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신진화론자는 아니다. 그것을 더 성경적이라 옹호하거나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나는 문자적 6일 창조를 고백하며, 세계를 무로부터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신진화론자들을 이단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러한 내게 모 교단의 유신진화론 이단 논쟁은 여러모로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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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진화론은 신학의 여러 부분에서 취약점을 내보인다. 이는 훗날 부활 및 ‘주님의 날’과도 연결되는 안식일 개념을 매우 모호하게 한다.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타락 이전의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도 죄론과 인간론의 중심부에 의구심을 던진다. 물론 유신진화론의 장점도 있다. 그것은 ‘신앙과 과학’의 논쟁 구도에서 양쪽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대안으로 존재한다. 선교적 입장에서는 큰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세속과의 점진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대에 적실성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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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학에는 강점과 약점이 있다. 약점과 모순이 없는 신학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 신학을 취하더라도 언젠가는 역설 내지는 신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다양한 교단들이 서로 다른 해석적 틀을 견지한 채 여전히 ‘형제’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약점이라고 하는 것이 선을 넘어 신학의 가장 중추적인 핵심을 무너뜨릴 정도로 뒤틀린다면, 그래서 공교회가 그동안 일치되게 지켜왔던 기본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 사상과 체계를 ‘이단’이라 부른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은혜의 선재성, 성경의 최종적 권위 등이 그동안 교회의 역사에서 이단성을 판별하는 주요 리트머스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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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개인이나 단체 혹은 사상을 ‘이단’이라 규정하는 행위는, 더 이상 그들을 공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이다. 해당 사상을 주창하는 이들과는 함께 떡을 떼지 않고, 일고의 여지 없이 어떠한 신학적 교류도 중단하겠다는 단언이다. 이러한 이단성은 특정 주체의 부분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단성은 언제나 총체적이다. 기독론에서 이단성을 보인 아리우스를 교회론이나 종말론에서의 대화 상대로 삼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유신진화론을 이단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을 주장하거나 용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이 되어버리며 더 이상 어떤 주제에서든 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 복음주의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교단과의 건설적인 신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C.S. 루이스의 책들과 팀 켈러의 책들은 금서가 될 터이고, 세대를 거쳐 훌륭하게 헌신해 온 여러 기독교 변증가들은 이단성이 짙은 말쟁이들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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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빈 오틀런드는 『목숨 걸 교리 분별하기』에서 교리의 경중을 4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복음에 본질적인 교리이다.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이단’으로 규정되기에 마땅하다. 두 번째는 교회의 건강과 실천에 절박하게 중요한 교리이다. 여기에서 갈리는 입장이 교단으로 분화된다. 세 번째는 어느 한 신학 분파에는 중요하나 분열할 정도로는 아닌 교리이다. 천년설에 관한 다양한 입장이 여기에 속할 수 있겠다. 네 번째는 복음을 전하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교리이다. 오틀런드는 ‘창조’에 관한 논쟁을 세 번째 부류에 집어넣는다. 나는 이 문제가 아무리 중대하게 다루어지더라도 두 번째 기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창조론이 이고 있는 문게를 고려할 때 이 입장으로 인해 교단이 갈라지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첫 번째 기준에 넣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배아의 원리’를 언급하며 문자적 6일 창조의 틀을 넘어서는 해석을 했던 어거스틴마저 이단 판결대에 세우는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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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교단에서 유신진화론을 반대하는 ‘교단적 성명’을 내거나, 교단 신학교에서 ‘유신진화론을 정통적인 교리로 가르치지 않겠다’라고 발표하는 일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는 교단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 표명이기 때문이다. 교단 신학교가 교단의 신학에 일차적으로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이단’이라 결의한 일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그러한 결정은 필연적으로 개신교 신학 내 수많은 학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단호하게 끊어내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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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간 신학적 차이를 대하는 태도에 관해 말하자면, 웨슬리안으로서 나는 구원론에 있어서는 ‘고전적 아르미니우스주의자’에 가깝다. 그렇다고 칼빈주의자들의 구원론을 이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판단하기에 내 입장이 더 성경적이며 상대의 입장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신학을 이단이라 규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이견을 갖고 있더라도 여전히 삼위 하나님을 향한 충성에 기초한다면, 함께 떡을 떼고, 복음을 노래하고,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감리교가 장로교를 향해, 장로교가 감리교를 향해 섣불리 이단 판정을 내리지 않는 이유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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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결정이 ‘이단’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이러한 결정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공교회성의 줄기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모든 기독교 분파가 공유하는 7대 공의회의 무게감을 경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단’ 정죄는 온 교회가 다시는 교류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심각하고 악한 신학에 가해져야 하는 최종적인 판단이다. 이번 사태를 돌아보면, 매우 급하게 이루어졌다는 점과 내부에서도 결정을 되돌려야 한다는 반발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전히 세계적으로 수많은 경건한 복음주의자들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진행형의 논쟁이라는 점에서, 신학의 무게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아쉬움이 내게는 남는다.
김성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