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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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에 있어서 자기 연민은
가장 고약한 독약이다.
절대로 자신을 불쌍히 여기면서
동시에 남을 긍휼히 여길수 없다.
절대로 자신을 아끼면서
자신을 버려야 하는
거칠고 무겁고 찌르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사람이 가장 짙은 어둠에 있을 때
가장 많이 먹는 것.
바로 자기 연민이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연약함..
어둠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이 자기 연민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는 것이다.
난 사춘기 때부터 오랜 세월동안
심한 영적 방황과 깊은 우울증을 겪었다.
우울증의 특징은 세상으로 나와 공감하지 않으려 하고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며
나를 끔찍히도 사랑하여
나를 공격한다고 착각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반격하며
스스로 불쌍히 여김으로
자신이 만든 감옥 안으로 제 발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잠근 문은 스스로 열지 않는다.
그 안에서 스스로 뱉어내고 토해낸
썩고 더러운 것들을 먹고 또 먹는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죽이고 멸망시킨다.
주변에서도 많이 보았다.
자신을 너무도 깊히 사랑한 나머지
주님보다 자신이 더 큰 자가 되어
주님자리에서 주님마저 밀어내 버리고
슬픈 기색을 띠며 그 자리에서 모두에게
동정받기를 원한다.
긍휼이 여김받아야 할 사람과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다르다.
하지만 불쌍한 사람 중에도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이 많다.
길에서 만난 은혜 집사님이 그렇다.
그 분은 노숙자가 되기까지 자기 연민에 빠져
살았다.
그 결과 사람에 대한 미움, 시기, 반항,
그것들이 거대하고 높은 벽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뒀다.
그런 이에게 동정은 독이다.
공감은 해 줄수 있지만
그의 감옥에 들어가 주저앉아
그의 토한 넋두리에 빠져들어선 안된다.
그의 상처를 치료해준 뒤
안아 준 뒤
그가 토한 것들을 함께 치우고
주님의 강한 손을 빌려
그의 차가운 손을 잡고
그 곳에서 나오도록 강하게 잡아 이끌어주어야만 한다.
공감만 해주는 이는 많다.
동정까지 주는 이도 많다.
눈물을 닦아 주는 척 하는 이도 많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공감과 동정 뿐만이 아닌
그 긍휼의 힘으로 우리를 죄에서 의로 이끌어내셨다.
끊임없는 사랑과 인내와 질책과 징계와 책망으로 말이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사랑의 관심이다.
하지만 지금.
누가 이런 사랑의 관심을 품는가.
신자들 역시 자신의 상처와
자신의 오래된 이야기들만을
사진첩에 고이 넣은 채
감상하기에 바쁘다.
난 이런 삶을 너무 오래 살아왔다.
이제 이런 삶은 내게 역겨움을 준다.
그것은 나를 죽이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젠 그 감옥에 있는 자들을 만날 때
내 손을 내미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 누구라도 괜찮다.
그 어떤 감옥이라도 괜찮다.
내 이전 감옥보다 더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감옥에 이 세상에 있으랴.
언제라도 주님이 내게 허락하실 때
죽기만큼 힘들었지만..
또 다시 주님 나와 함께 그 감옥에 들어가자 하시면
난 어김없이 일어나 주님 손을 잡을 것이다.
오직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말이다.
오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