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에 들이닥쳤다. 수많은 한인이 무차별 학살당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최재형에게 “빨리 떠나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떠나면 일본인들은 너희를 잡아 고문하고, 나를 배반하라 강요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고, 많이 살았다. 나는 죽을 수 있다.”라며 직접 체포에 응했고, 이후 벌판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향년 62세. 시신도 어딘가 버려져 묘소조차 없다.
가난한 함경도 소작농 아버지와 천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나, 1869년 대홍수로 아사자가 속출하자 “두만강을 건너면 살 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연해주로 이주한 아이 최재형.
겨울엔 신발도 없어 맨발로 눈길을 걸었고, 발이 시리면 들고 다니던 짚단을 깔고 잠시 그 위에 서서 언 발을 녹였다. 어느 날 항구 부두에 배고픔으로 쓰러져 있던 그를 러시아인 선장 부부가 거두어 키웠고, 선장을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항해하며 세계를 알아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에 물자를 납품하며 훗날 '연해주 최고의 갑부'가 된다.
최재형은 “내 자산은 내 것이 아니다. 나라의 것이다.”라며 연해주에 학교를 세워 한인 아이들을 가르치고, 굶주린 동포를 구원했다.
*안중근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고, 무기와 의복 구입비로 1만 루블(현재 7억여 원 가치)을 지원하였다.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를 준비할 때 사격 연습을 한 곳도 최재형의 집이었고, 이토를 척살한 브라우닝 권총을 구해준 사람도 그였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 쓰인 무기 구입 뒤에는 늘 최재형이 있었다.
*연해주 한인 사회에는 그가 살아있을 때에도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을 정도였다. 그는 한인들에게 존경받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제에 의해 시신을 찾을 수 없게 버려졌고, 남은 가족은 1937년 소련의 한인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해방 이후에도 최재형 선생의 시신은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순국 추정지(우수리스크)의 흙으로 가묘를 만들어 부인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다.
출처ㅡ역사뇌피셜
읽고서 나누고 싶어 소개한다.
독립은 그냥 이루어 진 것이아니다.
독립 운동과 민족을 위한 헌신에
감사 드린다.
이상갑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