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지식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다.
#讀讀讀 스티브 윌킨스 · 마크 샌포드, <은밀한 세계관>
@우리를 조종하는 8가지 이야기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이후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은 대체로 무신론적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던 해체주의 같은 '이론적 세계관'을 경쟁자로 세워 왔다. 이 책은 바로 그 전제를 문제 삼으며 시작한다. 저자들의 질문은 예리하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가 될지 그리스도인이 될지를 놓고 깊은 갈등에 빠진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이 있는가?",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를 일상에서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가?"
"없다."
기독교 세계관의 진짜 경쟁자는 강의실의 사상이 아니라 사무실, 기숙사, 카페에서의 대화 속에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마르크스주의 같은 이론적 세계관은 책을 읽고 논증을 따져본 끝에 "이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채택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우리 삶을 실제로 지배하는 세계관들은 그런 경로로 오는 법이 없다. 가령, 소비주의를 보라. 누구도 소비주의의 타당성을 검토한 뒤 소비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는다. 광고를 보고, 쇼핑몰을 드나들고, 친구와 대화하는 사이에 저절로 몸에 배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렇게 머리로 채택한 적 없이 몸이 먼저 살고 있는 세계관을 'lived worldview—일상생활의 세계관'이라 부른다. 여기서 기묘한 역전이 일어난다. (이 지점을 간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론적 세계관은 옹호하는 학자들은 많아도 그대로 사는 사람은 드물고, 일상생활의 세계관은 학문적으로 변호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도 그 신념대로 사는 사람은 수억 명이라는 기묘한 역전. 지독한 모순이다.
책이 해부하는 여덟 가지가 바로 이런 세계관들이다. 개인주의, 소비주의, 국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과학적 자연주의, 뉴에이지,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그리고 종교가 된 심리치료. 물론 이 여덟이 세상의 모든 세계관을 망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 가장 깊이 스며들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빚어내고 있는 관점들이라는 저자들의 판단에, 책장을 넘길수록 동의하게 된다.
논지의 핵심은 '은밀함'이라는 한 단어에 있다.
위 여덟 가지 세계관은 결코 교회 정문으로 쳐들어오지 않는다. 은밀한 뒷문으로 스며들어 기독교 사상과 뒤섞이고, 때로는 기독교적 견해 나아가 성경의 견해로 행세한다. 이러한 은밀한 침투의 공식은 한결 같다. 거짓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출발한다. (사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점이다.) 다만 그 진리의 적용을 극단으로 몰아가 진리가 더 이상 진리 되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책이 드는 예 가운데 몇가지만 따라가 보자.
- 개인주의가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 그렇다고 꼭 교회에 다닐 필요는 없잖아." 이 흔한 말은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는 기독교 진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 진리의 적용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각 개인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신념이 되고 만다. 하나님을 믿되 공동체는 버리는 신앙, 나를 위한 하나님만 남고 하나님의 백성은 사라지는 신앙이 된다.
- 국가주의도 같은 길을 걷는다. 주일 예배당에서 "God Bless America"를 함께 부르는 회중을 떠올려 보라. 조국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은 선하다. 그러나 저자들은 묻는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축복하시기를 노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다른 모든 나라도 동일하게 축복하시기를 진심으로 원하는가? 조국을 향한 사랑이 국가를 향한 궁극적 충성으로 바뀌는 순간, 창조되고 일시적이며 부분적인 선에 불과한 국가를 오직 하나님만이 차지하실 수 있는 자리로 높이게 된다. 애국의 얼굴을 한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 소비주의는 더 교묘하다. 소비 자체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창조세계를 누리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계획의 일부일 뿐이다. 소유가 정체성이 되고 구매가 구원의 언어(더 좋은 것을 사면 더 나은 내가 되리라 믿는)가 될 때, 우리는 경제적 선택이 영성의 문제임을 망각한다. 저자들의 지적이 아프다. 그리스도인들은 헌금에 대해서는 말해도, 나머지 소비에 대해서는 서로 거의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종교가 된 심리치료는 어떤가? 하나님은 상한 마음을 싸매시는 분이다. 내면의 치유는 복음의 열매다. 그러나 치유가 목적이 되고 자존감 회복이 구원의 자리를 차지하면, 죄와 회개의 언어는 사라지고 하나님은 내 감정을 돌보는 치료사로 축소된다. 예배가 힐링이 되고, 설교가 위로 강연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거짓은 정면으로 오지만, 왜곡된 진리는 은밀한 뒷문으로 온다.
저자들이 로마서 12:2을 책의 닻으로 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대'로 옮긴 헬라어 아이온(αἰών)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이야기, 우리가 매일 숨 쉬는 문화적 공기를 가리킨다. 그러니 바울의 명령은 특정 활동을 피하라는 금지 목록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따라 살게 되는, 더 깊고 널리 퍼진 위험에 대한 경고다. 공기를 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기독교의 처방은 회피가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일이어야 한다.
각 장의 서술은 공정하다. 섣부른 호들갑 떨며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는다. 각 세계관 안의 진리와 선한 측면을 먼저 인정하고, 그 진리가 어디서 왜곡되는지 분석한 뒤, 기독교적 응답을 내놓는다. 정죄가 아니라 진단이다. 보이지 않는 세균이 병을 일으키듯, 보이지 않는 세계관이 신자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오염시킨다는 데이비드 노글의 추천사가 책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준다.
저자들의 논지를 따라 착실하게 여덟개의 '세계관 해체(解體) 작업'을 마친 독자들은 이제 모든 사상을 무력화할 완벽한 기독교 이론 체계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들은 고개를 젓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이 땅에서 완벽한 사상 체계를 만들 수 없고, 인간 또한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은 이론적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삶으로 실제로 살아내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표지는 무엇일까?" 교리 시험 점수 따위가 결코 아니다. 바로 겸손과 사랑, 그리고 감사라는 삶의 덕목이다. 저자들은 이 세 덕목을 시금석 삼아 여덟 개의 세계관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집요하게 점검을 요구한다.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개인주의가 과연 겸손을 길러낼 수 있는가?" "우리 편이 아닌 대상을 향해 증오를 부추기는 국가주의가, 과연 원수를 사랑하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소비주의 안에 감사가 자랄 토양이 있는가?" 답은 자명하다.
"없다."
어떤 세상 세계관도 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토양을 제공하지 못한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결과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열매를 맺을 좋은 신앙의 토양을 가졌다고 자부하지만, 겸손과 사랑과 감사의 삶을 입술로만 고백하고 삶으로 살아내지 않는다면 결국 세상과 똑같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 말뿐인 껍데기 신앙으로 남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삶의 전 영역을 통합해 내지 못하고 겉돌게 된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세상의 은밀한 세계관이 이미 깊숙이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책의 가장 솔직한 문장과 마주한다. "기독교 신앙 체계의 내용은 독특할지 모르지만, 신앙 체계라는 점에서는 특별하지 않다. 모든 세계관이 신앙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 말대로라면 소비주의 역시 세상의 아픔을 진단하고 나름의 구원을 속삭이는 하나의 종교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에게 궁극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가 무언가를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이 실제로 '누구의 이야기'에 투신하고 있느냐이다.
비록 책의 사례가 다분히 미국적이라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자리에 우리 한국 사회의 풍경을 대입해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 우리의 광장에서는 십자가와 국기가, 그것도 성조기와 다윗의 별이 나란히 흔들리는 중이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언어는 정치 구호와 부딪치며 경계가 사라졌고, 특정 진영을 향한 증오는 신앙의 열심이라는 탈을 쓰고 있다. 이처럼 안쓰러운 풍경들 속에서 교회가 복음의 증인이 아닌 한 정치 세력의 전위대로 전락하는 순간, 국가주의 장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될 수는 없다. 여기에 성장주의와 학벌, 그리고 부동산을 향한 맹신까지 겹쳐 흐를 때, 이 책은 정확히 오늘날 한국 교회의 뼈아픈 자화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이 책이 누구의 손에 들리면 좋을지 조심스레 떠올려 보게 된다. 만약 설교자라면 주일 회중석에 앉은 이들이 실제로 어떤 세속적 이야기를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지 가늠하는 정직한 척도를 얻게 될 것이다. 소그룹을 이끄는 이들에게는 각 장이 독립적이어서, 여덟 주 동안 함께 읽으며 서로의 삶을 투명하게 비춰보는 좋은 텍스트가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일상의 삶에서 선교적 삶을 고민하며 분투하는 전우(?)들에겐 이 책의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우리는 늘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다급하게 묻지만, 이 책은 그보다 앞서 본질적인 질문을 묵직하게 던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이 이미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깊게 물들였는가?"
책의 뒤표지는 독서를 마치고 책장을 덮으려는 독자들에게 나지막한 안부를 묻는다. "당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안녕한가?" 누가 과연 나는 안녕하다고 답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안녕하지 못하다는 자각, 그 불편한 자각이야말로 이 책이 독자들에게 건네는 가장 귀한 선물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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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den Worldviews: Eight Cultural Stories That Shape Our Lives
권도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