제를 드리고, 울부짖고, 동정하고, 동일시하는 감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시편은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들이 부르는 찬송가들보다 더욱 통제불능의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편은 개혁주의자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된다. 한편 시편은 은사 운동가들이 부르는 노래들보다 신학적으로 심오하다. 그러므로 은사 운동가들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된다. 그러면 개혁신학은 상대화 되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렇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전 13:12). ‘그렇다’, 왜냐하면 이직도 신학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으로,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실제의 생활에 소화되고 형성화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학적으로는 바르지만 졸리는 표정으로 부르는 노래와 감정이 풍부하게 부르는 ‘복음 성가’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실까? 누가복음 18장 9-14절(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은 형식적인 옳바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예배를 통제적으로 드릴려는 어떠한 시도도 전복시킬려고 위협하는 것 같다. 나는 생각하기를 학문적인 신학 전통이 정도 이상으로 비대하고 깊어지면, 구체화의 문제가 어려워 지며, 이전에는 당연하게 무의식적으로 여겨지던 모든 일들을 취급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된다. 나 혼자 생각해 볼 때 개혁 전통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에 불과하며, 전통주의자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 성령은, (남미 오순절의 부흥과 같이) 영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역사적인 전통(특히 개혁전통)과는 무관한 통로를 창조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만인제사장설’은 개혁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강조한 것보다는, (비록 왜곡되고 과장된 면은 있지만) 오히려 은사 운동주의자들이 더 잘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전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은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 하에 일방적으로 가르칠려는 태도는 취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들은 이점에서 얼마나 자긍할려는 유혹을 받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자긍심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이 우리들의 이해를 부패시키는지를 아십니까?)“.18) 1). 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그 역사적 신학적 연구,” 「청교도 신앙」(생명의말씀사), pp. 13-14. 2). C. 피터 와그너 저, 이재범 역, 『성령의~ 능력과 교회성장』(임마누엘, 1987), pp. 23-37. 3). Vinson Synan, In the Latter Days Servant Books, 1984), pp. 48, 74. 4). Roy E. Shearer, Wildfire: Church Growth in Korea (Grands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Co.,1966), pp. 49-59. 5). 같은 책, P. 25. 6). 같은 책, p. 26. 7). 같은 책, p. 24. 8). 같은 책, pp. 21-23 9). 같은 책, p. 28. 10).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 pp. 279-281. 11). Tom Nettles, “A Better Way: Church Growth Through Revival and Reformation.” Michael Scott Horton, ed. Power Religion (Chicago: Moody Press, 1992), pp. 161-87. Tom Nettles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의 역사신학 교수이다. 12). Vern Poythress, NT 853 Miracles Class Note 중에서. 13). 같은 책, pp. 29-31 14). 로이드 죤스, 「청교도 신앙」, pp. 31-32. 15). 마틴 로이드 존스,「청교도 신앙」, p. 28. 16).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 pp. 279-281. 17). Tom Nettles, “A Better Way: Church Growth Through Revival and Reformation.” Michael Scott Horton, ed. Power Religion (Chicago: Moody Press, 1992), pp. 161-87. Tom Nettles는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의 역사신학 교수입니다. 18). Vern Poythress, Miracles Class Note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