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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어 온 것을 다시 들여다보며

작성자Israel태성|작성시간26.06.14|조회수30 목록 댓글 1

우리가 믿어 온 것을 다시 들여다보며

많은 분들이 교회에서, 수련회에서, 혹은 좋은 책과 영상을 통해 “창조과학”을 배우셨을 겁니다. “진화론은 거짓이고, 성경대로 지구는 6천 년 되었으며, 과학이 오히려 창조를 증명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렇게 가르쳐 주신 분들은 대부분 진심이셨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믿음을 지켜 주고 싶은 사랑에서 나온 가르침이었지요. 그러니 그 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은, 그동안 한 번도 천천히 들여다본 적 없던 질문 하나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그것은 정말 과학일까요?” 이 질문은 신앙을 흔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 단단한 자리에 놓기 위한 점검입니다.

과학이라는 모임에는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과학을 하나의 모임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들어가는 자격은 의외로 까다롭지 않습니다. 대단한 학위나 흰 가운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딱 한 가지 약속만 하면 됩니다. “제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가 나오면, 저는 깨끗이 인정하겠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시지요? 똑똑한 사람들의 모임인데 입장 조건이 “나는 틀릴 수 있다”라니요. 그러나 바로 이것이 과학의 핵심입니다. 어떤 주장이든 “이런 증거가 나오면 내 말은 폐기됩니다” 하고 미리 말할 수 있어야, 그제야 과학으로 인정받습니다. 한때 모두가 믿던 천동설도 그렇게 물러났고, 그 위대한 뉴턴의 이론조차 더 정확한 아인슈타인 앞에서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누구든, 아무리 권위 있는 사람이라도, 새로운 증거 앞에서는 자기 주장을 내려놓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모임의 문을 한 손님이 두드립니다. 이름은 ‘창조과학’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도 과학입니다. 보세요, 저도 논문처럼 글을 쓰고, 전문 용어도 쓰고, 학회도 있습니다.”

문지기가 정중히 묻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만약 지구가 6천 년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증거 즉 바위의 나이, 수십억 년을 달려와 우리 눈에 닿은 별빛, 차곡차곡 쌓인 지층, 생명의 설계도인 유전자가 나온다면, 그때는 주장을 거두실 수 있습니까?”

손님이 답합니다. “아니요. 그런 증거들은 모두 잘못 해석된 것입니다. 제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요.”

여기서 문지기는 난처해집니다.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증거를 거기에 끼워 맞춘다면, 그것은 이 모임의 단 하나뿐인 약속 “나는 틀릴 수 있다”를 거꾸로 뒤집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창조과학에 조심스럽게 이런 이름을 붙입니다. 유사과학(類似科學), 곧 ‘과학을 닮았지만 과학은 아닌 것’이라고요. 과학의 옷(용어와 형식, 그리고 ‘과학’이라는 이름)은 입었지만, 정작 과학의 규칙은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자리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고백을 실험실 보고서의 자리에 놓으려 할 때 생기는 어긋남이지요.

이것은 그저 비유가 아니라, 실제 법정에서 다투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창조과학을 공립학교에서 가르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1980년대 여러 법정은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 신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2005년에는 더 분명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한 보수 성향의 판사가 몇 주에 걸쳐 양쪽 증언을 다 들은 뒤, 창조과학의 다른 형태인 ‘지적설계’마저 과학이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판사 역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손님은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도 왔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대학이나 연구소가 아니라, 선교단체를 통해 교회의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창조과학은 처음부터 ‘실험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는 깃발’처럼 자라났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과학이라 굳게 믿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지요.

2017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공과대학 교수가 정부의 장관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그가 “지구의 나이는 6천 년이라고 믿는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며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개인의 신앙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목소리와 “나라의 과학정책을 맡을 사람의 판단으로는 곤란하다”는 목소리가 부딪혔고, 결국 그는 물러났습니다. 신앙의 자리와 과학의 자리가 뒤섞일 때 어떤 혼란이 생기는지를 보여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쯤에서 많은 분들이 불안해하실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진화를 인정하는 순간 내 믿음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인간 유전자 해독 프로젝트를 이끈 과학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무릎 꿇어 기도하는 깊은 신앙인이면서도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가톨릭교회도, 또 수많은 개신교 신학자들도 “진화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분들은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과 과학이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오가 즐겨 인용했다는 오래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늘로 가는지를 가르치는 책이다.”

그러니 진짜 다툼은 “창조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창조주이심은 흔들리지 않는 고백입니다. 문제는 다만, 신앙의 언어를 과학의 자리에 억지로 밀어 넣으려 할 때 생기는 마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런 물음이 따라옵니다. 그럼 성경의 첫 장, 창세기 1장은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먼저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창세기를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창세기를 낮추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창세기를 과학 교과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훨씬 크고 깊은 보물을 놓치게 됩니다.

옛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현대인이라 “그래서 며칠 만에, 몇 년 전에 만들어졌는가?” 하는 식으로 묻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처음 받아 든 옛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살던 세상에는 다른 민족들의 창조 이야기가 가득했는데, 그 이야기들은 대개 끔찍했습니다. 세상이 신들끼리 싸우다 흘린 피와 시체에서 생겨났다거나, 해와 달과 별은 사람이 벌벌 떨며 섬겨야 할 무서운 신이라는 식이었지요.

바로 그 한복판에서 창세기는 전혀 다른 노래를 부릅니다. 이 세상은 폭력의 찌꺼기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질서 있게 “말씀”으로 지으신 선한 곳이라고요. 사람들이 신이라 떨던 해와 달조차 창세기에서는 그저 ‘큰 빛’, ‘작은 빛’이라 불릴 뿐입니다. 이름조차 붙여 주지 않습니다. 너희가 두려워하던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일 뿐이라는 선언이지요. 그리고 사람은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게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창세기 1장이 정말 답하려는 질문은 “우주가 며칠 만에 생겼는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누구의 것이며, 사람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러니 창세기에 대고 “탄소연대측정 결과와 맞느냐”고 따지는 것은, 사랑 고백 편지를 받아 들고 맞춤법 점수를 매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글이 전하려는 마음을 놓치는 것이지요.

이것은 새로 지어낸 해석이 아닙니다. 혹시 “그건 요즘 사람들이 신앙을 적당히 타협한 것 아니냐”고 걱정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주 오래전부터 지녀 온 지혜입니다. 1,600년 전의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성경을 무리하게 문자 그대로만 고집하다가, 정작 세상 사람들 앞에서 신자가 웃음거리가 되고 복음이 조롱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요. 또 성경의 권위를 누구보다 굳게 지켰던 보수 신학자들조차, 과학의 발견과 성경이 충분히 조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창조를 믿는 신앙’과 ‘젊은 지구 창조과학’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닙니다. 후자를 내려놓는다고 해서 전자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제가 가장 마음 아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과 청년들에게 “성경이냐, 과학이냐. 둘 중 하나만 택해라” 하고 강요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성경은 그런 양자택일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음의 조건인 양 내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떠밀린 청년은 학교에서 배운 과학과 교회에서 배운 신앙을 양손에 들고 가지 못한다고 느껴, 결국 둘 중 하나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대개 신앙을 내려놓습니다. 지키려던 것을, 그렇게 잃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자녀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별빛 하나, 유전자 하나까지 지으신 분이시다. 그러니 네가 학교에서 우주를, 생명을 더 깊이 배울수록, 너는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창세기 첫 장은 세상의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너는 우연히 생겨난 먼지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지음받은 존재인가.”라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고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건넵니다. 이 질문 앞에서는 어떤 망원경도, 어떤 측정기도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답은 영원히 우리 믿음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유신진화론을 이단으로 결정한 어느 교단의 행위가 그간 진행해오던 논란을 더 증폭시킨 것 같습니다. 제가 그 교단이 이단으로 결정한 행위에 대해 단순한 염려를 넘어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유는 그 결정으로 대화와 토론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단 규정의 전제에도 맞지 않구요. 여하튼 이번 기회에 많은 분들이 막연하게 알았던 이번 사건에 대해 좀더 깊은 이해가 있길 바랍니다.

늘감사.

진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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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스더 | 작성시간 2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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